당근 마켓과 틴더의 3요소는 유사하다.
중고. 광고. 그리고 네고.
세상이 좋아졌다. 이제 사람들은 원하는 새삥(아다)이나 중고(후다)를 안방 침대에 누워서도 탭 한 번에 편안히 고를 수 있게 되었다. 원한다면 이쪽에서 먼저 광고할 수도 있다. 잘 나온 새삥(아다), 혹은 중고(후다) 사진 몇 장 찍어 올리고 어그로 좀 끌면 된다. 입질은 생각보다 쉽게 온다. 그러나 당근 마켓과 만남 어플은 매커니즘이 닮은 만큼 문제점도 유사한데.
나나 : 닌텐도 조이콘 한짝만 사면 반값에 주시나요
중고들은 대체로 망가져 있다는 것이다.
순정의 끝은 튜닝
설명서 절대 안 읽는 아저씨
혹시 문맹이신가요?
혹시 문맹 ㅣ
글자를 못 읽으시나요?
글자를 못 읽 ㅣ
아님 노안 ㅣ
몇 번의 백스페이스와 탭. 이제노는 혹시 스스로가 잘못 쓴 내역은 없는지 다시금 게시글을 확인한다. 닌텐도 스위치 급매. 미개봉품. 시세보다 싸요. 네고 안 받습니다. 분명 닌텐도 본품을 판다고 했다. 네고도 안 받는다고 했다. 이보다 더 친절하고 직관적일 순 없다. 이제노는 다시 나나의 메시지를 읽는다. 무엇 하나 해당사항이 없다. 옵션을 잘못 선택했나? 닌텐도 스위치 (가격 제안 불가) 혹시 (가격 제안 불가)가 회색 폰트라 안 보였나? 조이스틱 반쪽을 팔면 남은 반쪽은 나더러 어쩌라는 걸까. 나눠 쓰자는 건지. 이 골 때리고 양심 없는 네고에 이제노도 번민할 시간 정도야 당연히 필요했지만 나나의 인내심은 그 생각과 상식만큼이나 짧다. 메시지 몇 개가 채찍처럼 연달아 날아든다.
나나 : 팔렸나요?
나나 : 저 왼쪽은 있고 오른쪽만 사고 싶거든요
나나 : 직거래 가능하죠?
나나 : 거래 가능?
철철이: 잠시만요 저 밖이라 잠시 후에 연락 드릴게요
문장 하나에 몇 번의 독촉. 이제노는 손무덤에 눈을 묻으며 한숨을 쉰다. 누구에게 가든 행복하라고 리본도 달아서 잘 포장해 놨는데. 너무 비싸게 올렸나. 어쨌거니와 이제노에게 필요한 건 급매와 급전. 무엇보다 기록에 남지 않을 현금이 필요했다. 주어진 시간이 길었다면 단박에 나나를 차단했을 것이다. 쟁점: 거사는 최대한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이제노가 성공적인 재수를 위해 기숙학원 입소 상담을 근시일에 둔 시점이었다. 이제노의 보호자는 사치품을 사달라는 요구에 깐깐한 편은 아니었지만 늘 용도를 궁금해 했다. 현물이라면 더더욱 그랬고, 아무리 그래도 엄마아빠의 면전에 '초보 게이의 건전 성생활을 위한 각종 예비품과 미래의 만남 비용'을 위한 지출이 필요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이제노가 팔아치울 닌텐도 스위치는 매형이 몇 달 전 상견례에 예물 조로 선물했던 것이다. 네고 좀 해서 이런 이상한 놈한테라도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재수학원에 자유의지를 잃고 짱박힐 근미래를 생각하니 냉철한 사고가 어려웠다. 원래라고 썩 빡통적 사고방식과 거리가 먼 편은 아니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이제노가 고민하는 사이 화면 상단 바로 미리보기가 샷다처럼 내려왔다. 이번엔 당근 마켓이 아니라 맨더다. 맨더는 아시아권 벽장 게이를 위한 국산 틴더였다. 잭디보다 UI와 형태가 조악해으나 성질은 당근 마켓과 더 비슷했다. 물건을 제외한 상대방의 어느 것도 만나기 전까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탭.
이쪽은 상황이 더 나빴다. 호두까기 코트를 입은 남자가 이제노의 사진에 like를 눌렀다. 이제노는 두 손가락을 벌려 프로필 사진을 확대한다. 이제 보니 중절모도 쓰고 있다. 세상이 존나 요지경이네. 진상과 죠죠충. 아무래도 아이폰 XE으로 갈아탄 게 문제인 것 같다…. 씹XE들만 꼬이는 거 보면.
나나 : 거래 할 건가요?
호두까기: 프사 맘에 드네요
나나 : 제가 차 끌고 감
나나 : 님 사는 데로
호두까기: 저녁은 드셨나보죠?
나나 : ㄱㄹ?
나나 : ?
나나 : ?
호두까기 : 저는 이제 먹을 예정인데.. 반찬으로 뭘 먹을진 비밀입니다//
호두까기: 궁금하지 않으세요? :)
(차단)
맨더1: 안녕하세요
철철이: 네 안녕하세요
맨더1: 실례지만 ㅇㄹ 받으실래여
철철이: 아뇨 죄송합니다
자지 달린 것들은 대체로 미친새끼 아니면 변태새끼다. 뭘 먹을지 안 궁금하냐고 왜 묻고 지랄. 계속 비밀로 해. 이제노는 애써 상단 바를 보지 않으면서 판매자 게시글을 확인한다. 이만하면 캐삭 사인이 매너 온도 저체온증일 법 했는데 아닌 이유가 있었다. 나나가 올린 게시글은 단 한 개였다.
[반지 팜]
결혼반지로 산 건데 한 짝밖에 안 남아서 반값에 팝니다
생활감 조금 있음
순정이라 네고 안함
이 남자는 뭐든 반쪽짜리다. 라는 것이 이제노의 첫 번째 감상평이었다. 순정이라 네고를 안 한다니. 이미 약지에 한 번 뚫린 반지는 순정이 아니다. 반지의 품명은 까르띠에의 러브링. 누나의 웨딩밴드 백화점 순회공연에 찬조 출연한 덕분에 외웠다. 이 남자는 이혼을 한 게 아니라 당했나 보다. 유책 보호자로 위자료를 뜯겨 가산에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썸네일에는 공식 홈페이지 사진 캡쳐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팔려는 성의조차 코빼기도 안 보였다. 제노는 반사적으로 왼쪽으로 스와이프했다. 사진 화면이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두 번째 사진은 직접 반지를 착용한 손가락 사진이었다. 모델샷 이라기엔 투박했다. 마디마디가 송진 바른 듯이 거칠고, 이따금 거스러미가 조금 일어난, 돌봄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손. 건조한 감이 있지만 손등의 피부는 두껍고 젊었다. 싹싹 닦아 새것처럼 팔아도 모자랄 판에 쓴 티를 내다니. 생각은 짧고 혓바닥만 긴 남자. 한 번 다녀왔다면, 이제노보다 나이도 훨씬 많을 텐데… 사진 속의 손과 조그만 반지는 지독한 불협화음이다. 아마 와이프와도 딱 그만치로 안 맞았을 것이다. 아니면 의외로 내 여자에게만은 맞춰주는 성격이었던지- 가 이제노의 두 번째 감상평. 한 쌍의 반쪽만을 사고파는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감상평은 세 번째로 마무리되었어야 마땅했다.
근데 약지가… 참 길다.
이제노는 동정도탈 이론 파악을 위해 보았던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기억한다. 비뇨학과 교수가 말했다. 남근의 페르소나는 코도, 키도, 목도, 덩치도 아닌 바로 약지. 남자 패널들이 제각기 펼쳐보았던 손을 기억했다. 이제노는 제 손을 펼쳐본다. 그리고 다시 백금을 두른 네 번째 손가락을 본다. 일찍이 짝짓기에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손가락. 사회적인 의미로든, 생식적인 의미로든. 다섯 갈래로 쫙 펼쳤을 때 검지보다도 한 마디가 더 긴 약지.
선제적 변명 1
어디서 이제노와 같은 유튜브를 본 건지, 대뜸 약지 길이로 어필을 해오던 채팅 상대가 있었다. 너 아다야? 나 핑거링 죽여. 잘해줄게. 갓 고등학생이었던 제노는 그날 핑거링이 무엇인지를 검색했고, 스스로에게 시도해보았다. 들어가지도 않았다. 아팠다.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여기에 뭐가 들어가다니. 바텀은 천부인권 같은 건가. 어쩌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위로 가야 하는 사람인지도 몰라. 사이버로만 몇 마디 나눠본 불량핑크(경기/바텀/171/57/맨더 SVIP)에게 고문을 구했다. 불량핑크는 채팅으로 'ㅉㅉ' 혀를 찼다. 위아래고 자시고. 니가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기분이 좋냐. 원래 무조건 뒤 한 번 뚫려 봐야 포지션도 감이 온다. 잘하는 놈 한 번 만나봐라. 자기 입으로 잘한다는 놈 말고. 진짜 잘하는 놈. 그럼 다 알게 되어 있다. 잘하는 줄 어떻게 알아요? 이런 손가락은 잘 하는 손가락이에요? 자칭 핑거링 마스터의 사진을 보냈더니 단박에 퉁을 놨다. 길기만 하면 뭐하냐고. 굵어야지.
그 이후 불량핑크는 홀연히 계정을 터뜨리고 사라졌다. 그 형이 이 손가락을 보면 뭐라고 대답할까? 길고 두툼하고, 자신이 설명하던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그런 손가락인데.
선제적 변명 2
이제노는 다짜고짜 손을 보고 발정할 정도로 발랑 까지진 않았다. 어느 정도 성욕의 화신이긴 했지만 그건 일반적인 스무 살 남자애 수준에서 조금 더 나간 정도다. 하지만 기숙 재수 학원에서 딸도 못 치고 갇혀 있을 미래가 남은 1년의 전부라면. 누구나. 그게 설령 종교적 위인이라도 색계에 오르거나 욕계로 타락하게 될 것이다. 이제노는 엄마를 따라 이미 양평의 기숙형 재수학원에 방문한 바가 있었다. 한 시간 남짓 훔쳐본 폐쇄 공간의 불문율이란 이랬다. 1. 연애하지 말 것. 2. 자위하지 말 것. 하지만 사람의 뇌는 생리적으로 부정형의 실천이 불가하다. 늘 터부에 사로잡히고 마는 게 인간의 생래적 특성이다.
…반지만 파는 건가.
사진 속엔 손가락도 있는데.
선제적 변명 3. 사진에 비매품 표기는 없었다.
따라서 제노는 과단성 있게.
[철철이 : 석촌호수 쪽으로 와주실 수 있어요?]
정신 나간 결단을 내린다.
즉석 피케이
잠실역 석촌호수 둔치.
선선해진 날씨에 집 밖으로 쏟아져나온 사람들이 석촌호수 둔치에 빼곡했다. 일련의 사람들이 회전초밥처럼 호수 가위를 돌고 있다. 이따금씩 롯데월드 밖으로 아스라하게 쏟아지는 비명. 호수 주변 온도가 유독 따뜻한 건 짝짓기 전조 행위에 심취한 사람들의 체열이 모여 만들어낸 부분적 온난화라는 생각. 이런 날에 같이 올 가족도 남자도 없는 제노만이 홀로 드넓은 도로 쪽에 나와 서 있었다. 남들이 치킨 기다리는 동안 홀로 당근 거래를 기다리는 인생이 쓸쓸하진 않았다. 들고 온 에코백을 소중히 쓰다듬었다. 이 안에 든 닌텐도를 무사히 팔면 그에게도 일발 장전할 총알이 생길 터였다. 신속한 동정 도탈을 위한 자금이.
이제노의 계획이란 이랬다. 일단 닌텐도를 안겨주고 젤다 야숨까지 얹어 네고를 걸어볼 예정이었다. 조이콘 반쪽을 사서 뭘 하겠느냐고. 뭐든 사람은 한 세트를 사야 하는 거라고. 시세보다 훨씬 싸게 쳐주겠지만 어쨌든 반쪽만은 어렵다고. 비벼보면 안 될 일도 아닌 것 같았으니까. 어쨌든 이제노는 본인이 만연한 외모지상주의의 귀여운 수혜자라는 점은 알고 있었고, 손위연배에게 귀염 떠는 방식과 그 파급력을 모르진 않았다.
흥분과 공포는 형제처럼 닮아있다. 당근 마켓과 맨더도 그랬다. 이제노는 공사로 송신스러운 잠실역 길가를 부주의하게 배회하며 자연히 나나의 네 번째 손가락 생각을 한다. 이건 이제노가 처음 접하는 형태의 방만이자 방종이었다. 같은 학급이나 학원의 동년배가 아닌 연상이자 미지의 남성을 법의 보호 바깥에서 만나는 경험. 이제노의 첫사랑들을 손꼽아 볼까. 초딩 적 몰래 훔쳐 읽은 누나의 오천원만 주면 키스해주는 놈. 중딩 적 몽정에 상습적으로 등장한 데이비드 간디. 고딩 적 창간 의도와 다른 목적으로 모았던 맨즈헬스. 못생긴 남자는 처음부터 이제노에게 수컷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제노는 평생 진정한 수컷을 만난 바 없다. (만남≠교미) 나이브한 소년 이제노는 나나가 배 나온 아저씨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애초부터 상정하지 않았다. 동정 수컷으로서 그 손가락 주인의 얼굴은 어떨지 상상한다. 기왕이면 데이비드 간디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그렇다면 닌텐도는 그냥 줘 버리고 사방접기로 접어 재수학원에 데려가야지. 라고 생각했고. 부웅, 멀리서 오는 오토바이 소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빠라바라밤. 경박스러운 나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 때야 고개를 돌렸고. 본능적으로 뒷골이 오싹해질 만큼 가까운 거리감을 감지했을 때.
탁.
손이 허전해진다.
돌아보기까지 찰나의 시간 동안, 제노는 옅은 짜증을 느꼈다. 나나인가? 무슨 인사도 없이 물건부터 낚아채. 그러나 뒤를 돌았을 때 서 있는 것은 손이 섹시한 거래 상대가 아니었다. 제노의 등 뒤로 빠르게 멀어져가는 오토바이 한 대. 그 위에 올라탄 두 놈. 뒤에 앉은 놈의 손에서 흔들리는 익숙한 에코백… 딩동. 제노는 메시지 알림이 뜬 휴대폰을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맨더1 : 제가 후장 털어드림 ㅋㅋ
방금 후장 빼고 모든 게 털린 이제노는 차단조차 하지 못했다.
구라 같았다. 너무 짧은 시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21세기 서울 한복판에 아직도 소매치기 뻑치기 아리랑치기 따위의 치기가 존재한다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날치기를 당한 제노는 그 자리에 얼이 빠진 채 서 있었다. 상황은 파악은 일단에 완료했으나 다음 행동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떡하지. 거기 지갑도 넣어놨는데. 이런 땐 어떻게 하지? 경찰에게 바로 신고해야 하나? 번호판을 못 봤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얼간이처럼 돌아가야 하나. 화가 나기보다도 황당했다. 무엇보다 주변 목격자들이 제노를 힐끗거리는 그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당한 건 이제노인데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 걸까. 정말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 아주 바보 천치 같은 짓을 벌였다는 듯 제노를 바라보고 있다. 나쁜 것은 저 사람들 아닌가? 이제노는 지끈해오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맞다. 당근… 뒤늦게 생각에 미쳐 당근 마켓을 급하게 열었다. 어플 위로 두 개의 메시지 알림이 도착해 있었다.
나나 : 거의 다왔음
나나 : 삼선 슬리퍼에 보라색 추리닝
뭔 추리닝? 멍한 정신으로 메세지를 읽었다. 거의가 어느 정도 거의인지 의문이 닿았을 때. 직. 직. 귓가로 보도 블록을 긁는 발걸음이 들린다. 이제노는 망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메세지 속 인상착의와 정확히 똑같은 묘사를 가진 남자가 멀리서 슬렁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나나. 무지 보라색 추리닝. 검은색 삼선 슬리퍼. 인생에 시간 따위 썩어지게 남는다는 본새하며, 두 손 주머니에 찔러넣고 천천히 걸어오는 꼬락서니. 그린듯한 백수의 뽄새다. 생김새는 통속적이고, 품행은 저속하고, 등장부터 의미심장하고 상스러운 백그라운드 뮤직이 깔려야 할 것 같았다. 이제노는 그를 보며 반사적으로 똘추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솔직히 똘추 같았다. 강렬히. 아무래도 똘추의 어원은 또라이 추리닝이니까.
하지만 그 어원의 주인공은 현빈이다. 이 부분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지익.
삼선 쓰레빠는 제노 앞에 정확히 주차된다.
bpm : 110
"철철이 님?"
'나나'가 묻는다.
bpm : 130
"제가 철철이인줄 어떻게 아셨어요?"
"그쪽만 혼자 서 있길래."
bpm : …
나나는 기본적으로 말씨가 시니컬했고, 그것이 말하는 내용에 비해 화자의 싸가지를 깎아먹는 효과를 주었다. 그러면서도 차도에 황망히 선 제노를 향해 까딱이는 손짓. 일로 와요. 거기 차 다니잖어……. 그런 반쪽짜리 매너. 온도가 측정이 안 된다. 나나라는 깜찍한 이름과는 달리, 그는 남성보다도 사내나 수컷이란 지칭을 걸치고 다닐 아우라가 있었다. 맨더에 프로필이 올라온다면 대체로 오른쪽, 특정 취향에만큼은 가장 먼저 위쪽 Super Like로 스와이프 될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똘추를 흘끔거리는 게 꼭 보라색 추리닝 때문인 것 같지도 않았다. 추리닝은 아마 남자의 두 번째 살가죽 기능을 하는 것 같았다. 보통이 아닌 성깔머리는 눈썹부터 돋보였다. 앞머리를 싹 넘겨 볼캡을 쓴 눈썹께가 짙고 굵었고, 미간엔 상습적인 주름이 잡혀 있었다. 천박하고 날렵했다. 왕년에 날렸다는 세속적인 구어가 인생의 캐치프레이즈일 것 같았다.
유동 인구가 백만에 육박하는 잠실역 한가운데 홀로 쓰레빠 직직 끌고 나와서. 나나는 정확히 이제노를 꼬라본다. 견적이 나왔다. 남의 눈 같은 건 전혀 알 바 아닌 인간이구나. 인생의 한 부분을 놔버린 몰이성.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정제 바깥에서 살아가는 완연한 사나이. 까고 보면 막장 인생인 인터넷 소설 남자 주인공에게 뭇 여중딩이 느끼는 고양된 치기. 이제노의 누나가 저염식 속 투피엠과 정크푸드 속 이민용을 보며 열광했던 그 마음. 이 자리에서야 이제노는 그 마음들을 알 것 같다. 제노가 대략 오천 원 주면 키스해줄 것 같은 놈으로 보는 그 남자는 금연 구역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피워도 되냐고 제노에게 묻지도 않았다. 딴 사람이었으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싸가지와 가지가지는 한 끗 차이라고. 사람이 마스크 때깔이 좋으면 꼴새가 달라 보인다는 진실의 그린듯한 교과서였다. 담배를 물어놓고 불은 안 붙이는 게 일종의 매너로까지 보였다.
"어 춥다. 빨리 주세요."
남자가 쓱 손을 내밀었다. 다섯 갈래로 펼쳐져 있는 실물. 약지가 긴. 사진과 정확히 같은 손가락에 반지는 없었다. 이제노는 무의식적으로 그 위에 제 손을 얹는다. 무슨 개가 간식 앞에서 생각 없이 손을 주듯. 남자는 손을 탁 털었다. 거칠기보다는 성의 없이.
"그거 말고. 닌텐도."
디폴트 값도 반말이다. 죄 반쪽을 어디다 갖다 판 건지. 어쨌든, 설명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해도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게 현실로 일어났으니까. 그러나 막상 이 이해심 짧아 보이는… 다소 철부지 백수 모양 남자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 닌텐도 든 가방을…. 소매치기 당했어요."
남자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았다. 백 미터 전방에서부터 주름 잡은 각도 그대로다.
"뭐래. 장난하지 말고 줘."
"진짜예요."
"얘야. 형이 귀한 기름 써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식으로 거파하면 안 되지."
"진짜로 소매치기 당했다니까요, 오토바이 탄 사람들한테…."
"요즘 소매치기가 어딨어. 잠실에 차 대기가 얼마나 좆빠지는지 알아? 지금 벌써 삼천 원 날아갔다."
제노는 억울했다. 표정으로 최대한의 진정성을 드러냈다. 눈을 뉘인 이제노는 갓 스물. 생김새는 제철 과일처럼 말랑하고 유순했다. 어디 가서 가라 치고 사람 등처먹을 깍쟁이로 보이진 않았다. 진짜. 진짜 방금 전에. 저 에코백에 겔다의 전설 게임팩까지 포장해서 가져왔는데요.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는 몰라도 거듭 이어지는 항변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개를 한번 쳐들고, 높고 높은 가을을 20초 정도 응시하다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람 죄인 만드는 한숨이다. 제노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다소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귀밑머리를 긁던 남자는 마음을 정리한 듯 고개를 들었다.
"뭐 탔디?"
"아. 그. 오토바이……."
"기종."
"오토바이 기종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럼 대충 기억나는 것만 묘사해봐."
"몸통이 하늘색이고, 이렇게, 프레임에 하얀 색도 섞여있고, 나팔 소리..."
"쇼바는?"
"그게 뭔데요?"
"그래."
"왜 나한테 화를 내요?"
"내가 지금 화를 내는 거 같니 친구야."
남자는 취조하는 형사처럼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번호판은 없었지? 그 나팔소리가 막 빰빰빠빰 (입으로 꽤나 소리를 잘 흉내냈다) 이런 소리 나디? 얼굴은 봤어? 입은 옷은? 어느 방향으로 갔는데. 간 지 얼마나 지났어. 이제노는 기억력이 닿는 한 순순히 대답했다. 비슷한 소리 났어요. 얼굴은 못 봤고, 빵모자에 마스크 썼던데, 방향은 올림픽대로 쪽… 비록 등급이 미끄러져 재수를 선택하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이제노는 타고난 지능까지는 준수한 편이었다. 질문 세례를 만족할 만큼 퍼붓고 나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이제노는 가느스름한 눈으로 그의 손을 훔쳐보았다. 상판에 금이 쩍쩍 간 구형 아이폰 6플러스. 스페이스 그레이. (언제적 폰인가.) 근데 지금 뭐 하세요? 기다려 봐. 내도록 심드렁하던 그의 옆모습에서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달아오른 엔진처럼 뜨겁고, 한 발을 떼는 순간 달려 나갈듯한 위태로운 열기가. 한참 휴대폰을 톡톡 두드리던 남자가 이윽고 휴대폰을 집어넣는다.
"이따가 이만 원 빼줘요."
"네?"
"빼줘. 오늘 기름 많이 쓸 것 같으니까."
이제노가 환장하는 손가락에 차키를 걸고 돌리면서, 남자는 도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문득 뒤를 돌아본 그가 툭 뱉었다.
"이건 네고 아니고 수고비다?"
중고, 광고, 네고… and 수고
부르릉. 부릉. 부아앙.
