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 19세 이상 관람가 분량은 추후 소장본에 수록됩니다

 

 

 

 

이 폴로네이즈는 우리의 상징이 될 거야

 

 

 

 

 

4번의 독립

 

 

 

 

4번의 독립은 불가능하다.

 

주먹을 쥐고 손가락 하나를 펴 보아라. 다른 손가락들은 세 번째 마디까지 들어 올려 손등과 거의 직선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넷째 손가락의 마디는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아 직선을 만들기가 힘들다.

 

 

<제63회 학생 음협 콩쿠르>

 

 

부수고 싶다.

 

 

X배너 앞에 사람이 서 있다. 작은 키에 큰 덩치를 가진 불완전한 사람. 잔가지를 반으로 꺾어 박은 눈이 소년을 바라본다. 마찬가지로 잔가지를 굽혀 붙인 입이 소년을 향해 웃는다. 누군가 옷의 단추 두 알을 양보해 눈구멍을 뚫거나, 고운 조약돌을 골라 입꼬리를 찢어 준 일 없이 되는대로 빚은 이목구비가 신경을 긁어 놓는다.

 

사람 앞에는 소년이 서 있다. 소년의 눈과 입은 잔가지에 비해 완전하다. 차가운 빛깔을 띤 눈동자가 작은 사람을 마주 본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직선을 만든다. 파괴에 대한 욕구가 오장육부를 달군다. 동공 한가운데 장딴지만 한 크기의 사람 형태가 빛점처럼 모인다. 부수고 싶다.

 

퍽.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행위자는 소년이 아니다. 소년은 그저 행인의 발에 걷어차이는 눈덩이를 지켜볼 뿐이다. 봄기운이 아닌 누군가의 발길질에 의해 눈사람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부다듯한 파괴욕을 넘어 불유쾌한 감정이 기어오른다. 마치 자기 자신이 짓이겨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머니 깊숙이 숨겨 둔 손을 말아 쥔다. 볼 한구석이 움푹 패인 채 뒤집힌 눈사람의 머리가 소년을 바라보며 웃는다.

 

 

“벽돌을 넣어 놨으면 저렇게 부서지지는 않았을 텐데.”

 

 

<악보 1> 쇼팽 『폴로네이즈 No.6, op.53』의 1-4마디

- 반음계적으로 상행하는 긴장

 

기척보다 먼저 다가온 것은 향이다. 생전 처음 맡아 보는 향의 집합체. 비누. 캐러멜. 그게 아니면 섬유유연제. 의미 없는 독립이 모여 하나를 이룬다. 소년은 뒤를 돌아본다.

 

모든 무의의가 모여 의의가 되는 순간.

 

소년은 오늘 영웅을 죽였다.

 

 

*

 

 

 

왼손 약지가 사라진 것은 4분 21초 대였다.

 

폴로네이즈 제6번 <영웅>은 쇼팽의 작품들 가운데 한 정점을 이루는 것으로 칭송받는다. 쇼팽의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는 곡을 감상한 직후 편지 속에 이러한 내용을 남겼다:

 

 

영감! 힘! 활기! 의심의 여지가 없어. 지금부터 이 폴로네이즈는 상징이 되어야 해. 영웅적인 상징!

 

 

……이 폴로네이즈는 우리에게도 상징이 될 거다.

 

십인용 식탁의 끝과 끝을 우두커니 지키고 앉아 골드문트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조성진의 연주를 들을 때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그렇게 말했다. 친부에게는 ‘우리’라는 말에 악센트를 싣는 습관이 있다. 제노는 그것이 극심한 배타주의의 상징임을 알고 있었다. 듣는 이를 배제시킨 채 말하는 이의 소속감만을 강조하는 말하기 방식.

 

 

[인터뷰] 이영제 강남구의원 “끊임없이 도전하는 정치인… 해 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

(중략)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다. 장차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아들(이제노)은 서울시 유일 자립형 사립인 이레고등학교의 회장직을 3년간 맡아 왔다. 공부뿐만 아니라 리더십과 매너의 덕목까지 갖춘 아들은 오래전부터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던 이영제 의원을 닮아 오는 28일 강남구에서 열리는 재단 주최 콩쿠르 대회에 참가한다.

 

 

“그래…….”

 

넷째 손가락은 무명지라고 불린다. 다른 손가락들과는 달리 고유 명칭이 없다. 딱히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뭘 어쨌다고?”

 

묵직한 음성이 고막을 깔아뭉갰다. 제노는 이 무게가 뜻하는 바를 알고 있다. 정제된 말씨. 골라낸 단어. 평탄한 어조. 그것들을 합하면 아버지의 분노가 된다. 비로소 창조된 분노는 몸속을 파고들어 시간이 지날수록 부피를 키운다.

 

‘영웅’을 무너뜨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차 안에서, 아버지와 제노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최상석에 앉은 아버지는 내내 창밖을 내다봤다. 조수석에 앉은 제노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봤다. 역시나 네 번째 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빈 상태였다. 아버지는 분노를 유예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운전기사가 집 앞에 차를 세웠다. 기사의 안내를 받아 하차한 뒤, 그는 대문을 향해 앞서 나아갔다. 뒤따르는 제노를 한 번쯤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집채만 한 대문을 지나 현관문에 도달하기 전, 아버지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의 인내는 매양 그런 식이었다. 타자의 시선을 의식했으나 완벽한 자리를 찾지는 못했다. 그의 유예는 늘 현관문을 열기 전에 종료됐다. 아버지는 천천히 돌아섰다. 높낮이가 다른 시선이 머리꼭지 위로 내려앉았다.

 

“모든 사람들이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수는 없지.”

“…….”

“우리는 행운을 타고난 거다.”

“…….”

“너는 그걸 기억해야 하고.”

 

두 번째 기회.

 

조각말을 입안에서 궁굴렸다. 혀끝이 치조에 닿아 입길을 막았다. 관형사로 시작된 짧은 말마디가 목구멍에 얹혔다. 순간 기이하게도 머릿속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향이었다.

 

비누. 캐러멜. 섬유유연제. 다음으로 선형을 그리는 입꼬리. 무언가를 끊임없이 잡아당기던 눈동자. 당최 무어라 칭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누군가. 그 누군가가 가진 독립적인 개체들이 합일되지 못한 채로 방점을 찍었다.

 

“다음 콩쿠르까지 딱 이 주 남았다. 그건 우리 재단 주최 본선이니까 이번 예선이랑 비교도 안 되게 중요하다는 거 알고 있겠지. 예선 망친 것쯤은 지난번 과제 영상에서 좋은 점수를 딴 걸로 만회할 수 있어. 이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러 올 거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기대할 거란 말이야.”

 

압판으로 뭉근하게 찍어 누르듯 억압된 음성이 외따로 배돌았다. 그의 하나뿐인 아들은 이미 산발하는 기억들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그다지 깊지도, 강렬하지도 않은 인상이 깜부기불마냥 심중을 밝혀 왔다. 어쩌면, 그곳에서 정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아버지는 낮게 읊조리며 뒤돌아 현관으로 향했다. 너한테도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 힘들어도 콩쿠르 끝날 때까지만 참아라. 성공적으로 해내겠다고 약속만 하면 원하는 건 뭐든 해 줄 테니까. 목도리에 입술을 묻고 아버지의 발뒤꿈치를 응시하는 제노의 머릿속에는 단 두 가지 토막말만이 반복적으로 선회했다.

 

 

두 번째 기회.

두 번째 기회.

너는 그걸 기억해야 하고.

나는 그걸 기억해야 한다.

 

 

제노는 시선을 들어 올린다.

 

 

“가지고 싶은 게 있는데요.”

 

 

없는 약지에서 작열감이 느껴진다.

 

 

 

*

 

 

[지식iN]

Q. 손가락이 사라지면 어떻게 하죠

만약에 있던 손가락이 없어지면 어떻게 살아가나ㅛㅇ

비공개 · 2010.10.04 · 조회수 53,652

 

A 2개

사람은 또 거기에 맞게 적응을 하면서 살아가요

 

 

“……어때?”

