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 19세 이상 관람가 분량은 추후 소장본에 수록됩니다
다큐멘터리의 시작은 불순했다.
전라도 목포에서 정우성 원빈 강동원으로 불리던 고등학생 나나는 일찍부터 자신의 진로를 깨우치고 싸모 따라 서울로 상경했다. 벌써 3년 전 얘기다. 지금은 강남 어드메 퍼블릭 호빠에서 기둥서방으로 전직해 여자 집에 눌러앉았다는데. 팔자 고쳤냐고? 글쎄.
이것은 한 낭만주의 호빠 선수의 혐오스러운 일생을 관음하고자 시작한 이야기가 아니다.
앵글을 바꾸기에 앞서, 우선 계기를 조명해 본다.
마이킹 : 가오는 렌트가 된다
마이킹의 유래는 일본어로 가불을 뜻하는 마에가리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군대에서도 쓰이는 용어인데, 휴가 나갈 때 가오 세우려고 계급장 땡겨쓰는 걸 그렇게 부른다고. 나나는 지금까지 너무 많은 걸 땡겨썼다. 그러나 인생은 후까시고 가오는 렌트가 된다. 그 진리가 가장 통용되는 업소에서 우리의 나나가 일하고 있다.
“지난달에 이백 받고 또 땡겨간다고?”
김 실장이 혀를 찼다. 너 그러다 골로 간다. 천 넘어가면 억 찍는 거 순식간이야. 쪼인트를 까이고도 나나는 꿋꿋하게 뻗댔다. 그의 마이킹은 오천 밖에 안 된다. 다들 집 구한다고 일억, 이 억씩도 빌려다 쓰는데, 고작 오천 가지고 나나 인생만 골로 갈 이유는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랑. 사랑 때문인데.
다섯 번째 연애가 저문 것은 작년이었다. 지금 만나는 옥주 누나는 호빠로 복귀한 직후에 사귀게 됐다. 난 군필이 좋아. 싸젯물 덜 들어서 순박하잖아. 군 복무를 의경으로 한 나나는 옥주의 착각을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짭군필이라는 고백 대신, 군바리들이 종종 여자 마음 달랜다고 사오는 달팽이 크림을 쿠팡에서 주문도 해봤다. 별 지랄을 다 한다고 투덜거리던 찬이가 튼 팔꿈치에나 찍어 발랐다.
지랄…… 나나가 보아온 모든 연애에는 늘 지랄이 따라왔다. 선수에게 지랄하는 손님. 손님에게 지랄하는 선수. 정 마담에게 지랄하는 찬이. 나나에게 지랄하는 김 실장. 그리고 나나가 본 바로 지랄의 근본은 ‘내 말 좀 들어라’. 즉 ‘날 좀 봐달라’에 있었다.
“나나. 우리 다다음달까지 집 빼야 해.”
“왜요?”
“집주인이 전세금 올린대. 근데 내가 지난달에 우리 할머니 병원비 때문에 보증금을 좀 빼서 썼거든….”
나나는 옥주를 위해 ‘지랄’을 감수하기로 했다. 옥주가 나나와 같이 살고 싶다고 했으니까. 같이 살고 싶지만, 돈 때문에, 사정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그렇게 될 일이 아닌데, 할머니가 아팠고, 지난달 블랙프라이데이에 쇼핑을 조금 무리했고, 네 생일 선물을 사느라 현금서비스를 썼고, 그러다 보니 보증금이 여위었고,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함께 살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옥주 누나 얼굴이 정말 슬퍼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 슬퍼하게 두기 싫어서. 나나는 할 수 있는 걸 해야 했다.
결국 나나의 '지랄'이 이겼다. 김 실장은 '지랄맞은 새끼'라는 인정과 함께 오백 중 이백을 땡겨주었다. 마담, 우리도 마이킹 이거 없애자니까요? 자꾸 떼주니까 얘네가 무슨 무이자 현금서비스인 줄 알잖아요. 자기 전용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정 마담이 흘긋하게 웃었다.
“빚으로 묶어놔야 점프 안 뛰고 열심히 일하지. 그리고 난 반드시 받아내잖아…….”
“......”
“열심히 일해. 장기 너무 건강하지 않게.”
나나는 조금 쫄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갚으면 되니까. 나나가 쥘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다. 태생적 한계. 생래적인 품격이 가난했다. 다행히 여기서 가오는 렌트가 된다. 나나는 연애라는 휴가를 위해 조금, 미리 땡겨오는 것뿐이다. 돈 좀 모아라. 미래 대비해야지. 다들 어디서 배운 것처럼 똑같은 말을 해도, 나나는 옥주가 없는 미래 따위는 필요 없었다. 나나의 계산으로 지금처럼만 벌면 모자람 없이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사랑까지 계산했어야 했다. 마음은 돈으로 잴 수 없다는 고집이 늘 나나의 지갑 사정에 결정적인 미스를 낳았다.
[누나]
[입금 확인했어요?]
[우리 이제 이사 안 가도 돼]
[이따 저녁에 갈게]
옥주 집으로 가는 건 사흘 만이었다. 옥주는 집을 정리해야 하니 일주일 정도는 오지 말라고 했지만, 나나는 당장 이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말도 없이 집에 찾아갔다. 택시를 타고 가는 내내 마음이 설렜다. 말했을 때 옥주는 기뻐할까. 당장 같이 살자고 할까. 나나는 몸만 들어가면 되는데. 익숙한 도어락 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그때 나나가 조금만 덜 취했어도, 현관에 놓인 신발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취한 걸음이 몸을 침실로 비틀비틀 이끌었다. “누나, 우리 돈 나왔어. 같이 살 수 있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누나를 이불째로 끌어안고 사랑스럽게 코끝을 비볐다. 이불속에서 미약한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누나. 미안. 자고 있었어? 나 깨우려던 건 아닌데…” 그러면서 팔에 힘을 주던 나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집 밖을 나서기 전, 가스를 껐던가 하고 돌아보게 되는 그런 류의.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나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왠지 확인해보기 무서웠다. 평소에 끌어안던 느낌보다 단단하고 두터운 부피감 속에 든 게 옥주라고 믿고 싶었다. 심호흡을 하고 이불을 걷었다. 가장 먼저 나나를 반긴 것은 눈이었다. 졸음에 잠긴 검은 두 눈이 나나를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누구세요…?“
나나는 이불 속에 안긴 사람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입매에 매달려있던 미소가 느슨하게 미끄러졌다. 문득 김 실장의 실없는 농담을 떠올렸다. 애인 집에 모르는 남자가 누워있는 경우는 세 종류야. 숨겨둔 애인이거나, 가족인 척 숨겨둔 애인이거나, 숨길 생각도 없는 애인이거나.
그리고,
앵글이 돌아간다.
어떤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볼까.
이제노에게 상식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스물 남짓한 삶은 정상의 가두리 안에서 양식되었다. 일렬 하자면 경기도 성남. 수능 등급은 남들 하는 만큼보다도 조금 더. 결괏값이 나쁘지 않아 대학교를 빌미 삼아 상경했다. 등록금을 내는 데 남의 돈이 필요하지 않은 수준의 다복한 가정. 이렇다 할 인간 군상을 만날 일도 없이 공군에 지원해 무난하게 전역했다. 고등학교 때 남고에 재학하면서도 동급생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우쳤지만 이마저도 평범한 삶의 간을 맞추는 정도다. 성정 자체가 예사로운 덕에 사랑에 번민한 바 없으니 괴로운 일도 없다. 타인에게 들킬 만큼 못다 한 사랑이 넘친 적도 없었다는 뜻이다.
이제노가 가진 결핍. 이렇다 할 분량의 독창적인 역사. 사색이 필요한 상식 장외의 사건. 이를테면 이 삶의 지엽적 특성이란 누가 봐도 믿을 수 있음. 이제노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음. 따위로 정의 내릴 수 있었단 말인데.
“혹시, 애인….”
“네?”
“애인이세요?”
“누구의? 그쪽의?”
“옥주 누나…… 애인이시냐고요.”
그리고 이제노는 억울한 개의 표정을 안다.
어쩌자고 이 남자는 나를 안아 눈썹을 누인단 말인가? 불과 세 시간 전까지 배를 채운 찌개, 마카로니, 진로 소주와 깨지 못한 밤잠이 몸 곳곳에 진득하게 엉겨 붙어 있다. 이제노는 남자의 두툼한 팔 안에 주검처럼 안겨 눈을 끔뻑거린다. 왜 나를 계속 안고 계시는지. 도대체 어떻게 소리 소문 없이 입주 1일 차 자취방에 무단으로 침입했는지. 다독다독 되짚고서야 이제노는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다시 설정하지 않은 자신의 책을 떠올린다.
“옥주 누나랑 언제부터 만났어요? 저보다 먼저 만나셨으면, 그러면… 제가 내연남이니까.”