천지가 진동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돌아보고 눈살을 찌뿌릴 만큼 심각한 공해였다. 주범은 이제노 앞에 선 하얀 아반떼였다. 중고마켓에도 안 내놓을 구식 양카 한 대가 석촌 호수 표면에 잔물결이 일 정도로 요란뻑적한 배기음을 내고 있었다. 매연을 뿜으며 달려온 차는 이제노 앞에 매끄럽게 멈춰 섰다. 곧이어 차창이 내려간다. 운전자 얼굴은 배신 없이 익숙했다.
"야. 타라."
차창에 팔을 걸친 나나가 턱을 까딱였다. 무려 야타란다. 아까부터 대사의 수위가 구시대적 쌍스러움과 클래식을 차선 바꾸든 넘나든다. 무심코 뒷좌석 문을 열다가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니 택시 기사냐. 시선만으로 소리 없는 일갈이 들려왔다. 별 수 없이 보조석에 엉덩일 붙였다.
"아까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랑 차 조심하라고 했는데."
"조심은 타기 전에 하는 거고. 타고 나면 즐기는 거야. 우리 친구 몇 살?"
"스무 살이요."
"좋을 때다."
남자가 자일리톨을 입에 물었다. "아저씨 운전해야 하니까, 친구가 잘 보고 있어." 금이 쩍쩍 간 구형 아이폰이 이제노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이게 뭐예요? 네비. 제노는 휴대폰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쌌다. 잘못 쥐면 손에 유리가 박힐 것 같았다.
화면에는 웬 네이버 카페가 떠 있었다.
인천폭주연합 헤드라이트
작성자 나나
ㅎㅇ
오늘 석촌호수에서 엑시브 탄 오폭 보신분
아리랑치기 상습범들 같은데
한놈은 빵모자 썼고 차체엔 불법 에어혼 달았답니다
올림픽대로 근처에 족구하는 형님들 없습니까?
아래로 댓글들이 달려 있었다.
슈퍼티뷸 : 하~~~ 행님도 지갑 털렸습니까? 전 아이폰… ㅜ 겨우 매칭된 훈녀랑 카톡중이었는데 고냥 쌍콤하게 빼가더군요… 썅놈들 그냥 벽에 들이받고 뒈졌으면
SLRrrr쥐성 : 헐 요즘도 아리랑치기 있음? ㄷㄷ
ㄴ LP580 : 쥐성님. 반말 댓글은 좀 …;
ㄴ SLRrrr쥐성 : 헉; 죄송해여
LP580 : 저 봤습니다. 아까 가볍게 족구 한 판 뛰러 나갔는데, 웬 어린노무 시키들이 자꾸 뒤에서 곡예운전을 하더라고요 -_-;; 핸드백 든 여자 보이니까 쏘던데…
ㄴ 슈퍼티뷸 : 전에 6번국도에서 유명하던 양아치쉑들인데 요새 주말마다 잠실로 원정오는듯 합니다 ㅜ 한번 싹 쓸어버리죠~~~
양카매니저 : 오 저희 벙개 나왔는데 함 쫓아가볼까요? ㅋㅋ
ㄴ 나나 : 예 실시간 위치 업뎃좀 해주세요
ㄴ 나나 : 지금 잡으러 ㄱ
끝에만 작성자의 답이 두 개나 달려 있었다. 나나. 이 남자는 모든 사이트에서 같은 닉네임을 쓰나 보다. 제노는 다시 답글을 읽었다.
'지금 잡으러 ㄱ'
무슨 뜻?
1 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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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계에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라는 격언이 있다. 화려하게 움직이다가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라는 뜻인데, 이 남자의 운전은 그 반대였다. 스타트를 벌처럼 쏘아올린 아반떼는 차선 위에서 비로소 나비가 되었다. 깜빡이도 없이 현란한 무빙으로 차선을 끼어드는 아반떼 뒤로 날카로운 급제동과 클락션이 쏟아졌다. 제노는… 안전벨트의 발명에 이토록 감사한 적이 없었다. 죽을 것 같았다. 뭐라도 묶어놓지 않으면.
"제발 천천히 달려요!"
"뭐? 달리라고?"
"천천히 달리라고!"
"오케이, 꺾으."
"아아아악!"
운전대를 기하학적인 각도까지 꺾어 차선을 단숨에 두 개나 갈아탄 나나가 킬킬 웃었다. 천천히 달리는 사자가 어떻게 가젤을 잡니, 친구야. 그 사자도 서울 6차선대로에서 달리는 거였으면 가젤 포기하고 집 갔죠! 뭐? 바람 때문에 안 들린다! 왜 지가 듣기 싫은 것만 안 들린대! 귀가 멍멍했다. 손가락 틈만큼 열어둔 차창 사이로 찬바람이 배를 주린 맹수처럼 불어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닌텐도 당근 하러 나왔다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건 아실까? 이렇게 죽는 걸까? 죽으면 기사 한 줄은 나오지 않을까? 닌텐도 조이콘 반쪽 반값에 달라는 새끼랑 거래하러 나왔다가 죽은 사람? 당근 상대 손가락 사진 한 장에 욕망을 좇아 기어 나온 재수생이 차사고로 비명횡사한 사건? 아무 구간이나 찝어서 헤드라인에 올려도 골 때리고 짜쳤다. 이그노벨상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근데 아무리 올림픽대로가 잘 닦였다고 해도 그렇지, 이 사람은 서울 도로에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달리는 걸까. 왜 경찰은 출동하지 않는 걸까.
"저기. 앞에 강강수월래 보이지?"
"뭐라고요?"
나나는 대답 대신 앞을 턱짓했다.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본 제노는 그만 기가 질리고 말았다. 차선 하나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떼들.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튜닝된 오토바이들이 게르만족처럼 대이동을 꾸리고 있었다. 나나가 빵! 한번 클락션을 울려주자, 저쪽에서도 회답하듯 나팔소리가 무수히 쏟아졌다. 귓청이 쨍했다.
"나나 님!"
반가운 외침과 함께, 아반떼 곁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바짝 붙는다. 나나도 차창을 내리고 빠끔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로 갔어요? 예? 어디! 아! 저 앞에! 저기! 오토바이 운전자가 한 손으로 앞을 휘휘 가리킨다. 운전대에서 위태롭게 한 손을 떼는 작태에 보는 제노가 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도로 위에서의 아찔한 대화를 마친 나나는 곧 차창을 닫았다. 계기판이 기괴한 각도로 넘어간다. 나나의 발은 악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제노는 이제 안전벨트가 더는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천장에 달린 어시스트 핸들을 꽈악 움켜쥐고 한 손으로 폰을 열었다. 한 손이 타닥타닥 문자를 친다.
[엄마 미안ㅎ]
끼익. 다시 1차선이다. 난폭한 반동에 쥐고 있던 아이폰이 발치로 날아갔다. 제노는 목청을 돋웠다. 시리야! 문자 보내줘! 시리가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시속 160 키로의 칼바람은 모든 대화를 사오정으로 만들었다. 앞에서 드디어 익숙한 오토바이 꽁무니가 보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에코백도 보였다. 제노는 눈을 감았다. 뒷 차의 성난 클락션과 나재민의 세레모니 클락션이 귓가에서 아스라이 부서진다. 폭풍우 만난 배처럼, 차체와 함께 허우적이던 제노 앞으로 단단한 팔뚝이 불쑥 튀어나왔다.
"꽉 잡아."
제노는 시키는 대로 꽉 붙잡았다.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뜨겁고. 단단한……
쿵. 차체가 현란하게 돌아간다. 차창 바깥으로 오토바이가 땅을 구르는 장면이 소리 없이 지나갔다. 스키드마크를 따라 밤 벚꽃이 아름답게 흩어진다. 제노는 멍하게 그 광경을 응시했다.
벌써 봄이 오나.
Rest. In. Permanence
잘 살던 아파트를 팔았다.
갑자기 생긴 목돈을 어쩔까.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떻게든 이 돈을 다 써버리고 싶었다. 이별 후에 머리를 자르는 사람들처럼. 함께일 때 쌓아온 것들은 잘라서 버리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인혜가 떠난 지 일 년이 지났다. 안녕 잘 가요, 그런 아름다운 이별은 못 되었다. 여전히 집밖만 나가도 발에 밟혀 상한 냄새를 풍겨오는 미련이 길마다 낭자했다. 자살자에게 남은 욕망이라곤 그저 먹고 자고 싸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큰 돈 써서 기쁘게 해줄 사람도. 더는. 재민은 통장에 찍힌 돈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사야 가장 헛되고 헤프게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탕진해야 우리의 저물어 버린 관계에 어떤 의미도 남기지 않을 수 있을까.
가장 먼저 게임기를 샀다. 닌텐도 스위치 동물의 숲 에디션. 다음은 차를 살까 해서 브로슈어들을 긁어모았다. 빨간 차가 인쇄된 페이지만 골라서 벅벅 찢어내다가, 방바닥에 내던져버렸다. 그렇게 좋아하던 차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재민은 죽었다. 남은 건 그냥 팔다리 달린 깡통이었다. 골뚜껑 아래 뇌 대신 습자지만 꽉꽉 채워놓은 빈 깡통. 그따위로 살아봐야 세상은 굴러갔고, 아무도 아파트 바닥에 누워 깡술 마시는 나재민을 위로해주지는 않았다. 비장 빠진 자리를 믹서기로 갈아버린 커플 사진으로 채우는 지랄도 지쳤을 때 쯤. 재민은 사놓고 한 번도 켜지 않은 닌텐도를 꺼내들었다. 게임 칩을 꽂았다. 아무 게임이나, 손에 집히는 대로 산 거였는데. 하다보니 사람들이 왜 게임을 하다 폐인이 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게임에는 현실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 뭔 게임에서도 집 대출을 갚으래. 이거 전세야? 보금자리론으로 대환대출 안 돼?
- 야! 그냥 머리를 밀고 산에 들어가. 여기서 홀아비 냄새 풍기지 말고!
은지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휴지를 집어던졌다. 집들이 선물이라고 들고 와 놓고선 그걸 던지냐. 바닥에 뒹굴던 날백수는 꿈지럭 몸을 일으키면서도 손에 쥔 닌텐도를 놓지 않았다. 은지는 인혜와 재민 사이에 낀 불쌍한 친구였다. 이혼 후에도 재민이 청승 떨다 죽을까 봐 종종 고개 내미는 과분한 친구이기도 하고. 애가 너무 건강한 게 좀 흠이다. 이러다 죽고자 하는 의지를 존중하질 않아.
- 아. 전자 제품은 진짜 중고로 사는 게 아니다. 오른쪽 왜 이렇게 안 눌리냐.
- 새 거로 사든가 그럼.
- 하지만 중고들이 불쌍하잖아.
- 하… 나재민 머리털 다 뽑아버리기 전에 집 가야겠다.
- 갈 때 냉장고에서 김치 좀 가져 가. 왜 내 주변 여인들은 다 나만 보면 김치 보내주냐. 밥 못 먹고 살게 생겼나.
- 벌써 홀아비 냄새 뱄나 보지. 술 좀 끊어라. 쓸 데 없는 것 좀 그만 사고. 일자리도 구하고!
코트를 걸친 은지는 현관을 나설 때까지도 잔소리를 이어갔다. 쾅. 힘주지 않아도 세게 닫히는 원룸 현관문을 바라보다가 뒤통수를 긁었다. 쓸 데 없는 거 아닌데. 세상에 나온 이상 다 쓸 데가 있는 것들인데.
쓸 데 없는 건 없지만, 쓸 수 없어진 것들은 존재한다. 끝내 눌리지 않게 된 닌텐도의 오른쪽 조이콘이라던가. 심장이 엥꼬났는데 애먼 비장만 도려낸 나재민 따위의 것들 말이다.
중고한테는 중고인 짝을 찾아줘야지. 새 조이콘을 사기 위해 오랜만에 당근 마켓에 다시 접속했다. 닌텐도를 검색하고 1페이지에 있는 모든 판매자에게 똑같은 채팅을 보냈다. 닌텐도 조이콘 한 짝만 사면 반값에 주시나요. 답을 준 건 한 사람뿐이었다. 철철이.
철철이래. 이름이 어떻게 철철이냐. 칠칠이 같잖아… 자기 닉네임은 나나인 주제에, 재민은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킬킬 웃었다. 만나기로 한 위치는 잠실 쪽이었다. 은지와 그짝에서 식사할 때 접속해놨더니 위치가 그렇게 됐다. 나오시라는데 나와야지. 옷장에 대충 처박아둔 추리닝을 꺼내 입었다. 10년 전에 밴드 애들이랑 노라조 컨셉 노려보자고 맞춘 보라색 추리닝.
그런데 철철이란 놈. 막상 눈앞에 두니까 웃음은 안 나더라.
잠실 드리프트
차려. 열중 쉬어. 차려. 대가리 박아. 한쪽 발 들어. 코어에 힘 줘. 필라테스 안 다녀? 앞으로 다녀. 그거 별로 안 비싸. 오토바이 팔면 돈 나오잖아. 어? 발가락으로 서. 발가락으로. 배에 힘 안 주면 발모갱이 나가요. 나가면 아프잖아. 아프면 싫잖아. 병원 밥은 맛도 없는데.
봄이어도 아직 밤은 춥다. 그러나 열선이 흐르는 따뜻한 보조석 시트는 그러한 바깥 추위로부터 제노를 상냥하게 격리시켜주었다. 차 안에는 옅은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재떨이 칸에는 동전과 영수증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발치엔 웬 박카스 병도 굴러다니고 있었다. 차주 성격이 그리 깔끔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구성하는 물리환경에 그닥 섬세하거나 공을 들일 것 같진 않았다는 뜻이다. 제노는 떡볶이 코트 앞섶을 여미고 차창을 조금 내렸다. 손틈 만큼 열린 차창 밖으로 가느다란 드라마가 더욱 선명한 칼라로 펴려진다. 쌍팔년도 똥군기 멘트에 맞춰서 벚꽃 위를 구르는 멸치 둘. 그리고 오토바이에 앉아 골프채를 안마봉 삼아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밤벚꽃과 깔이 미치게 잘 맞는 똘추가 하나. 제노는 조용히 아이폰 카메라를 켰다. 도저히 이 순간을 기록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 했다. 무엇보다 아까부터 저 똘추를 벗어젖힌 성난 광배근의 순간을.
제노의 안에서 나나는 재정의 되었다.
오천 원 주면 땅바닥에 키스시켜주는 놈으로.
오토바이는 결국 미끄러졌다. 소매치기범들은 붙잡고 보니 미성년자였다. 각자 탈색모에 껌 좀 씹을 관상이었는데, 대비 효과일까? 나나 앞에 세워두니 그제야 제 나이대에 맞게 쪼그라든다. 오히려 그들 쪽이 피해자로 보이기도 했다. 제발 부모님께 이르지 말아 달라 / 어 그래? 부모님이 살아 계셔? 부모도 있는 것들이 겁도 없이 빨간 줄에 도전해? / 저희 병원만 보내주세요 진짜 도망 안 갈게요 / 그냥 절고 살아… 앞길 빤한 것들이 몸 건강해서 뭐하게 / 아 횽… 갖은 엄살을 떨던 그들은 나나가 트렁크에서 골프채를 꺼내는 동안 부리나케 도주를 시도하다 붙잡혔다. 그들이 벚꽃과 함께 바닥을 뒹굴게 된 현주소였다. 쌀쌀한 봄밤, 제노가 으슥한 시간까지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차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연유이기도 했다.
구호 외치기도 귀찮았는지, 입을 다문 재민이 찌뿌드드하게 어깨를 푼다. 골프채를 쥔 채 좌우로 허리를 푸는 꼴세를 보니 아예 이제노가 여기 앉아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곧 유격 2차전이 시작될 것 같았다. 그의 미성년자 갱생 훈련은 애초에 이제노의 목적도 아니었다. 차를 그따위로 몰면서 드라이버는 왜 들고 다니는 걸까. 아무래도 골프공이 아니라 다른 걸 갈기려는 게 목적이겠지. 제노는 조수석의 차창을 마저 내리고 고개를 뺐다. 열선 켠 조수석도 하도 앉아 있으니 엉덩이가 다 배겼다.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걱정하는 연락은 없었다. 여전히 맨더 1이 대물이 어쩌고 하는 메시지를 보다가 화면을 껐다.
"그만하고 가요. 저 배고파요."
골프채를 끼고 스트레칭을 하던 재민이 그를 돌아본다. 진한 눈썹께를 반쯤 올리고.
"저녁 안 먹었어?"
"이렇게 긴 당근이 될줄 몰랐어요."
"아. 아직 안되는데."
"좀 그만해요. (저 포함) 애들 잡겠어요…"
재민이 가벼운 골프채 대가리와 바들바들 떠는 비행청소년을 돌아본다. 이어 골프채를 바닥에 던졌다. 꺼져. 저 봐. 사람 패려고 들고 다니는 거 맞지. 범법의 농도를 따지자면 이 쪽이 구속감인데. 땅에 뻗은 청소년의 몸뚱이를 발로 밀어 굴리기까지 한다. 진짜. 못생겼으면 제노가 직접 112를 눌러 신고했다. 재민이 발치에 널브러진 에코백을 주워 다시 운전석에 올라탔다. 때가 묻은 가방의 귀퉁이를 턴다. 탁탁. 큰 의미는 없다. 이미 흙먼지와 벚꽃 잎으로 범벅되어 있기 때문이다. 재민이 에코백 속의 닌텐도를 꺼낸다. 제법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전원을 켠다. 켜지긴 할까. 무릇 전자기기의 내구성은 생각보다 연약할진데.
"아."
"왜요?"
"조이콘 한 쪽 빠개졌다."
그럼 그렇게 굴리고 멀쩡하기를 바랬나? 정말이지 물건 다루는 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남자다. 줘 봐요. 재민에게 짐을 턱 맡기고 닌텐도를 받아 들었다. 재민은 응당 걸어 다니는 행거라는 듯이 그것을 집어 들고 눈만 껍적댔다. 닌텐도 상태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재민이 사겠다는 반대쪽이 부러져 있었다. 헛웃음이 났다. 결국은 반쪽만 팔게 됐네. 진짜로.
이거 대물 접수할 거야. 다 받아낸다.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점차 잦아든다. 딸각 딸각. 충격으로 아날로그 스틱이 돌아간 것 같았다. 이거 아예 해체한 다음에 고쳐야겠는데요. 고장 났어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조이콘을 만져보다가 포기한 제노가 재민을 돌았을 때.
"어. 너 번호 뭐야?"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비번이 0000이길래. 그냥 눌러만 봤는데."
"아니 물어보면 되지 왜 남의 폰을 막."
제노는 황급히 재민의 손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남의 핸드폰을 왜 함부로 봐요? 목소리가 떨려나온 까닭은 마지막으로 실행했던 앱이 맨더였기 때문이다. 그 수위는 둘째 치더라도 내용부터가 일반적이진 않았다. 제노는 잠긴 화면을 다시 풀었다. 실행 중인 앱 없이 기본 배경화면이 떴다.
"아니. 지금 보험사에 사고난 거 접수 중인데. 니 휴대폰 번호 확인하려다가."
그러니까 그걸 왜 잠깐도 못 기다리고, 남의 휴대폰을 본다는 극단무식단순한 방법으로. 기다렸다 물어본다는 선택지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는지. 제노는 줄줄 쏘아 붙이려다 말고 휴대폰을 쥔 채 씨근거렸다. 너무 예민하게 굴어도 수상쩍으니까. 전부 본 걸까. 아님 못 본 걸까. 제노는 재민을 노려보았다. 재민은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원래도 어느 정도 불만 있는 표정이 디폴트니 본 건지 만 건지 애매한 와중에.
"너 좀 그쪽이냐?"
"그쪽이 뭔데요?"
"......아니. 됐다."
그쪽.
웅, 하고 휴대폰이 짧게 운다. [언제 오니?] 이번엔 안부를 묻는 엄마의 문자다. 일순 어떤 예감이 거북한 체증처럼 덜미에 얹힌다. 마지막 알림. 7분 전 맨더 1의 후장 안위를 묻던 메시지. 제노는 조심스럽게 상단 바를 끌어내린다. 7분 전의 알림은 이미 밑으로 밀려 내려가 보이지 않는다. 야릇한 아이콘의 데이팅 앱 메시지 알림이 우수수 쌓였다. 2분 전, 3분 전. 가장 최근의 메시지도 분명 제노의 안위를 묻고 있었다. 후장의 안위를.
"혹시……"
“…….”
"봤어요?"
“…….”
남자는 대답 없이 담배를 피운다. 긍정으로밖에 읽히지 않았다. 미친놈 아냐. 가슴이 쿵쿵 뛴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한 감정이 한 번에 물밀듯 치솟았다. 사람이 이렇게 경우가 없어요? 간신히 한 마디 했다. 제노는 여태껏 자신이 게이라는 걸 누구에게도 털어놔본 적이 없었다. 들킨 적 또한 당연히 없었다. 좁다란 퀴어 소사이어티에서 대학이 박제되고, 얼굴이 박제되고, 직장으로 전화가 걸려오고, 그런 실화는 괴담처럼 이제노의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다. 어플을 할 때도 신상이 특정 될 만한 정보는 조심스럽게 골라냈는데. 까면 바지를 깠지 얼굴을 깐 적은 없는데.
"그러게 누가 그런 어플을 띄워두래?"
거기서 무신경한 한 방. 제노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변명이 하고 싶었는지 한 꺼풀 느슨해진 목소리로 자분자분 말을 걸었다.
"거까지 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이미 본 걸 어쩌겠냐."
“........”
"아니, 친구야. 나 그런 쪽에 편견 없거든? 거 실수로 화면 좀 봤다고 그렇게 앵돌아질…… 너 우니?"
……
그 이후, 강남과 잠실에 이르기까지 30분간 긴 눈물의 드라이빙이 이어졌다.
*
형. 잠실이 왜 강남을 못 따라가는지 알아요?
잠실이 원래 강북이었는데, 홍수 때 샛강이 생겨서 지금 강남이 됐대요. 그니까 원래 강남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란 말이에요. 근데 송파구가 서울에서 세 번째로 집값이 비싼데, 서울대를 제일 못 보낸대요. 제가 좀 그래요. 우리 누나는 강남인데 나는 잠실 같아요. 누나는 좋은 대학 나와서 변호사랑 결혼하는데. 나는 하나는 이미 못 했고 하나는 못 할 예정이거든요…
(훌쩍)
"휴지 줘?"