 

 

텍스트에서 눈을 떼어 냈을 때, 또 다른 시선이 얼굴을 관통했다. 발밑에 옹송그린 찬양이 고개를 쳐든 채 제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노는 그제야 휴대 전화를 교복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미안. 못 들었어.”

“아직도 신경 쓰고 있는 거야?”

 

까만 비닐봉지가 찬양의 손안에서 늘어졌다. 찬양은 다리오금을 펴고 느지감치 일어섰다. 걱정으로 점철된 눈빛. 허우대에 가려져 있던 무덤의 흔적이 드러났다. 잿더미가 눌어붙은 담배꽁초의 무덤이 있던 곳. 조금 전까지 도도록이 쌓여 작은 산을 이루었던 묏자리가 갈선 두 사람의 신코 앞을 지켰다.

 

“스티븐 허프도 그랬잖아. 실수는 연주자가 청중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는 과정이라고…….”

 

다물린 입술이 일직선을 그린다. 제노는 찬양에게서 봉투를 건네받았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며.”

“그건…….”

 

찬양은 적당한 대답을 골라 내는 듯싶었다. 제노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 두서를 지킬 수 있을 만한 대답을. 얼마간의 선별 과정 이후 짐짓 과단성 있는 어조가 흘러나왔다.

 

“너한테는 실수가 아니었으니까.”

 

제노가 찬양을 바라봤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까…….”

“너한테는 그게 최선이 아니었을 거야. ……맞지? 평소랑은 달랐어. 연주하는 사람은 음악 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잖아. 그게 목숨이라도 되는 것처럼 얻기 위해서 구하고, 두드리고, 애쓰고…….”

“…….”

“그날 너는 안 그래 보였어.”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하나뿐인 친구는 이미 그가 죽어 가는 영웅을 되살리고자 기한 노력의 값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제노가 ‘우리’, 그러니까 아버지와 자신을 위해 어떻게 노심했는지. 매일 밤 손가락 마디가 타들어 가는 듯한 통각을 느끼며 얼마나 오랜 시간 잠을 줄여야 했는지. 그리고 마침내 실제로 약지가 사라져 버렸을 때, 그 사실을 깨달은 5초간 명맥을 유지하려 쏟은 전신전령의 부피까지.

 

“제노야,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야. 다른 사람들이 이해 못 하는 것들도 뭐든 이해해. 그러니까…… 알지?”

“보여?”

 

찬양의 코앞으로 왼손을 불쑥 들이밀었다. 희어멀뚱한 시선이 내려앉았다. 손. 팔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하는 기관. 그중에서도 왼쪽. 그뿐 무엇을 더 보아야 하고, 무엇이 더 보여야 하냐는 듯한 눈길.

 

“손가락이 없어졌어.”

 

가늘고 긴 손가락들이 촘촘히 뻗은 손샅을 뒤훑던 눈이 제노를 향해 겨누어졌다. 찬양의 얼굴에는 명백한 당혹감이 스며 있었다. 예기치 못한 칙유를 들은 사람처럼.

 

“어…… 어떤 손가락이?”

 

제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놀라울 것 없는 정적이 흘렀다. 온기와 한기의 낙차. 그 속에서 제노는 진위를 구별해 내려 했다. 감식안 같은 눈동자가 찬양을 꿰뚫었다.

 

“손가락은…….”

“…….”

“하나쯤, 없어도 되지 않을까?”

“…….”

“그것도 다른 손가락이 아니라 약지라면……. 그거 하나쯤은 내가 대신해 줄 수도 있잖아.”

 

고개를 돌렸다. 찬양이 시야에서 탈락했다. 두 번째 기회. 제노가 그려 둔 지정선을 넘어선 자에게 그런 선의는 베풀어지지 않는다. 고마워. 진심을 찾아볼 수 없는 인사말이 찬양의 입꼬리를 갉아 올렸다. 먼저 발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는 제노를 뒤따르며 찬양은 공사다망하게 재깔였다.

 

“아까 내 말, 아, 못 들었다고 했지. 그…… 주말에 우리 집에서 공부할래? 어머니가 너한테 해 주고 싶은 요리가 있다고 하셨어. 집에 피아노 있으니까, 너 연습도 할 수 있고……”

 

수돗가를 돌아 나가던 제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시간 되면 하룻밤 자거나, 소논문 준비도 같이……. 임금을 호가하던 동선이 가로막히자 찬양 또한 멎어서서 입을 다물었다. 동그만 옆통수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찬양은 그 곧은 시선의 끝을 좇아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갈색 머리.

 

 

그리고 사냥감을 응시하는 눈동자.

그런 눈이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

 

 

 

전능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만드는 데 걸린 시간, 7일. 그 일곱 날을 뜻하는 이레고등학교의 연혁은 새로 쓰인다.

 

이곳에 이제노가 있다.

 

그를 무엇으로 회자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보기보다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 성인이나 동로마 제국의 황제 같은 그 이름이 현존하는 Z세대 청소년의 본명이라는 데에 있다. 선천 운인 사주와 후천 운인 성명학 모두 놓치지 않은 그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갑 의원 후보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것은 장차 대단한 정보가 된다.

 

 

9학기 연속 전교 1등.

이제노는 해냈다.

어째서일까?

 

 

일각의 TV 드라마에서 학생들은 명문 고등학교를 3년 만기 알카트라즈라 일컫는다. 미 연방정부의 교정시설. 재소자의 후생 복지가 최악에 달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교도소. 그러나 실지의 이곳은 감옥이라기보다 천국에 가깝다. 통상적인 명문이 비탈에 불과하다면 이레고등학교는 해발 2,000미터 이상의 고산 지대다. 그리고 그 내왕로의 개척자:

 

 

우리는 그를 보며 미술실의 다비드 흉상을 떠올린다. 온갖 보그병신체로 수식해도 아깝지 않다. 지성부터 볼품까지 모두 갖춘 으뜸 중 으뜸. 9학기 연속 전교 1등. 이레고등학교의 일인자.

 

조물주의 손안에서 만물이 창조된다. 태곳적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밟아 없애거나 존재하지 않던 것을 만들어 낸다. 그런 점에서 회장은 훌륭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그의 손은 매양 지요한 취급을 받았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손. 부서뜨리는 손. 평범한 사람들은 타고나지 못했을 신체발부.

 

이 학교에서 이제노의 입지란 그런 것이었다. 손의 존재. 오로지 그것만으로 무언가를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학생들은 그의 권위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완전무결한 손의 구성 요소 중 하나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동시에 이레고등학교에 전학생이 왔다.

 

 

어쩌면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시사철 티오가 꽉 찬 명문고의 물문을 뒤늦게 뚫고 들어온다는 건 크게 세 가지 이유로 특정됐다. 첫 번째, 돈이 뒤지게 많거나. 두 번째, 공부를 미치게 잘하거나. 세 번째, 낙하산이거나.

 

전학생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전학생은 ‘전학생’이라고 불렸다. 학생들은 그가 세 가지의 보기 중 몇 번째에 해당하는지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에 어떤 한자를 쓰는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집안 사정과 가족관계는 어떤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청객 不請客

명사 오라고 청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찾아온 손님.

 

 

그는 토착 원주민들 사이에 떨어진 신문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언뜻 보기에도 그는 세간을 뒤흔들 만한 천재가 아니었다. 모두를 쥐고 흔들 수 있을 만큼 부유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선택지는 하나.

 

 

낙하산.

하지만 그는 정작 자신이 왜 이 땅에 추락했는지 모르는 듯했다. 사유를 궁금하게 여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전학생은 기꺼이 교실에 외딴 운석처럼 앉아 있다. 유기된 짐승마냥 목이 길고 곧은 그의 앉음새는 유달리 다붓해 보였다. 그는 마치 파동의 동심원처럼 연약한 궤적을 두르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

남들과 다른 것에 조갈을 깎는 이레고등학교 학생들이 그에게 느끼는 감상은 한마디로 국한됐다.