그렇게 묻는 얼굴은 흡사 바람맞은 남자보다도 8차선 도로 한가운데 사료 한 줌과 버려진 개의 것과 같다. 남자는 옥주 씨와의 진상을 촉구하면서도 여전히 이제노를 안고 있다. 이불을 둘러 안은 품은 열탕의 수막처럼 무르고 덥다. 겨울바람을 머금은 코트 깃에서 쌉싸름한 새벽의 냄새가 났다. 깜빡. 신발장 센서등이 꺼진다. 남자의 곱살한 눈과 코와 입을 어루만지던 조광이 삽시간에 물러선다. 이제노는 기억을 더듬는다. 이 낯선 품, 그리고 도통 이 투룸에 어울리지 않게 잘 다듬어진 얼굴을 알고 있는지. 아니. 데이터베이스에 없다. 어둠에 젖은 남자의 뺨을 더듬어보았다. 잎살이 참수된 목련 같은 촉감. 모르는 골격이다.
이제노는 아직 술에 취해 있다. 이 모든 필연적인 공교로움을 설명하기에 앞서. 1. 이제노는 제대 후 복학 학기에 맞춰 새로운 자취방으로 이사했다. 2. 텐은 이제노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3. 새로 개업한 오뎅바에서 진로 소주 여섯 병을 깠다. 따라서 이제노가 불과 3시간 전까지 집 앞 오뎅바에서 진로 소주 세 병을 마셨다는 점, 현재 시각이 상당히 이슥한 심야라는 점은 분명히 참작되어야 하며.
“저는 옥주가 아니고 제노예요.”
“노예… 요? 옥주 누나가 왜 그쪽 노예예요?”
“......”
따라서 이 다큐멘터리의 시작은 상당히 불순하다.
더티 앵글
옥주는 사치스러운 씀씀이에 비해 생활력이 있었다. 그런 점은 나나가 옥주를 좋아하는 까닭이 되기도 했다. 신논현이나 선릉이 아니라 대학가에 사는 부분도 그랬다. 옥주가 말하기를 같은 2호선이라도 대학가는 보증금이 더 저렴하다고. 찬이를 포함한 직장 동료들이 지척으로 퇴근할 때 나나는 야간 할증이 붙은 택시를 탔다. 따라서 귀가 시각은 언제나 조금 더 야심한 새벽.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옥주와 얼굴 볼 시간도 주로 이때다. 만나면 옥주와 나나, 둘 중 하나는 꼭 취해 있었다. 둘 다 취해 있을 때도 더 많았다. 그런 때마다 그들은 집 앞 순댓국밥집에서 속을 풀었다. 3차를 오거나 친목을 모이기 위해. 오종종하게 모인 다른 생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 번 적응한 길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나나는, 낯선 이와 진중한 이야기를 나눌 곳으로 가장 익숙한 장소를 택했다.
순대… 좋아하세요?
저 근데 토할 것 같은데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나요.
아…
국밥집으로 어색한 침묵이 내렸다. 집에서 이불째로 끌어안은 뒤로 계속 이 정도 대화의 반복이었다. 나나는 열쩍게 순대국밥을 두 개 시켰다. 고민하다 소주도 추가. 도무지 이 상황을 맨정신으로 긋고 가기가 어려웠다. 지금 눈앞에 앉은 이 남자. 술 냄새가 나는 옥주인 줄 알았으나, 술 냄새가 나는 남자였던, 나나로서는 도무지 처음 보는 얼굴인 그는 자신을 제노라고(노예가 아니었다) 소개했다. 건조한 통성명. 애인의 내연남치고 슴슴한 반응이었다.
아니… 어느 쪽이 내연남일까.
따져보면 이런 상황에서 주로 대타의 위치에 놓이는 것은 나나였다. 남편 대타. 남친 대타. 무언가 평범한 삶 속에선 해갈될 수 없는 욕망의 대타… 그런 나나가 무슨 자신감으로 감히 옥주 누나의 진짜 애인을 자처했을까. 진짜는 저쪽일지도 모르는데.
“총각. 맨날 같이 취해서 오던 언니는 어디 갔어?”
사장님이 나나를 알아보고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나나는 빈 술잔을 들여다보았다. 모르겠어요. 어디 간 걸까요. 갔다 오는 게 아니고, 영영 가버린 걸까요. 하루 만에 세간 살림이 싹 사라졌어요. 그 집에 낯선 남자가 들어왔어요. 이백만 원을 보낸 지 6시간이 지났는데도 1이 사라지지 않아요.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이 사실 이백만 원짜리였어요. 이 복잡한 산수 문제의 답이 그렇게 쉬워도 되는 걸까요.
화장실에 다녀온 제노가 자리에 앉았다. 나나는 재까닥 술병을 들었다. 상대의 잔이 마르게 두지 않는 건 직업병이었다. 술 시중을 들 상대를 관찰하는 것도.
사막 같다.
부석부석한 머리. 눈물점이 무색하게도 건조무미한 눈동자. 분명히 취했을 텐데, 거기에 또 술을 붓는 건데도, 물에 물 탄 듯 희멀겋고 묽은 낯빛. 그는 게우고 온 사람답지 않게 나나가 채우는 잔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나의 만성적인 직업병과는 성질이 달랐다. 비우는 척 없이, 어디 버리는 척 없이, 묵묵하고 꿋꿋하게 꽉꽉 쌓인 잔을 비워냈다. 매번 어설프게 고개를 꺾거나 가슴을 가리는 예절을 보면 아마 아버지나 어른에게 술을 배웠을 것이다. 다른 말로는 술을 가르쳐줄 아버지나 어른이 있다는 뜻.
절대로 나나와 어울릴 일이 없는 인종.
나나는 어색하게 술잔을 매만졌다. 어떻게 대해야 하나.
“내가 졸려서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상대가 먼저 침묵을 깼다.
“우선… 저는 옥주라는 사람의 애인이 아니에요.”
“아.”
“전에 살던 세입자 이름이 그랬던 것 같긴 하네요. 방 보러 갔을 때 들었거든요. 낮에 갔는데 자느라 문을 안 열어주셔서…….”
“네…”
“전 이번 주에 이사 왔고, 아직 못 푼 짐도 많아요. 아까 보셨겠지만.”
복부에서부터 맥 빠진 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구나. 애인이 아니구나. 하긴 애인이면 옥주만 혼자 쏙 사라지진 않았겠지. 그럼 나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찔을 부린 거다. 자연히 눈이 깔린다.
죄송해요. 진심 어린 사과.
아니에요. 형식적인 용서.
제가 옥주 누나 집에 얹혀살았거든요. 제 보증금도 들어 있었고. 변명.
그러시구나. 무관심.
다시 침묵이 내렸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제노가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사람 죄인 만드는 한숨이다. 하지만 나나는 죄인이 맞긴 했다. 함부로 남의 집을 비틀어 열었으니까. 집주인을 끌어안기까지 했으니까. 내 집이 남 집이 되는 줄도 몰랐으니까. 사랑 하나 똑바로 신경 쓰질 못해서, 옥주 누나가 혼자서 먼저 떠나게 만들었으니까… 그러니까. 죄송하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죄송하다고. 혹시라도 옥주 누나에게서 연락이 오면. 그때 알려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지잉. 지잉. 지잉….
두 사람은 동시에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제 거네요. 나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노는 말없이 흘끗 자기 휴대폰을 눈짓했다. 그의 휴대폰도 울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동시에 전화를 받는다.
“누나. 지금 어디야?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연락 그만 하라니까. 정환아.”
멈칫.
나나와 제노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일단 나나는 정환이란 이름의 남성미에 반응했다. 친구인가?)
“어… 보증금이 모자란다는 게 무슨 말이야, 누나?”
“너랑 다시 시작할 생각 없어. 다 끝난 사이에 연락받는 거 불편해.”
(친구가 아닌가?)
“이백만 원이면 된다고 했잖아. 그래서 보낸 건데…”
“정환아. 우리 대학에서 또 얼굴 봐야 하잖아. 이러지 말고 좀…”
“울지 마, 누나. 정환이랑은… 아니, 집주인이랑은 얘기해봤어?”
“다신 새벽같이 울지 마… 아냐. 말이 헛나왔어. 연락하지 말라고.”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누나, 지금 다른 사람이랑 있어서…”
“무슨 딴 남자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끊어.”
뚝.
동시에 통화를 끊었다.
혼선이 난무하던 통화였다. 둘은 휴대폰을 쥔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젠 익숙해진 어색함이 조용히 감돌았다.
“방금은…”
“아 네. 그냥 전 애인…”
“아… 전 옥주 누나가…”
“네…”
물어도 될까. 고민하던 끝에 그냥 물었다. 애인이 되게… 집착하시나 봐요? 넌지시 건넨 말에 제노는 아무 말이 없다. 묵묵하게 눈을 깜빡이다 나나를 올려다본다. 이런 내밀한 대화가 과연 오늘 처음 만난, 그것도 자신을 예고 없이 끌어안은 가택 침입자와 나누기 적합한지를 재는 표정이었다.