아뇨…
아무튼요. 저 저번 달에 고등학교 졸업했어요. 제가 다니던 학교 교훈이 '큰 사람이 되자'였거든요. 근데 큰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다. 요만해. 제 생각에 '작은 사람은 되지 말자'로 바꿔야 할 것 같아요. 같은 반 친구는 1월 1일 되자마자 헌팅 술집에 갔대요. 다섯 살 많은 누나랑 해봤는데 느낌이 안 왔대요. 언제까지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대요. 무슨 지뢰에 사정을 했다길래 뭔 지뢰? 군인인가? 했는데 질외사정이더라고요? 그 이후로 섹스 하는 게 무섭대요. 그니까 연애도 시작을 못하겠대요. 제 생각에는 좀… 너무 작아서 느낌이 안 온 게 아닐까 싶어요. (훌쩍) (자. 휴지.) (고맙습니다하…)
저는요. 성인 인증 받을 수 있게 됐을 때 처음 데이팅 앱을 써봤어요. 처음 채팅해 본 사람도 기억나요. 자기는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된댔어요. 그 사람은 친구의 누나랑 섹스를 했는데 자기 친구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왜 고민하냐니까 사실 친구랑도 해봤다는 거예요. 왠지 나도 누나 생각이 날 것 같아서 채팅방 나왔어요. 그런 얘기만 해요. 데이팅 앱으로는. 정말 그런 것밖에 안 해봤거든요… 저는 같은 게이들 중에서도 잠실인 것 같아요. 나도 남자 좋아하고 저 사람들도 남자를 좋아하는데, 연애로 도무지 이어지질 않아서…
"휴지 줘? 이게 마지막인데."
"감사합니다."
나나는 의외로 좋은 청자였다. 시스헤테로에겐 생소하고 관심 없는 주제일 텐데도 꽤 끈기 있게 들어주고 있지 않나. 시선을 깔고 묵묵하게. 시시때때로 제노의 코 훌쩍임에 휴지를 내미는 정도의 적당한 간섭에서 그치며. 숙연히 고개를 떨구고 있던 남자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꼭 닮은 놈들 만날 필요 있나… 연애는 서로 다른 구석이 모자란 사람을 만나는 게 좋아. 그래야 한 쪽이 고장 나도 둘이 합쳐서 구실을 하지. 이 닌텐도처럼 말이야……
"내 말 안 들었죠?"
"아냐 아냐. 듣고 있어."
좋은 청자라는 말은 취소다. 제노는 아까부터 게임기에 코를 박고 있는 남자를 식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순간 집중력이 대단한 사람 같다. 한 번 꽂히면 앞뒤를 보지 않는다. 현재는 고장 난 조이콘을 소생시키는 일에 광적인 집념을 보이고 있고. 그의 접시 위에 손도 대지 않은 타코가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뭐 한 마디 물어보지도 않고 여길 오길래, 멕시코 음식 좋아하나 했더니. 좋아하지 않으면 여긴 왜 온 걸까.
남자는 속죄라도 하듯 이제노의 게이 담론을 묵묵히 들어주고 있다. 도중 휴지를 뽑아서 내밀기도 했다. 눈물만 닦고 있더니 가까이 와보라고 손짓해서 직접 코도 풀어줬다. 흥 해. 흥. (그 와중에 이제노는 남자의 손이 이제노 얼굴을 다 덮는 부분에 주목했다). 그렇게 잠실과 강남 얘기까지 끝났을 때 남자가 묻는다.
"그래서. 친구는 갑자기 왜 운 거야?"
“…….”
"그쪽… 큼. 좀 남쪽인 거 들킨 게 그렇게 쪽팔렸니? 아저씨 그런데 편견 없다니까."
그는 쪽팔릴 때 눈물이 나는가보지. 이제노는 웬만해선 울지 않았다. 그 눈물의 속성은 대체로 분노의 응결이었다. 단순히 쪽 좀 팔았다고 눈물샘을 열기엔 타고난 면면도 두꺼웠다. 다만 면면이 두껍다는 건 남에게 그닥 까발리기 어려운 이면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노는 누울 자리를 잘 알았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살아온 보금자리가 발 뻗고 누울 자리는 아니었을 뿐이다. 이제노는 타코를 노려보며 코를 훌쩍였다. 이 죽일 놈의 비염. 열 받으면 코찔찔이가 되니 분노는 가오부터 잃었다.
데이팅 어플은 단순히 손가락 한 번 휘딱이는 것만으로 호오를 갈하는 주체적 인생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걸 누군가에게 아무 예고나 자유의지 없이 들키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 누군가가 이제노의 유효한 신상 정보를 몇 가지 알고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얼굴도. 나이도. 연락처도. 거주지도. 들킬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제노는 당근마켓에서 닌텐도를 파는 대신 이미 맨더를 통해 여러 번 막창을 얻어먹었을 것이다. 물론 이 개노답 자유의 영혼 폭주족이 바로 제노의 부모에게 이 작은 비행을 꼰지를 것 같진 않았지만. 확실히 제노의 예상과 통제 바깥에 있는 인물이니까. 남의 폰을 막 뒤지고도 뻔뻔히 코를 닦아주는 또라이. 눈물의 재료는 다시 공포와 흥분이다. 이제노의 조그만 비밀은 은밀할 땐 무섭고 드러날 땐 열뻗쳤다. 그걸 알아챌 신경줄조차 없는 남자에게 들켰다.
"무섭잖아요. 형은 제 번호도 봤고 얼굴도 아는데."
"어이구."
"빡치시면 막 도로에서 시속 150키로 밟고."
"음. 동승자 배려한 속도였는데."
이것저것 다 털어내고 나니 뒤늦게 쪽팔렸다. 게이 얘기는 왜 했어. 들켰다고 다 까발릴 필요는 없는 거였다. 구긴 휴지를 슥슥 모아 정리하는데, 갑자기 시야로 불쑥. 솥뚜껑이 쳐들어온다. 아니다. 재민의 오른손이었다. 당근마켓에 올라가 있던 비매품이, 조막만한 식당 테이블의 저지선을 거침없이 넘어온다. 제노의 머리꼭지에 닿기까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무서웠어용."
돌연 천연스러운 말투였다. 조카 두고 농담 따먹는 삼촌마냥 크크 웃으면서. 아이. 왜 그런 거로 울고 그래애. 쫄탱이네, 우리 철철이. 어구어구. 원반처럼 크고 두꺼운 손이 머리칼을 벅벅 헝클인다. 소 핥은 머리가 된 이제노는 멍하게 눈을 끔뻑였다. 이건 분명 이제노가 파악한 캐릭터와는 달랐다. 올림픽대로에서 시속 150을 거뜬히 밟는 나나 씨가 이런 목소리를 내다니. 자긴 어린이 안전구역에서는 서행하는 경우만큼은 갖췄다는 듯이. 지금 저를 꼬시는 건가요? 코찔찔이 건드리는 취미 없는데. 건드렸잖아요. 분위기가 오래 재운 고기처럼 한꺼풀 부드러워진다. 언제 폭로전이 있었냐는 듯이. 제노는 나나가 보기만큼 양아치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강강약약의 인간일지도. 의외로 일자무식 깡패들이 순진할 때가 있다고들 하던데. 그저 못 배워먹어서 그렇지. 사람이 썩 나쁜 것 같지도 않다고. 한 번 다녀올 정도로는 팔리는 물건이라고.
ᅠ서로 다른 구석이 고장난 사람을 만나는 게 좋다고 했던가.
이제노와 서로 다른 구석이 고장 난 사람이란 뭘까. 우선 헤테로여야겠지. 이제노와 다르게. 성적 경험이라곤 고등학교에서 받아본 언수외 1등급이 전부인 이제노와는 다르게 어느 정도 까진 맛이 있어야 할 것이다. 후다. 새파랗게 어린 이제노와는 다르게 원숙한 연상이어야 할 것이고. 정상성의 대로만을 조심조심 달려온 이제노와는 다르게 정해진 길에서 난폭하게 벗어날 줄도 아는, 그런 야성적인…
톺으면 톺을수록 왠지… 낯설지가 않은데.
손가락이 길고 두꺼운 사람을 만나라던 불량핑크와, 이 남자가 말하는 이제노의 연애 적합자가 한 사람으로 귀결된다. 눈앞에 있는 남자.
작은 사람뿐인 이제노의 오목조목한 세상사에 등장한 난폭한 성인. 본능적인 정향반응. 새로운 자극에 대한 각성. 이제노는 나초에 살사 소스를 듬뿍 올렸다. 입속으로 짠맛과 시큼하고 상쾌한 살사의 맛이 번졌다.
"형은."
"형 아니고 아저씨."
"아저씨라기엔 너무 젊어 보이는 형은 연애를 좀 잘 아시나 봐요. 막… 연애가 어떻고. 이런 연애 교양서 같은 말 하는 거 보면."
"우리 친구보다는 잘 알쥐. 어린 아다 게이 친구."
애 취급을 하려면 애 취급만 하지. 상스러운 워딩만 잘도 섞어 쓴다. 그래도 학생에서 친구까지는 올라왔구나. 제노는 기름기가 묻은 손을 물티슈로 닦으면서 문득 떠오른 의문을 물었다.
"근데 혹시 이혼하셨어요?"
무던하게.
게임기에 처박혀있던 시선이 제노에게로 옮겨온다. 툭. 조이콘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둔 남자가 식당 의자 등받이에 푹 기댄다. 반쯤 지퍼가 열린 보라색 추리닝 주머니로 두 손이 사라졌다. 범인들은 진실을 감추고 싶을 때 손을 먼저 숨긴다던가.
"어떻게 알아."
살사에 박힌 올리브처럼 까만 눈동자가 제노를 향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힘이 빠져있던 눈에 어떤 예기가 번들거렸다. 제노는 침을 삼켰다. 아까 남자가 고딩들을 어떻게 굴렸는지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당근에서 봤어요. 반지 올리신 거. 그거 결혼반지잖아요. 누나 반지 살 때 구경해서 알아요."
“.....”
"그 반지. 안 팔렸으면 저한테 파시면 안 돼요?"
남자는 잠시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곁다리로 나온 샐러드만 깨작이다가, 그마저도 입맛이 돋지 않는지 느적히 물 한 모금으로 입안을 헹구고는, 제노를 보지도 않고 나긋하게 물었다.
"친구는 이름이 뭐야?"
"알려주면 제 신상으로 해코지할 거예요?"
"안 하쥐."
"....이제노예요."
"반지는 왜 사려고? 누구한테 고백할 일 있어?"
"그런 사람 없어요. 그냥……."
기념으로? 제가 살면서 결혼반지를 가져볼 일이 어디 있겠어요. 파는 김에, 에누리해서 손가락까지. 저한테 잘못하셨잖아요. 잘못을 인질 삼아 그의 육신을 강도질해도 될까? 입속으로 이유들을 우물거렸다. 무엇 하나 뾰족하게 와 닿는 게 없었다. 그저 가지고 싶었다. 저 남자가 파는 유일한 한 가지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이대로 인연이 뚝 무 잘리듯 잘려나가진 않을 것 같아서…
"그럼 안 돼."
그러나 무 자르듯 깔끔한 거절이 들려온다.
"왜요?"
"거기 가격 보이지? 999999원. 친구 돈 많아?"
"아무렇게나 적어둔 거 아니에요? 가격은 협의라면서요."
"얘야. 세상에 협의 붙는 말은 다 구라예요. 알고 보면 다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거다?"
"그럼 999999원 낼게요. 저 어릴 때부터 모아온 적금 있어요."
남자는 대꾸 없이 자신의 아이폰을 뒤집었다. 스크린을 몇 번 터치하자, 제노의 화면에 떠 있던 상품에 거래 완료 알림이 떴다. "짠." 제노는 분한 숨을 짧게 내쉬었다.
"안 팔렸으면서."
"팔았어. 방금."
"왜 저는 안 돼요? 반쪽짜리 결혼반지 사는 데에도 자격이 필요해요?"
자긴 조이콘 반쪽 달라고 우겼으면서……. 혼잣말을 들으란 듯이 했다. 하하. 남자가 시시하게 웃었다.
"얼마에 살 건데? 내 순정."
내 실연을 얼마에 팔까…. 듣기엔 나긋한데 보기엔 건조하다. 소리 없는 제노는 그의 눈에 대한 감상을 정정했다. 올리브보다는 타이어에 가깝다. 식은 고무처럼 닳고 닳은, 윤기라곤 일절 없는 무광의 흑점이다. 남자는 갑자기 왜 팽팽해지는 걸까. 방금 전까지는 잠깐 따사로운 볕이 들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왜 한여름 땡볕에 부푼 타이어처럼, 이 아슬아슬함은 대체 왜.
"순정까지는… 안 사도 괜찮은데요."
이제노는 실연에 얹어 청승까지 사겠다고 한 적 없었다. 반지 하나 좀 네고 걸었다고 넘볼 걸 넘보라는 식. 울렸으니 그래도 좀 미안하단 기색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니 그도 삔이 좀 상했다. 누가 한 번 뚫린 결혼반지를 반쪽을 중고로 산다고. 전당포에 가보라지. 얼마에 팔아주나. 조이콘도 반 갈라서 반값 달라는 그쪽 네고는 뭐 합리적이었던가. 이런 기회 흔치 않은 건데. 거래하러 나온 사람 새빠지게 고생시켜놓고……
"저도 거래 안 할래요."
남자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응?"
"제 닌텐도도 방금 가격 올랐어요. 99999원이에요. 반쪽 조이콘이라도 받고 싶으면 교환해요. 반쪽짜리 반지랑."
침묵. 남자가 한숨을 쉰다. 뒷머리를 매만지다가. 턱을 문지르다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친구야."
"친구 아니고 이제노예요."
"제노야. 너 나한테 관심 있니?"
"오늘 처음 봤는데요.“
"관심이 꼭 두 번 봐야 생기란 법 있나. 말해 봐. 게이한테도 먹힌다고 자랑하고 다니지 않을게."
"왜 공짜로 들으려고 해요… 얼마에 살 건데요, 제 관심."
어쭈. 제노를 쳐다보던 남자가 미간을 찡그리고 웃었다. 한 마디도 안 지는 어린놈의 엇된 반항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톡. 속눈썹을 추켰다.
"너 내 이름은 한 번도 안 묻네."
그가 중얼거린다. 질문 아닌 혼잣말에 가까운 포맷이었다. 가격도 안 알려주는데 이름은 알려주나…. 제노도 그 포맷을 흉내 냈다. 배움이 빨랐다. 드르륵. 남자가 의자를 밀고 일어선다. 남자를 따라 시선이 올라갔다. 재밌다는, 흥미 본위의 시선이 제노를 관통한다. 이제노도 지지 않고 꼬나본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낸 남자가 제노에게 그것을 내민다.
"가서 계산하고 와."
제노는 손에 쥔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NA JAEMIN.
이름을 그런 식으로 알려주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애프터
이제노는 안전히 귀가했다. 나나가 집까지 데려다주진 않아서 그냥 버스 타고 왔다. 집 앞 정류장에서 내리는데 다리에 힘이 빠져서 휘청대다 자빠질 뻔했다. 귀가하니 어머니가 일찍 일찍 다니라고 혼을 냈다. 엄마는 알까. 내가 오늘 슬기로운 게이 생활 자금 장만하려다 객사한 재수생이 될 고비를 넘겼다는 걸.
당근마켓 채팅창은 죽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재민은 후기 쓰는 법이나 거래를 마감하는 등의 중고 마켓의 생리를 모르는 것 같았다. 어쨌든 돈도 닌텐도 오간 바 없으니 아직 거래는 끝나지 않았다. 제노는 거래를 마감할 때 그에게 걸맞을 코멘트 몇 개를 돌아본다. 시간 약속을 잘 지켜요. (대신 거래 시간이 길어요.) 응답이 빨라요. (답장 느리면 존나 뭐라 해요.) 제가 있는 곳까지 와서 거래했어요. (제가 갈 필요 없는 곳까지 데려갔어요.) 손이 커요. (울렸다 눈물 닦아줬다 장단 맞추기 어려워요. 그치만요. 욕도 잘하고 섹시해요. 또 거래하고 싶어요. 연락해도 되나요.)
나나는 제노와의 재거래를 달가워할까. 제노는 하루에도 여남은 번 변함없는 채팅창을 들여다보곤 했다. 객기도 전염이다. 땔감 지펴줄 상대가 없으니 개길 마음도 자꾸 사그라지었다. 용기가 기준치보다 모자랐다. 초면인데 아무도 모르는 내 신상을 털고. 울고. 뻗대고. 괜히 연락했다 차단이나 당해버리는 건 아닐까. 제노는 나나에게 연락하는 대신 네이버 스토어에서 조이콘 셀프 수리 모듈을 주문했다.
따라서 제노는 익명성에 몸을 맡기고 자문을 구한다.
철철이: 있잖아요
가렌후박: ㅇ?
철철이: 제가 오늘 번개 같은 걸 했는데
철철이: 상대가 헤남이긴 했거든요
가렌후박: 아 스트레이트 재앙
철철이: 머리도 쓰다듬어 줬어요
가렌후박: 근데 꼬실 맛 있음 원래 스트레이트들은 다 걸레임
철철이: 생긴 게 이뻤어요... 몸도 완전 제 취향
가렌후박: 너 잘생겼냐?
철철이: ㅎ...
가렌후박: 얼사 ㄱ?
철철이: 얼굴은 좀
가렌후박: 그럼 물건 사진 줘바
철철이: 제 고추는 왜요??
철철이: 고추 봐서 뭐하게요
가렌후박: 사진 싫다매; 프로필도 없는데 그거라도 봐야지 사이즈 나오지 존나 빼네
철철이: 잠시만여...
제노는 멀뚱히 제 고간을 내려다본다. 자주의 체크 혼방 파자마에 덮인 리틀 제노. 엄마와 아빠를 제외하면 타인에게 노출한 경험이 없는 수줍은 친구였다. 세상 사람 중 아는 이가 셋뿐이니, 생김새를 자세히 들여다 본다고 제노임을 알아볼 순 없겠지. 제노는 망설임 없이 바지춤과 속옷을 추켜 내렸다. 어정쩡한 각도로 사진을 찍어 전송했다.
철철이: (사진)
갤러리에 사진이 남아 있는 것도 좀 흉물스럽게 느껴져 바로 삭제했다. 그 사이에 메시지의 1이 사라졌다. 삭제된 항목에서 한 번 더 빠르게 사진을 지울 때까지 상대방은 답장이 없었다. …괜히 보냈나. 다시 생각하니 좀 창피한 것도 같아 귓바퀴에 열이 오를 때쯤.
가렌후박: ㅁㅊ
가렌후박: 씨1발
(상대방이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제노는 멍하니 객체가 사라진 대화방과 일말의 욕설을 들여다본다. 잠옷 바지를 채 다시 입기도 전이었다. 쌍욕 박고 사라진 상대는 대화방이라는 허물만 남기고 증발했다. 평가는 단 두 마디. ㅁㅊ. 그리고 씨1발. 액정이 꺼지고, 검어진 화면 위로 충격에 감싸인 남자가 되비친다.
내 좆이… 그렇게 좆같은가?
(그야 좆이지만)
다음날 모듈이 도착했다. 그 다음 날에 조이콘을 고쳤다. 사용 설명서는 어렵지 않았다. 미니 드라이버로 껍데기를 따고 스틱을 갈아 끼우니 새 것이 됐다. 그렇게 세 개의 하루가 지나갈 때까지 이제노는 차마 재민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선뜻 밥은 먹고 다니냐는 안부 인사가 통할 상대는 아니니까. 괜히 긁었다가 채팅 방이 영영 사라질지도 몰랐다. 자꾸 그날의 쾌속 드라이브가 어른거렸다. 이어 가렌후박의 쌍욕이 뇌리를 바늘 끝처럼 예리하게 스쳤다. 연락할까. 말까. 망설임으로 귀한 시간을 흘려보내던 제노에게 계기라는 게 생겨난 건 충격의 좆평으로부터 나흘이 지난 뒤였다.
“수도계 별침이 계속 돌아가… 이상한데.”
현관을 열고 돌아오던 엄마가 염려스럽게 중얼거렸다. 지난달에 수도세가 너무 올라서 확인해봤는데. 어디 물 새고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정전 난 이후론 전구도 자꾸 깜빡거리고… 아무래도 사람 한 번 불러야 할 것 같아. 신축인데 여기저기가 왜 이렇게 난리인지. 정말. 아빠는요? 너네 아빠 다음 주에나 와. 대구로 출장 가셨어. 그리고 집에 있어봤자 그 양반이 이런 걸 할 줄 알기나 하겠니. 모 기업의 임원인 제노의 아버지는 출장이 잦았고, 가족관계의 유대에 끼치는 영향이 실로 미미했다. 매주 쓸고 닦지 않아도 화장실은 늘 깨끗한 줄 아는 위인이었으니까. 엄마도 곧 친정 가봐야 하는데 어쩐다니. 사람 부르면 또 돈 십이나 깨질 텐데… 고민하는 어머니의 옆모습을 보던 제노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제가 해결해볼게요."
"네가? 어떻게?"
하다못해 설거지를 할 때조차 접시 수장을 깨먹고야 마는 친탁의 아들을 의뭉스럽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제노는 의기양양하게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해결해줄 사람 있어요. 아들 믿고 안심하고 다녀와.
철철이 : 반지 준비 됐어요?
나나 : 안 판다고
철철이 : 그럼 다른 거 파실래요?
나나 : ?
이번에야말로 매너 온도를 달굴 차례였다.
< 플럼버 판타지 >
미국인들이 성적 판타지를 느끼는 직업 중 하나가 바로 배관공이죠. 미국의 배관공은 한국과는 달리 직업 선호도와 임금 모두 높은 직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영화 <브루클린>이 로코의 부진한 유행을 깨고 박스 오피스 순위권에 드는 기함을 토했는데, 주인공 토니의 직업이 바로 배관공입니다. ..(중략).. 플럼버 판타지는 전통적인 남성성에 기초한 욕망입니다. 판타지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낯선 남자일 것
2. 전문 지식과 육체미로 충만할 것
3. 다른 이들의 이익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을 것
4. 내밀한 공간에 침입할 것
이 점에서 배관공은 가장 이상적인 모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험하지만 길들여진 남자죠. 섹스 판타지는 포르노와 분명 다릅니다. 판타지는 단편적 자극이 아닌 지속되는 언어입니다. 꿈꾸는 이의 다각적이고 복합적인 욕망의 총체입니다.
띵동. 초인종이 울린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제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관문을 힘차게 열자, 코 앞에 비딱하게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왼손엔 검은 봉다리. 오른손엔 공구 상자를 들고.
"너는 하고 많은 사람 중에 꼭 나한테 변기 누수를 맡기고 싶어?"
"그냥… 제일 빨리 와주실 거 같아서요."
"이건 내가 지 시다바리인 줄 아나…. 현장에서 결제 받는다."
이번엔 검정색 똘아이 추리닝을 입고 있다. (검정색이니 똘아이까진 아닌가.)
차액도 입금 안 하길래 거파인줄 알았더니… 툴툴거리면서도 그는 순순히 집으로 들어섰다. 제노는 잠시 현실감 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재민. 나재민…. 여러 번 되새기던 이름의 주인이, 지금 제노의 집에 있다. 아주 익숙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낯설어졌다.
재민은 화장실 타일 위로 들고 온 비닐봉투를 툭 내려놓았다. 그 안엔 수리를 위한 부속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일단 뜯어는 볼 텐데. 만약 내 힘으로 어떻게 안 되는 문제면 그땐 누수 전문가 불러. 내가 실수로 뭐 깨먹어도 내 탓 아니다. 알지? 듣고 있냐? 그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만 주억였다. 내용보다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그랬다. 귓속을 시원하게 훑는 자일리톨 향의 목소리.