 

불모지에 떨어진 평범한 인간은 며칠 만에 말라 죽을까. 얼굴 없는 주인의 손길에 분갈이를 당한 그는 건조한 토양에 뿌리를 내려야 했다.

 

 

 

*

 

 

 

전학생이 교실에 앉아 있다.

창가 네 번째 줄과 뒷문 바로 옆 사이의 간극.

 

 

제노는 그를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 다갈색의 머리카락. 목 끝부터 두어 개 끄른 동복 셔츠 단추. 책상 아래로 길게 뻗은 두 다리. 얼굴을 이루는 획은 대체로 날깃하고 가는 곡선이다. 늘어뜨린 눈썹만이 유일하게 짙은 농도를 띤다. 그의 모든 것이 제노와는 다르다. 그와 제노에게는 더 이상의 교집합이 없다. 닮은 점이라고는 와잠 밑으로 열 손가락을 펼친 것 같은 그림자뿐. 얼굴을 받치는 뺨뼈는 물에 갠 안료로 그린 프레스코 벽화처럼 단단하면서도 따뜻해 보인다.

 

이름 없는 존재. ‘전학생’이라고 불리는 사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에 어떤 한자를 쓰는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집안 사정과 가족관계는 어떤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도 그를 사랑하거나, 그에게서 사랑받으려 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은 분명 기현상에 가까웠다. 그는 누구라도 사랑할 만한 맺음새로 마물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딸깍.

…….

딸깍.

…….

 

 

그를 볼 때마다 불행을 예습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툭.

 

 

엄지로 노브를 누르던 제노가 샤프펜슬을 내려놓았다. 곧 책상을 짚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전학생을 향해 몸을 틀었다. 45*65 사이즈의 좁은 공간에 몸을 욱여넣은 학생들을 지나쳤다. 이곳에서는 만물이 제노의 통제 아래 있다. 한 걸음. 그에게 가까워질 때마다. 한 걸음. 도둑 같은 시선들이 새치기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

 

 

“안녕.”

 

 

전학생은 이제노를 올려다본다. 건조하게 메마른 점막에 물기 없는 제노의 모습이 채워진다. 두 개의 시선이 서로를 더듬는다. 제노는 그가 자신을 알아보리라 확신했다. 자신이 그를 알아보았듯.

 

 

“…….”

“…….”

“누구?”

 

 

그러나 오답을 내놓은 이단아는 허를 찔렀다.

 

출제자는 입을 다물었다. 세계가 기울어진다. 발밑은 광막한 수평인데 자신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눈사람을 걷어차던 잔상. 같은 위치, 같은 각도, 같은 눈높이로 그것을 함께 바라보던 두 시선의 유대가, 착각의 발길질에 허물어진다. 이제노를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의아함. 알아보지 못한다.

 

알아보지 못해.

네가. 나를.

 

망치나 도끼. 그것도 아니면 맨손. 정 안 되면 혀를 써서라도 그 평정을 박살 내고 싶은 충동이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주먹을 부르쥐었다. 깔끔하게 다듬질한 손톱 끝이 손금을 파고들었다.

 

 

어.

 

 

전학생이 문득 미소 지었다.

 

 

혁명가네.

 

 

때맞춰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세계의 경사가 원위치 된다. 그는 제노를 알아보았다. 유리 같은 눈동자에 도리어 탁한 깨달음이 스미는 장면을 제노는 목격했다. 그랬는데도 기분이 좋지 않다. 부다듯한 파괴욕을 넘어 불유쾌한 감정이 기어오른다. 다시금 허공으로 고개를 돌리는 전학생의 옆얼굴을 내려다보며 불가부득한 의문을 삼킨다. 왜 자신을 혁명가라고 부르는지.

 

 

 

*

 

 

 

어린 시절 제노는 책과 가까이 지냈다. 단순히 취미를 넘어서서 홀려 있었다. 책을 베고, 덮고, 안고 살았다. 그것은 제노가 자세하게 외로워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책과 함께한 이제노의 유년은 유전된 비정형의 가치관을 깨부수어 나가는 혁명의 시대였다.

 

 

‘책이 좋아, 내가 좋아.’

(이건 누구의 목소리지?)

 

 

“혁명의 시대?”

 

간결한 질문이 현실 감각을 일깨웠다. 일렬횡대로 늘어선 활자를 따라 굴러가던 제노의 눈동자가 멈췄다. 규빈은 검지로 책장을 들척였다. 굵직한 제목이 쓰인 표지가 드러났다.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

 

“갑자기 웬 혁명. 누가 네 권위에 도전이라도 할까 봐?”

“누가 나더러 혁명가래서.”

 

훼방꾼의 개입으로 읽던 부분을 놓쳤음에도 불구하고, 제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찰나 코웃음이 쏟아졌다.

 

“독재자가 아니고?”

 

고개를 들어 올려 규빈을 올려다봤다. 농담이지. 뭘 또 날을 세워. 오늘치 소명을 다했다는 듯 이기죽거리던 낯짝이 뒤돌아 도서관을 빠져나간다. 다 읽지 못한 책을 든 채로 제노는 창밖을 넘어다봤다. 인공 잔디가 너르게 깔린 운동장 한구석에 전학생이 나볏하게 서 있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며.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학생들에 의해 그의 실루엣은 뭉뚱그려진다.

 

 

머리카락이 파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더 쉽게 찾을 텐데.

 

 

불현듯 피운 깜부기불 같은 생각을 뒤로하고, 제노는 책상 가녘에 산처럼 쌓아 둔 혁명에 관한 책들을 하나씩 치우기 시작했다. 정말로 읽고 싶은 책은 코스 요리처럼 가장 밑바닥에 깔아 두는 것은 유년의 자신으로부터 답습해 온 독서 습관이었다. 책의 무덤을 헤친 제노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야생의 사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더께가 쌓인 고서 위로 훅 입바람을 불었다. 이후로도 이 책을 펼쳐 드는 자는 오로지 학생회장뿐이리라.

 

 

 

매가 구덩이에 놓인 먹이에 유인되어 내려오는 순간, 사냥꾼은 맨손으로 재빨리 매를 잡는다.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은 사람이 덫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사냥꾼인 동시에 사냥감이 되어야 한다.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맨손으로 / 재빨리 / 매를 잡는다.

 

띄어쓰기로 동강 난 마디 아래 검은 흑연이 미끄러진다.

 

 

 

 

 

J#

이제노에게 사랑은 이중주였다.

 

보기 좋으면 만지고 싶었다. 전부 내 것 같다가도 문득 난폭한 질투에 휩싸였다. 아파할 줄 알면서도 제 사랑을 피하지 않고 감당하기를 바랐다. 그런 것들이 필요했다. 손길이 닿아도 죽지 않는. 두 개의 독립적인 감정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 없이 하나의 욕망을 그렸다.

그의 세레나데는 단조로운 법이 없었다. 병아리를 질식시키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폭력적인 애정을 받아 내던 하프문 베타의 이마는 까졌고, 약지는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

무대에 새로운 연주자가 올랐다.

 

 

전학생. 눈처럼 악의 없고 입자 고운 미소를 지닌. 그러나 꺼풀을 벗기면 그 속에는 상대 연주자가 파고들 틈을 내주지 않는 견고한 벽돌이 박혀 있다.

 

 

제노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노를 부드럽게 고립시키는 그의 완벽한 독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

 

 

건반이 검고 흰 이유는 피아노가 값비싼 악기라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는 설이 있다. 흰 건반에는 상아. 검은 건반에는 흑단.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구태여 이곳에 올려놓게 만든 이유 또한 비슷했을 것이다.

 

 

왜 하필 약지인가?

만일 이게 신이 내린 형벌이라면, 조금 더 중요한 손가락이 사라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오늘도 백건 위에 혁명하러 왔어?”