집착까진 아니고…… 그냥 제가 좀 드라이한 거 같아요.
드라이요?
화류계와는 연관 없는 수사였다. 호빠는 물이 마를 새가 없으니까. 모두가 쩐으로 묶인 비즈니스처럼 보여도, 까보면 진창도 이런 개골창이 따로 없다. 사랑은 반드시 기만으로 끝. 싸구려 치정은 드라마도 되지 못했다. 이곳에서 사랑을 찾는 건 나나 뿐이었다. 응달에 핀 이끼 중에서도 가장 축축하고 미끈거리는 놈.
제노가 부러웠다.
잘 젖지 않는다는 건 강함이니까.
사연에 좌지우지되는 법 없이, 함부로 센티멘탈에 젖지 않는 견고한 인생. 한참 전에 셀프 호구 진단 내리고 순응한 지 오래인 나나와는 딴판이다. 나나는 이런 마른 모래 같은 사람과 소통하는 법을 몰랐다. 불쌍한 태도를 취해야 할까. 쉽게 젖지 않을 텐데. 아니면 화를 내볼까. 금세 꺼질 것 같은데. 휴대폰을 문지르던 제노가 눈을 들었다.
“그래서… 그쪽은 잘 안 풀렸나 보네요. 옥주 누나란 사람이랑.”
“…….”
“갈 곳은 있어요?”
나나는 드라이한 남자의 눈을 보았다. 얄팍한 실핏줄이 서 있었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아프리카의 뿔이 떠올랐다. 물고기조차 말라죽은 강바닥의 갈라진 땅.
사막과 물고기
갈 곳은 있냐고 물었다. 없는 걸 알면서도.
나나는 고개를 저었다.
잘 곳은요.
또 저었다.
“원래 있던 집은 없어요? 아예 뺐어요?”
“네. 옥주 누나네 집에 얹혀살았어요.”
“무슨, 비상금 같은 것도 다?”
“네. 긁어모을 것도 없어서 땡겼는데요.”
“지금 수중에 얼마가 있는데요?”
“7만원쯤… 모듬회 2인분 한 번 시킬 수 있을 정도.”
나나가 잘못을 저지른 개처럼 이제노를 올려다보았다. 숟가락으로 국밥의 뚝배기 바닥을 긁는 소리가 시무룩하게 느껴졌다. 이제노가 그를 혼낼 리도 없는데. 물론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개노답에 생각도 없는지 좀 궁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불순한 궁금증이 나나의 삶에 궁극적인 영향을 끼칠 것도 아닐진대. 이제노는 나나와 유리된 완전한 타인인데. 상당한 수준의 염려가 그 얼굴에 깃들어 있다. 이제노는 그가 몇 살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의식주를 담보 삼아 사랑을 좇는 인간을 실제로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전역 후 이제 겨우 귀밑머리를 기른 이제노가 참작하기에도 꽤 무모했다.
이제노가 나나를 주거침입죄로 파출소에 처넣지 않은 이유는 단 두 가지였다. 그는 외적으로 유약하고 섬세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달콤하고 연약한 디저트나 관상용 열대어 같았다. 디저트가 타인을 향해 나쁜 마음을 먹는다 해도 뭐… 그냥 달콤하겠지. 그런 사람이 파출소에 들어갔다간 엄지손가락으로 누른 밀푀유처럼 겹겹이 부드럽게 으스러질 것이다. 첩첩하게 내리깔려 처연한 속눈썹. 얼굴을 구성하는 이목구비의 선이 날카롭지만 맹렬하지 않다. 집을 통째로 잃어버렸다면서도 사람을 함부로 쏘아보지 않는다. 보증금을 날려 먹었다면서도 호기가 없었다. 그 점에서, 나나는 바보 같을지언정 한심해 보이진 않았다.
“그럼 돈은 어떻게 갚아요?”
“어… 이, 일해서.”
“일이요?”
“네. 약간… 서비스업.”
서비스업…… 이제노는 무심코 나나를 훑는 시선을 다잡는다. 서비스업과 풀어헤친 가슴팍의 상관관계를 어림한다. 아쉽게도 구체적인 상상까진 닿지 못했다. 주색잡기라면 가방끈이 짧았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평범한 복학생 이제노의 주변에 저렇게 가슴팍을 풀어헤치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게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나나가 입은 옷의 마감을 볼 때 브랜드가 싸구려 같지는 않았다. 다른 의미로… 저렴해 보이긴 했지만. 춥지도 않나. 이제노는 눈 둘 바를 몰라 순대국밥을 훌쩍거렸다. 국물은 식지 않아 뜨거웠다. 이유 모르게 귀가 붉어진 나나는 묵묵히 소주잔만 채운다. 꼴꼴꼴.
“짐 옮기시는 거 봤어요?”
“그냥 이삿짐센터 왔다 갔다 하던 것만.”
“이런 날에 이사하려면 힘들었겠죠….”
당장 잘 데가 없는 자신의 처지머리보다도 옥주가 그리워 슬픈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제노였다면 고소장 작성하는 법부터 검색했겠다. 엄마나 경찰서에 전화를 하거나. 하지만 나나는 누구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다. 옥주에게조차. 애달픈 눈을 할 뿐이다. ……킬바사 소시지 같은 어깨를 움츠리고.
가족은 있을까? 외람된 의문이긴 하지만 상황이 그랬다. 사랑도 돈도 잃었다고 투정 부릴 정서적 보호자가 있기는 한 걸까. 나나의 사정이 이제노의 알 바는 아니었으나 이 궁금증은 온전한 휴머니즘이다. 소주잔을 비운 나나가 다시 뚝배기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통이 참 작았다. 저렇게 작아서 사기를 당하나 싶을 정도로.
“갈 친구 집도 없어요?”
“일단 쫑구한테 전화해볼게요.”
그게 누군데. 나나가 급하게 휴대폰을 꺼냈다. 잠시 후. 전화기 너머에서 높은 언성이 들려왔다. 이 씨발 토트넘(이제노는 굳이 따지자면 아스널의 팬이었다)으로 시작해서, 마핸 쌌다 끊어까지, 욕 말고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딱 봐도 사회적 교양과는 담쌓은 사람 같았다. 정말… 서비스업? 시종일관 거칠던 전화가 뚝 끊겼다. 나나는 텅 빈 접시를 보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찬이…”
받지도 않았다. 아마 자고 있을 거예요… 나나가 시무룩하게 부연했다.
“그럼…”
세 번째 전화를 걸기 위해 번호를 누르던 나나가 아, 짧게 탄식했다.
“배터리가…”
….
여기서 나를 보면 뭐 어쩌란 건가 싶었다.
이제노는 한숨을 쉬었다. 딱 보니까 일 끝나고 뒤풀이로 술 마시다 온 것 같은데. 소주로 머리를 빨았나 싶을 정도로 술 냄새가 절절 끓고. 눈 아래는 시커멓고 셔츠는 가슴팍까지… 풀어헤쳤는데 가슴이 볼수록 정말 크다. 애인한테 소박에 사기까지 콤보로 처맞은 불쌍한 꼬라지랍시고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뭐……
그 부뚜막 위 송아지 같은 눈으로 쳐다보면 내가 뭐…
…내가 뭐 호락호락하게, 그렇게 쉽게.
“일단 배터리 충전할 동안만 몸 좀 누였다 가세요.”
다시 말하지만 이 마음은 휴머니즘이다.
나나와 이제노는 폰 기종이 꼭 같았다. 핸드폰을 충전할 동안 화장실까지 빌려주면 시간이 딱 될 것 같았다. 대번에 얼굴이 갠 나나가 해사하게 웃었다. 여느 남자애 같지 않았다. 해바라기 같다. 까까머리 틈바구니에서 막 벗어난 이제노도 좀 헉, 싶을 정도로. 속이 좀 탔다. 냅다 비운 소주잔을 다시 채워주는 손길이 곱고 그윽하고 신속했다.
이제노가 파출소에 가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노는 낯(짝)을 가린다. 육체파 미인이라면 더.
근데 이름이 진짜로 나나예요?
…….
세속적인 육신과 동떨어진 그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
낭만주이 관찰 일기
2월 00일
원래 일기를 잘 안 쓰는데 일단 써본다
혹시 내가 실종되면 이 일기를 참고해주길
물론 나나 씨는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엄마한테 모르는 사람이랑 같이 살게 됐다고 말은 안 했다
어차피 나는 나나 씨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
나나 씨는 보통 밤에 나가서 아침에 들어온다
무슨 우렁각시처럼 몰래 들어와서 설거지를 해둔다
절대 일부러 미루는 게 아니다 나는 원래 설거지를 좀 모아서 하는 타입이다
식기세척기를 고용한 기분이다
잘생기고 말 잘 듣는 식기세척기
2월 00일
나나 씨가 리조또를 해줬다.