앞에 두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게 있다. 생각보다, 제노는 그가 퍽 보고 싶었다. 이유를 꼽자면 거창한 건 없다. 제노는 그 성질머리의 말단들이 눈에 밟혀 마음이 동했던 걸지도 모른다. 보통 로맨틱 코미디는 지극히 사소한 지점에 출발하니까. 이를테면 단순히 사진 한 장에 넘어간 손가락뿐만 아니라. 싸가지를 띄어 쓰는 저 말씨라던가.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나사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헐렁한 눈깔마저도….
"뭘 꼬라."
저 말본새도 어느 정도…….
*
변기 수리가 오래 걸리는 일일까. 맘 같아선 한 열두 시간 정도 걸렸으면 좋겠다. 제노는 지금 학자였다 미간을 좁히고 한 남자가 그리는 뒤태를 탐구하는 중이다. 재민은 니트릴 장갑을 낀 채 꽤 오래 몸을 수그리고 있었다. 판판하게 벌어진 티셔츠의 직물 위로 부푼 근육의 질감이 교차로처럼 도드라진다. 그가 입은 티 쪼가리는 아주 얇아서, 재민이 팔을 움직이거나, 양변기 뒤쪽을 향해 허리를 숙일 때마다 팔과 등의 어느 부분을 쓰고 있는지 선연히 볼 수 있었다. 확실히… 타인의 지식을 빌려 필요 이상으로 정교하게 깎은 몸은 아니다. 정나미 없는 식단조절이나 주 단위의 커리큘럼 밖의. 멋대로 몸을 쓰고 움직여 직조된 등이다. 야만적인 생활양식에 더 적합한 성깔머리와 몸뚱아리. 왜 동양에서 돌쇠, 서양에서 농부나 정비공 판타지가 성성한지… 알 것도 같았다. 제노는 조용히 휴대폰으로 어머니께 문자를 보냈다.
[엄마 변기 잘 고치는 며느리 어때?]
답장이 왔다.
[갑자기 며느리?]
[변기 고친다더니 여자친구 불렀니?]
여자친구라니. 이렇게 아들을 모르신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요?"
"신혼집이 연식이 좀 된 아파트였어. 온 데가 다 앵꼬 나는데 일일이 사람 부르면 돈 아깝잖아."
신혼집.
며느리 삼을 생각 중이던 제노의 머릿속으로 이전 결혼이 끼어든다. 돌싱인 건 알았는데. 막상 이전 결혼 이야기를 듣자 기분이 묘했다. 재민에게는 아직도 신혼이라 칭할 만큼 덜 익었으나 일찍이 마감된 생활이 있었다. 재민은 결혼이 유효하던 시절에 어떤 남편이었을까. 제노의 아빠처럼 가정 내부의 일엔 좀 무심했을까. 아니면 매형처럼 필요 이상으로 살가웠을까. 집을 하나하나 직접 뜯어 고쳤다는 얘기를 보면 후자에 가까웠을 것 같았다. 양가적인 감각이 제노를 시소에 태운다. 멀미처럼 일렁이는 거북함. 명치뼈를 두들기는 효능감. 제노는 말없이 일하는 등짝을 바라보았다. 볼탭인지 뭔지. 변기 부속품을 떼어내느라 성이 난 근골격이 얇은 티 한 겹 너머로 꿈틀거리는 광경. 그리고 상상한다. 집의 이곳저곳을 고치고 다듬는 재민을.
"형."
"아저씨."
"저는 어른 같은 사람만 아저씨라고 불러요."
"그래… 어른 같지도 않은 날백수 새끼 불렀니."
"왜 이혼한 거예요?"
변기를 떼어내던 재민이 세면대에 뒤통수를 콩 부딪쳤다. 분명 자기가 부딪혀놓고. '이 집은 뭐 이딴 곳에 세면대가 있어?' 라는 눈깔로 세면대를 노려본다. 무생물을 상대로도 겐세이를 놓는구나. 뒤통수를 문지르던 재민이 다시 공구를 집어 든다. 물탱크 부품을 하나씩 뜯어내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그런 심각한 이슈 물어볼 땐 손 들고 질문해."
제노는 착하게 손을 들었다.
"삼켜."
그럴 거면 왜 들라고 한 거죠?
"왜 이혼 했는지 말하기 싫어요? 이혼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던데요."
"어른들한텐 네가 모르는 어른들의 세계가…."
"꼰대 발언 사절."
"남의 가정사에 뭔 참견…"
"싸가지 부족."
"이게 듣자 듣자 하니까…"
"말 돌리기 금지."
재민이 두 팔을 무릎에 걸치고 쭈그려 앉는다. 당장 입에 담배만 물리면 영락없는 양아치였다. (실제로 무엇도 안 물린 입가를 더듬던 재민이 한숨 쉬는 본새에서 습관의 무서움이 배어나왔다.) 분명히 한번 참은 표정이다. 손가락 다섯 개를 쥐락펴락할 때마다 그의 뼈마디가 뚝뚝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제노는 살며시 침을 삼켰다. 섹시해 보이면 미친 거겠지. 한 대 정도는 줘 터져도 괜찮을 것 같다면. 깽값 돈 말고 몸으로 받고 싶어진다면. 잘못된 데이트 문화 인식 전파에 일조하는 거겠지.
"곤란하시면 다른 거 물어볼게요…."
“…….”
"왜 결혼했어요?"
이혼은커녕 결혼과도 먼 제노는 아직 곤란하지 않은 관혼상제 질문을 몰랐다. 다행히 재민은 제노의 머리통을 터뜨리지 않았다. 후. 이마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불어 넘긴 그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섹스해보니까 좋아서. 대답 한 번 심플했다. 말본새는 저급했지만 진또배기 저질은 아닌, 단지 그렇게 보이고 싶어서, 그저 그런 양아치처럼 보이고 싶어서, 재민은 그렇게 대답한 것 같다. 가공된 위악이라는 증거는 그의 손가락에서 이미 찾았다. 얼마 전까지도 꾸준히 반지를 걸고 다닌 흔적. 오목하게 패인 선명한 돌싱 흉터.
"…섹스하고 좋으면 아무랑이나 결혼해요?"
제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정말, 어떻게 보자면 게이인 제노보다도 편견 없이 공평한 성적 사상 아닌가. 섹스하고 좋으면 할머니랑도 가능할까? 남자랑도? 이제노랑도…? 재민은 그런 제노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지 않았다. 대답 대신 자조 섞인 고갯짓을 설레설레 쳤다. 내가 이 어린애랑 무슨 얘기를 하냐, 그런 제스쳐다. 니네 부모님은 어디 갔니? 새끼 게이 자식이 이러고 다니는 거 아셔? 게이 자식 새끼겠죠. 형용사 순서에 사감 넣지 마세요. 엄마 외할머니네 갔고 오늘 집 비어요. 그래(어쩌라고라는 눈빛). 그는 다시 제노에게 등을 돌린다. 공구를 놀릴 때마다 그의 팔 근육에 힘찬 펌핑이 들어갔다. 얄팍한 반팔 티셔츠 아래로, 어깨 근육이 크게 비틀리는 움직임이 생생하게 보였다.
이혼하면 실의에 빠져서 몸도 마음도 망가질 줄 알았는데. 재민은 현역이라 해도 믿을 만큼 팔팔했다. 번식 경쟁에서 1회 성공해본 자가 지닌 생래적 페로몬이 여전히 은은히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의 등판을 빤히 쳐다보았다. 애 취급 하는 것보다 그가 제노한테 등을 보이는 게 더 마음에 안 들었다. 보긴 좋은데. 마음에는 안 든다.
"반지 저한테 파세요. 형이랑은 안 어울려요."
시큰둥하던 눈이 이제야 제노를 향한다. 어울리거든? 목소리는 버석한데 내용은 유치하기 그지없다. 제노는 화장실 바로 입구에 쭈그려 앉았다. 타일 위에 앉은 재민과 눈높이가 같아졌다.
"왜 하필 까르띠에에요? 그 중에서도 왜 러브링이에요? 우리 누나는 결혼할 때 러브링은 절대 안 살 거라고 그랬거든요. 그거 정조대에서 영감 얻은 반지라고. 근데 형이랑 정조는… 진짜 안 어울리잖아요. 아님 와이프 희망사항이 들어간 초이스인가…."
"야."
탁. 라텍스 장갑을 내던지는 소리에 제노는 움찔거렸다. 자극의 정도가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꼬리 내릴 마음이었다면 처음부터 개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재민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구부정하던 척추를 찌뿌드드하게 펴고, 어깨가 넓게 벌어지는 몸짓은 맹수처럼 조용하고 위압적이었다.
"간격 좀 지키지."
간격. 앞차 간격을 말하는 걸까. 자기는 쌩 무시하고 달려버리던 그런 안전거리를 지키라고 제노를 혼내고 있는 걸까.
"내가 맨날 친구라고 부른다고 우리가 진짜 친구는 아니잖아."
제노는 어린 죽순처럼 나릿나릿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한참 제노를 응시하던 남자가 한번 팔뚝에 힘을 주었다. 쿵. 변기 꼭지가 묵직하게 원위치 된다. 크게 몸집을 부풀린 등을 보면서, 복어처럼 늘 따끔하게 부풀어있는 남자를 언젠가는 터뜨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장장 1시간에 걸친 수리였다. 재민이 변기 뚜껑을 원위치로 덮고 물을 한 번 내렸다. 쿠르륵. 쿠륵. 깔끔하게 물이 내려간다. 더 이상 물 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또 물 새면 업자 불러. 간다."
남자는 정말 변기만 고치러 왔던 모양이다. 부속물 쓰레기를 한데 때려 넣은 비닐을 든 남자는 곧장 성큼성큼 신발장을 향해 걸었다. 혼난 뒤로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던 제노는 벌떡 일어났다. 형. 붙잡을 용건도 없으면서 불러 세웠다. 무시해치우고 그냥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남자는 걸음을 딱 멈춰 세웠다. 비딱한 시선이 제노를 향한다. 말해보라는 듯이. 막상 재촉하는 시선 앞에 할 말이 궁했다. 레퍼토리가 많은 게이가 아니었다. 어린 제노는.
"밥… 드셨어요? 전 배고픈데."
"해먹어."
"김치 볶음밥 해드릴게요. 식사 하고 가세요."
"너 많이 먹어라. 나 김치 들어가는 거 찌개 빼고 다 싫어해."
"왜요?"
"너무 빨개."
정치색이 있으신가…? 말문이 막힌 제노를, 남자는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의 속눈썹 아래 뭉친 불량한 구체가 제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기묘한 침묵이었다. 말이 없는 게 아니라, 허공을 가득 떠돌고 있는 말들이 들리지 않는 진공 상태 같았다. 저 눈이 뭔가 말을 하는 거 같은데. 어떤 계기를 기다리는 침묵 같은데. 그 계기가 충분하지 못해서 돌아서지 못하는 것 같은데. 착각일까…? 제노는 느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하나씩 끄집어냈다.
"오므라이스는 좋아해요? 오므라이스 해줄게요."
"아니. 찝찝해서 입맛 없어."
"찝찝하면 저희 집 화장실에서 씻어도 돼요."
"속옷은."
"새 거 있어요."
"겁도 없는 새끼… 모르는 어른을 뭘 믿고 욕실에 들여."
"닌텐도 조이콘 고쳤어요."
남자가 입을 딱 다물었다.
어. 설마.
"…게임 하다 가실래요?"
제노는 팔짱을 얽은 자세로 자신의 팔꿈치를 꽉 감싸 쥐었다. 설마… 이거라고? 재민은 침묵했다. 신발장에서 신발에 한 짝 발을 꿴 자세 그대로. 그의 눈이 고장 난 현관등 센서를 느리게 쳐다본다. 저건 안 고치냐. 중얼거리면서. 그가 발을 다시 천천히 현관 바닥에 둔다. 두툼한 발바닥이 턱. 턱. 마루를 밟는다. 그가 제노 앞을 다시 지나쳐갔다.
"짱짱한 거로 사와."
쾅. 화장실 문이 닫혔다. 마루에 덩그러니 남겨진 제노는 잠긴 문을 쳐다보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뭐. 어른을 들여?
그러니까. 제노는 이 애어른 다루는 방법을 정말 터득한 거다.
삶은 B과 D 사이 C의 연속
그렇다면 Bath와 Dish 사이의 C란 무엇인가. (아쉽게도 Condom을 내밀기에 아직 제노는 그정도까지 까지지 못했다.)
첫 번째로는 Color다. 방금 사온 언더웨어 선물 세트를 식탁에 내려두고 턱을 문질렀다. 수시 쓸 때보다 더욱 심각한 고민 끝에 화장실 문을 조그맣게 두드렸다. 왜! 들어오지 마, 문 잠갔어! 우렁우렁한 재민의 고함이 들려온다. 무슨 색깔이 좋으세요?! (작아진 물소리) 뭐? 뭐가 섹시하다고? 아니, 색깔이요! 팬티 색깔! 뭐 팬티 사왔다고? 문 앞에 둬! (다시 커진 물소리) 제노는 소통을 포기하고 문 앞에 속옷 패키지를 두었다. 좀 궁금하긴 했다. 회색 흰색 검정색 중 무슨 색을 고를지.
두 번째는 Cook. 오므라이스는 지단을 먼저 부치나 밥을 먼저 볶나? 제노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야 자신이 부엌과 친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되짚는다. 김치통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도 양파와 햄이 어디 있는지는 잘 몰랐다. 제노에게 냉장고는 난해하고 주방은 낯설었다. 여느 가정집처럼 락앤락에 곱게 담긴 반찬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하지만 무엇이 무생채무침인지, 무엇이 장조림인지. 하나하나 열어보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려웠다. 제노는 불과 얼마 전까지 중식과 석식을 먹던 고삼이었으니까. 물론 뚜껑을 열어 확인할 수 있겠지만 제노에게는 시간이 모자랐다. 냉장고 문을 오래 열어두면 전기세가 나가고, 재민은 몸을 씻고 나올 것이다. 요리를 시작조차 안한 꼴을 보면 훌쩍 집에 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오늘 굴린 두뇌 운동량과 들인 시간이 허사가 되어버린다. 제노는 고민 끝에 달걀을 꺼냈다. 지단 부치는 게 어렵다면 계란말이를 하면 됐다. 시간도 더 짧고 들어가는 재료는 비슷하니까.
제노는 고개를 빼 화장실 문을 바라본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물소리가 들린다. 볼 안에 계란을 깨트렸다. 텄다. 계란이 엉망으로 깨졌다. 제노는 젓가락으로 계란 껍데기를 집으려 끙끙거린다. 겨우 껍질을 솎아내고 홧김에 다시 양파와 햄을 꺼냈다. 세 번째 고민. 햄을 볶을 때도 식용유를 둘러야 하나? 햄은 기름지잖아. 인덕션 위에 프라이팬을 올리다 말고 눈썹을 찡그렸다. 물소리에는 아직 끊임이 없다. 새삼스럽게 이 집에 재민이 있다고 실감하니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붙잡아 씻기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그를 먹일 밥까지 만들고 있다. 스스로가 좀 완연한 성인처럼 느껴진다.
뭣보다 나 요리에 좀 소질 있는 것 같아. 프라이팬에 올린 햄이 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제노는 그렇게 생각하고. 힘겨운 젓가락질로 햄을 뒤적거리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데.
"친구야. 계란 타는데."
"네?"
그리고 별안간 튀어나오는 목소리에 펄쩍 뛴다. 분명 방금까지 물소리를 들어 한참은 걸리겠다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이 씻는 데 물을 끄고 몸을 닦고 스킨 로션 바르는 프로세스까지 포함되어 있지 않나. 프라이팬 손잡이를 쥐고 놀란 가슴을 달래니 재민이 그를 한 번 더 재촉했다. 너 요리 못하는구나. 잘한다며. 왜 정신 빼고 있어. 한 번이 아니고 3연타다. 대답할 틈은 줘야 할 것 아닌가. 욱 치미는 분기에 팩 고개를 돌렸다가.
"탄다고. 거기 연기 올라오잖아."
왜?
"왜 팬티만 입고 계세요?"
"원래 씻고 나서 바로 안 입어."
"아."
경우가 없어. 너무 없어. 제노는 뒤집개를 쥔 채 꼼짝하지 못했다. 매캐하고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어떤 채소는 살짝 태우면 오히려 단 맛이 난다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육질로만 이루어진 남자에게서 왜 탄 채소의 향기가 나는 걸까. 제노는 정말이지 묻고 싶었다. 누가 당신을 태웠길래 그렇게 벗겨놨냐고. 팬티만 입고 나오다니. 아다 게이 혼자뿐인 집에.
물론 속옷만 주기는 했지만. 정말 속옷만 입고 나올 줄은 몰랐다. 방금 샤워를 끝낸 몸엔 온천에서 삶은 달걀처럼 온습한 열기가 배어있다. 지나치게 붙었기에 온도를 알 수 있었다. 제노의 반팔 너머로 맨살의 촉감과 윤곽이 느껴졌다. 남자는 그늘이 너무 많았다. 복부든 팔뚝이든 쩍쩍 갈라져서, 오십 가지 그림자가 그레이 말고 저 인간 복부에 다 있었다. 제노의 시선을 느낀 재민이 눈썹을 한 번 까딱거렸다.
"뭘 꼬라."
"옷 드려요? 안 추워요…?"
"불 앞이라 더워."
"인덕션인데."
"관념적 불이지. 근데 이게 뭐야?"
오버쿡 된 음식에서 그슬린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오므라이스요."
"이야. 불 없이 이렇게 태우기도 쉽지 않은데…."
제노의 어깨를 두꺼운 손이 움켜쥐었다. 비켜 봐. 제노를 한 발짝 옆으로 옮기는 손짓만큼은 제법 나릿하고 부드러웠다. 뒤집개까지 쓱 가져간 그가 프라이팬에서 탄 음식을 접시로 옮겨 담는다.
"탔는데 왜 담아요?"
"이 정도는 잘라내고 먹으면 돼. 버릴 필요 없어."
"그래도… 탄 거 먹으면 암 걸리는데."
"아, 걸리적거려. 너 저기 가서 앉아 있어."
그는 제노를 인덕션 앞의 가용 범위에서 완전히 몰아낸다. 제노는 목각인형처럼 바 의자에 앉았다. 재민이 제노가 널브러뜨린 계란 껍데기와 햄 포장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제집인 양 동선이 익숙하고 부드러웠다. 냉장고 열어도 돼? 속질이 깡패 양아치면서 그런 걸 묻는 매너가 있다니. 제노도 쉽게 뒤지지 못하는 냉장고에서 재민은 용케도 재료들을 찾았다. 아보카도. 크림치즈. 토마토. 할라피뇨… 할라피뇨는 피자 시킬 때 끼워 넣었던 건데. 잔반까지 써먹는 게 진짜로 집밥을 해본 태가 났다.
제노는 작금의 상황을 복기한다. 키워드로 정리해 보자. 주방과 남자. 정확히는 주방과 벗은 남자. 화장실을 고치고 밥을 하는 남자. 말이 되거나 자극이 덜하거나 둘 중에 하나는 충족해야 했다. 물도 이렇게 마시면 체한다. 넷플릭스 드라마도 이렇게 다 때려 박진 않는다. 이래도 되나? 그렇다면 나의 뭘 믿고? 물론 싸우면 내가 지겠지만. 제노는 주먹을 잼잼 쥐었다 피며 다시 재민의 등을 본다. 이제는 얇은 티쪼가리의 속박을 벗어던져 완연하게 드러난 맨 등을. 그 위로 뚝뚝 방울져 떨어지는 물방울과 젖은 머리카락. 신체를 구성하거나 잇는 불퉁한 선을.
그는 주방을 애인처럼 잘 다뤘다. 썰고. 익히고. 재료를 배합해서 믹서에 갈고. 플레이팅까지 신경 썼다. 누군가를 위한 요리를 자주 차려본 사람이 으레 그러듯이. 믹서에 크림치즈와 함께 간 아보카도를 구운 빵에 바르고 할라피뇨와 토마토를 얹는다. 간을 본 재민이 음. 짧은 소리를 냈다.
"딱 좋네."
딱 좋다는 요리는 제노 앞에 놓였다. 자기는 탄 부분을 잘라낸 오므라이스를 가져간 재민은 맞은편에 앉았다. 통상적으로 연인이 앉는 자리다. 제노는 멀뚱히 토스트를 내려다보았다. 간편식 같지만 생각보다 먹기 까다로운 음식. 잘못 먹으면 손을 더럽히고 가루가 몸에 묻는다. 그런 걸 저런 차림으로 만든다. 상스러운 남자다.
토스트를 한 입 먹었다. 제노의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왜 맛있지?"
아닌 척 제노의 반응을 관찰하던 재민의 입가가 보일 듯 말 듯 풀어졌다.
"에로틱 푸드 들어봤어? 꿀. 딸기. 할라피뇨. 크림치즈. 이런 거."
속옷만 입고 해서 에로틱 푸드는 아닌가. 그런 걸 의외로 잘 안다고 감탄했더니 아내가 좋아했거든. 담담하게 말하며 오므라이스를 먹는다. 그는 숟가락 위에 너무 크게 썰린 야채를 지적하지 않았다. 비웃은 것 치곤 어떤 불평도 없이 요리를 먹어 해치우는 태도.
전 와이프에게도 그랬을까?
재민을 다시 보게 되었다. 지금의 그는 남이 갈고 닦아 내놓은 요리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전처의 취향일지 궁금해졌다. 그녀가 몇 년의 결혼 생활 동안 사포질하고 엮고 기워 지금의 재민을 만들었을 테니, 재민은 그녀의 에로틱 푸드인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남이 정성들여 내놓은 음식을 무단으로 취식하는 것 같아 좀 떨떠름해졌다. 그 정도의 양심은 있었다. 무엇보다 재민이 아직까지 와이프를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면 그건 제노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으니까. 제노는 자꾸 물크러지는 아보카도를 뒤적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내 아니고 전처시겠죠."
"아직 입에 안 익어서 그래."
"그래도 이혼한 사람 얘기를 자꾸 꺼내고 그러는 게… 좀 그렇게 느껴지거든요. 저한테 혹시 벽 치는 거예요?"
내가 게이라서?
끽. 제노의 포크가 그릇을 긁었다. 잘못된 곳을 긁을 때 나는 불협화음에 어깨가 움츠러든다. 대답은 재깍 돌아오지 않았다. 말없이 수저를 뜨던 남자가 낮은 한숨을 지었다.
"그런 거 아니다."
"그런 게 뭔데요."
"뭐든. 니가 오해하는 거야."
"전 사람 오해 잘 안 해요."
"내가 좀 오해를 잘 사. 아무튼 친구… 아니. 얘야. 니가 동서남북중에 좀 남쪽이라고, 드러워서 그러는 거 아니라고."
"진짜요?"
"그래. 솔직히 니 정도면 뭐…."
뭐어. 말끝이 늘어진다. 뭔가를 말하려다 도로 돌돌 삼킨다. 아무튼… 벽 좀 치면 어떠냐. 그냥 니가 존나 귀여워서 그런가 보다 해. 저 귀여워요? 어. 조카 같아. 형이 조카라고 하니까 되게 욕 같다. 분위기가 무두질된다. 식사중에 그들은 적당한 이야기를 나눴다. 어디 사는지: 인천. 아직 신혼집에 사는지: 팔았다. 아파트 판 돈으로 니 닌텐도 사러 온 거다. 그럼 오늘은 인천에서 잠실까지 날아온 거냐: …. 재민은 뒷목을 매만졌고 제노는 앞머리를 꼬았다. 얘기를 하다 보니 평소보다 접시가 느리게 비었다. 그럼에도 결국 식사를 끝마쳤다.