 

 

누군가 불쑥 번민을 깨뜨렸다. 제노는 근원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줄곧 건반과 사라진 약지에 붙박았던 시선을 비틀어 바닥을 응시했다. 붉은 노을빛이 울커덕 밀려 들어왔다. 어스름한 음악실 안으로 주홍빛 낙조가 낯을 끼워 넣었다. 창문의 형태로 모양 난 바닥 위로 실루엣이 덧그려졌다.

 

학생회장이 음악실을 점거했을 때, 말을 거는 학생들은 전무했다. 그것은 이레고등학교의 불문율이었다. 음전하기 그지없는 학생회장이 피아노를 만질 때만큼은 얼마나 히스테릭해지는지 학습이 되었으므로. 관습법을 감히 깨뜨릴 수 있는 자는 아직 학교의 금기를 다 깨치지 못한 신삐리뿐.

 

제노는 그제야 음악실 문에 기대 서 있는 전학생을 돌아봤다.

 

“왜 자꾸 그래.”

 

얼굴 반편을 그늘선으로 가른 전학생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내가 뭔갈 했어?”

“혁명 얘기 꺼내잖아. 내 앞에서.”

“아.”

 

난 또 뭐라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전학생이 웃었다. 그의 새하얀 운동화가 사붓이 다가온다. 사람이 아닌 유령이나 배처럼 무게 없이 미끄러운 걸음걸이였다.

 

“네가 그날 영웅을 죽였잖아.”

“…….”

“혁명에 성공한 사람은 영웅이 되지만, 결국 그 영웅을 다시 죽이는 것도 혁명가라고 생각하거든, 난.”

 

제노는 냉소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혁명가는 고리타분한 구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건립하는 자다. 그러나 이제노는 체제를 뒤엎은 적이 없다. 체제에서 낙오되었을 뿐.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전학생이 다시 말을 걸었다.

 

“내가 보고 있어서 못 치는 거야?”

“아니.”

“그럼.”

“약지가 없어서.”

 

한 개를 제외하고 정갈하게 뻗어 나간 손가락이 열을 모사하듯 건반 위를 줄지었다. 전학생의 시선이 그 면바른 선을 타고 갸우듬히 기울어졌다.

 

“약지로 눌러야 하는 건반이 있는데.”

“응.”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없는 것 같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것 같다’란 그런 말이다. 교사도. 아버지도. 급우들도. 모두 한목소리로 제노에게는 ‘약지가 존재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들 눈에는 보인다고 했다. 그들 눈에 보이니 없을 리가 없다고 했다. 병원 의사는 공돈 들여 촬영한 MRI 사진을 코앞에 들이밀었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사진 속에는 분명 약지가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잠들기 전 헤아려 보고, 자고 일어나서도 셈해 본다. 약지는 실체가 아닌 숫자로써 존재를 증명한다. 그런데 몸은 모른다. 그 존재를 인식하려 들거나, 힘을 주어 움직이려 할 때마다 말을 걸어 오는 것이다. 이거. 없다고. 없는 걸 무슨 수로 구부리거나 펼치겠느냐고.

 

 

“안 보여?”

 

 

어깻죽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는 뒤통수에서 들렸는데. 다음에는 귓가까지 다가올 것 같아서, 제노는 간지러움을 떨쳐 내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전학생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목도했다. 석양이 물들어 더한층 다색을 띠는 머리를 다정하게 기울이고, 버릇없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연주자를 기다리는 관객의 눈. 기다린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다지 강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듯한 시선. 그만의 무심한 관심.

 

 

“표시해 줄게.”

 

 

저런 관심을 받으면 누구든 질식하겠지.

 

 

우리는 거의 초면이지만 오래오래 알아 온 것 같다. 그의 손길도 마찬가지였다. 마른 이불처럼 건조하고 따뜻한 손이 제노의 손을 붙잡아 왔다. 아주 조심스럽되 강단 있는 태도. 소중한 것을 다룰 때처럼, 무엇도 망치거나 다치게 해 본 적 없을 것이 빤한 손이. 반대편 손으로 악보 체크를 위해 놓아 두었던 볼펜을 쥔 전학생이, 제노의 약지 둘레를 따라 선을 그렸다. 살갗의 무늬를 타고 펜촉이 가늘게 나아간다. 제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하나. 둘. 셋. . 다섯. 넷을 소외시키거나 망설이게 하지 않는 검고 뚜렷한 표시선.

 

 

“보이지?”

 

 

보였다.

약지의 위치가.

 

 

순간 박동이 다시 튀기 시작했다. 약지가 보이는 것과 그 위치가 보이는 것은 달랐다. 엄연히 달랐으나, 제노는 천천히 건반에 손을 얹었다. 빈틈없이 맞물린 백건과 흑건이 이를 드러낸 짐승처럼 제노의 손을 맞이한다. 그 위협적인 치열 위, 천사의 헤일로처럼 동그란 표식을 맞추어 간다.

 

 

빗겨 지는 해의 틈에서, 소외되었던 자들의 선율이 능숙하게 반짝였다.

 

 

 

*

 

 

전학생은 조짐이었다.

 

불청객을 유령 취급 하던 학생들은 문득 어딘가에서 불어 온 남동풍을 맡는다. 이레고등학교의 겨울은 차라리 사금파리를 머금은 압슬. 마침내 그들의 삭막한 계절에 어떤 살부드러운 기운이 침투한 것이다. 짐승들이 살내를 귀신같이 알아채듯, 모리배들은 그 공기의 기원이 전학생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패러다임의 위협인가? 그가 몰고 온 ‘낌새'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에 대해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던 자들은 뒤늦게 고삐를 졸라맸으나, 전학생의 신상은 여전히 불명했다. 학생들은 차츰 그를 경계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태생적으로 타인의 공격성이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빚어진 이류처럼 보였다. 찌르려던 손이 도리어 멋쩍어지게 만드는 성숙함을 가졌다. 프란츠 크로머들의 무리로 똑 떨어진 막스 데미안. 그 자신만의 공기에 둘러싸여 그 자신만의 법칙들 아래 살면서, 낯설게, 외롭고 고요하게. 그 배후에는 이제노가 있었을 것이다.

 

레밍의 습성을 지닌 동류들에게 우두머리의 정서가 전이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였다. 전이는 일방향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곧 회장의 정서다. 드러나게 편애하거나 금지옥엽 기르는 일 없이, 심지어는 각자의 가장자리를 지키며 말조차 섞지 않았음에도, 전학생을 바라보는 회장의 눈빛을 몇몇 발밭은 간상들은 희미하게나마 눈치챘다.

 

며칠간의 검질긴 관찰 끝에, 학생들은 하나둘 총구를 내렸다.

 

그는 여전히 ‘전학생’이라고 불렸으나, 더는 교실에서 유령이 아니었다. 그에게 느끼는 심리적 거리가 부쩍 좁아진 교실에서는 전에 없던 스몰 토크나 숨을 죽인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학생은 내접원의 중심에 있었다. 얕고, 성가시고, 부드러운 파동을 퍼뜨리면서. 그는 웃고 있으나 웃고 있지 않았다. 단지 끄트머리가 가늘고 오목한 입매를 습관처럼 늘어뜨릴 뿐이다.

 

제노는 그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모래라는 단어가 모래알 하나를 뜻하지 않듯이. 더께로 쌓인 눈의 결정들을 모아 눈이라고 일컫듯이. 결속된 개인들은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분리되지 않는다. 저렴해진다. 이제노가 찾고자 하는 ‘하나’가 ‘학생’이라는 덩어리 속으로 흡수당한다.

 

 

안 보여.

 

 

눈밭에서 그를 잃었다. ‘전학생’ 대신, 일제히 같은 모양과 색깔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밖에 보이질 않는다. 검은 뒤통수의 무리개들이 죽을 만큼 지루했다. 다 거기서 거기.

 

 

안 보여.

 

 

연주자는 섬세하게 타고난 손가락으로 필통을 벌렸다. 그가 찾는 빛깔은 없었으므로, 심이 가느다랗고 붉은 플러스펜을 꺼냈다. 회장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전학생을 둘러싸고 있던 필부들이 고개를 들었다. 회장의 걸음을 따라, 학생들이, 하나 둘, 자리를 비켰다.