의외로 요리에 재능이 있던데 왜 그쪽으로 안 가고…
엄마가 반찬을 보내줬다 정리하는데 나나 씨가 좋겠다고 했다
뭐가 좋겠다는 걸까? 반찬이 돼지갈비랑 감자조림이라서? 아니면 반찬을 보내주는 엄마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전자였으면 좋겠다. 나나 씨는 이런 때에 생판 남의 집에 얹혀 살 만큼 사고무탁해 보이니까. 그런 걸 부러워한다면 유사시에 나가라고 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다.
생판 남을 거둬주는 나는 뭘까?
이건 다 나나 씨가 잘생겼기 때문임
눈이 좀만 덜 컸어도 왕십리역에서 신문지 덮고 잤을 거다
2월 00일
오늘 저녁은 배달 감자탕
사람이 둘이니까 전골을 시켜 먹을 수가 있어서 좋다
밥을 먹는데 나나 씨가 왜 자길 거둬주냐고 물었다. 그걸 3일 만에 묻다니 상당히 배은망덕하다
솔직히 나나 씨가 청소기도 돌리고 리조또랑 새우 파스타도 해주고 빨래도 널어주는데..
거둬준다고 할 수 있나?
말을 돌렸는데 안 통했다 생각해보니 나나 씨는 내가 게이란 걸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내가 신고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왠지 나나 씨한테라면 커밍아웃이 그렇게 못할 일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무슨 나쁜 짓이나 하겠어.. 그래서 그냥 말해줬다
내가 게이라서 그런 걸로 하자고 이유 엄청 불순하지 않냐고
나나 씨는 한참을 주저하더니 자긴 게이가 아니라고 말했다
알아요 애인이 옥주 누나라고 하셨잖아요, 했더니
아… 그래도 노력해볼게요. 라고 대답했다
나나 씨는 또 새벽에 나갔다
과연 집에 들어올까?
4일 차.
집에 안 들어왔다
5일 차.
오늘도 안 들어왔다
가출인가?
6일 차.
드디어 들어왔다. 사흘 동안 술독에서 잠을 퍼질러 잤나 보다. 어디 집에라도 갔다 왔냐고 물었는데 쫄딱 젖어 술 냄새 풀풀 풍기는 나나 씨는 헤어졌다는 짧은 대답만 전했다. 옥주 누나를 만났다고. 그런데 자기 자리가 없었다고. 돈은 전부 누나의 전남친 치료비로 들어갔고, 아니, 전전남친, 이제는 나나 씨가 전남친을 꿰찼으니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대화 토씨 하나까지 다 기억난다. 나중에 나나 씨가 옥 어쩌고 여자를 고소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써둔다.
그래서 그 돈을 안 받게요?
못 준대서…
못 준대도 어떻게든 받아내야죠.
못 받을 거예요.
그 말을 하던 나나의 목소리는 젖은 나무처럼 단호하고 울적했다.
“제가 뭘 달라고 해서 받아본 적이 없거든요.”
그게 정말 돈 얘기였을까.
8일 차.
…
일기장을 치웠다.
“나가죠. 집에서 청승 떨지 말고.”
어떻게 밤낮을 자기 등쳐먹은 여자의 행방도 아니고 흔적만 찾고 있을 수 있을까. 이제노는 좀 궁금했다.
기본적으로 나나의 속성이 미련퉁이라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해갈되지 못한 사랑으로 삶이 무용해지지 않기 위함인지. 이제노는 사랑도 나나도 잘 모른다. 그를 위로할 필요도 방법도 당연히 몰랐다.
이건 밤낮을 방구석에서 옥주의 흔적을 찾고 앉은 그를 위로해주자는 휴머니즘이 아니다. 저 남자가 집안에 범람시키는 실연의 우울을 집 밖으로 좀 퍼내고 싶었다. 나나는 감정 과잉이다. 이제노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감응하는 법을 잘 몰랐다. 선형을 긋는다면 두 사람은 가장 양 끝단에 있었다. 의기소침한 누군가를 위한 위로는 이제노에게 좀 버겁고 어려운 과업이다. 아마 텐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이제노가 먼저 뛰쳐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노 머해
일기 써요
-오늘 일기에 텐이랑 술 마실 거라고 써
집에 손님 있음
-아 왜
-오늘 동아리 연극 뒤풀이 해
-미남 다수
-제노 오ㅏ!!
손님 두고 나가기 쫌
-손님 잘생겼어?
ㅇㅇ
-사진 보내바^^
“사진 찍어도 돼요?”
“네? 저요?”
“한 장만 찍을게요.”
부은 눈을 슴벅이던 나나가 눈가에 중지와 검지를 댔다. 제법 깜찍한데. 뒷박에 까치 다가구 입주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옥주를 그리며 눈물 짜는 나나의 얼굴이 한 치만 더 현실에 가까웠다면, 자취방의 세대 인원에는 큰 변함이 없었을 텐데. 이제노가 손가락을 꿈질거리며 찍은 사진을 보낼 동안에도, 나나는 반항이나 응당한 궁금증 없이 물끄러미 이제노를 보고만 있었다. 가끔 이 사람은 지나치게 순응한다. 마치 정물이나 길섶의 풀처럼. 밟히거나 누군가에게 뜯겨지는 일이 사고가 아니라 본인의 생래적 운명이라는 것처럼. 체념적이고 가련했다.
(사진)
이제노의 짧은 대학교와 사회생활에 빗대어 보건대, 나나의 이목구비는 배치가 필요 이상으로 공손했고 결과물은 화려했다. 동북아시아를 누비며 대학 두 번 다닌 텐이 보기에도 크게 다를 것 같진 않았다. 텐은 이제노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사람을 잘 다뤘다. 성애를 떠나서 텐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주색잡기의 화신을 그 누가 마다할까. 이제노는 텐에게 나나를 소개해주기로 마음먹었다. 텐이라면 나나를 좀 즐겁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답장은 금방 왔다.
-씻기고 빗겨서 데리고 나와
그리고 나나도 능히 텐을 즐겁게 해주리라.
§
만나기로 한 장소는 삼거리에 새로 문을 연 술집이었다. 선배들을 따라 종종 가던 지하 일 층 술집이 방을 빼고 방학 동안 공사에 들어간 자리였다. 작년 겨울을 기점으로 삼거리에 외지인이 슬슬 모이기 시작했다는 얘기는 주워들었다.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이제노가 기억하던 바와는 사뭇 달랐다. 심상찮게 번쩍거리는 네온사인 문구가 예사롭지 않았다. 대학가 술집은 원래 좀 싸고 투박한 맛인데. 계단부터 멜랑꼴리한 분홍색이라 이제노가 되레 거부감을 느꼈다. 이쪽 인근에 잔뼈가 굵은 텐의 지인이 목을 잡았다고 얘기한 바를 들었다. 그래서일까. 대학가 술집이라기엔 공기부터가 좀 불순했다. 잘못 만졌다간 독이 오를 것처럼.
이제노가 기억하는 지하 일 층은 막걸리 방이었다. 조그만 발을 드리운 평상이 따박따박 깔려 있었다. 지금은 노래방처럼 넓다란 복도에 방사형으로 방 여러 개를 만든 모양새였다. 타깃은 재학생의 친목 도모가 아닌 외지인의 일회성 만남 같았다. 미팅 많이 하겠네. 이제노는 무상하게 생각했다. 방문마다 반투명한 시트지가 발려 있다는 점에서 더 그랬다.
텐은 가장 안쪽 방에 있었다. 연극 동아리원들과 함께였다. 텐은 버디 프로그램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어에 능숙했고, 당신의 갖가지 인간관계에 열렬히 이제노를 끼워주었다. 이제노의 세상은 상당 부분 텐으로 인해 확장되었다. 텐은 몇 번씩 연극 동아리에 함께할 것을 꾸준히 권고했지만 그뿐이었다. 이제노는 태생적으로 꾸며내는 일에 재능이 없었다. 그게 스스로가 됐든, 뭐가 됐든. 무엇보다 텐의 연극 동아리 부원들은 이제노가 아는 한 가장 거리낌이 없었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방종했다. 인가받은 동아리가 아닌 점에서부터 그랬다. 완전히 몸을 담그기엔 이제노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술집 입구부터 팔을 양껏 벌리고 있는 텐은 이제노의 그런 면을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알바생이 다 남자네요?”
“어. 너무 좋지? 제노 왜 이렇게 늦게 와?”
“씻기고 빗기느라…….”
그제서야 텐이 제노의 어깨 너머를 흘끗였다.
“직접 씻겼어?”
“제발.”
“제노가 어디서 혼자 물어 올 수 있는 얼굴이 아닌데.”
“좀 조용히.”
“셔츠는 웬 디올?”