"아. 진짜 오믈렛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게 잘 하지도 못하는 걸 도전하고 그래. 되는 거 해. 그래도 돼."
"다 실패하면서 배우는 거죠. 다음엔 더 잘 할 수 있어요."
남이 그냥 하는 말에도 갖다 이기죽대는 게 얄미워서, 퉁을 놓았다. 접시를 치우며 비웃음을 기다리는데, 이상하게 장내가 조용하다. 고개를 들었다. 재민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다 실패하면서 배우는 거지."
그가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담가놓는다. 설거지는 니가 해. 제노는 자신의 앞에 놓인 빈 그릇까지 겹쳐 드는 재민을 바라보며, 잠시 기묘한 괴리에 휩싸였다. 처음 만났던 나나의 모습. 당근마켓 진상인 줄 알았더니 직거래 폭주마. 그리고 지금의 나재민. 익숙하게 그릇을 물에 헹구는 그의 뒷모습에서 묻어나는 가정적인 그림자. 뽄새와 다르게 집안일에 재능이 없진 않고, 그게 참 보기에 좋고. 생각보다 예쁘고. 여성들이 일생을 함께할 상대로 고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개체. 그럼에도 돌싱. 도무지 액면가가 종 잡히지 않는 남자에 대해 궁금한 것이 하나 늘었다.
방금 왜 웃고 있었지?
Rest. In. Practice
이혼은 무슨 이혼이야! 너 한 번 줄 그으면 끝이다, 어? 그냥 좀 안 맞아도 맞춰가면서 사는 거지. 여기서 술 먹고 있을 게 아니라 지금 와이프한테 달려가서 싹싹 빌어.
이혼 서류를 받은 날 그나마 하나 남은 대학 동기라고 고광수를 보러갔다. 재민을 고기집에 불러낸 놈은 그러게 애를 낳았어야지 않냐고 길길이 날뛰었다. 솔직히 니 와이프만한 여자 또 있을 거 같냐? 걔도 웃겨, 니가 뭐 마누라를 패길 했어 장모님께 못하기를 했어? 하, 이런 때 애가 있었어야 하는데. 1년이나 지나도록 여태 뭘 했냐, 어?
내가 낳을 수 있었으면 낳았지. 친구야.
실상 두 부부의 오작교 역할을 했던 고광수다. 대학 무대에서 콕 찝어 인혜와 재민을 이어줬던 놈이니까. 책임을 통감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이다. 솔직히 나재민은 알 바가 아니었다. 고광수가 무슨 말을 떠들든. 재민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고기를 구웠다. 고광수가 곤드레만드레 취할 때까지도 술은 입에 대지 않았다. 뻗어버린 동기를 술집 앞에 버리고 나왔다. 얼어 죽든 말든 솔직히 나재민은 또 알 바가 아니었다. 주위를 돌아보기에 그는 지나치게 결심한 상태였다. 그의 결심에 필요한 건 고광수의 좆같은 위로가 아니었다. 필요한 건 편의점에서 산 소주 네 병. 그리고 아반떼 키.
나재민의 기일이 된 기념비적인 날.
마지막으로 아반떼에 시동을 걸면서, 자살자는 생각했다.
정말 애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애를 가지고 싶었다.
정상가정에 대한 열망이었든. 애가 태어나야 비로소 영원에 한 발짝 가까워지리라는 촌스러운 구색이었든. 재민은 아이를 원했다. 부정할 수 없는 그들의 결실을 원했다. 궁극적 목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결혼식에서 성욱이의 주례사를 듣는 동안에도 애 이름에 욱은 넣지 말아야지, 인혜처럼 둥근 이름, 혀끝이 한 번도 걸려 넘어지지 않고 발음할 수 있는 글자들로만 이름을 이루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신랑을 부르는 소리를 세 번이나 듣지 못했다. 신혼 초기, 어쩔 수 없이 딩크족으로 살면서도 재민은 정말이지 애가 있었으면 했다. 이왕이면 딸. 인혜를 닮은 아이로. 세상에 그 애를 닮은 애가 한 사람이라도 늘길 바랐다. 그럼 인혜도 더는 외로워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매일 밤 인혜의 배를 감싸고 묵음된 기도를 문질렀다. 아들은 낳지 마. 널 외롭게 할 남자를 세상에 늘리지 마.
'그 반지. 안 팔렸으면 저한테 파시면 안 돼요?'
처음엔 뭐 저런 애가 다 있나 싶었다.
'왜 결혼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뭐 저런 애가 다 있나. 이제노. 철철이라는 놈은 이름 한번 아주 제대로 쥔 어린애였다. 제노라니. 처음 듣자마자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이제노. 이제노. 만약 재민이 애를 낳았다면 당장에라도 훔쳐오고 싶을 만큼 평평한 이름. 그런데 나제노 아니고 이제노여서 완벽한 이름. 이름에 이응이 들어가면 인생이 딸딸 잘 굴러갈 것 같다고. 나재민이 인혜 이름을 두고 자주 했던 말이 생각나게 하는 이름.
그 애를 울렸다.
애 갖고 노는 게임기 좀 뺏어보려다 제대로 눈물샘 찔렀다. 엉엉 울어버리는 애 앞에서 재민은 진땀을 쭉 뺐다. 애를 키워본 적이 있어야 알지. 애가 우는데, 이게 왜 우는 건지. 뭐가 서러워서 저러는 건지. 울음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그런 부성애를 장착하기도 전에 이혼당한 탓이다. 떨떠름했다. 어설펐고. 애가 우는데 뭘 미안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객쩍고. 괜히 머리 슥슥 문지르고 흐흐 웃으면서 넘기는데, 그때 딱 인혜 말이 생각나더라. 그게 니 문제라고. 딱 매듭 짓고 넘어가지 않고 당장을 적당히 무마하려는 게 정말 네 문제라고.
애들 앞에선 찬물도 함부로 못 켠다. 이제노는 배움의 속도가 빨랐다. 재민이 뱉는 족족 흡수해서 새총처럼 따박따박 돌려 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래서 울컥 할라 칠라니까 이 고양이 같은 게. 딱 한 발짝만 더 걸으면 터지는 지뢰 앞에서 앞발을 멈추는 후각이 있다. 게이들은 다 이런가. 눈치 밭고. 되바라지고. 남자 기분 참 쉽게도 주물럭대고. 씻고 나왔을 때 욕실 문 앞에는 세 벌의 속옷이 놓여있었다. 재민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깨물었다. 금도끼 은도끼냐. 그중 가장 검은 드로즈를 집어 들었다. 부엌에서 풍겨오는 매캐한 향기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서툴게 불을 조절하는 동그란 뒤통수가 보였다. 다 태워먹은 요리를 뒤적이고 있는 어린애의 뒷모습이 가슴의 나사 한 칸을 꽉 조여왔다.
어린 꼰대 새끼.
존나 깝싸서 귀여운 것도 깎아먹는 새끼.
잘 못하는데도, 끝까지 태워먹더라도 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라고. 다음에 또 할 거라고 땅땅 못 박아버리는 그딴 곤조 있는 애새끼.
나재민은 한 번 태워먹은 요린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 쓰레기통에 박아버리고 다신 쳐다보지 않는다.
그러나 재민은 제노가 태운 요리를 버리지 못했다. 태운 부분을 잘라내고 전부 먹었다. 망가진 부분만 도려내고 살아가는 한 남자를 위해 요리된 음식을.
쟤가 여자였으면 어땠을까. 딸처럼 생각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여자여도 변함없이 쥐어박고 싶었을까. 부른다고 재깍 대령했을까. 애가 곤란해서. 참 난처해하는 표정을 짓는 상상만으로 막 차린 밥상에서 일어나, 인천에서 잠실까지 장장 46킬로미터를 달려왔을까. 열 살 차이가 아니라 스무 살 차이였다면. 그랬다면 현관문을 곧장 열고 돌아갈 수도 있었을까.
*
재민은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득달같이 제노를 닦달했다. 닌텐도 고친 거 어딨어? 방에 있는데. 꺼내줄게요. 커피부터 마실 요량이었던 제노는 네스프레소 캡슐을 꺼내다 말고 황황히 닌텐도를 꺼내 주었다. 곧바로 닌텐도를 받고 일어나려는 재민을 붙잡아 앉히며 커피 취향을 물었다. 재민이 전원 버튼을 누르다 말고 실실 웃었다.
"커피는 탈 줄 알아?"
"기계는 잘 다뤄요."
"그럼 나 샷 8개 타줘."
"8개?"
토씨를 달진 않았다. 이런 폭주마가 카페인 중독이라는 게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니까. 캡슐 네 개를 곧장 까면서 제노는 생각했다. 이렇게 자극을 좋아하는 남자가 어떻게 결혼까지 했을까. 폭주와 카페인. 전부 중추신경을 흥분시키는 제로백이 5를 넘지 않는 것들이다. 사람은 보통 반대에 끌리니까. 과속을 좋아하면서도 매여 있는 삶을 꿈꿨던 건지. 닌텐도 화면을 흘끔거리는 재민에게 일단 마시고 확인하라 일갈했다.
제노는 재민이 식탁 의자에 걸어둔 옷가지를 챙겼다. 재민에게 묻지 않고 세탁기에 넣어 애벌빨래를 돌렸다. 너무 빨리 돌아가 건조기도 돌렸다. 허락보다는 통보가 빨랐고, 그보다 재민이 커피를 마시는 속도가 더 빨랐으므로.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구시대적 우화에 엄지를 내리꽂던 이제노도 결국 똑같은 수컷이었다. 폭주족 선녀는 거의 목구멍을 열어 커피를 꽂다시피 하곤 소파에 달려가 앉았다. 누가 누구더러 조카라는 건지. 제노는 한숨을 쉬며 그의 옆에 따라 앉았다.
"모듈 받아서 아날로그 스틱 고치긴 했는데. 잘 되는지 한 번 확인해 봐요."
"어떻게 고쳤어? 너 이과야?"
"이과긴 한데… 그냥 시키는 대로 껍데기 까고 바꾸니까 되던데요."
"이야… 이과들이 머리가 좋긴 좋아. 괜히 연봉 높은 게 아냐."
그게 대학도 못 가서 재수하는 이제노 앞에서 할 소린가. 제노는 대답 대신 리모콘을 들어 TV를 켰다. 공교롭게도 공영 채널에서 물수능을 지탄하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만점자가 12명이었던, 대통령까지 "매우 유감"이라며 사과했던 물수능. 제노 역시 그 물수능의 피해자이며 필요한 게 대통령의 사과는 아니었더랬다. 울적해진다.
"아 이거 된다. 잘 고쳤네."
사람 마음이 울면이든 짬뽕이든. 눈치도 없는 재민은 소파 테이블에 뒤꿈치를 갖다 찍고 발가락을 끄덕거리고 있었다. 발가락 열 개가 움직이는 뽄새를 보아하니 신까지 났다. 제노는 소파 위에 다리를 접어 앉았다. 턱을 괴고 심각한 표정으로 재민의 발끝을 보았다. 이어 무릎을. 반쯤 갈라진 맨 허벅지를. 코튼 브리프의 끝단까지 미처 닿기 전에 휘까닥 고개를 돌렸다. 제노를 심란하게 만드는 또 다른 문제. 저 남자는 왜 바지를 줬는데도 안 입는 거지?
"수능 두 번 친다고 안 죽어. 난 이혼도 했는데. 인생 안 끝나더라."
그러니까 그런 얘기 할 땐 사람 눈 보고 하라고. 게임기에 코 박고 있는 애어른 위로 타코 집에서의 장면이 오버랩 된다. 재밌어요? 어. 친구는 나랑 다른 게임을 하는 거 같네. 마을이 왜 이렇게 풍족하지? 형이 아직 가방끈이 짧아서 그래요. 나 대졸이다 인마. 아저씨 어릴 땐 이런 거 부모 잘 둔 애들이나 가지고 놀았어. 무슨 마흔 살처럼 말을 하세요… 스쳐지나가는 대화. '부모 잘 둔 애들'이라는 말이 귀에 걸렸다. 그럼 자기는, 부모를 잘못 뒀다는 뜻인가. 같은 인생을 두고, 제노와는 영 다른 플레이를 해 온 걸까. 게임에 몰두한 재민 옆모습을 시선으로 덧그렸다. 입매는 진중히 다물려 있지만 진실한 눈썹의 들썩임. 저렇게 신날까. 서른 먹고 게임기 하나로.
"저 어차피 재수학원 들어가는데… 그 계정 드릴까요?"
넌지시 물었다. 재민은 대답이 없다. 이미 게임과 일체화 되었다. 피아식별이 불가한 동물의 숲 주민이다. 아마 운동광 속성이겠지. 제노는 한숨을 쉰다. 이래서 부모님이 아이들한테 게임기를 안 주는 거구나. 나이만 따지면 저 사람이랑 우리 엄마 나이 차이가 나보다 더….
………
생각치 않기로 했다.
재민은 소파 등받이에 거의 녹은 채 게임에 집중한다. 끈도 안 맨 가운이 그의 복부를 언뜻 드러낼 정도로 밀려 올라갔다. 제노가 제발 이거라도 입고 있으라고 억지로 걸쳐준 옷이다. 속옷차림이 심란해서 입혔더니 가운 차림도 만만치 않았다. 대충 걸친 옷가지가 부푼 가슴팍에 걸리적거렸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는 전광판처럼 둘러진 엠포리오 아르마니의 요령없이 단단한 폰트.
재민은 제노가 집에서 즐겨 입는 바지를 대체로 답답해했다. 이런 걸 어떻게 입고 자. 통 좁아서 깝깝시럽게. 제노는 홈웨어로 재질을 따져도 통을 따져본 적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빠 반바지를 들고 왔다가 한소리 들었다. 지금 내가 암만 아저씨래도 서른인데 지금 아빠 바지를 주는 거냐. 으이? 제노에게 꿀밤을 놓는 시늉을 해놓고는 그냥 턱 소파에 앉아버렸다. 아르마니 드로즈 한 장 걸치고.
전부터 의심했지만 이제는 확신이 들었다.
이 남자는 제노가 남쪽인 걸 (너무하게) 신경 안 쓴다.
남자 생식기는 뜨끈해선 안 된다는 주의인지 옷으로 감추려는 낌새조차 없다. 편안하게 간격을 둔 무릎 사이로 자꾸 기어들어가려는 관심을 이제노가 어떻게 막을 것인가. 제노는 다시 재민의 무릎 뼈를 응시한다. 의지와 상관없이 시선이 자꾸 실거미처럼 기어 올라갔다. 시선에 손이나 발이 달렸다면 재민은 못 견디게 간지러워 했을 거다. 그 손끝이 아주 잘폭하고 끈질기게 그를 흝었을 테니까. 복 달아나게 들들대는 무릎이나. 두 덩어리로 갈라진 허벅지. 제노의 것보다 채도가 더 짙은 살갗. 그리고……
올해 결혼 성혼율이 19만 건으로 역대 최저 비율을 기록했습니다. 황혼 이혼은 10년 새 두배 이상 증가했는데요. 요즘은 외도나 폭행 같은 사유보다 성격차이나 입장 차, 소통 부재 등을 원인으로 이혼에 이르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어느샌가 다시 불온한 시선으로 그를 훑고 있었다. 귓가를 매만지며 괜히 게임 화면을 건너다보았다. 어떻게 플레이하고 있나 봤더니…… 뭐지? 제노는 잠시 눈을 의심했다. 혹시 동물의 숲에 행성충돌이라도 있었던 건가? 자신이 길을 따라 아름답고 균일하게 가꿔놓았던 꽃밭이 있던 자리가 쥐 파먹은 듯이 쑥대밭이었다. 황금 장미는 다 사라졌으며, 밭을 뒤집어놓은 자는 구덩이를 도로 메워놓는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입이 벌어진 제노를 두고 화면은 명랑하게 이동한다. 제노는 머지않아 꽃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깨달았다. 심어도 꽃이 다시 자라지 않는 해변가. 납치당한 황금장미들이 한 텐트를 요새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나름 미감이랍시고 열 맞춰서 겹겹이 심어둔 열정이 엿보여 더욱 보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배치였다. 재민의 캐릭터가 텐트에 들어갔을 때, 제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니, 텐트에 옥좌는 왜 갖다 놨어요?"
5평도 안 되어 보이는 텐트에 거대한 옥좌가 비좁게 낑겨 들어가 있다. 동물의 숲에서 제일 비싼 아이템을 사느라 ATM 잔고가 0원이었다. 처음 보는 아이템이라 샀다는 뻔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이 분수에 맞게 돈을 써야죠."
"몰라 난. 있으면 다 써버려야 돼."
"황금 장미는 왜 저렇게 집 주변에 다 심어놨어요?"
"보살이 나 주변에 황금 많이 두라더라. 사주에 금이 없다고."
"집은 사주에 물이 없어서 해변에 지었나?"
"아니. 오션뷰가 죽이잖아."
이 사람. 인생을 게임처럼 사는 거로 모자라서 게임도 인생처럼 살고 있다… 제노는 도저히 용서 안 되는 미학과 난잡함의 섭리 속에서. 제노는 게임기에 바짝 붙어서 목청을 올려가며 훈수를 뒀다. 어느덧 바짝 몸이 붙어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로.
나무는 왜 싹 다 밀어놨어. 그거 과일나무란 말이에요.
아니. 나무 좀 베면 어때서. 심으면 또 자라잖아?
이거 디자이너들한테 보여주면 다들 고혈압으로 쓰러져요.
숲이잖아, 숲. 숲을 누가 숨 막히게 다 정돈하고 앉았어? 누가 잠실 아니랄까봐…
남자의 중얼거림이 속을 따끔하게 찌른다. 제노. 화면에서 시선을 뗀다. 재민도 그를 따라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치고서야 팔이 바짝 붙을 정도로 거리감이 가까웠다는 걸 알았다. 재민이 뒤늦게 한 짬새 물러났다.
"…잠실은 싫어요?"
ᅠ이 순간 제노가 떠올리는 건 일말의 메시지다. 상대방이 단박에 사라진 대화방이다. 역시 싫은 걸까. 숨 막히고 안 맞는다 생각하나. 나재민도 이제노가 그를 어떤 시선으로 훔쳐봤는지,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 알게 되거나. 이제노가 바지춤을 내리면 미친 씨1발 외치고 이제노의 인생에서 영영 퇴장할까. 일종의 전조처럼 그가 물러나 앉은 한 뼘을 내려다보았다. 물수능 뉴스를 들었을 때보다도 곱절로 가슴이 울울하고 답답해졌다.
그러나 재민은, 제노가 시선을 내리깔 때까지도 제노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검지를 세운다. 어설프게 세운 검지로 제노의 앞머리를 걷어 올렸다. 시무룩한 각도로 누운 눈썹이 드러난다. 제노가 다시 눈을 마주치자 재민이 고개를 까딱였다. 뭔 일 있으셔용? 잠실 깠다고 서운했어용? 제 발 저릴 때만 말끝 올려붙이는 게 약았다. 여우다.
"무슨 일이 있긴 했는데……."
"뭔데."
"아니에요."
"너 이거 나한테 복수하는 거지?"
"아니, 진짜 아니에요 말로 하기가 좀……."
"말로 못 하는 일이 어딨어. 그럼 제스처라도 해봐."
괜히 빼려다가 오히려 상대를 자극해버렸다. 시선을 쭉 내렸다.
"거길 왜 보지?"
"그렇게 입어놓고 안 보길 바라요?"
"아. 맞다. 너 게이지."
진짜로 까먹고 있었나보다. 제노는 띄엄띄엄 설명을 했다. 나흘 전 맨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객관적으로 큰지 작은지 모르겠어요. 학교 애들은 다 나보다 작았으니까. 그런데 물어볼 곳은 없고. 그랬는데 맨더에서 어떤 사람이 한번 봐준대서… 사진을 보내줬거든요."
"고추, 고추 사진을 보여줬다고?"
재민은 정말 '푸핫'하고 웃었다. 얘 진짜 큰일 날 애네… 뭔 겁대가리가 이렇게 없어? 허파가 홀쭉해지도록 웃는 그 앞에서, 제노는 뜨거워지는 목덜미에 괜히 손등을 댔다. 자기도 보여 달라고 킬킬거리는 놈을 보면 볼수록 명절날 유독 얄밉던 작은 삼촌이 생각나 패주고 싶기까지 했다. 웃음 끝이 끌끌 잦아든 재민이 소파 위로 턱을 괸다. 근육의 프레임이 유연하게 뒤틀린다.
"뭐라 욕하디."
"미쳤다고… 씨발이라고."
"그걸 가만 놔뒀어? 아저씨가 죽여줄까?"
"뭐 어떻게 죽여요… 누군지도 모르는데."
말끝에 웃음이 났다. 빈말인 줄 알면서도 조금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재민은 웃느라 지쳤는지 소파에 편안하게 등을 대고 눕는다. 마지막으로 작대기 내놓고 서열 놀이 하던 게 군대 다닐 때가 마지막이었나… 말꼬리가 뱀 허물처럼 늘어진다. 툭. 툭.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리면서. 편안하게 무릎 떨어뜨려 놓고. 누운 각도가 훤하다. 옆에 앉았을 뿐인데 제노의 시야로 재민의 머리부터 발끝이 다 들어온다. 누구 보라고 저렇게 활짝 드러눕지. 여긴 이제노밖에 없는데. 위에서 문득 질문이 들려왔다. 볼래?
"뭘요?"
"니가 아까부터 흘끔거리던 거."
"제가 아까부터… 네?"
"그 새끼한테 니 좆사만 보내고 끝났다며."
재민이 자신의 허벅지 상부를 툭툭 쳤다. 여기 비교분위 있잖아. 그렇게 말하는 재민의 입가에는 짓궂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 나름으로 건넨 위로인지, 회식 턱 내는 아저씨와 같은 호방함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동물의 숲 계정을 양도해 준 일에 대한 꽃값인지. 어떤 이유든 붙여야지만 간신히 이해가 가는 헤테로의 제안 앞에서. 냉정한 게이 소사이어티에 저온 화상을 입은 제노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고개를 저을 타이밍은 이미 지났는데 말이다.
그럴 마음도… 없었고.
WHY? 사춘기와 성
어떤 책이든 유독 너덜너덜해지는 건 성과 생식 파트다. 인류의 타고난 본성에 대한 증명이겠다. 왜 수능 영역에는 국영수만 있고 섹스 성기 발기 과목은 없는 걸까? 절대다수가 탐구하고자 하는 건 그런 분야일진대 말이다. 그랬으면 재수도 안 했을 거고. 자신의 이 학구열도 정당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성실한 공부로 아쉽게 흘려보낸 학창시절을 보답받기 위해, 제노는 탐구하기로 했다. 분야는 오춘기와 성. 대상은 이 남자로.
식탁보들은 왜 흰색이 많을까. 더러워질 걸 알면서도.