 

제노는 조도가 낮은 시선으로 그들을 주시했다. 얼굴이 구분되지 않는다. 다 똑같은 가죽을 뒤집어쓰고. 똑같은 온도를 띠고. 똑같은 경외를 덧껴입고. 누구도 먼저 나서지 않는 그들은 하나의 심장으로 움직이는 덩어리일 뿐이다. 그들 틈에 박혀 있던 이질적인 ‘하나’가 고개를 든다.

 

 

내일은 파란색 펜을 사야겠다.

아무도 파란색 눈을 그냥 눈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테니까.

 

 

유년의 자신을 답습하듯. 그가 자신에게 그렇게 했듯. 제노는 전학생의 손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학생들은 숨을 죽인다. 가느다란 펜촉으로 전학생을 찔러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속죄양에게 내려질 처단을 긴장과 흥미 본위의 감정으로 고대한다.

 

제노는 감아쥔 그의 약지를 빨간 펜으로 둘러 그렸다. 빨간 궤적을 따라 다부진 약지를 도려낸다. 뚜렷하다. 이제야 그가 보였다. 낙형처럼 지지고 태운 후에야.

 

제노가 씌운 낙인은 반지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 너무 붉고 짙은 나머지 사랑의 증표라기보다는 불길한 존재를 부르는 부적에 가까워 보였다. 오랏줄처럼 조여드는 약지를 내려다보던 전학생이 고개를 솟쳤다. 어떤 것도 묻지 않는 눈동자. 모두에게 보이지만, 이제노에게만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 사라졌다. 

 

 

사랑은 다 거기서 거기.

그런데 마침 그 애가 거기 있었고.

 

 

“앞으로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겨울은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누군가가 고요하게 죽어 가는 계절이기도 했다.

 

 

 

 

 

 

[주제: 내 삶에 영향을 준 사람]

 

칠판에 굵다란 획이 덧그려졌다. 7교시 진로 시간. 사회 과목을 담당하는 교사가 분필을 쥔 손으로 칠판을 탕탕 두드렸다.

 

“이번 진로 탐색 수행평가 주제입니다. 누가 됐든 자기 삶에 조금의 변주라도 됐다면 대상에 제한을 두지는 않겠습니다. 단, 자기 자신은 금지. 괜히 독특한 시도 한다고 점수 높게 받는 예술 과제 아닙니다. 그런 뻔한 시도는 이미 선배들이 실컷 했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

 

이레고등학교는 단순히 등급이 매겨지는 학업뿐 아니라 학생들의 진로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3학년이 되면 실시하는 진로 수행평가는 그들이 얼마나 특별한 자들인지 방증하는 매개이기도 했다. 인터뷰의 라인업은 햇수를 거듭할수록 화려해져 갔다. 환경부 장관. 국립발레단 수석 발레리나.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배우. 3선 국회의원. 학생들이 지목하는 대상은 평범과 거리가 멀었다. 찬양은 루이지애나 출신의 트럼펫 연주자에게 쏟을 질문들로 빼곡히 채운 노트를 품에 안은 채 물었다.

 

“제노야, 넌 누구 할 거야?”

 

 

삶에 영향을 준 사람.

 

 

찬양의 질문이 새어 나간 직후, 여러 개의 곁눈질이 제노에게로 집결됐다. 그들 또한 궁금했을 것이다. 이 학교를 대표하는 회장의 면담 상대는 누가 될 것인지. 바퀴벌레처럼 음침하게 기어드는 시선들을 뒤로하고, 제노는 입을 닫아걸었다. 

 

 

 

*

 

 

 

인생에서 가장 혁명적인 존재…….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제노는 운전기사의 클랙슨을 못 들은 척 발길을 틀었다. 도착한 곳은 학교 정문과 멀지 않은 승차장이었다. 여러 대의 택시가 줄지어 늘어선 곳. 전학생은 그곳에 우두커니 놓여 허공을 바라본다. 제노는 시선을 깔아뜨렸다. 눈석임한 땅 위로 잡풀들이 힘겹게 몸을 뒤틀고 있었다. 서로를 누르고, 밀치고, 음성적인 자리에서 생명력을 발아하는 존재들. 제노는 근처에 놓인 돌을 신코로 궁굴렸다. 자그마한 돌의 무게에 짓눌린 풀이 각개의 위치로 꺾였다.

 

누군가 만들어 놓고 간 눈사람이 승차장 의자 위에 놓여 있다. 비꼬인 사지. 일그러진 눈. 분명히 창조되었으나 의도와 성의가 배제된 피조물.

 

제노는 전학생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눈길을 주는 대신 제노의 시선을 따랐다. 같은 위치, 같은 각도, 같은 눈높이에서, 두 사람은 얼마간 함께 눈사람을 톺아봤다. 순간적인 파괴욕이 들끓었다. 제노는 다리를 치들어 눈사람을 걷어찼다. 작은 머리통이 퍽석 무너앉았다. 전학생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제노를 응시했다. 그 모자람 없는 관심을 되받으며 제노는 그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들을 상상했다. 실망이네. 그보다는 나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예상을 깨부수듯 전학생은 묵묵하게 허리를 숙였다. 남들보다 외피가 두꺼워 따뜻해 보이는 손이 땅에 널브러진 존재들을 그러모았다. 흩어진 눈. 제노가 굴린 돌. 이울어 버린 잡풀. 그것들이 한데 섞여 다시 사람의 형태를 이룬다. 파괴와 창조를 거쳐 태어난 눈사람은 아까보다도 더 작아져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주먹만 한 악의를 품고 있음을, 창조의 과정을 지내본 제노는 알았다. 한바탕 무너졌다 다시 일어난 눈사람 앞에 응등그린 전학생은 두 팔을 무릎에 걸친 채로 입을 뗐다. 무위한 낯이었다.

 

“이걸 부수면 혁명이 되겠지.”

“…….”

“아까 그건 발악이고.”

“…….”

“이해해. 영웅은 항상 그늘 속에서 발악하는 존재니까. 이득을 본 사람들한테나 혁명인 거야.”

 

이윽고 다갈빛으로 가라앉은 머리꼭지. 이후로도 잠시 동안 말없이 눈사람을 응시하던 재민이 고개를 들었다.

 

“네가 보여 주는 영웅이 좋아.”

 

 

가장 사사로운 것이 가장 혁명적인 것이다.

학교를 대표하는 학생회장은 자신이 점찍은 자에게 묻는다.

 

 

“인터뷰.”

“…….”

“너로 하려고.”

 

 

답이 필요없는 질문에는 물음표를 걸지 않는다.

조짐이다.

 

 

 

죽은 약지를 위한 파반느

 

언젠가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인생에 만족합니까?

 

어쩌면 그것이 오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방 한가운데 전학생을 앉혀 놓은 제노는 관조적인 시선을 유지해 본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누구의 시선에도 얽매이지 않는 시간.

 

“네.”

 

질의응답의 중요성.

 

“어린 시절에 극복할 수 없는 역경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형제가 있습니까?”

“하하.”

 

질문과 동떨어진 웃음소리에 제노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작은 의자에 걸터앉은 그는 정말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질문들이 꼭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 같아서. 전부 네,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잖아.”

 

제노는 무심하게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해 본 적 있나 보네.”

“드라마에서 봤지. 대답.”

“아니요. 없어요.”

 

제노는 이따금 고개를 들어 대꾸를 잇는 전학생의 얼굴을 바라봤다. 소묘할 때와 같이 간헐적인 관찰.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제노는 쥐고 있는 샤프펜슬을 짓갈겨 언제라도 그의 이목구비를 샅샅이 그려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과묵히 질문과 대답을 메모해 내려갔다. 공책에는 다른 질문 후보들이 몇 가지 더 쓰여 있었다. 목록 아래 구분선을 들이긋는다. 거짓말 탐지기에는 늘 함정 질문이 있다. 요지를 제외한 모든 Q들은 다 함정을 위한 초석일 뿐이다.