텐은 그 말을 숫제 속삭이듯이 했다. 길게 뉜 눈초리가 은근하다. 나나는 복도 어귀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나나의 몇 안 되는 옷가지 중에서 가장 단정한 옷을 입혔는데 하필이면 대학가에 나다니는 옷가지 중에 제일 비쌌나 보다. 나나는 흰자가 다 보이게 눈치를 보면서 불투명한 창문을 흘끔거렸다. 금번의 나나는 산책하러 간다는 거짓말에 속아 병원에 끌려온 개, 같았다. 시리즈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잘못한 개. 사기당한 개. 억울한 개. 입은 왜 저렇게 헤 벌리고 있담. 이제노는 폭 한숨을 쉬며 텐을 밀어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자기가 알아서 씻었으니까 괜히 놀리지 마. 그리고 이쪽도 아니에요.”
“제노. 이쪽으로 만들어줘?”
“이 형 미쳤나 봐.”
이쪽? 저쪽? 무슨 편이라도 가르는 걸까. 눈동자를 쫑긋거리는 나나를 보며 텐이 장비처럼 웃었다. 어떻게 저렇게 야실스럽게 생겨서 촉나라 장수의 영혼이……. 이미 두어 병은 족히 걸친 것 같았다. 이제노는 이를 깍 문 채 텐을 방 안으로 욱여넣었다. 가장 넓은 연극 동아리의 안쪽 룸은 이미 소돔과 고모라였다. 살아 숨 쉬는 미남이 왔다. 누구? 제노? 제노 왔어? 제노는 친구도 잘생겼어. 형 그럼 우린 뭐야? 남. 텐이 양팔을 거수했다. 한차례의 밀물 같은 함성을 외면하며 이제노가 문을 닫았다. 형. 진정들 좀 하라 그래. 나나는 마치 무슨 잘못이라도 한 듯한 표정이다.
“술 못 마셔요?”
“어… 그냥 그래요.”
“그래요? 잘 마실 줄 알았는데.”
“네? 왜요????”
“그냥…….”
설명하려다 포기했다. 어떤 말을 해도 상대의 옷차림이나 적어도 강남에서 기십 주고 색을 냈을 머리나 와꾸를 지적하게 될 것 같았다. 민증에 잉크 마르자마자 주변에서 가만 안 뒀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술 잘 마시게 생겼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니까. 제노는 술집을 둘러보았다. 닫힌 문들 사이로 상기된 비명 소리가 샜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만 같은 죄의식이 들었다. 아마 이런 곳이 불편한 건 이제노일지도 모른다. 부끄러웠다. 이제노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너울거리는 문에 이마를 묻었다. 뒤에서 머뭇대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운동화를 빌려줄걸. 이제노는 조금 후회한다.
“집에 가고 싶으면 말해요.”
말한다고 집에 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
들켰나.
내가 짭이라는 걸.
§
텐은 얄궂다.
그렇다고 해도 경위가 없는 인간은 아니다. 바운더리 속에 사람을 마구 들이는 것 같으면서도 명정한 분별이 있었다. 아마 그가 이제노를 아끼고 좋아하지 않았다면 선뜻 나나를 데려오란 소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노도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나는 텐의 분별 속에서 가치를 지닐 인간인가?
이제노는 모른다.
“몇 살이에요? 왜 이렇게 잘생겼어요?”
“어, 저 스물네 살… 누나 맞아요? 피부 되게 좋으시다….”
이제노가 나나에 대해 아는 것. 이름이 진짜 나나는 아니라는 것. 전 여자친구의 이름은 옥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수상할 정도로 잘생긴 남자. 날개 같은 속눈썹에 따뜻한 우울을 이고 진 남자. 해가 질 때쯤 훌쩍 사라져 또 맘대로 나타나는 남자. 이제노는 나나에 대해 잘 모른다. 사실 스물네 살이라는 것도 방금 알았다.
동아리 부원들은 기꺼이 나나를 받아 주었다. 테이블 위의 술잔을 거의 쓸어버리다시피 하며 나나를 가운데 자리에 힘겹게 앉혔다. 남녀의 무릎을 넘는 나나는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초대받지 못한 객처럼 쭈뼛거린 건 이제노 쪽이었다. 이제노는 텐의 손에 이끌려 그 옆에 앉았다. 바싹 붙어 앉아 어깨가 붙었다.
“제노야. 형 너 기다리다가 늙어서 발기부전 왔어. 이거 꼬추 봐. 왜 이렇게 안 왔엉.”
“그것 참 유감이에요.”
“오빠 이름은? 이름은 뭐예요?”
“허정, 오빠 아니잖아.”
“텐. 아가리.”
팔이 정말… 단단하고 뜨겁네.
“제노는 친구도 잘생겼다.”
“끼리끼리 노나봐.”
친구도 끼리끼리도 아닌데. 구태여 말하진 않는다. 나나라면 이런 말에 또 개의 표정을 지을 것 같았다.
동아리 부원들은 대부분 연영과 출신이었다. 학교를 두 번 다닌 건 예사에 이미 계란 한 판인 만학도도 허다했다. 자연히 음주가무와 주색잡기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일반적 대학가의 수준을 초월했다. 두 사람은 앉자마자 연거푸 물컵 석 잔 만큼의 술을 마셨다. 이제노가 네 번째 잔을 마다할 동안 나나는 빼지 않았다. 구성원들은 그 점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술을 잘 마시는 편 같지는 않았는데. 새벽마다 풍기던 술 냄새를 생각하면 납득은 됐다.
“이름이 나나예요?”
“아…….”
“왜? 진짜 이름 알려주면 너무 친해질 것 같아? 우리가 매달릴 것 같아?”
“오빠가 이러니까 알려주기 싫어하는 거겠지….”
“그럼 우리 진짜 이름 걸고 술게 임 하자.”
이미 저들끼리 술이 거나하게 오른 부원들은 나나의 출신성분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늘 한번 재밌다면 그만일 사람들이기에 나나를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이제노도 나나를 잘 모르니까. 가짜 이름 같은 피상적인 것들 말고. 그의 연혁. 나나가 가진 진짜인 것들. 그런 것들을 모르는 채라면 나나를 소개해줄 수 있는 이들은 결국 아무나를 자처할 사람들뿐. 이제노는 전도된 관심을 외면하며 철저한 타인처럼 앉아있을 뿐이다.
술자리의 대부분은 졸업반이 목전인 사람들이다. 그나마 어린 축에 속하는 이제노부터가 갓 전역한 까까머리였으니, 딸기 게임이나 두부 같은 건 너무 시시했다. 평소였다면 시시껄렁한 음담패설만으로도 충분히 재밌게 놀았겠지만 뉴페이스가 있는 오늘은 사정이 좀 달랐다. 통하는 얘기도 없는 초면의 미남. 다나까도 덜 빠진 구면의 군바리 미남. 술자리를 널리 재밌게 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는 사람들로서는 애간장을 다 태우는 것처럼 보였다. 야 요즘은 뭐 한다냐? 너는 무슨 미팅도 안 가봤어 어린애가. 하나뿐인 헌내기를 붙들고 물어봤자 전부 다 아는 범주였다. 나나는 도통 이 사람들이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말똥말똥 눈을 굴리고 있다.
“야 그럼 우리. 노예팅 할까.”
“와 언제적? 오빠 민방위죠?”
“그거 작년에 수학과에서 했다가 에타 난리난 거 몰라?”
“원래 재밌는 건 다 난리나. 지들이 숨어서 하려고 그래.”
“나 밍키 수발들고 싶지 않은데.”
“나도 네 수발 받기 싫다.”
“오빠 성 인지 감수성 진짜 병신이네요.”
발단은 첫 번째 학번이 0으로 시작하는 만학도. 노예팅은 이제 대학가에서 거의 사멸하다시피 한 문화였다. 이제노는 뜨악하기에 앞서 나나를 한차례 살핀다. 노예팅. 무엇보다 나재민에게 가장 유해해 보였다. 여자친구에게 돈부터 뜯기는 남자인데 신분제도에 묶인다면 얼마나 학대당하고 혹사당할지 일단 걱정부터 됐으니까. 노예팅을 하든지 말든지. 나나는 물티슈를 뜯어 테이블 귀퉁이를 닦는 데 열심이었다. 뭘 저렇게 닦아내는 걸까. 아까부터.
그리고 흘끔거리는 이제노를 텐이 보고 있다. 얄궂게 웃는 얼굴. 이 상황을 못 견디도록 재밌게 여기고 있을 게 분명했다. 텐은 이제노의 연애사에 늘 관심이 많았으니까.
“노예는 남자들로만 하자. 나 여자 노예는 별로. ”
남자! 성별 간 희비가 순식간에 교차했다. 평소 같았으면 170에 만30 상폐남이 남자냐고 볼멘소리했을 애들까지도 눈이 번쩍였다. 이유는 명확했다. 그들의 시선이 제노와 텐, 그리고 나나를 향한다. 날 봐서 어쩌게? 셋 중에 쓸모있는 건 나나뿐일 텐데. 떨떠름했다. 나나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순종적인 낯으로 자기 앞에 놓인 티슈로 테이블 물방울을 훔치고 있었다. 이 사람 진짜 어떡하지. 이러니까 어디 가서 등쳐먹히고 사기당하지.
그럼 술게임 해서 진 사람이 노예팅 입후보하기.