남자를 담은 목욕 가운이 식탁보처럼 벌어진다. 굴곡을 따라 구비구비 소파 아래로 늘어진 털섬유는 금방이라도 얼룩질 것처럼 깨끗했다. 속옷이 검어서 더 그렇게 보이나. 그런데 이제 보니 저 속옷, 아주 검은 것 같지도 않다. 정말 검었다면 그늘지지 않았을 테다. 저렇게 윤곽이 두드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지적 제노의 렌즈로 보이는 광경은 맨즈헬스에 버금가는 샷이었다.
어쩌다 엄마 아빠가 비운 집 소파에 낯선 아저씨를 넙죽 눕혔을까. 소파 앞에서 쭈뼛거리면서도. 제노는 결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손만 안 댔다 뿐이지 눈으로 샅샅이 보고 있다. 거진 엑스레이처럼. 눈썹까지 살짝 찡그리고.
보라색 똘추였던 남자는 목욕 가운에 드로즈만 입혀놔도 이렇게 색스러운 그림이 나오는 진국이었다. 보기만 해도 나쁜 짓을 하는 기분이 든다. 누구도 제노를 건드리지 않았는데 맥박의 별침이 마구 돌아간다. 플럼버 판타지를 수십 가지는 쓴 것 같은데. 막상 플럼버를 탐구해야 하는 제노는 함부로 손가락을 까딱일 수 없다. 비교… 비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도 벗어…? 긴장한 손바닥을 티셔츠에 문질렀다. 가로등처럼 멀거니 서있기만 하는 제노를 보던 남자가 하품을 쩍 한다.
"내가 돼지 머리니. 놓고 고사 지내게."
"그치만… 비교하라는 말이 잘. 어디까지 허락하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싫으면 빠꾸 할 테니까 게이 어린이 꼴대로 하세요."
나재민은 자신의 고추 보여주는 걸 무슨 조카한테 스마트폰 쥐어주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상황에 부적절한 호칭에 기가 막힌다. 머리로 스팀이 오르자 도리어 긴장이 느슨해졌다. 제노는 '꼴대로' 재민의 허벅지 곁에 앉았다. 남자가 눕고 남은 좁은 시트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고, 골반 위로 고개를 쭉 뺐다. 코끝으로 더운 비누 향기가 훅 끼쳤다.
재민은 턱을 괴고 제노 하는 짓을 빤히 쳐다보았다. 티비로 야구 보는 아빠도 딱 저 위치에 저 자세로 눕는데. 다르다. 완전 달라. 그는 제노에게 자꾸 아빠 아들 놀이를 시도하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아버지를 대입하기에 나재민은 너무 현역이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쩍쩍 갈라지는 근육이나, 드로즈 위로 두텁게 담긴 묵직함이나. 코 점막이 시큰했다. 소파 옆에 조금 더 바짝 붙어 앉았다. 허벅지 배면에 제노의 가슴팍이 닿았다. 남자의 허벅지가 훅 딴딴해졌다. 속옷 안에 담긴 형태를 눈으로 어루었다. 좌측수납… 끄트머리는 거의 골반까지 닿고 있고. 굵기도 좀 더, 두껍나…? 비교. 비교라는 걸 하려면 역시 제노도 벗어야 할까? 손을 뻗다가 남자에게 덥썩 붙들렸다. 고개를 들자, 아까와 같은 담담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무표정한 남자와 눈을 맞추고 물었다.
"벗기는 건 빠꾸예요?"
손목을 쥐고 있던 힘이 느슨히 풀려나갔다. 대답 없는 대답. 제노는 속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배꼽 아래부터 시작된 핏줄의 계곡은 속옷 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남자의 암묵적인 허락을 믿고 속옷을 들췄다. 담겨있던 묵직한 부피감이 턱. 제노는 숨을 참았다. 종종 맨더에서 좆사 요구하는 메시지가 왜 오는지 반 푼 정도 이해했다. 위로 볼 때랑 비교가 안 됐다. 현물은. 선명하고. 열기가 느껴지고.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을 돋웠다. 남자가 숨을 쉬느라 배가 오르내린다. 제노가 탐구하는 영역도 함께 느리게 오르내린다.
"나 담배 피워도 돼?"
"아파트라서 안 돼요.
"베란다에서도?"
"안 돼."
재민이 낮게 숨을 뱉고 입가를 매만진다. 무언가를 꽉 참는 표정이다. 담배를 못 피우게 한 게 상당히 곤욕인 모양이었다. 혹시… 만져도 돼요? 안 돼. 그럼 비교를 못 하는데… 눈으로 기억해두고 나중에 니 거 보면서 비교하면 되잖아. 재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군대에서 작대기 비교가 어쩌구 해놓고선. 그때도 이랬나. 눈으로 다린다는 느낌으로, 제노는 다시 재민의 복부부터 샅까지를 훑었다. 재민은… 살성이 참 다르다. 드러남을 전제로 한 외피처럼 거칠고 단단해 보였다. 곳곳에 툭툭 모가 져 있다. 고운 모래 둔덕 위에 바람이 인 것처럼 몸결이 뚜렷했다. 아랫배에 손금처럼 일어난 혈맥. 옅은 주름. 이정표처럼 금이 갈라진 배. 아까는 그늘이 많아서 못 봤는데, 지금 보니 그의 몸에는 이질적인 흔적이 있었다. 복부에 완만한 J자 모양의 상처.
"상처는 왜 난 거예요?"
재민은 어중간한 미소를 지었다. 교통사고 나서. 그의 운전 패턴으로 미루어 보건대 지극히 당연스러운 경위다. 제노는 잠시 본연의 목적을 잊고 흉터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자작나무 가지처럼, 하얗고 두꺼운 줄기에 돋친 가시들.
"사고가… 크게 났나 봐요."
"작진 않았지. 장기 하나 파냈어."
"헐. 어디요?"
"비장."
비장이 어디더라. 단박에 감이 오지 않았다. 어쨌든, 약지에 둘러진 흰 자국이 전부가 아니었다. 배에 이토록 선명한 상처를 한 그루 키우고 있었던 거다. 이 돌싱은.
ᅠ제노는 남자의 위로 거의 쏟아질 것처럼 몸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이 흉도, 반지 자국도 이 남자가 간직한 상실의 흔적일까. 그럼 이 곳은 비어 있을까. 손가락으로 쿡 찌르기만 해도 공명하며 우는 소리를 낼까. 이제 물건보다도 이 흉터가 더 흥미로웠다. 정말 이 나무뿌리 같은 금이 실재하는지 궁금해서. 어떤 소리가 날지. 어떤 촉감일지 궁금해서. 낚싯줄을 당기는 것처럼. 손끝이 아주 살짝, 도톰하게 도드라진 흉터를 덧그렸다. 이제노 스스로 닿았는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살그머니 스쳤을 뿐인데. 방아쇠를 당긴 양 손목 밑으로 덩어리가 힘차게 꺼떡였다.
…꺼떡?
"음. 난 이제 가야겠다."
그리고 별안간 울리는 수업 종처럼. 속옷이 싸악 올라가고.
"어어."
"왜. 왜. 무슨 일."
제노는 뒤늦게 퍼뜩 고개를 치들었다. 재민은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기로 했냐는 것처럼 단조로운 표정이다. 그가 가운 자락까지 여몄다. 옷의 섶들을 전개도처럼 전부 펼쳐놨던 게, 인체 탐험을 시켜줬던 게 까마득하게 없던 일인 척을 한다. 내 옷 건조기에 있지? 다 돌아간 것 같으니까 입고 간다. 닌텐도 값 넣어줄 테니까 계좌 불러. 오늘 일당은 까고. 목소리의 톤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지만. 제노가 고개를 기웃거리자 건조기에서 멋대로 옷을 빼 입고, 바지를 끌어 올리는 손에서 서두름이 묻어났다. 제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묻는다.
"방금 발기하셨어요?"
Rest. In. Pfuckkkkk
아……. 씨발.
*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는 행위. 그게 평생에 한 번만 보일 수 있는 진기이자 명기라고 들었다.
재민은 허물처럼 가운만 남기고 도망쳤다. 발기했냐는 물음에 반응은 버라이어티 리덕션. 3초 침묵하다가. 어. 맞다. 나 집, 야구, 야구 볼 시간이네. 답지 않게 말을 절다가. 현관으로 구를 듯이 달아났다. 신발 한 쪽 제노의 것을 잘못 신었다가 벗는 것도 다 봤다. 아니, 잠깐. 근데 계좌번호는 주셔야……. 말을 미처 끝맺기 전에 면전에서 현관문이 쾅 닫혔다. 제노가 다시 조용히 문을 열었을 때, 아파트 층계로 거친 발소리가 왕왕하게 울리고 있었다. 여기 18층인데……. 멀쩡한 엘리베이터를 두고 뚜벅이로 내뺄 만큼. 그 폭주족은 당황한 걸까.
제노는 당근마켓 안심 번호로 전화를 했다. 첫번째. 씹혔다. 두번째. 무시당했다. [전화 안 받으면 신고하겠습니다.] 어플 채팅으로 차분히 메시지를 보내고서야 상대가 유선 상의 부름에 응했다.
"그렇게 가버리시면 어떡해요. 거래 덜 끝났잖아요."
[뭐가. 뭐. 뭐가 덜 끝났는데.]
"닌텐도. 계좌번호도 안 드렸어요. 그냥 가져가면 절도인데……"
[지금 할게. 지금. 이거 얼마랬지?]
"구천구백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 원이요."
[거파해. 딴 데서 산다, 그냥.]
"딴 데서 안 사실 거잖아요. 지금 저희 집에 그거 돌려주러 올 자신 있어요?"
[…….]
전화상으로 침묵이 추처럼 흔들린다. 제노는 거실 위에 허물처럼 벗어진 가운을 집어 올렸다. 아직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식탁보…… 조용히 침을 목 너머로 되밀었다. 나재민. 스물 초입에 총천연색을 선물한 남자. 흔한 당근마켓 진상이었다가. 폭주족이었다가. 깡패였다가. 일당만 주면 집도 고쳐주는 남자. 그가 이제노를 보고 발기했다. 인과가 그를 봐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보내면 재민은 영영 제노의 인생에서 꺼져버릴 게 뻔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5년 주기로 고간 깊이 후회할 것 같다. 제노는 가운을 보며 고민한다. 제노의 전두엽은 아직 현역이다.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어떻게 해야 꼬리 자르고 도망간 이 남자가 얼굴 한 번 더 보여줄지 궁리했다.
알았어요. 닌텐도 현금으로 안 받을게요. 대신 다른 거랑 교환해요.
…너 또 반지 달라고 하려고 그러지. 집착하지 마. 징그러워.
징그러운데 왜 발기하셨…
뚝.
전화가 끊겼다. 당황하지 않았다. 뭐 놀라야 당황을 하지. 뭘 좀 잊고 있으시나본데. 제노도 알았다. 안전운행은 본인만 안일하게 앞으로 간다고 되는 게 아니다. 차분히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가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재빨리 차 대가리부터 끼워 넣었다.
"저 운전 연수 해주세요."
최악의 선생님
놀랍게도 제노는 면허가 있었다.
내년엔 면허 따기 더 어려워진다는 괴담은 철마다 돌아왔고, 다들 수능이 끝나기 무섭게 운전면허 학원으로 달려갔다. 제노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크리스마스 전날 간신히 실기와 도로주행에 통과하며 면허를 따놨다. 차는 없어도 신분증이 두 개여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었다.
재민은 지극히 단순했다. 폭주와 카페인처럼 제로백과 급정거가 빨랐다. 운전 연수를 운운하자 원래의 뻔뻔한 목소리로 돌아와 거절을 흉내 냈다. 넌 내 흉터를 보고도 배우고 싶냐. 나한테 배우면 양아치 운전밖에 못 해. 나 봤지. 초보 눈높이에 맞춰줄 인내심도 없고 도로에서 갖춰야 할 매너도 몰라. 구구절절 유수처럼 길다. 제노는 재민이 사유를 읊는 동안 멍하니 가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으니까. 한 큐에 승낙하면 오히려 제노가 당황했을 테니까. 말 끝났어요? 그리고 듣는 동안 미리 준비해둔 반박을 읊었다.
짜증 언제는 안 냈어요? 매너 온도도 처음부터 36도 안됐잖아. 보시는 바와 같이 배우는 머리가 없지는 않아서요. 기계도 잘 다루는 편이고 운전면허도 한 번에 땄어요. 실전에 필요한 약간의 스킬만 알려주세요. 학원 오며가며 운전해야 할지도 몰라서. 운전학원에서도 차선 두 개 한 번에 빠지는 깡은 안 알려줄 것 같아서요. 재민은 다시 침묵했다. 움직이기 직전인가. 한 번 툭 치면 넘어갈 상태인가. 남자를 다루는 법에 대해 어느 정도 선행학습이 된 제노는 넌지시 요점 노트를 꺼내들었다.
'혹시… 또 발기하실까 봐 그래요?'
금주의 학습 내용: 과속하는 차의 핸들은 조금만 틀어도 크게 돌아간다.
제노는 침묵 위로 셋을 센다. 아주 천천히. 하나. 둘. 셋. 완전히 수를 세기도 전에 전화 너머의 재민이 헛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제노는 숨죽인 채 조그맣게 웃었다.
시간당 오만원. 나중에 합산해서 받는다.
다음 안내 시까지 직진입니다.
솔직히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방법이 있었다니. 자연스럽게 드라이브에 장거리 여행까지 갈 생각에 한참 뒤척였다. 어디로 갈까? 구리? 남양주? 욕 나오게 차 많은 서울에서 스파르타 도로 주행일수도. 아니면 혹시, 재민이 지금 살고 있다는 인천에 갈지도 모른다. 아파트는 팔았다던데. 원룸에 사나? 자취하고 잘 취하는 아저씨? 제노는 우선 10시간 풀 수면을 했다. 기대는 기대고 잠은 잠이었다.
다음날. 재민은 그들의 첫 행선지를 밝혔다.
"전주 찍고 온다."
누가 첫 운전을 전주로 가요?
장장 세 시간 반에 걸친 운전이었다. 핸들을 꽉 쥐다 못해 어깨가 결리기 시작했을 때, 제노는 자신의 선택을 아주 조금 후회했다. 재민이 경고한 대로, 재민의 인내심은 운전 거리와 시간에 반비례했다. 핸들은 제노가 쥐고 있는데, 차선의 흐름은 재민에게 넘어갔다. 일전의 의기양양한 마음을 무참히, 호되게 대갚듯이.
여기서 차선 바꿔. 다시. 깜빡이 넣고. 아냐. 그쪽 차선 아냐. 제한 속도는 안 보냐? 네비 믿지 마. 표지판을 봐. 대가리 거침없이 밀어넣어. 저 호로 새끼 보이지. 운전 저렇게 하면 안 된다. 저거 부모가 없어서 저래. 저렇게 살다 칼 맞고 뒤질 거야. 어휘는 하나하나 작두날처럼 시퍼런데 목소리는 조근조근하다. 초보를 가르친다는 마음과 양아치 근성이 합의를 제대로 이루지 못한 컬라보였다. 제노는 길바닥에 차를 굴리는 게 최초인 어린애였고, 재민은 그 어린애를 마음껏 굴렸으며.
"혀, 형. 여기 차선이 없어요!"
"어. 그럴 땐 그냥 뒤에 붙으면 돼. 남들 따라가."
"제가 맨 앞 됐는데요!"
"음… 그땐 그냥 잘 해. 삘 알잖아. 대충 이쯤이 중앙선이겠거니…"
결국 정안 휴게소에서 재민과 제노는 자리를 바꿨다. 운전석 밖의 세상이 이렇게 안전하고 쾌적했다니. 조수석에서 뻗어버린 제노를 두고 재민은 여유롭게 톨게이트로 진입했다. 고상한 기와 모양의 현판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장장 네 시간의 운전이었다. 낭만은 없었다. 비로소 핸들을 쥔 재민이 승기를 잡았다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전주식당 #전주맛집
전주는 어딜 들어가도 맛집이야. 맛의 본고장이지. 재민은 제노를 데리고 웬 콩나물 국밥집에 차를 댔다. 콩나물 국밥은 서울에도 있잖아요. 서울 콩나물이랑은 다르다니까. 자꾸 깍쟁이 티낼래? 야. 이런 식당은 대파 하나도 달라. 도시 대파는 국에 넣으면 흐물자지처럼 물컹물컹해져서 우울하거든? 근데 시골 파는 끓여도 심이 살아있어. 딴딴해.
"가끔은 형이 저보다 더 게이 같이 말하는 거 아세요?"
"게이 같이 말하는 게 뭔데."
그들 앞으로 뜨거운 국밥이 놓였다. 재민이 지껄인 허튼 소리 때문에 괜히 국밥에 들어간 대파가 신경 쓰였다. 한 숟가락 떠본 후엔 어느 정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삭했다.
"어때. 나한테 계속 연수 받고 싶어?"
재민이 히죽거리며 묻는다. 역시 고도의 괴롭힘이었던 거다. 돈 받고 어린애 괴롭히면 좋아요? 어 좋아. 잊고 살던 운전의 재미가 막 용솟음 쳐. 그런다. 참나. 재민이 계란 한 알을 터뜨린 국밥 속을 신이 나서 휘저었다. 제노를 이겨서일까. 아니면 정말 콩나물 국밥을 좋아해서일까. 어제 술 먹고 올 걸. 맨 속에 먹는 게 아쉬운 맛이다야. 용암처럼 뜨거운 국물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떠 마셨다. 뜨거움에 대한 역치가 참 높은 사람 같다. 여러 모로.
"왜 하필 전주로 온 거예요?"
한숨을 쉬며 물었다. 재민은 국을 뜨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전주가 왜. 와이프 첫 운전도 여기로 왔어."
“…….”
"그때도 내가 운전 봐줬거든."
수저질이 점점 느려졌다. 어지러운 뚝배기 속을 들여다보는 재민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다. 마치 그리운 날을 어루만지는 목소리였다. 그때 와이프가 고속도로를 잘못 들어서. 그런데 통 핸들을 못 꺾겠다고 그래서. 제노는 이렇다 할 대답 대신 훈김 나는 그릇 속을 수저 끝으로 긁었다. 여기가 그때 왔던 데예요? 아니. 와이프는 국밥보다 찜을 더 좋아해서. 아구찜 집 찾아갔지. 갓길에 차 대고. 그리고 수저질이 완전히 멎었다.
입맛이 바닥을 쳤다. 아구찜 맛있었겠네요. 어. 근데 여기 맛있지 않냐? 나는 전주서 여기 국밥이 제일 맛있던데. 물론 맛있었다. 국물 몇 수저를 뜨는 것만으로 배 속이 빠듯하게 뜨거워졌다. 위 안쪽을 욱찌르는 이 감각이 물리적인 열기인지 서운함인지 헷갈릴 정도로. 이 남자는 도무지 중고가 아닌 게 없다. 세상 곳곳 차로 못 갈 곳이 없어 보이는 주제에 드라이브 코스까지 중고에 되팔이다. 제노는 운전도, 전주도, 이런 콩나물 국밥도 처음인데. 하지만… 이런 거 가지고 서운함을 운운하는 거. 주제넘은 어린애 같았다. 재민도 그렇게 느낄 게 뻔했다. 얘 왜 이래. 하고 또 영영 도망가 버릴지도 모른다. 제노는 애써 느릿한 수저질로 울큰한 마음을 감췄다.
"와이프한테도 이런 식으로 가르쳐줬어요?"
"당연히 아니지. 훨씬 젠틀하게. 애정을 담아 가르쳐줬지."
"그렇구나…."
"거렇줴."
"와이프한테도 운전 가르쳐주다가 발기했어요?"
풉. 콜록콜록. 밥을 먹던 재민이 급하게 사레가 들렸다.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어내는 그에게 차분히 물을 따라서 건네주었다. 제노는 그가 입가를 마저 닦을 동안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대답을 기다렸다. 수문장처럼. 어떤 대답도 허투로 넘겨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컵을 움켜쥔 재민이 되물었다.
"뭔 발기?"
"그때 저한테 발기하셨잖아요."
재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 씻으러 가야겠다. 밥풀 묻었어. 그러더니 현관 반대쪽의 화장실로 사라졌다. 제노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뭐. 여기는 전주인데. 나를 두고 집에 가기라도 하겠어. 이제사 좀 식은 국물도 떠먹었다. 콩나물도 씹었다. 과연 아삭아삭했다. 물렁자지와 거리가 멀다. 국밥을 반 정도 비우자 다시 어슬렁 나타난 재민이 자리에 앉았다. 아까의 동요는 흔적도 없이 씻어내고 온 표정이다.
"밥 다 먹었냐? 슬슬 일어날까?"
"왜 발기 얘기 나오니까 갑자기 화장실 가요?"
"누가 발기를 했다고 그래. 난 원래 그 정도 해."
"갑자기 고개를 드시던데요?"
"남자는 하늘을 보고 걸어야 돼. 너도 기억해 놔라."
아 담배 피워야겠다. 다시 그가 벌떡 일어난다. 이번엔 출입문으로 도망친다. 테이블 옆 식당의 문을 밀고 나가려다 텅. 몸을 부딪친다. 이까짓 문에게 출입을 거절당해 황망하다는 표정으로 재민이 헛기침을 했다. 뭐야. 우리 갇혔어. 재민이 제노를 돌아보며 문을 두들겨도 밀어도 보았다. 제노는 고요히 일어나 재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없이 문 옆의 스위치를 눌렀다.
지이잉.
"지방 너무 무시하지 마요."
밀면 안 열리는 게 당연했다. 버튼 식 자동문이니까. 사람이 좀 주변도 돌아보고 그래야 할 텐데. 이렇게 앞만 봐서 어떻게 운전을 잘하지. …여기 돈 많이 벌었나 보네. 나 처음 왔을 땐 안 이랬는데……. 재민이 궁시렁거리며 바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 피우고 온다. 일갈하는 재민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재민이 문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제노는 어깨를 잘게 떨며 웃었다.
국밥집은 회전율이 빨랐다. 외진 길목에 있어 접근성이 좋지만은 않았는데도 손님과 국밥의 출납이 잦았다. 제노는 재민을 기다리는 대신 남은 국밥을 마저 비웠다. 재민이 담배를 다 피우고 오면 집에 돌아가려나. 재민 몫의 국그릇은 이미 비워진 지 오래였다. 저 정도면 식도에 국밥을 꽂아 넣은 수준이다. 이어 제노의 시선이 식기 옆의 휴대폰에 닿았다.
재민은 여느 또래처럼 휴대폰을 손에 달고 다니지 않았다. 켕기는 게 없는 가보지. 제노와는 다르게…. 주인과 같이 너무도 버젓이 놓여 있는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재민은 제노의 번호를 알고 있다는 게 기억났다. 사고 신고를 위해 멋대로 가져갔지. 그래서 제노를 울렸다. 근데 자기 번호는 알려주지도 않고. 상판이 빠갈난 기체를 보고 있자니 문득 재민이 자신을 어떻게 저장했을지 궁금해졌다. 살그머니 상체를 숙여 휴대폰 화면을 건드렸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화면이 켜졌다. 암호조차 안 걸려 있는 기본 배경화면이다. 정말 앞과 뒤가 똑같은 사람이구나.
다른 것은 궁금하지 않았다. 제노가 재민에게 어떤 수식언인지만이 알고 싶었다. 재민도 자신의 번호를 찾는 데 죄의식이 없었으니. 이 정도는 피장파장으로 괜찮겠지. 제노는 전화 앱에서 제 번호 열자리를 눌렀다. 번호 위로 저장된 이름이……
[잠실 신세경]
…….