 

“나 좋아해?”

 

네, 아니오로 대답 가능하던 질문들의 틈바구니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잠깐 웃을 때를 제외하고 줄곧 허공에 멎어 있던 그의 초점이 조리개처럼 제노에게 맞춰진다.

 

“흥미 있어.”

“다시.”

“…….”

“날 좋아해?”

“좋아한다고 해 줬으면 좋겠어?”

 

두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덧얽힌다. 각기 다른 온도와 습도를 지녔지만 동시에 아주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 제노는 반문에 대한 대답 없이 반문했다.

 

 

“좋아해?”

 

 

전학생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응.”

 

 

알아들었다는 듯이.

 

 

“그럼.”

“......”

“날 사랑해?”

 

 

명료하게 정해진 대답만 요구할 뿐인 인터뷰가 계속된다. 전학생은 다시 침묵을 고수했다. 질문과 답변 사이에 찍혀야 할 마침표가 길어질수록, 샤프펜슬의 촉이 공책을 두드리는 소리가 강해졌다.

 

 

…….

…….

 

 

뚝.

 

 

샤프심이 부러졌다. 제노는 무표정한 얼굴로 샤프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노트를 덮었다.

 

“인터뷰가 너한테는 좀 어려운 것 같네.”

 

답이 없는 증인을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던 대법관이 말한다.

 

“놀이라고 생각해. 내가 질문하면, 너는 내가 원하는 답을 찾아내는 거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전학생이 여지없이 미소 지었다.

 

“인터뷰하고 싶은 대상을 잘 모르겠어서. 힌트 좀 줄 수 있어?”

 

 

인터뷰하고 싶은 대상…….

 

제노는 반대편 손으로 무심코 왼손의 약지를 문지른다. 전학생이 그려 준 ‘표시’가 물이나 시간에 휩쓸려 희미해진 이후로도, 푸른색의 볼펜으로 수십 번 덧그린 새파란 흉터가 엄지 지문의 요철을 따라 각립했다. 제노는 치켜뜬 눈으로 전학생의 손가락을 직시했다. 자신이 그려 둔 붉은 흉터는 간곳없이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제노에게는 남아 있는데.

그에게는 없다.

 

 

“나 좋아하는 애.”

 

 

반역이다.

 

 

“나 없으면 숨도 못 쉬고. 몸은 좀 약하고. 내가 싫은 티 내면 기절도 하는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하루 종일 궁리하다가 결국 나 기쁘게 하는 법을 찾아내는 애.”

 

전학생은 말없이 어딘가를 내려다봤다. 잠시간의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빈틈없이 땜질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려 시선을 맞춰 왔다. 이해했다는 듯이. 네가 나를 통해 보고 싶어 하는 존재를 껴입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사랑해?”

“응.”

 

제노는 전학생을 응시했다. 마치 누군가 돌아온 것처럼. 그저 그러기만 하는 적요가 이어졌다. 이윽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뜨려 둔 의자에서 일어섰다. 말쑥하게 다려 입은 동복 셔츠. 색 하나 묻어 있지 않은 검은 머리. 백건과 흑건의 집합이 그를 향해 기울어진다.

 

따뜻한 색채를 띠는 뺨. 웃지 않을 때에도 예쁘게 뜯기는 입술. 귀염성 있는 눈동자.

 

얼굴 위에 돋을새김처럼 각인된 이목구비를 손으로 더듬어 본다. 그 자리에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처럼.

 

두 사람 사이로 얄팍한 수조의 아크릴이 생겨난다. 어항 속에서 제노는 나직히 다음 문장을 뱉었다.

 

“사랑해.”

 

질문으로 위장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답 없이 홀로는 존재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전학생이 제노를 바라본다. 제노는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

 

“사랑해.”

“…….”

“사랑해.”

“나도.”

“나도는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야. 다시.”

“사랑해.”

 

전학생이 대답했다. 푹신한 배를 누르면 사랑해, 녹음된 목소리를 뱉어 내는 곰인형도 그보다는 달콤했다. 제노가 던지는 질문의 내용보다 그 질문 자체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그런 주제에 상냥한 음색을 덧씌워 그 너머의 무성의함을 감췄다. 벽돌을 넣은 눈사람. 얼기설기 붙여 둔 서늘한 눈을 떼어 내면, 걷어차는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들 흉기를 품고 있는.

 

제노는 들고 있던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사랑하는가?’

왜 이런 질문을 예비해 두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엇을 위한 문인지. 그가 내놓기를 원하던 대답은 무엇이었는지. 입속이 간지럽다. 토해 내고 싶어 온종일 입천장을 찌르고 간지럽히던 말이 혀뿌리를 치고 불쑥 튀어나왔다.

 

 

“너 같은 거 재미없어.”

 

 

파란 지느러미가 살랑인다.

수조 너머에 서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지느러미가 가리고 있다. 치우고 싶었다. 제노가 가장 아끼는 하프문 베타를 치우고서라도 보고 싶은 얼굴이 저 너머에 있는데. 약지처럼. 분명히 그 자리에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재미없어?”

 

조용한 질문이 넘어왔다. 날이 선 시선을 솟구었다. 인터뷰이는 답을 말하는 존재다. 한 곬만을 위해 앉혀 놓는 존재다. 질문은 나만 해. 함부로 변주하지 마. 그가 손 밖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통제 외로 이탈하지 않도록 엄격하게 교련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무람없는 연주자의 낯짝을 넘어다보는 순간.

 

 

언뜻.

 

 

지느러미 너머가.

 

 

제노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목전에 소년이 앉아 있다. 그는 분명 전학생의 얼굴을 했으나 이질적이었다. 떨리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덮어쌌다. 힘을 주어 꽉 움켜쥔 자리에는 여전히 다섯 개의 손가락이 만져졌다. 만져지는데도 믿을 수 없었다. 이게 약지인지. 갑작스럽게 돋아난 기형적인 육손인지.

 

 

“같이 있을 때 재미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소년의 눈매가 구붓하게 휘어진다. 웃을 때 속눈썹이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그림자를 드리우며 흔들렸다.

 

 

“내 생각 해 주는 사람.”

 

 

Q. 너 같은 건 재미없어.

A? 재미없어?

Q. …….

A? 같이 있을 때 재미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A? 내 생각 해 주는 사람.

 

…….

 

(그러니까.)

 

…….

 

(너한테는 재미없겠지.)

 

 

 

 

인터뷰어는 깨닫는다.

그는 ‘그것’의 얼굴이 될 수 없다. ‘그것’의 얼굴을 하고 제노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 얼굴은 그 자리에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분명히 만져지는데도 확인할 수는 없는 어떤 손가락처럼.

 

통제에서 벗어난 질답은 기록되지 않는다.

흔적이 없었으므로…… 잔혹했다.

 

 

 

*

 

 

상실의 연속.

 

 

약지를 잃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콩쿠르까지 남은 날짜가 하나씩 쓰러져 갈수록 제노의 연주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표식이 흐려질 때마다 그 위를 덧그리고 또 덧그렸다. 언뜻 손가락을 본 찬양이 몸에 좋지 않다고 우는소리를 했으나, 제노는 살갗이 팰 만큼 꿋꿋하게 볼펜으로 선을 둘렀다. 매일 저녁마다 전학생을 집에 들였다. 와, 라고 한마디만 하면 집 앞에는 그 애가 있었다. 이미 과제로써 완성된 인터뷰를 처음부터 다시 하고, 다시 하고, 또 다시 했다. 전학생의 말대로였다. 인터뷰는 거짓말 탐지기의 체계와 점차 유사해져 갔다. 의미 없는 단답형의 질문만을 무수히 답습할 뿐. 그 틈에서 상대의 거짓을 찾아내기도 했다.

 

손가락을 분명히 봤을 텐데도, 보이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노야,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려 줘……. 수전 아래 손을 비집어 씻으면서도 표식에는 물이 닿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을 때, 찬양이 애걸했다. 제노는 거울을 들여다봤다. 며칠 사이 눈에 띄게 강팔라진 얼굴이 똑같이 자신을 꿰뚫었다.