여자가 지면 어떡해?
텐이 흑기사 한대.
그럼 하지 뭐. 애기. 술자리 재밌는 거 딱 읊어봐. 재밌고 신선하고 찐한 걸로다가.
그럼 라이어 게임 해요.
그게 뭔데?
오빠 라이어 게임도 모르나?
오빠는 외제 싫다.
흑기사를 자처한 텐이 사회를 보기로 했다. 설명은 진행과 동시에 이어졌다. 일단 내가 쪽지에 제시어를 적어서 돌릴 거야. 라이어만 꽝 쪽지를 뽑을 거고. 그 다음, 각자 제시어에 대해 설명하는 거야. 라이어 안 뽑은 애들은 일단 쪽지에 적힌 제시어를 설명해. 근데 라이어가 눈치 못 챌 정도로만 해야 해. 라이어는 애들 설명을 들으면서 제시어를 짐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고……. 에이. 일단 게임 하면서 이해해보자. 자, 제비 돌린다? 텐은 영수증을 네 번 접어 아홉 쪽으로 찢었다. 라이어 쪽지에만 하트 그렸어. 하트 뽑으면 라이어야. 곧 이제노 손에도 아무렇게나 찢긴 쪽지가 들어왔다.
하트.
제노가 라이어였다. 차라리 나나가 라이어인 것보단 이쪽이 낫다. 그는 구라를 못 치게 생겼으니까. 첫 순서는 다행히 다른 동기였다. 제노는 혼자 조용히 긴장했다. 반드시 이기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남모를 승리욕이 조금 있는 타입이었다. 그도.
“나는 이거 색깔별로 있어.”
“이거 모으는 게 취미인 사람도 있어.”
너도나도 힌트를 던진다. 일상적인 물건일까. 페이크일까. 이게 뭐라고 입술까지 말랐다. 술잔을 둥글리던 이제노는 제 차례에 오자 기발한 설명을 쥐어짜는 척 머리를 굴렸다. 나는 오늘도 이거 썼어. 반응이 질색은 아닌 걸 보니 일상적인 물건은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순서는 나나로.
“가끔 입에 물어요."
응?
갑자기 추리에 혼선이 오기 시작했다. 색깔별로 있고, 모으는 게 취미가 될 수도 있는데, 입에도 문다? 맞은편 만학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물 수 있어. 물 수 있지. 게임을 아주 잘하네. 이제노만 혼란에 빠졌다. 일상적인 물건이 아닌가. 뭔가… 야한 건가? 그럼 오늘도 쓴 나는 뭐가 되지? 목이 타서 물을 마셨다. 체질적으로 거짓말이 안 맞았다. 옆에서 나나가 또 컵을 따라 남은 물 자국을 훔쳐 닦았다. 왜 자꾸. 언제부터 위생 청결에 죽도록 신경 썼던 사람처럼.
규칙대로 한 바퀴가 또 돌았다. 비싼 건… 돈값을 하지. 나는 평소에도 갖고 다녀. 예상대로 무난한 물건이 맞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사무용품 같은… 또 이제노의 차례가 돌아와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난 까만색을 좋아해. 너무 소극적인 설명만 하고 있나 싶어 지레 찔렸는데. 누구도 딱히 자신을 눈여겨보는 것 같진 않다. 이제노는 어느덧 승부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이성에게 팔려 가 노예가 되고 싶진 않았다. 게이니까.
다시 나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몸에… 넣기도 한대요.”
어?
여기저기서 헛숨 들이키는 소리가 터졌다. 게임의 연령가가 단박에 겅중 뛴다. 이제노는 정말이지… 자신이 했던 대답을 되짚어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썼음.’ ‘까만색을 좋아함'. 오늘도 썼고 까만색을 선호하는… 근데 몸에도 넣을 수 있는? 미친 거 아냐. 첫판이라 쉽게 간다면서 도대체 무슨 키워드를 쓴 거야. 설마 제시어가 탐폰이나… 딜도… 따윈 아닐 것 아닌가. 텐은 이미 상에 머리를 박고 흐느끼고 있었다. 웃어. 뭐가 웃긴데.
무엇보다 나나는 제일 잘 알 것이다.
이제노가 그런 물건을… 오늘 쓰지 않았다는 걸.
계속 같이 있었으니까.
나나는 이상한 데서 덤덤했다. 없는 말을 하진 않았다는 것처럼… 수습할 수 없는 분위기로 판이 술렁였다.
나, 나는 그런 용도로 이걸 쓰진 않아.
어 뭐, 야동에선 그럴 수도 있지….
라이어 누구야? 그냥 여기서 끝내자.
당연히 나나지! 이걸 몸에 왜 넣어?
몰표로 나나가 라이어에 지목되었다. 나나는 뒷덜미를 긁적이며 자기 제시어가 적힌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자기가 라이어가 맞는지 아닌지도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야. 제시어 까봐. 까봐. 난 볼펜. 나도. 나도. 하나둘 쪽지가 던져진다. 시선이 나나에게 쏠렸다. 도대체 어떤 기가 막힌 제시어를 보고 그런 설명을 했나 싶은 기대에 찬 시선.
저도 볼펜이요.
그러나 나나가 대답했다.
“…….에이. 구라치지 마요 형. 그렇게 팔리기 싫어요?”
“진짠데…”
“진짜야. 내가 라이어거든…….”
나나를 대변하기 위해, 이제노는 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영수증 조각을 꺼냈다. 찌그러진 하트. 그제야 모두가 얼 나간 표정으로 나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럼. 그가 말한 게 다 볼펜에 대한…?
“왜 설명을 그렇게 했어요?”
“너무 쉽게 하면 안 된다고 해서…….”
“냅둬. 팔리고 싶었나 보지. 나는 땡큐다.”
“근데 이걸 몸 어디에 넣어요? 앞? 뒤?”
“입이랑… 어…….”
“공부할 때 펜 막 물어요?”
공연히 물컵을 건드리던 제노는 곧 나나를 흘끔거린다. 그는 이제 상 위나 물기를 닦지 않는다. 불온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꼭… 오면 안 될 곳을 왔다는 것처럼. 나나에게 각별한 책임감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제노는 진심으로 그가 걱정됐다. 이백만 원에서 변제 불가한 판돈을 더 얹어버린 건 아닐지. 그만 우울했으면 하는 마음에 데려온 자리인데. 이건 그냥 술자리일 뿐이니까, 싫은 티를 내도 된다고 귓속말을 해줘야 할까. 아니면 객을 대신해 화를 내야 할까. 고민하는 시간보다도 일행들의 고성이 더 일렀다.
“그럼 나나가 졌으니까 벌칙 해볼까?”
텐이 재밌다는 듯이 웃는다. 다들 한 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얘네 너무 짓궂은데 괜찮을까?
근데 나나 수위면 조빱일 것 같은데요. 볼펜을 입에 문다잖아요.
볼펜 무는 게 뭐. 나도 고민할 땐 볼펜 물어.
두둔해주네. 너 사고 싶구나?
아냐!
선뜻 나서기 힘든 분위기 속에서도 용감한 쟁취자는 늘 한 명씩 있었다.
“그럼 내가 살게! 나나, 장기 자랑 해줘! 볼펜 물고 댄스!”
네. 나나는 순순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네, 야. 뭘 알고 대답하나 싶었다. 저 얼굴을 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잖아. 저런 사람을 사고팔면 그건 진짜 매매지. 제노는 고민 끝에 팔을 벌린다. 하지만 미처 막아 세우기 전에 재민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 제노는 깨닫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이쪽이었다는 걸.
계산서에 붙은 모나미 볼펜을 집어 들고, 나나는 거침없이 테이블에 올라갔다. 술병을 집어 들 때도 아무도 그의 다음 행동을 짐작하지 못했다. 술병 주둥이가 가슴팍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셔츠 위를 적시는 알코올의 폭포. 사람들의 입이 일제히 벌어졌다. 누군가는 경악으로. 누군가는 희열로. 그러나 모두의 얼굴에는 같은 생각이 떠올라 있었다.
진짜 제대로 아는 새끼다.
순식간에 룸이 시끌시끌해졌다. 야! 화끈하다! 쟤 취한 거 아냐? 진짜 대박. 미쳤나 봐. 관객들이야말로 즐거워 미쳤다. 그러면서도 룸의 출입문을 자꾸만 힐끗거렸다. 나쁜 짓을 꾸미는 사람들처럼.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기들이 더 안다는 듯이. 그중에 무고한 얼굴은 나나뿐이었다. 무엇도 잘못되지 않았다는 태도로. 가게 음악에 맞춰 허리를 느리게 흔들었다. 룸이 비명과 웃음으로 떠들썩하게 젖는다. 이곳에서 젖지 않은 건 제노뿐이었다. 제노는 건조하게 침묵했다. 건조하게 술을 따랐다. 건조하게 외면했다. 모두를 물들인 분위기에서 물과 기름처럼 이탈했다. 나나가 기어코 바지 버클로 손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계속 건조함을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내려와요.”