우선 잠실까진 알겠는데… 신세경? 왜? 제노는 잠시 제 휴대폰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아무리 봐도 신세경은 좀……. 그냥 이제노다. 종이 같아도 목이 달랐다. 그렇다면 제노가 아는 신세경이 아닌가. 공부만 해온 제노는 연예인을 잘 모르니까. 충무로 느와르 단역 전문 배우 신세경 (48세) 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쥐고 있던 휴대폰이 갑자기 징 울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국밥 그릇 안으로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번엔 화면에 다 담기지도 않는 긴 수신자 명이 떴다.
[고랭지찰옥수수5kg만원현지직판…]
…찰옥수수?
제노는 한참 울리는 휴대폰을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앞과 뒤가 같은 사람이라는 감상은 정정하겠다. 의외다. 뭐랄까… 요리하는 사람은 역시 다르다. 제노 같았으면 옥수수쯤은 그냥 마트에서 샀을 텐데, 직판을 받는 성의까지 있었다. 새삼 재민을 새롭게 보는 사이 전화가 뚝 끊겼다. 이윽고 문자가 연달아 도착했다.
[짧게 통화 가능하실까요?]
[주소지 문제로 연락드렸습니다]
주소지 문제. 찰옥수수가 애먼 데로 가버린 걸까. 옥수수는 빨리 쉬는데. 문자 내용을 곱씹기도 전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제노는 고개를 쭉 뺐다. 재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담배를 보루로 피나. 빡쳐서 먼저 가버린 건 아닐 것이다. 전화가 여기 있으니까. 혹시라도 또 자동문을 못 열어서… 드드득. 손 안에서 진동이 오래 이어졌다. 한 번 울리는 전화는 무시할 수 있어도 두 번 울리는 전화는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망설이던 끝에 제노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이따 오면 전해주면 돼. 아까 형 없을 때 찰옥수수 업자한테 전화가 왔다고, 배송에 문제가 생겼다고…
[재민 씨?]
업자치곤 젊은 남자 목소리였다.
"네, 지금 재민 형이 자리에 없어서요… 찰옥수수 배송에 문제가 생겼나요?"
[네? 찰옥수수요?]
"네?"
[저 인혜 남자친구입니다.]
인혜. 남자친구. 아귀가 헌 퍼즐 조각처럼 단어가 맞물린다. 손바닥으로 식은땀이 고였다. 왠지. 받지 말았어야 할 전화를 받은 것 같았다. 전화기 너머로 제노를 두고 작은 대화가 오간다. 자리에 없다는데? 바꿔줘 봐.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 끝에 다른 목소리가 나타났다. 여보세요? 재민아? 겨울옷처럼 따뜻하고 상냥한 여자의 목소리. 형이 지금 담배 피우러 가서……. 제노는 말끝을 여물지 못 했다. 실수했다. 옥수수가 쉬어 터지든 말든 전화를 받지 말아야 했다.
[혹시 전화 받으신 분이 누구실까요.]
인혜. 그 이름을 머릿속으로 한 번 곱씹었다. 일순 날카로운 직감이 손톱 끝을 찔렀다. 여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전화를 받는 낯선 목소리가 누구인지 물을 수 있는 여자. 스스로를 소개하지는 않아도 될 만큼 가까운 재민의 지인. 반면에 제노는. 저는 그냥……. 말끝이 잿불처럼 사그라지었다. 대답으로 할 말은 자명했다. 제노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고, 대개 형편없었으니까.
"조카 같은… 애예요."
[아.]
짧은 대답. 궁금하지 않음이 자명한데 상대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제노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젓가락으로 식당 휴지를 문질렀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 재민의 전처에게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었다. 어중 뜬 침묵을 먼저 깬 건 상대편이었다.
[재민이는 잘 지내나요?]
잘 지내나요. 안부 인사. 모르긴 몰라도 그것은 전처만이 낼 수 있는 억양으로 느껴졌다. 염려인데. 보고 싶진 않고. 보고 싶진 않은데. 걱정은 되는. 재민이 줄기차게 퍼 올려 전시하던 추억들을 떠올린다. 그가 가는 곳마다, 짚는 장소마다 그녀가 빠지는 데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한 여자로 꽉 차있었다. 도무지 이제노로 덮어씌울 곳이 보이질 않을 만큼.
"잘… 못 지내요."
툭.
문지르던 휴지 끝이 찢어졌다.
"저… 죄송한데… 진짜 잘 지내는지 궁금하신 거예요? 아니면 상투적으로 묻는 거예요?"
[네?]
"잘 못 지내거든요. 재민 형이요. 아직 그쪽… 인혜 씨 많이 좋아하는 거 같아서요. 근데 이렇게 대답하면, 할 말 없으시잖아요. 남자친구도 이미 생기셨으니까, 달라질 것도 없는데…."
이런 말 하면 안 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앎과 이해는 동의가 아니다. 제노가 아는 것은 아주 단편적이고 일방적이다. 그러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지. 나라면 꽉 붙들었을 텐데. 손가락도 길고. 요리도 잘하고. 자지도 팔뚝만하던데. 낮에도 밤에도 상대를 배불려줄 남자 같던데.
재민이 해준 요리는 가장 사랑에 가까운 행위 같았다. 오로지 먹는 자의 기쁨을 위해 그럴 필요 없는 수고로음을 거쳐 맛을 배합하는. 마치 사랑의 말을 고르는 것과 비슷한 일. 성깔머리에도 없는 그런 일을… 제노 같은 어린애한테도 기꺼이 해주는 남자를 왜 당근 마켓에 다시 내놨을까. 내놓을 거면 소유권 포기를 완전히 하던가. 잘 지내냐고는 왜 묻지. 그 인사치레에 재민이 지을 표정을, 제노는 알았다. 재민이 그간 여러 번 보여주었으니까. 그래서 당신은 중고로 팔아버린 남편의 안부를 계속 묻나요. 제노는 몇 가지 의문을 삼킨다. 삼킨 후에 혓바닥에 남는 찌꺼기 같은 말은 하나다.
누군 갖고 싶어도 못 갖는데. 이것마저 입 밖으로 내지 않는데 큰 힘이 들었다.
상대측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재민 형이 잘 지낸다는 말 듣고 싶어서, 마음이 불편해서 물어보시는 거면. 그건 별로인 거 같아요. 잘 지낼 리가 없잖아요. 세상에 좋은 이별이 없다는 거, 아시면서 그렇게 묻는 건 좀. 재민 형한테 너무 잔인하잖아…"
"이제노."
제노의 손에서 휴대폰이 느리게 빠져나갔다. 시선이 한 박자 늦게 돌아갔다. 빼앗긴 휴대폰보다 그것을 문지르는 손이 먼저 보였다. 홀려서 연락하게 만들었던 투박한 손.
"내가 간격 지키라고 했지."
또 식어빠진 타이어 같은 눈… 재민, 주머니에서 꺼낸 무언가를 탁 테이블 위로 던진다. 데굴데굴 굴러온 작고 둥근 상자가 제노 앞에서 멈춰 선다. 제노는 멍하게 그것을 집어 들었다. 반지 케이스였다.
"그게 그렇게 갖고 싶냐? 가져."
제노는 목각인형처럼 어색하게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국밥집의 조명과 어울리지 않는, 까르띠에 러브링이다.
"너 같은 애랑 연애도 운전도 못 해 난. 빠꾸도 못 당기는 애 옆에 누가 타고 싶겠냐."
무엇에도 길 들지 않은 날 것의 눈깔이 천천히 제노로부터 돌아선다. 제노를 등진다. 그 와중에도 제노는 멍하게 생각한다. 나랑 연애할 생각이 있긴 했나. 난 그러자고 말 꺼낸 적도 없는데. 뭐야 그게. 그렇게 말을 해버리면 꼭. 기회가 있었던 것 같잖아. 그럴 수도 있었던 걸. 이제노가.
이제노가 다 망쳤다는 듯이.
"다 먹었으면 일어나. 집까지 태워줄 테니까."
재민이 겉옷을 챙겼다. 제노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저 그게 마지막 선심이라는 듯이. 계산대로 가는 재민을 보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카드를 꺼내는 재민의 뒤를 지나쳐 그대로 음식점에서 뛰쳐나갔다. 남자가 부르는지 안 부르는지는 못 들었다. 차키는 어차피 이제노의 주머니에 있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무작정 표지판을 따라 달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차창을 열었다. 바람이 시큰한 눈을 시원하게 말렸다.
'이제노.'
처음으로 이름을 불리는 순간이 이토록 건조한 로맨스는 없을 거다.
'그게 그렇게 갖고 싶냐? 가져.'
어떤 최악의 프러포즈에서도 그런 식으로 반지를 받는 사람은 없을 거다.
'너 같은 애랑 연애도 운전도 못 해 난. 빠꾸도 못 당기는 애 옆에 누가 타고 싶겠냐.'
결혼을 못 해서 다행이다.
이런 끔찍한 걸 첫 경험으로 남기지 않아도 돼서.
[경로를 벗어났습니다.]
인생이란 길에서 한 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게이라고 부모님께 말한 것도 아니다. 어플을 다운받았다고 문란하게 아무나 만나고 다닌 것도 아니다. 아직 딱지도 못 뗀 초보운전. 누구도 대신 핸들을 잡아주지 않아 이리 저리 비틀거렸다. 혼자 가는 길이라 남들 뒤에 붙지도 못했다.
[경로를 벗어났습니다.]
버진 로드를 걷는 누나의 뒷모습을 보던 순간, 제노는 눈을 크게 뜨고 깊은 심호흡을 했다.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행복을 한껏 들이켜 뱃속에 채우고 싶었다. 그래도 제노도 흉내 낼 수 있을 몇 가지 행복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반지를 나눠 가지는 일. 꼭 결혼반지는 아니어도. 재민이 반지를 고르는 모습을 몰래 상상했다. 상상일 뿐인데도 늘 얼굴 없는 여자가 재민의 곁에 있었다. 고작 그 정도 상상을 했을 뿐이다. 연애라니. 그런 건 꿈도 꾸지 않았다. 그냥 이제노는……
[경로를 벗어났습니다.]
인천에 가보고 싶었다.
그 정도는 데려가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 와이프랑 공동집필한 구질한 로맨스나 되읊으러 따라온 게 아니었다.
어느새 차창 밖으로 피처럼 붉은 노을이 진다. 끼어 들 차선 보고, 내비 보고. 긴장하는 동안엔 나재민 생각이 안 날줄 알았는데 긴장할 때마다 나재민 생각이 났다. 돌아가는 길엔 옆에서 윽박지르는 사람이 없어서. 이제노가 선택하는 것마다 하나하나 토다는 남자가 없으니까…. 제노는 신중하게 깜빡이를 켰다. 그리고 다시 오롯하게 내비게이션이 보여주는 길만 따라갔다. 원래의 이제노처럼.
조용하고 어둑한 도로를 달렸다. 그런 남자 사실은 별로다. 재민을 엄마한테 소개시켜주는 상상을 한다. 남자라는 걸 빼고 봐도 여러모로 달갑지 않은 사람이다. 입도 걸고. 퉁명스럽고. 나이도 많고. 이혼도 했고. 뻔뻔하기까지 했다. 배에는 어따 팔아먹었는지 또 비장이 없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 달리는 남자.
이번엔 소개시켜준 후를 상상한다. 제노가 재수학원에 들어간다고. 그 인간이 나를 기다려 주기는 하겠어? 아니. 애초부터 만나주지도 않을 거다. 됐다. 이제는 이쪽에서 사절이다. 스트레이트는 재앙이 맞다. 차 없이 오느라 고생이나 했음 좋겠다. 쌤통이다. 그런데 이제노는 뭘 기다리는 걸까. 내비게이션 대신 달아둔 휴대폰 위에 어떤 알림도 뜨지 않는 일로 차분하게 열이 오르고 있는 걸까.
반대를 만나라고 했다. 그런데 그럴 거면 발기는 왜 했어. 내가 장기 빈 곳 조금 만졌다고 왜 세워서 사람을 설레고 심란하게 만들었나. 아니. 전부 다 됐다. 솔직해지자. 제노는 그의 엑스가 부럽다. 반쪽도 모자라 하나밖에 없는 걸 빼줄 정도로 사랑받은 여자가 부러웠다. 그렇게 사랑할 줄 아는 재민이 부러운 것 같기도 했다. 제노는 그럴 용기가 없다. 알지도 못한다. 그릇이 모자란 것도 같다. 같은 성별한테만 발정하는 것도 분에 넘치는 일이라 가지고 있는 용기를 다 써버렸다. 150을 밟을 엄두도 못 내고, 닌텐도 반쪽을 주는 데도 혓바닥이 길었다. 그러니 그런 사랑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당연히 부러웠다. 반지를 갖고 싶다고 조른 건 그런 의미였던 거다. 다정하게 운전을 가르쳐주는. 못마땅한 시선을 받을 바에 손목을 붙들고 경로를 함께 벗어나줄 손을 달라고. 하지만 현실은 어린애의 고집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멋대로 넘어버린 선. 그러니까 재민은 제노를……
전화 받으신 분은 누구실까요?
맘에 드는 대답이 하나도 없었다. 당근마켓에서 만난. 고추 정도는 어떻게 얻어 본. 그냥 조카 같은… 어린애. 사실 발기도 나 때문이 아니었을 거다. 그냥 무릎을 치면 툭 발을 걷어차듯, 그런 반사 작용이었을지도 모른다. 재민은 현역의 팔팔한 남자니까. 그런 인간에게 이제 막 스물에 들어선, 뭣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쯤이야. 반찬거리였을지도. 제노는 그에게 손이 좀 많이 가는 어린애였던 거라고… 생각할 때.
갑자기,
눈앞으로 불쑥 끼어 든 차가 보였다.
제노는 곧바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럼에도 충돌을 막을 수 없었다.
진로 방법 변경 위반
퉁. 그 정도 세기로 앞 범퍼가 부딪혔다. 그다지 센 타격은 아니었다. 제노는 핸들을 움켜쥔 채 펄떡이는 심장을 누르기 위해 애썼다. 앞 유리로 상대 차주와 눈이 마주쳤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땐 상대가 뒷목을 잡고 차에서 내리던데. 앞 유리로 보이는 상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결코 젊지 않은 인상에, 안검하수로 쳐진 눈이 제노를 기분 나쁘게 훑는다. 마치 제노의 정보를 탐색하듯이. 그 결과에 따라 어떤 자세를 취할지 계산하는 시선이다.
기분 나쁘다.
1분이 천 년처럼 흘러갔다. 제노는 용기를 내야 했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차 문을 열고 다가갔다. 상대 차는 한 번에 두 차선을 건너던 상태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제노가 탄 아반떼의 앞 범퍼는 멀쩡했지만 상대 차는 약간 찌그러졌다. 이건… 도대체 누구 과실이지? 분명히 끼어 든 건 상대 차였는데, 모양새만 보면 제노가 친 것 같아서… 우선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기계처럼 운전석으로 다가갔다. 앞 유리를 통통 두드리자, 상대 운전자가 차창을 내렸다. 그는 웃고 있었다. 여전히 기분 나쁜 방식으로.
"아니이… 들어오는 거 봤으면 멈췄어야지. 뭐 하는 거야?"
제노는 아… 짧은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그의 말투에는 이미 모든 계산이 끝나 있었다. 이제노를 공격할 모든 태세가 갖춰져 있다는 게 느껴졌다. 운전석을 열고 내린 남자는 등산복 같은 옷의 자크를 턱 끝까지 채웠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푹푹 한숨을 쉰다. 제노 면전에 대고.
"에이 씨 참… 내가 들어오는 거 안 보였어요? 거기서 움직이면 어떡해. 어?"
"저 브레이크 밟았어요."
"움직였어. 움직이는 거 내가 봤는데? 봐요, 내 차만 찌그러진 거. 뭣하면 경찰 부르던가."
묘하게 반말과 존대를 오가는 말투. 당당한 말투에 밴 은근한 무시. 내가 깜빡이 켰는데 학생이 밟았잖아. 학생이 속도를 줄였어야지. 에이 참. 자꾸 혀를 차고. 한숨을 푹푹 쉬고. 어리네? 학생 같은데? 운전면허증 보여줘 봐요. 나이를 깔아뭉개고, 무엇을 요구하고. 그게 지극히 당연한 절차라는 양. 권리라는 양. 내밀어진 손앞에서 제노는 새하얘진 머릿속을 정돈하기 위해 애썼다. 진짜 면허증을 줘야 하나? 이럴 땐 어떡하지? 내 차가 아닌데. 그게 문제가 될 수도 있나? 제노가 어리까는 사이 상대는 벌써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보험사에 알리는 모양이었다. 근데 이제노는 모른다. 이 차가 어떤 보험에 들었는지. 블랙박스가 있긴 한지. 심지어… 이 차의 진짜 주인이 지금 어디 있는지조차.
"일단 저기 농협 보이시죠? 거기로 차 뺍시다. 여기는 위험하니까."
제노는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데. 상대차가 먼저 출발했다. 따라서 급하게 차를 탔다. 나재민의 차는 주인을 닮아서 시동 한 번 쉽게 걸려주지 않았다. 구식 차키를 달각이는 동안 뒤에서 누군가 계속 빵빵거린다. 요즘 시동은 다 스마트키로 건다는데……. 눈이 시큰했다. 뿌얘진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을 때 간신히 시동이 걸렸다. 옆이 약간 찌그러진 차의 뒤로 얼른 붙었다. 사이드 미러에 제노의 모습이 되비친다. 꼴사납게 울고 있는 어린 초보 운전자.
눈물이 턱을 따라 떨어졌다. 제노는 눈물을 닦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고, 그냥 턱 끝에 맺히는 물기를 둔다. 왜 이러지. 잘 모를 땐 뒤를 따라가라고, 나재민이 가르쳐준 대로 하고 있는데. 왜 모든 게 잘못되어가는 기분이 들까. 왜 다 망치기만 하는 걸까. 그런데. 그런데 왜 그게 다 내 탓이 되나. 어른들은 왜 조금도 그를 기다려주지 않을까. 분을 못 이긴 울음이 가슴팍에서 헐떡인다. 클락션을 마구 때리고 싶었다. 한 번 봐 줘요. 봐달라고요. 당신들한테 당연한 걸 나한텐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어떻게 옳은 선택만 하라고. 처음부터 능숙한 사람이 어딨어요. 나는 초보운전인데. 당신들도 반드시 거쳐 왔을 시기를 살고 있을 뿐인데. 당신들이 세월 어딘가에 떨어뜨린, 당신이 잊어버린 처음이 바로 나인데.
남자가 가리켰던 농협의 코너를 돌았을 때. 코를 훌쩍이던 제노의 시야로 작은 메모지가 보였다. 앞 유리 바깥에, 심지어 구석에 손바닥만 하게 붙어있어서 여태 인식을 못했다. 누구 보라고 저렇게 안 보이는 곳에 붙여놨을까. 차 안에서 보면 뒤집혀 보이는 메모. 제노는 휘갈겨 쓴 악필을 천천히 읽었다.
전화하면 차 빼줌
전화를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리 선택이 있었을까.
갓길에 멈춰선 아반떼 안. 울적한 신호음이 도미노처럼 넘어간다.
Rest
In
Phone
[뭔데.]
…….
[…남의 차 아리랑치기 해놓고 왜 니가 우냐고.]
2 round
상대 차주 보험사는 사고 난 지 10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너무 빨리 도착해서 어디 대기타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 이후로 그들은 제노를 배제하고 자신들끼리 소근소근 대화를 나누었다. 사고를 낸 차주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제노에게까지 넘어왔다. 재민과 달리 쩐내가 진동하는 냄새가 맡기 싫었다. 재민은 무슨 담배를 피우지… 잠시 현실 도피적 생각을 하던 제노는 휴대폰을 다시 확인했다. 5분 전 전화를 마지막으로, 다음 연락은 없었다. 한숨을 쉬었다.
한 사람에게는 몇 가지의 구실이 요구될까. 사람 구실. 아들 구실. 학생 구실. 어른 구실…. 제노는 그러한 사회적 구실에 별달리 저항하지도, 적극적으로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가 저항한 구실은 단 하나였을 뿐이다. 남자 구실. (이라는 말에 내포된 시스 헤테로 유성애자틱 인생 계획) 그게 그렇게 큰 반항이었나? 고작 한 번이잖아. 딱 한 번. 손이 섹시한 남자를 만나보고 싶어서. 여기 저기 다 망가진 닳아빠진 후다라도 괜찮으니까. 이제노가 좋아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한 번만 만나보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던 건데. 어쩌다 일이 여기까지 왔을까… 보험사랑 대화를 나누며 힐끗힐끗 이제노를 쳐다보던 차주는, 이야기를 다 끝냈는지 이쪽으로 걸어온다.
"많이 안 다치셨어요?"
아까와는 영 딴판으로 사근한 말씨였다. 보험사한테 코칭을 받았는지, 그럼에도 느물느물 사람 깔보는 태가 여실하다. 제노가 이 사태를 똑바로 대처할 능력이 없다는 걸 확신한 모습이었다. 제가 볼 땐 이거 뭐 내 차만 찌그러진 것 같고, 학생도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데. 내가 그쪽 차 움직이는 거 분명 봤거든. 블랙박스 좀 떼 가서 봐도 되나?
분한 건 상대가 깔보는 대로 제노는 이게 처음이고 대처할 방법을 잘 모른다는 거다. 블랙박스…. 힐끗 차를 돌아보고 망설였다. 함부로 상대에게 넘겨줘도 될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까 전화했을 때 재민이 분명 자기 오기 전엔 아무 것도 하지 말랬다. 가만히 기다리고 상대 잘 잡고만 있으라고 했는데. 어쩔 줄 모르는 사이 허락도 없이 차주가 운전석으로 다가갔다. 어어. 뭐하시는 거예요. 제노는 반사적으로 차주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생각보다 세게.
"아야야! 뭐야!"
"여, 여기 얌전히 계셔야 해요."
"아, 아파! 이거 폭력이야 지금? 어? 나 진짜 경찰 불러?!"
한 놈은 소리 소리를 지르고. 한 놈은 죽자고 매달리고 있을 때. 귀청이 떨어지도록 커다란 클락션 소리가 울렸다. 울림통이 완연히 다른 사납고 공격적인 소리다. 제노와 차주는 동시에 경적의 발발지를 돌아본다.
어둑한 아스팔트 차선에서 홀로 독보적인 색감. 차체가 낮아 맹렬히 기어오는 듯한 걸음새의 노란 스포츠카. 제노는 한눈에 차종을 알아봤다. 아이코닉할 정도로 비싸고 좋은 차. 일전에 누나가 여자로서 한번쯤 몰아보고 싶은 (그러나 취향과 가격 상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드림 카라고 떠들던 차였다.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 이름값대로 성난 황소처럼 배기음이 그릉거린다. 그 값비싼 차가 정확히 제노 앞에 물뱀처럼 멈춰 섰을 때. 제노는 아파트를 팔았다는 남자의 말을 떠올렸다.
차 문이 열린다.