 

“문제가 아닌 게 문제지.”

“……무슨 말이야?”

 

유일한 문제는. 

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

 

이름을 불리지 않은 피아니스트는 세상에서 실종되듯이, 도외시당한 약지는 점차 미아가 되어 갔다.

 

 

 

인터뷰를 되풀이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제노는 이미 일곱 번씩 한 질문을 처음부터 반복했다. 어김없는 도돌이표였다.

 

“형제가 있습니까?”

“네.”

 

기계적으로 다음 질문을 읽으려던 제노는 문득,

패러다임이 깨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형제가 있습니까?”

“네.”

 

평이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제노는 쥐고 있던 노트를 밀어 치웠다. 순간 방 안이 어둡고 고요해졌다. 미묘하게 날이 돋은 목소리로 제노가 물었다. 여태까지랑 대답이 다른데. 이번이 거짓말이야, 지금껏 거짓말을 한 거야. 전학생은 도리어 고개를 갸울였다.

 

“거짓말은 한 번도 한 적 없어. 같은 사실에 변주를 줘서 조금 다르게 대답해 볼까…… 한 거지.”

 

첫날에 비해 부쩍 가까워진 거리. 어깻죽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네. 네. 아니요. 기본적인 단답형의 A들이 어지럽게 기록된 노트를 따라 시선을 굴리며 전학생은 미소를 지었다.

 

“죽은 형도 형제잖아.”

 

죽은 형.

그것은 분명히 새로운 대답이었다. 여기까지 와서야 전학생의 일면을 드러내는 답이기도 했다. 변화다. 기꺼운가? 제노는 시선을 내렸다.

 

 

“나 좋아해?” 

 

 

이변을 살해한다.

 

 

전학생이 웃었다. 짧게 웃는 숨소리 또한 낯설었다. 그는 울고 싶지는 않기에 웃는 사람 같았다. 반복의 굴레에 균열이 간다. 제노가 원치 않는 현상이었다. 괴로워도 반복되기를 바랐다. 매일 밤 그가 지느러미 너머의 얼굴로 나타나기를. 거듭 선을 깎는 제노의 약지가 결국은 잘려 나가더라도, 사랑해, 하면 사랑해, 하는 인형으로 앉아 있기를 바랐다.

 

“형이 있었는데 죽었거든.”

“나 좋아해?”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랬대.”

“그 질문은 끝났어. 날 좋아하냐고.”

 

제노는 고집스레 노트에 시선을 곤두박았다. 자신이 병들어 가는 약지를 외면했듯. 의미 없이 사각이는 펜촉에서 피 같은 잉크가 배어 나왔다.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났다. 노트 위에 얹힌 손끝이 시야에 걸렸다.

 

“사실 내 이름도 형 거였다더라.”

 

 

쾅.

말아 쥔 주먹이 책상을 내리쳤다.

 

 

“내가 언제 네 이야기 하라고 했어?”

 

 

알고 싶지 않음으로 중무장된 마음에 가시가 돋쳤다. 전학생은 방을 가로질렀다. 헤매는 일 없이 곧장 제노의 책장 앞으로 성큼 걸어간 그는 갑자기 책을 뽑기 시작했다. 한 권. 다시 한 권. 말릴 틈조차 없이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비로소 누군가를 다치고 망치려는 손짓. 그러나 분명 처음은 아닌 행위. 도대체 언제 집을 뒤진 거지? 그가 책을 네 권째 치워 냈을 때, 제노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목젖이 부푸는 느낌이었다. 무슨 짓이냐고, 왜 남의 책장을 뒤지냐고 쏘아붙여야 하는데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조여드는 목통을 가르고 소리를 비집으려는 찰나, 전학생이 책장 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액자였다.

 

“이 사람이지? 네가 인터뷰하고 있는 대상.”

 

숨을 들이켰다.

그게 거기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저걸 어떻게.

언제.

 

“어제 봤어. 청소하러 오신 아주머니께서 책장 치우고 꽂는 걸 깜빡하셨나 봐. 너 피아노 칠 때 좀 봤지.”

 

액자 속에서는 술래에게서 잊혀졌던 아이가 연약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사진 속 아이와 지독하게 닮은 얼굴이 같은 곡선을 그렸다. 닮은 게 아니다. 흉내였다. 단전에 숨이 고였다. 눈자위가 서늘하게 굳어져 깜빡일 수조차 없었다. 손에 액자를 든 그림자가 완벽하게 정지한 제노를 향해 기울어진다.

 

“괜찮아. 그게 쉬워.”

 

나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대리였거든. 치기가 말라붙은 건조한 얼굴에 그 애가 걸쳐진다. 낯설고 익숙한 반쪽짜리 미소가 붉은 볕에 잠긴다. 개와 늑대가 구분되지 않는 시간.

 

 

 

*

 

 

 

얼굴을 벗겨 버리고 싶었다.

 

 

 

자리에서 튀어 나간 제노가 그의 가슴팍을 뻐세게 밀어붙였다. 저항의 의도가 담기지 않은 몸이 침대 위로 너끈히 무너졌다. 채 정리되지 못한 문장이 솎이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왜 다 내가 시켜서 하는 것처럼 굴어.”

“…….”

“나한테 아무 관심도 없으면서.”

“…….”

“왜 자꾸, 흉내를 내냐고.”

 

기가 뒤틀렸다. 주화입마의 상태에서 제노는 그를 노려봤다. 압판으로 뭉근하게 찍어 누르듯 억압된 음성을 한 글자씩 내뱉었다.

 

“내가 제일 큰 문제여야지, 너한테는.”

 

목소리가 우들우들 떨렸다. 억울하기 그지없는 참변을 당해 성토하는 듯한 제노를 전학생은 멀거니 올려다봤다. 시선에 난자당하면서도 그는 별세계에 있는 사람 같았다. 산치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그는 왜 아직도 전학생이지? 전학생에서 ‘전’이 떨어지려면, 얼마큼의 시간이 지나야 하는 거지? 그에게 형태라는 게, 이름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아니지…….”

“…….”

“우리가 하는 놀이는 그런 게 아니잖아.”

“…….”

“네가 질문을 하면 나는 네가 원하는 답을 찾는 그런 놀이를 하고 있는 거잖아, 우리는.”

 

경동맥이 팔딱거렸다. 가량없이 죄어들던 목구멍에서는 실낱 같은 음성조차 비집을 수 없었다. 속눈썹의 그림자가 점차 묵직해졌다.

 

“사랑하냐고 물어봐.”

“…….”

“대답 안 궁금해?”

 

뒤통수를 뚫고 점막에 모인 형광등 빛이 한 점을 이룬다. 덩어리져 모인 빛이 바닥없이 낙하한다. 위에서부터 한 방울 뚝 떨어진 눈물이 전학생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웃음기를 지운 채 손을 뻗었다. 마른 이불처럼 건조하고 따뜻한 손이 제노의 뺨가죽에 닿는다. 제노는 동공을 비껴 그 손의 행적을 좇는다.

 

“내가 재미있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리고 문득.

자신의 눈물이 묻은 약지를 찾아낸다.

 

 

붉은 표식. 한참 전에 사라졌어야 할 그것이 온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 여태 보지 못했을까. 자신이 표시해 놓고.

 

제노는 깨닫는다. 약지를 잃어버린 것은 진실로 그것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제대로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설령 선명한 표식이 남아 있더라도 영원히 잃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름을 불리지 못하는 피아니스트가 세계에서 종적을 감춰 버리는 사건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찾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척추를 구성하는 골조처럼 단단한 손아귀가 제노의 허리를 감았다. 전학생은 내내 까부라져 있던 몸을 가뿐히 일으켰다. 심장의 위치가 포개어지기를 잠시, 그는 제노의 등줄기를 받친 채 부드럽게 넘어뜨렸다. 저항의 의도를 담고자 하지 않은 몸이 침대 위로 허물어졌다. 오래전부터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듯한 눈빛이 제노의 이목구비를 다감하게 문질렀다. 그가 가진 단단함과는 달리 농도 옅은 손길이 동복 셔츠를 비집고 기어 들어왔다.