손목을 붙들었다. 테이블 위 나나가 자리에 앉은 제노를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아, 왜……. 원성이 금방 사그라든다. 제노는 화를 내거나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물끄러미 방을 한 차례 돌아보았을 뿐이다. 시선에 단차가 생긴다. 나나가 더 높은 곳에 있는데도, 그 남자만 한없이 바닥에 있었다. 그렇게 보였다. 아무도 그 남자에게 고개를 젓지 않았다. 그래서.
“내려와서… 화장실 가요.”
§
이 대학가의 불건전한 음주문화 조장 술집의 유일한 장점은 화장실이 건물 공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노는 여자 화장실 앞의 긴 선형 인파가 볼 새라 나나를 화장실 안에 구겨 넣었다. 누가 봐서 큰일이 나기야 하겠냐마는 이제노의 마음이 그랬다. 리모델링이 막 끝난 화장실은 술집에 딸린 것치고 쾌적했다. 이제노는 이마를 짚다 짧게 턱을 까딱였다.
“벗어요.”
“여, 여기서.”
“옷 빨아야죠. 비싼 건데 얼룩져요.”
“아…….”
“계속 입고 있으면 춥고 찝찝하잖아요.”
나나는 머뭇머뭇 셔츠 단추를 풀었다. 아까는 무슨… 바지에 팬티까지 벗어 던질 기세였으면서 수줍은 새색시처럼 벗고 있으니 이제노도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내가 게이라서 좀 그런가. 뒤도 돌아줬다. 한 남자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이쪽을 힐끔거리며 볼일을 보는 남자와 나나 사이를 슬그머니 막아섰다. 벗는 사람을 가려주고자 하는 본능 같은 거였다. 내가 게이라고 세상이 다 게이로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거라고.
“다 벗었어요.”
“…그렇게 훌러덩 벗으면. 무슨 이너도 안 입었어요.”
“죄송해요.”
“그만 죄송하고 이거 입어요.”
“맨몸에요?”
“어쩔 수 없잖아요. 입고 있어요. 집 갈 때까지.”
나나가 옷을 받아 들기 위해 팔을 내밀었다. 그 순간 가슴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가슴은 좀… 시끄러웠다. 자기주장 강하고. 자꾸 자길 봐달라는 것 같고. 볼 때마다 적응 안 되는 양감이네 진짜. 이제노는 애먼 세면대를 보며 입고 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 점퍼를 벗어 주었다. 거울 속에 비친 귓바퀴가 벌겠다. 그도 어쩔 수 없는 게이 새끼였다. 술 마셔서 그렇지 뭐. 이제노는 부러 옆통수를 긁었다.
“이거 물세탁 해도 되나? 코인빨래방 갈래요?”
“괘, 괜찮아요. 제 옷이 아니라서….”
“자기 옷이 아니면 더 큰 일 아닌가.”
“어…… 이 정도는 그냥 거기서 빨아줘요.”
‘거기'. 자기 옷이 아니라길래 친구한테 빌린 줄 알았는데. 꼭 어디 가게에서 잠시 빌려온 옷처럼 말을 했다.
“일단 물로 한 번 헹굴게요.”
“네, 네… 제가 해도 되는데.”
“집 가고 싶어요? 바람 쐬고 와도 되는데.”
“괜찮아요.”
차박. 술집 세면대에 젖은 옷감이 닿았다. 술에 얼룩진 셔츠 소매를 다시 조물조물 빨았다. 나나는 눈을 슴벅이며 물줄기에 옷감을 문지르는 이제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음란하게 놀았냐는 양 무구한 낯이다. 어이가 없어서 실실 웃었다.
“왜 웃어요?”
“그냥… 새내기 때, 보통 아이스크림 사러 가자고 하면서 꼬시거든요.”
“아이스크림?”
“네. 사고 친 애 이렇게 따로 데리고 나와서. 아무 일 아닌 척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고.”
그냥 그렇다고요… 다들 그렇게 하던 게 생각나서. 중얼거리면서 옷감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제 옷이었으면 이렇게 품을 들여 물에 적시고 조물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국물도 아니고 술이니까. 그냥 대충 입고 집에 돌아가 세탁기에 쑤셔 넣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나는 좀 다른 사람이다. 이상하게 나나한테는 그런 무심한 행위들이 잘 안 됐다. 품을 들이고 손이 가는 사람. 섬세한 세탁 방법이 필요한 직물 같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혹은 무심하게 문지르고 빨았다간 영영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곰살맞은 편도 아니지만 없는 다정을 암염처럼 긁어내고 마는 것이다.
“저 사고 친 거예요?”
“…조금?”
“미안해요.”
“괜찮아요. 저 화내는 거 아닌데요.”
누가 봤다간 군기 빡센 과의 얼차려라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이제노는 얼룩진 셔츠를 문지르는 데 집중한다. 물비누라도 뿌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애초에 이렇게 비싼 셔츠를 물세탁 해도 되는 걸까. 생각해보면 돈도 없다면서 어떻게 이런 비싼 옷들만 걸치고 다니는지 좀 궁금해졌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상한 남자. 상식으로 설명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 보이는 대로 짐작했다간… 나나에게 좀 실례인 추론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제가 사람을 그렇게 궁금해하는 편은 아닌데요.”
“네…”
“원래도 그래요? 술자리에서.”
제가… 뭔가를 말할 것처럼 입을 달싹이던 나나가 고개를 숙였다.
“네. 원래도 그래요.”
원래. 제노는 조금 섣불렀던 어휘 선정을 후회했다. 나나의 입에서 듣고 보니, 원래라는 말은 너무 컸다. 그의 인생을 단정 짓는 말처럼 들렸다. 힐난하고자 함은 아니었는데. 정정하기엔 늦었다.
“못 마시겠으면 그냥 저 줘요. 안 마셔도 되고. 왜 무리해요.”
“…….”
“누가 뭐라 하는 거 아니잖아요. 집 가고 싶으면 얘기해요.”
대꾸가 없었다. 이제노는 노란 물 얼룩이 조금 남은 셔츠 깃을 문지르다 거울을 보았다. 낯선 눈이 되비친다. 그 눈. 기본적으로 세상에 무언가를 빚진 듯한 선량한 눈.
“저… 잘못했죠? 그런 자리가 아니었던 거죠?”
혼내려는 건 아니었는데 혼내는 것처럼 됐다.
“잘못이라기보단…”
말꼬리가 늘어졌다. 잘못이라기보단… 뭐였을까. 따지고 보면 그냥 흥이 과했던 자리였고, 취하면 흔히들 개가 되고, 그게 익숙한 모임이었는데.
그냥 뭐랄까.
좀 그랬다.
말릴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나나가 개가 되는 건.
아니, 말려줄 사람이 필요해 보였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으니까. 감히 짐작하면 전에도 그랬던 것 같다.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아무도 말리지 않음이 차곡차곡 쌓여서, 팔다리가 자라고 얼굴이 생겨서 마침내 나나라는 인간이 된 것 같았다. 나나에게는 생래적인 불행이 있었다. 가만히 두면 그의 형태가 그렇게 굳어질 것 같았다.
자꾸 나나를 개로 생각하는 것도 그만둬야 하나.
“무리 안 해도 돼요.”
문득 자신을 돌아본다. 그럼 제노는. 제노는 ‘누구나 말림’으로 이루어진 사람인가? 4년제 대신 3년제에 가는 것을 말리고, 같은 남자를 만나는 것을 말리고, 슬프기를 말리고. 만나는 사람을 위해 이백만 원을 태우는 일을 말리고. 술자리의 판돈에 옷을 버리는 일을 말리고… 제노는 젖은 셔츠를 탁탁 털었다. 반의반으로 접어 팔에 걸었다. 채 마르지 못한 물기로 팔뚝이 젖어 드는 것을 느끼며 제노는 생각한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상식선이었다.
제노는 상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원래 이름이 나나예요? 직업은 뭐예요?”
물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의문해야 했을 것들을 이제서야 물었다. 이름, 직업. 세상에서 제일 뻔한 질문 앞에서, 나나는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달큼한 알코올 내음이 진동하는 상반신을 두 손으로 감추고. 처음으로 발가벗겨졌다는 태도로 시선을 불안하게 굴렸다. 왜? 이름과 직업이 왜? 테이블에 올라가던 태도, 남자 이름으로 치기엔 장난 같은 호칭… 낌새가 슬슬 짙어졌다.
“본명 아니죠?”
네. 나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직장… 에서 쓰는 이름이에요.”
“그냥 말해요.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누가 혼내요?”
“....호빠요.”
아다리가 딸각 맞아들어갔다.