운전석에서 구두가 뻗어 나온다. 반짝이는 듀퐁 구두가 아스팔트를 밟고. 차주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한, 초면의 남자가.
"어~ 여기 맞지? 이제노?"
…누구세요?
왠지, 딱히 개연성은 없지만, 분위기상 당연하게도 나재민이 내릴 줄 알았던 제노는 어중간하게 웃음을 걸친 그대로 어색하게 상대를 쳐다보았다. 안양 1번가에서 자주 보일 것 같은 남자가 껀드럭대며 제 차를 퉁 쳤다. 야! 다 왔어 인마! 그만 일어나! 반대편 보조석 문이 딸깍 열렸다. 납작한 람보르기니 차체 위로 불뚝 솟는 풍성한 정수리. 이번엔 제노가 기대하던 그 남자가 맞다. 슬리퍼가 바닥을 끄는 소리. 지익. 직.
이번에도 삼선 쓰레빠는 제노 앞에 정확히 주차된다. 이제노는 소리 죽여 탄식한다. 어떻게 저런 패션이.
똘추가 아니었다. 발에는 삼선인데 위로는 세미 정장을 쫙 빼입은 남자. 마치 무릎 아래로는 안 찍히는 방송을 준비하는 출연자처럼, 신발 하나만 완전히 따로 노는 차림새로. 람보르기니를 택시처럼 타고 온 나나가 하품을 쩍 하고 섰다. 끈덕진 잠기운에 범벅된 눈깔이 곧바로 제노에게 꽂힌다. 그는 자길 태우고 온 삐끼를 향해 두툼한 봉투를 던졌다.
"카풀 땡큐."
"자주 이용해."
부웅. 람보르기니는 도착했을 때와 같은 속도로 다시 그 자리를 떠났다. 이제 이곳에 남겨진 건 아반떼. 상대 차주.
그리고 나나와 철철이.
그의 눈이 현장을 훑는다. 찌그러진 상대 차 옆면과 제노의 차. 직직 끌리는 슬리퍼가 곧바로 제노에게 직진한다. 제노의 운동화는 움찔 한 걸음 물렸다. 아까 식당에서 본 식어빠진 타이어다. 너무 뜨거운 것보다 차가운 것도 김이 난다. 금방이라도 하얀 연기가 올라올 것 같은 차가운 분노 앞에서, 제노는 더듬더듬 변명을 주워 삼켰다. 저 사람이 갑자기 차선을 두 개씩 넘어와서… 근데 전 분명 멈췄거든요. 저쪽에서 무리하게 들어오다가 박은 건데… 블랙박스 뺏어가려고 하고… 아까부터 말하고 싶던 것들이 줄줄 북받친다. 제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데 지금은 재민이 화난 표정을 지으면서도, 제노 말을 끝까지 듣고 있어서. 말끝에 소매로 눈가를 찍어 눌렀다. 아까 사이드 미러에 비친 자신의 우는 얼굴은 너무 볼품없었다. 그에게만은 그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분함을 천천히 삭혔다. 제노의 양 어깨를 감싸 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안 다쳤어?"
상식적인 질문이 들려온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김이 날 것처럼 분노한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차를 등지고 제노만을 바라보는 눈빛. 다가오던 서슬에 비해 얼마간 누그러진. 심지어 다정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GTA 임상 체험처럼 멋대로 차를 갈취했는데. 심지어 사고까지 냈는데. 염려되는 건 차나, 보험료 같은 게 아니라는 것처럼. 제노의 안위를 묻는다. 제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등신처럼 코를 훌쩍이며.
"네… 아악!"
대답하려다 어깨를 무지 아프게 쥐어 짜였다. 제노가 비명을 지르기 무섭게 재민이 버럭 성량을 높인다. 뭐가 안 다쳐! 아파? 여기? 여기 아파? (꽈악 꽉) 아… 아파요! 아! 눈물이 글썽해지고서야 겨우 제노를 놔준 재민이 천천히 상대 차주를 향해 돌아선다.
"당신, 이리 와 봐."
제노에겐 걸어 와놓고 상대는 오라고 부르는 싸가지. 잠시 멈칫하던 상대 차주가 뒷목을 문지르며 다가온다.
"아니, 차선 바꾸는데 아반떼가 살짝 치더라고요. 애가 운전을 잘 못하나본데, 내가 그냥 수리비만 받고 넘어 갈라니까…"
"지퍼 내려."
"예?"
"옷 지퍼 내리라고."
"아니 갑자기 무슨… 어?!"
망나니는 다짜고짜 얼 타는 차주의 점퍼 지퍼를 쥐어 당긴다. 죽 지퍼를 내리고. 킁. 코끝을 찡긋이던 재민이 씩 웃었다. 악당처럼.
"이 씨발 새끼 술 마셨네."
"뭐… 아니……."
"뭐가 아니야. 술 냄새 나는데? 너 이거 경찰 불러서 검사해봐?"
"아니, 하 참… 아니 이건 낮에 한잔 마신 거고."
"뭘 낮에 마셔요. 븅신아… 불법 차선 변경에 음주 운전이면 벌점이 얼마야? 제노야. 형이 저 새끼 차 뺏어줄까?"
"그런데 아까부터 왜 이렇게 욕을 합니까? 나도 좋게 끝내자고 이러는 거예요. 예? 거기 학생, 어디 봐봐. 많이 다쳤어?"
남자가 성큼 제노를 향해 다가온다. 그러나 제노가 몸을 빼기도 전, 어깨를 퍽 떠밀린 남자가 뒤로 비틀거렸다. 그를 밀친 재민이 목을 울려 웃었다.
"아, 나랑 얘기하시라고... 내가 얘 보호자니까."
슥 몸을 나서면서. 제노의 어깨는 제 쪽으로 콱 끌어당긴다. 팔 바깥을 움켜쥔 손. 그건 안도감보다 더 빠듯하게 아름 안으로 제노를 옥죄고 끌어안는 것 같은 감각이다. 단순히 재민이 제노의 보호자를 자처해서가 아니다. 재민은 정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제노의 과실이 100이라고 해도. 속도를 줄이지 않거나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 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제노의 편을 들어주다 못 해 블랙박스 정도야 동전 먹듯 가볍게 삼켜버릴 것 같다. 오로지 제노만을 위해.
사실 연수를 나오기 전. 재민이 꼬리처럼 가운을 남기고 튀었을 때. 흉터를 버튼처럼 눌리고 발기한 게 궁금해 제노는 비장이 뭔지 찾아봤었다. 비장은 늙은 적혈구를 내쫓는 장기였다. 꼭… 자기 같은 걸 잃어 버렸다 싶었다. 보통 사람은 비장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데. 비장은 왼쪽 갈빗대가 끝나는 부분. 그러니까 지금 재민이 제노를 붙인 곳. 그곳에 있었다. 고성이 오가는 와중에. 제노는 비로소 재민의 경계 안에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경계 속은 침입한 이에게 무소불위를 건네주고 마는 아우토반. 제노는 얼얼한 어깨뼈를 문지르며 사태를 관망했다.
"누군 좋게 안 끝내고 싶었는줄 아나. 이거 보니까 대인 접수 합의 안 한다고 질질 끌 것 같은 새끼야."
제노를 뒤로 숨긴 재민이 손짓을 한다. 경찰 불러.
*
남자는 살면서 세 번 우는데.
나는 두 번을 다 울었구나.
그래도 저 정도까지 추하게 울진 않아서 다행이다. 경찰서 취조실 유리로 보이는 가해 차량 차주를 바라보며 제노는 따뜻한 율무차를 홀짝였다. 곁에서 이미 맥심을 두 잔째 축내고 있는 재민은 경찰을 앞에 두고 귀를 후비는 중이었다. 아, 몰라 몰라. 난 이거 사고 접수할 거야. (상대 차주도 반성을 하고 있고…) 저 새끼 술 냄새 났다니까. 음주운전 이거 살인미수예요, 살인 미수. (그 부분은 저희가 검사를 해봤는데 알콜 수치가 아슬아슬해서…) 지금 검사해서 아슬아슬이면 사고 났을 당시엔 얼큰했을 거 아니에요. (저 분 말로는 선생님도 자길 쳤다는데…) 그거 구라예요. 증거 있어? 억울하면 진단서 떼 오라 그래. 됐고, 나 설득할 시간에 그냥 사고 접수하셔요. 나도 우리 교통과 순경님들 공사가 다망하신 거 아는데, 저거 가만 놔두면 사람 죽입니다. 세상에 좋은 일 한다 치고 좀만 수고해줍시다. 예? 지가 억울하면 마디모를 접수하든 뭐든 하라 그래. 시간도 많은데 어디 끝까지 가면 누가 뒤지나 보자. 똥고집에 무너진 건 원만한 합의를 바라던 경찰이었다. 미간에 내천 자를 새긴 조사관이 블랙박스 영상과 교통사고 발생상황 진술서를 가져가기 무섭게, 재민은 의자에 대충 걸쳐둔 마이를 집어 들고 일어났다.
아반떼는 경찰서 앞에서 얌전히 주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민은 제노더러 먼저 차에 가 있으라고 했다. 이번에도 튀면 죽는다고 엄포를 놨는데,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걸 이젠 알 것 같았다. 진짜 화난 모습을 몇 번이고 봤으니까. 아반떼 안은 난방이 다 식어 있었다. 제노는 보조석에 몸을 구기고 재민을 기다렸다. 오 분 뒤 운전석 문이 열렸다. 제노의 뺨에 따뜻한 캔 커피가 닿았다. 재민이 앉는 동안 각이 잡힌 정장이 바스락거리는 소릴 냈다. 그 차림새는 뭐예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재민은 한숨을 한 번 털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 없이 물기만 하는 반쪽짜리 매너는 여전했다.
"아까 그 전화. 우편물 받아가라는 전화였거든."
제노가 차를 들고 튄 뒤. 재민은 잠시 도둑맞은 얼탱을 되찾기 위한 줄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다행히 인천 폭주 연합인가 뭔가 하는 카페에 전주 사는 회원이 있었다고. 차를 빌려 타고 서울로 온 것이다. 제노보다도 훨씬 빠른 차를 타고, 훨씬 빠른 경로로 서울에 도착한 재민은 가장 먼저 가까운 백화점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옷을 샀단다. 인혜 씨 만나려고요? 아니. 걔 남친 만나려고. …남친 만나는데 왜 옷을 사요? 안 꿀리려고. 그러나 결정적으로 신발을 사기 직전 제노에게 전화가 왔다. 그리고 지금 여기.
"그럼 그 람보르기니는…"
"대학 동기. 걔 사촌형 차 뽀렸다고 자랑하길래 태워달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제노가 실수한 게 맞았다. 전화를 받은 것도. 뛰쳐나간 것도. …사고를 낸 것도. 시들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곁에서 빤한 시선이 느껴진다.
"진짜 안 다쳤어?"
"솔직히 민망할 정도로 멀쩡해요."
"안 다쳤어도 병원 가. 상대 과실 80이라 상대측 보험사가 돈 다 내줄 거야. MRI도 찍고. 재수 학원 들어가기 직전까지 그냥 한방 병원 가서 디비누워."
"입원은 좀…"
"왜?"
형 못 보잖아요. 대꾸 대신 캔 커피 바깥만 문질렀다. 부끄러워서. 표면 물기가 엄지에 묻어난다. 눈물 마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추운 곳에 갑자기 들이닥친 온기는 물체의 표면에 어떤 물기를 만들어낸다. 점차 난방이 채워지는 아반떼 안으로 눅눅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제노는 주머니를 뒤졌다. 아까부터 허벅지에 불편한 이물감을 전해오던 반지 케이스.
"전처 분한테 멋대로 말해서 죄송해요."
케이스를 내밀었다. 재민이 흘끗 그것을 보더니, 순순히 받아간다. 딸깍. 케이스를 열자 반지가 나온다. 얄쌍한 웨딩 밴드를 매만지는 투박한 손. 흐릿한 차 안의 조명을 양분 삼아 다이아가 열매처럼 반짝였다.
"그냥. ……네가 인혜랑 얘기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어."
하지만 지금도 그 반지가 재민과 안 어울린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반지를 돌려주는 까닭은. 반지보다 더 한 게 욕심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야의 초점이 이동한다. 손에서… 재민의 옆모습으로. 아직까지 주름이 좀 잡힌 짙은 눈썹과. 반지를 내려다보는 올리브 같은 눈동자. 전처를 떠올리거나 그 추억을 더듬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각도의 입매. 아무래도 이 반지를 가지고 있으면…….
"아직 사랑해서요? 아님 제가 형의 대변인처럼 굴어서?"
"너한테까지 묻히기 싫어서."
"…뭐를요?"
"글쎄……"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실연을? 하고 중얼거리고 큭큭 웃었다. 그가 눈가로 반지를 갖다 댔다. 완벽한 원을 그리는 반지의 한가운데로 눈동자가 정확히 들어간다.
"너가 벽 치냐고 물어본 적 있었지. 벽 친 거 맞아. 일부러 전처 흔적 자꾸 꺼낸 거 맞아. 나는 영원히 인혜한테 매여 있을 줄 알았거든. 근데 너랑 있을 때 인혜가 보이지 않으니까. 그래서 잊지 않으려고 자꾸 너와 나 사이에 인혜를 세웠는데."
“…….”
"인혜가 안 보이는 자리가 하나쯤은 있어도 될 것 같아…"
재민이 차문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차창이 느리게 내려간다. 경찰서의 전경이 보인다. 그 위로 둥근 달. 반지가 반짝이며 날아갔다.
이딴 거 사지 마. 너랑도 안 어울려.
가볍지만 너무 무거운 영원을 담고 있던 것이, 어딘가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던가. 제노는 운전석 차창 너머의 밖을 보았다. 재민은 반지를 던져놓고도 반지의 흔적을 보고 있지 않았다. 더 이상 캔 커피가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 이쪽 저쪽을 굴리며 제노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래서…… 진짜 저랑 연애할 생각 있었어요? 대답 대신 손 안에 들린 온기를 빼앗겼다. 자연스럽게 캔 커피를 빼앗아 든 재민이 한 모금을 축였다.
"연애는 무슨 연애야… 재수 학원 들어가면서, 결혼 적령기 지난 남자 고무신 신기려고."
"발기 시켰으니까 책임져야죠……."
"너는 아직도 그 얘기냐……"
그럼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제노는 차근차근 일련의 만남과 대화를 되짚는다. 반지도. 닌텐도도. 발기 얘기도 모조리 빼앗겨 할 수 없게 됐다. 제노가 재민에게 습득한 것 중 적용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정도 남았을 뿐이다. 들어오기 전에 깜빡이를 켜라는 아주 기초적인 매너. 이를 테면 심각한 이슈를 물어보기 전엔 손을 들라는 상식. 제노는 입술을 짓씹다 조용히 손을 들었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는 물어보기 전에 손을 드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있잖아요. 내가 마시던 캔커피 막 마시길래 든 생각인데.
"혹시 키스해도 돼요?"
재민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 기대도 안 했다. 짧은 침묵 끝에 제노는 다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섰던 재민은 손에 쥐고 있던 캔 커피를 기어 옆 홀더에 채워 놓았다. 엄마 걱정하시겠다. 집 가자. 상투적인 멘트와 함께 운전석에서 훅 몸이 건너온다. 맘대로 중간선 너머로 손을 뻗어 제노의 안전벨트를 당겼다. 잠금쇠가 걸리고 손 쉽게 몸이 묶였다. 눈이 마주친다. 원두 냄새가 흐리게 날 정도로 거리감이 가까웠다. 지나치게. 경찰서 앞에 환하게 빛을 태우는 가로등을 등지고, 농담기 없는 표정이 제노를 응시한다.
교회 머리맡의 마리아 상처럼 팔을 벌린 경찰서 앞의 포돌이가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노는 재민의 머리꼭지 너머로 흔들리는 플랜카드의 표어를 읽는다. 따뜻한 가슴으로 국민의 손과 발이 되겠습니다. 눈시울을 얕게 깜빡였다. 닿을 것 같았다. 속눈썹도. 아니면 다른 것도. 지금 가슴팍의 따뜻한. 이거. 제노는 음료수로 축축해진 목을 한 번 가다듬는다.
"사고 났을 때… 벨트 매고 있었어요?"
남자가 짧게 숨을 뱉었다. 아니.
뒷목이 낚아 채였다. 입술이 부딪히는 순간, 제노는 접촉 사고의 무서움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제때 멈추지 못하면 그게 사고라는 걸…
"...형."
bpm : 190
적정 수위를 이탈하였습니다.
"솔직히… 아까 람보르기니 멈췄을 때. 형 차인 줄 알았어요."
bpm : 230
새로운 안내를 시작합니다.
"…람보르기니가 좋아?"
bpm : …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벚꽃엔딩
기숙형 재수 학원 초입에 벚꽃을 심어 두다니. 실로 반사회적 발상이다. 죄수들 마음을 간질여서 어쩌자는 건지.
제노는 창밖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학원의 전경은 대체로 네모낳고 각이 져 정나미가 없었다. 교도소처럼 비좁고 끔찍했다. 재수생들의 잃어버린 춘삼월을 잠깐, 달래기 위해 벚나무를 심어둔 걸까. 학원 곳곳, 등걸의 아래마다 벚꽃이 자살한 현장이 낭자했다. 제노는 차라리 봄이 다 지나고. 비가 우중충하게 내릴 장마철에 입소할 걸 그랬다. 그랬다면 전경 곳곳을 물들인 야릇한 분홍을 보며 심란해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 재민과… 재민과 한 이백 번 정도는 더 할 수 있었을 테니까.
기숙 학원 입소 2주차. 성적과 성욕은 비례했다. 손바닥에 흉처럼 열 개의 금이 패였다. 재민을 생각할 때마다 주먹을 악 쥔 까닭이다. 재민은 버튼이라도 있었지. 제노는 버튼도 없었다. 시시때때로. 기상 체조를 하다가. 밥을 먹다가. 수업을 듣다가. 영단어를 외우다가. 그때마다 제노는 주먹을 움켜쥐고 학원의 벽에 붙은 생활규칙 제 5항을 올려다보았다.
이성교제 금지
. 원 내 이성교제 적발 시 제적 처리 합니다.
. 이성교제는 많은 학생들의 학습 분위기를 저해하며, 본인의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이성 간의 불필요한 대화 및 신체 접촉도 이성교제로 간주합니다
그럼 동성 교제는 괜찮은가. 제노는 좁다란 걸상 위로 냅다 엎드렸다. 휴식으로 허락된 건 오 분 남짓한 시간이다. 재수 학원 내에서는 바른 자세 외의 것들은 허락되지 않았다. 근데 형은 정자세 말고 다른 것도 잘 하던데……. 책상에 푹 엎드렸다. 수학 강사가 자신이 키워낸 서울대생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기본기가 중요하다고, 이 기본기가 튼튼해야 나중에 고득점 문제에도 대처할 수 있는 거야. 튜닝의 끝이 순정인 이유가 뭐겠어?
살짝 열린 창밖으로 시원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봄이 따뜻하다느니. 벚꽃이 로맨틱하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제노에게 가장 따뜻했던 시간은 너무 이르게 핀 벚꽃 위로 사람이 구르던 계절이었다. 그렇지만 다시. 이제노는 경로로 돌아왔다. 제노는 연필을 고쳐 쥐고 노트를 내려다본다. 따라가야 할 길은 그곳에 전부 적혀 있었다. 길을 모를 땐 다른 차 뒤를 따라가라고 했으니까. 제노의 선생님이.
빵.
빠앙.
강사만이 발언권을 가진 학원에 날카롭게 경적 소리가 울린다. 심지어 두 번. 원생들이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쬔 짐승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제노는 교실을 두리번거리는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익숙했다. 정적을 찢는 이 클락션. 그리고 건물 밖을 왕왕 울리는, 황소가 을러대는 것처럼 낮은 엔진과 배기음 소리. 분명히 귀에 익었다. 제노는 애써 학생들을 진정시키는 교사 몰래 조용히 창가 밖을 내다보았다. 무심코 입가로 웃음이 스쳤다.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
노란 차체가 발정기의 뱀처럼 건물 앞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
제노는 힘을 주어 창문을 열었다. 다시. 흥분과 공포는 닮았다. 설마, 하는 염려감이 연료가 된다. 엔진처럼 덜미가 달아올랐다. 꼬리에 사감을 단 채 맴을 돌던 람보르기니가 매끈하고 신속하게 멈춰섰다. 낮은 차체의 문 밖으로 차주가 내린다. 제노가 아는 얼굴이다. 그리던 손이다. 손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을 때마다 떠올리던 육신의 주인이다. 재민이 무어라 소리치는 대신 차 안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들었다. 러브 액츄얼리가 되기엔 지나치게 성의 없는 악필이 보드 마카로 죽죽 그어진 스케치북이 넘어간다.
[닌텐도 오른쪽 고장남]
[직거래 가능?]
그는 이제노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재수학원 앞에 스포츠카를 끌고 와서 당근 스파링을 유도할 리가 없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제노가 알고 있으니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책상에 펼쳐진 필기구며 노트는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어어 어디 가!! 외치는 강사를 뒤로 하고 뛰쳐나간다. 문틈으로 빼곡하게 따라붙는 질시와 고성. 민폐일까. 하지만 건물 밖에 재민이 스케치북을 들고 직거래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몰고 온 람보르기니와 마찬가지로, 꼬리에 강사와 수많은 시선을 달고 복도를 내달린다. 엄마한테 어떻게 말하지. 아, 몰라. 이해해주시겠지. 건강하기만 하랬잖아. 나가면 더 열심히 해야지. 다음엔 더 열심히 해서, 이딴 감옥에 갇혀있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다 실패하면서 배우는 거니까. 이제노를 가르칠 실패의 교과서는 저 바깥에 있다고. 튜닝의 끝이 순정이라면,
순정의 끝은 튜닝
이니까.
모를 땐 다른 차 뒤를 따라가라고 했지.
어떤 차 뒤를 따라갈지는 내 마음이다.
Sexy...
이마 짚었다가 빵 터졌다가 탄식했다가 ... 끝에는 감탄하게 되네요. 최고의엔딩이에요. 마지막 브금이 크레딧 음악 같아서 끝내주는 로맨스 코미디 영화를 본 기분이에요. 사랑합니다 두나두나 앤나 하나님
람보르기니 러브 액츄얼리 로맨틱 슬리퍼 그러나, 좌측수납과 비장손실까지 알려주는 공 실존?
저.
개바보 됏어요.
책임져 주세요...
눈물이 나요 진짜 최고.... 너무 재밌는 거 아닌지 ㅜ
훠친 너무 재밌어요;;;;;;
글이 섹시할 수도 있나요?
미치겠어요... ㅎ진짜 워치겠다 저 진짜 하루종일 순끝튜 생각만하고...손에아무것도안잡히고....
전처라도될걸그랬어
Omg..........
좌측수납 sexy
뒷목 낚아 채서 키스 sexy
내 심장 가져가서 비장 채우려는게 분명함 그게 아닌 이상 이렇게 심장을 뛰게 할 순 없음
나책임져나책임져나재민은비장을잃었지만난오늘심장을잃었다
너무재밌어요ㅠㅠㅠㅠ아아악
미쳤다 너무 좋아
올해 본 글중 최고같아요 박수 빡빡침
아진짱 개쩐다 개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