 

 

향의 집합체.

비누. 캐러멜. 그게 아니면 섬유유연제. 의미 없는 독립이 모여 하나를 이룬다.

 

 

제노는 그의 뒷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춘다.

 

“넌 이미 내가 재미있잖아.”

 

 

 

파괴와 창조는 동시에 이루어진다.

 

 

 

*

 

 

 

가슴팍 위로 그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제노는 얼굴을 틀어 창밖을 내다봤다. 더는 개와 늑대를 헷갈릴 시간이 아니다. 개도 늑대도 식별할 수 없는 어둠의 횡포. 살결을 헤엄하듯 나부죽이 산들거리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파란색은 별로 안 어울려.”

 

전학생은 경사지게 기울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진의를 묻는 대신 곤죽이 된 제노의 약지에 입술을 찍었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드랍고 세심하게.

 

다른 손가락들과 달리, 약지는 대부분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다.

약지를 지탱하는 관절은 비틀어져 있거나 건강하지 않은 선을 그린다.

약지가 유독 외부의 충격에 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래서 보호구가 필요한 거야.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대는 것처럼.”

“피아니스트더러 손가락에 부목을 대라는 건가.”

“그것보다 좋은 거.”

 

널브러진 옷 속을 걸터듬은 전학생이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이 제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덫처럼 물렸다. 샅을 파고드는 미지근한 금속의 느낌에 제노는 손을 들어 올렸다. 얼비치는 달빛을 받은 은색 반지가 천사의 헤일로처럼 반짝인다.

 

 

“결국 넌 찾아낼 거야.”

 

 

조용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린다.

그가 지칭하는 바가 손가락이 아님을 안다.

 

 

“네 약지가 독립하는 날에 버려.”

 

 

음악을 다루는 손은 섬세하다. 고작 반지 하나를 끼우는 것만으로도 연주의 음색을 뒤바꿀 수 있을 정도로. 제노는 말없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문질렀다. 턱 밑으로 시선이 타고 오른다. 다시 그를 바라봤다. 손 줘 봐. 말 한마디에 순순히 내밀어진 손을 쥐고, 제노는 똑같은 세기로 그의 약지를 문질렀다. 붉은색이 지워진다. 표식이. 다른 이름이 걸린 낙인이 사라진다.

 

 

같이 벌받지는 마.

사랑이 아니면…….

 

 

없는 것을 보던 소년과 있는 것을 보지 못하던 소년이 각자의 독립을 이룬다.

 

 

 

*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 박수를 쳤다. 무대 뒤편에서 중앙으로 걸어 나온 제노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76*50*36 사이즈의 좁은 공간에 몸을 욱여넣었다. 백건 위에 혁명을. 아홉 개의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

 

 

폴로네이즈 제6번 <영웅>은 쇼팽의 작품들 가운데 한 정점을 이루는 것으로 칭송받는다. 쇼팽의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는 곡을 감상한 직후 편지 속에 이러한 내용을 남겼다:

 

 

영감! 힘! 활기! 의심의 여지가 없어. 지금부터 이 폴로네이즈는 상징이 되어야 해. 영웅적인 상징!

 

 

(연주가 시작된다)

 

 

주변의 모습을 반사할 뿐인 색. 색깔이라고 볼 수 없는 색. 더는 검지도, 붉지도, 파랗지도 않은 약지의 표식을 건반에 위치시킨다. 존재가 보이는 것과 위치가 보이는 것은 다르다. 멀리 있어 볼 수 없는 것과 가까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것이 다르듯. 연주자는 자연스럽게 존재 자체보다 존재의 위치를 인식한다. 파동의 동심원처럼 둘린 연약한 궤적이 백건과 흑건의 치열을 훑는다. 구둣발을 비스듬히 들어 올린다. 페달을 밟을 적마다 개인 교사에게 들었던 채찍질이 귓전을 맴돈다. 세게, 세게! 조금 더 세게! 

 

 

비누. 캐러멜. 섬유유연제.

선형을 그리는 입꼬리. 무언가를 끊임없이 잡아당기던 눈동자.

모든 무의의가 모여 의의가 되는 순간.

 

 

그 순간은 창조와 같다. 손가락을 부유하는 천사의 헤일로 뒤편으로 다른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질문 노트에 들이그은 구분선과는 명백히 다른 성질을 지닌 흔적. 누군가 있는 힘껏 물어뜯은 듯한 상처.

 

 

결국 넌 찾아낼 거야.

 

 

눈을 깜빡인다. 손샅에 살 뿌리가 내려온다. 다시 눈을 깜빡인다. 비어 있던 약지가 돋아난다. 무너졌을 때에는 누군가 뽑아낸 것마냥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던 것이, 일어설 때에는 눈이 쌓이듯 천천히 존재감을 부풀린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약지는 더 이상 숫자가 아닌 실체로써 존재를 증명한다. 문득. 파괴에 대한 욕구가 오장육부를 달군다. 부수고 싶다. 제노는

 

 

네 약지가 독립하는 날에 버려.

 

 

1.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헤아린다.

2. 연주를 멈춘다.

3. 고개를 돌려 관객들을 바라본다.

4. 반지를 빼낸다.

 

 

4분 21초 대의 자살이었다.

 

 

 

 

 

<제4회 이레 전국 고등학생 콩쿠르>

 

 

X배너 앞에 사람이 서 있다. 작은 키에 큰 덩치를 가진 불완전한 사람. 잔가지를 반으로 꺾어 박은 눈이 소년을 바라본다. 마찬가지로 잔가지를 굽혀 붙인 입이 소년을 향해 웃는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

 

이 무게가 뜻하는 바를 알고 있다. 아버지의 유예 또한 인내를 다했을 것이다. 노기 섞인 한숨을 곤두뱉는 아버지를 등진 채 제노는 눈사람의 머리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우리가 아무리 운이 좋다고 한들 세 번째 기회는 없을 거다.”

 

부지중 언성을 높인 그가 저 멀리 대기 중인 운전기사를 곁눈질했다. 우선 집으로 가자. 가서 마저 이야기해. 눈길을 밟아 앞서는 아버지의 뒷등 너머로 오도카니 멎어선 제노는 자신의 약지를 내려다본다. 새하얀 눈 속에서 살처럼 돋아난 목소리가 문득 귀를 울린다. 타인의 이름을 벽돌처럼 박고 살아가던 ___가 있었다. ___의 것이 아니던 질문들이 있었다. 그 자리에 애진작 채웠어야 했을 이름. 수십 번 도려냈던 약지를 응시하던 제노는.

 

 

 

 

“재민이는 뭐 하고 지낼까요.”

 

 

 

 

주먹을 쥐고 손가락 하나를 펴 보아라. 다른 손가락들은 세 번째 마디까지 들어 올려 손등과 거의 직선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넷째 손가락의 마디는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아 직선을 만들기가 힘들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4번의 독립은 가능할지 모른다.

 

 

불청객은 돌아갈 때 가장 큰 박수를 받는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식iN]

Q. 손가락이 사라지면 어떻게 하죠

만약에 있던 손가락이 없어지면 어떻게 살아가나ㅛㅇ

비공개 · 2010.10.04 · 조회수 53,652

 

A 2개

질문자 채택

 

찾아야죠.

 

 

 

 

 

 

 

 

 

 

 

폴로네이즈와 상징

재민이는 뭐 하고 지낼까요.

 

아버지는 깨닫는다. 이 폴로네이즈는 그들의 상징이 될 수 없음을. 그러므로 나쁜 교육이 향해야 할 방향은 더욱 뚜렷해진다.

 

[여보세요.]

과외 구하신다는 분 맞으십니까?

[아… 맞아요. 과외 알아보려고 전화 주셨어요?]

예. 사이트에 올려두신 사진과 이력서를 보았습니다. 아이를 꼭 선생님께 맡기고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