이제노는 입을 다물었다. 눈치채지 못한 것도 아니다. 구태여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다. 이런 태도가 나나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그게 이제노가 가진 상식. 보편. 예의. 사연 없는 사람은 없고 나나라면 더욱 그랬다. 나나의 삶을 멋대로 재단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노는 머뭇거리다 점퍼의 지퍼를 여며 주었다. 여기서 그럴 필요 없어요. 저 사람들 술 마실 때나 좋지 오래 볼 것도 아니잖아요. 무리하지 마요. 턱 끝까지 지퍼를 올린 후에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분위기를 깰까 봐.”
“분위기 깨도 돼요. 나나 씨는 제 손님이잖아요.”
“헉. 제가… 손님이에요?”
“집에 들였으니까 손님이죠. 내가 데려온… 사전적인 의미의.”
“아….”
손님의 정의가 좀 다르구나. 제노는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저한테만 편한 자리잖아요. 무리하면 내가 미안해지니까. 아까처럼 짓궂은 장난에 일일이 동조해주지 말고. 그냥 빠져나오고 싶으면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해요. 잔소리와 걱정 사이에 놓인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젖은 손을 손수건에 닦던 제노가 문득 나나를 돌아보았다.
“근데 진짜 이름이 뭐예요?”
“진짜 이름이요?”
“미용실이나 어디 가게 예약할 때, 택배 받을 때, 그럴 때도 나나라는 이름 써요?”
“네.”
“그럼 고지서에 찍히는 이름은요? 관공서에서 가족관계증명서 뗄 때 거기 적혀있는 그 이름은요. 저는 본명으로 부르고 싶은데.”
“어… 나나라는 이름 별로예요? 월세 미납 고지서에 적혀 있는 이름 말고, 미용실 갈 때 쓰는 이름 쓰면 안 되는지…”
듣고 보면 맞는 말이다. 제노로서도 꼬치꼬치 묻는 일이 귀찮았지만.
“우리는 미용실에서 만난 사이가 아니니까요.”
“아…”
이런 반응이니까. 덩치 산만한 성인 남자에게서 제노는 어린 조카를 떠올린다. 외가의, 열 살이 넘게 차이 나는 어린 조카. 제노가 불쑥 집에 존재하기만 해도 행복해 까무러치는 아이. 맹목적으로 나를 좇는 어린애는 원래 손이 많이 간다. 자꾸 보채고, 눈을 떼고 있으면 불안하고, 얌전한가 싶으면 허를 찌른다.
“알려줘요. 본명.”
참 쉬운 질문인데도, 나나는 몇초 간 긴 뜸을 들였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더듬더듬 허공을 헤매던 시선이 느릿하게 제노에게 돌아왔다.
“나재민이요.”
화장실 바깥에서 제노를 찾는 아우성이 들렸다. 슬슬 취한 일행들이 한둘 화장실로 기어 올 시간이었다. 제노는 모든 젖은 천들을 곱게 개켜 들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서, 자신의 겉옷을 입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본명이 더 가짜 같네요. 예뻐서. 이제노도 취하지 않았다면 이런 말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노도 적잖이 술을 마셨고. 그래서 취했고. 없는 정이나마 좀 흘렸다. 나나는, 다정하고 잘생겼으니까.
§
화장실 복도를 빠져나가는 제노의 뒤를 얼뜰한 낯으로 지켜보았다. 자신의 것이 아닌 옷 위를 더듬어보았다. 옴팡 젖었던 몸에 더는 물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사막이 다녀간 것 같다. 제노는 젖는 게 익숙한 그를 손쉽게 말렸다. 가려주고, 덥혀주었다. 이름을 물었다. 예쁘다고 했다.
재민은 입가를 매만졌다.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매번이 로또처럼 극적이고 간절한.
시작의 순간이었다.
거주 지역 및 주된 근린생활시설이 개인의 습관과 언어에 미치는 영향
맹모삼천지교의 관점을 중심으로
‘해야만 한다’와 ‘그래야만 한다’는 얼핏 듣기에는 닮았지만 전혀 다르다. 전자는 행동이지만 후자는 본질을 단정 짓는 점에서 쉽게 고루해지고, 때때로 강제적이다. 여자는 다리가 이뻐야지. 선수면 재미가 있어야지. 돈을 잘 뽑아야지. 마스크가 좋으면 겸손해야지. 손님을 물어와야지. 부모는 어딨어. 낳아줬으면 찾아뵈어야지. 사랑해야지. 가난하면 사랑하질 말아야지.…. 그 속에서 ‘해야만 한다'는 힘을 잘 발휘하지 못한다. 쉬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사람답게 살아야 하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단지 수많은 ‘그래야만 한다’가 인생의 양팔을 형사처럼 옭아맨 채로 끌고 갔다. 나나는 점차 그런 사람이 되어 갔다. 그래야만 하는 사람으로.
“아. 교양 하나 드랍해야 하는데.”
식탁에서 제노가 문득 중얼거렸다. 교양을… 왜 드랍해요? 교양 있으면 좋은 거 아니에요? 아. 아니. 교양 수업이요. 대학교 수업. 방학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개강했는데요. 지금 정정 기간이에요. 이따가도 수업 하나 있어요. 부스스한 꼬라지로 밥을 차리던 재민이 웃었다. 교양도 가르쳐주고… 대학 좋은 거 같아요.
들어온 날부터 재민은 당연하게 가사노동에 손길을 뻗쳤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 장을 봐온 메뉴로 밥(제노의 아침이자 재민의 저녁)을 차린다. 먹고 나선 제노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재민은 잔다. 재민이 일어나면 장을 보고 제노가 집에 들어오면 같이 밥(제노의 저녁이자 재민의 아침)을 먹고 재민이 출근하는 동안 제노가 잔다. 완벽하게 겹치지 않는 생활패턴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오늘 재민은 출근하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잤고, 제노와 엇비슷하게 일어났다. 방금 먹은 밥은 제노의 아침이면서 재민의 아침이었다. 처음으로 두 사람의 시곗바늘이 마주친 날이었다. 정확히는 재민이 제노의 바늘을 따라잡은 날.
재민은 궁금했다. ‘해야만 한다’의 세계. 제노는 오늘 과제를 해야만 하고,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나가야만 한다고 했다. 그가 늘어놓는 일과가 좋았다. 벽돌집처럼 견고하고 빡빡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바늘은 어긋날 것이고, 재민은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겠지만.
“저도 한 번 가봐도 돼요?”
그냥 조금.
맛만 보고 싶어서. 조금.
§
술자리에서 재민은 누군가에게 팔려가지 않았다. 룸으로 돌아간 직후 재민이 제노의 귀에 ‘이제 집에 가고 싶다’고 속삭였기 때문이다. 제노는 그 즉시 보일러를 켜고 나왔다는 성의 없는 변명과 함께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이러기 있어? 이름은. 이름만 알려주고 가. 전화번호라도. 옷자락을 붙잡는 손들은 제노가 쳐냈다.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말에 텐은 그냥 웃었지.
제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재민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재민은 구구콘을 골랐다. 추워요. 그렇겠죠. 술로 샤워를 했는데 따뜻하길 바랐어요? 내 옷도 다 뺏어 입고. 제노의 핀잔에도 배스스 웃기만 했다. 재민의 웃음은 대체로 무구했다. 그의 출신이나 소재지와는 별개로. 제노는 더 이상 재민을 불순한 술자리에 데려가지 않기로 했다. 같은 장난. 같은 농담도 그의 앵글과 자신의 앵글에선 각기 다른 의미를 띄는 것 같으니까. 차라리 분리하자고. 다신 섞으려고 하지 말자고.
그리고 일 주일 뒤. 그가 갑자기 대학교에 관심을 보였다.
제노는 시간표를 체크했다. 교양 수업이 하나. 복수 전공 강의가 하나. 교양은 오후 1시부터 시작이었다. 정정 기간이라 수업 내용은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전부일 테지만… 제노는 요령을 피울 성격이 못 됐다. 전공 수업까지는 시간이 좀 뜨니, 교양 정도라면 재민을 데려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마, 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옷장(제노가 옷걸이 10개 분량의 공간을 재민에게 빌려주었다)을 열고 고민하는 재민의 옆모습에서는 강한 열정이 풍겨오고 있었다.
이거 어때요?
그건 가슴이 너무…
이건요?
이 날씨엔 좀 추울 텐데.
결국 제노가 재민에게 옥스퍼드 셔츠 한 벌을 빌려주었다. 제노 기준으로 가장 단정하고 정숙한 옷이었다. 그러나 막상 입히고 보니 정숙이 다 군대 가더라. 단추가 아파 보였다. 늘어나진 않겠지. 아니. 터지지만 않으면…… 제노는 재민이 가슴을 어렵사리 쪼매는 모습을 걱정스럽게 지켜보았다.
배 안 고파요?
학교에서 밥 먹을 수 있어요?
있는데… 별로 맛없어요.
그럼 저 급식 먹을래요.
급식은 고등학생이 먹는 거예요.
그럼 대학생이 먹는 학교 밥…….
원래는 자취촌에서 백반을 미리 먹고 갈까 했지만, 재민은 내내 학식을 먹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제노의 모교는 학식이 맛없기로 유명했다. 외지인을 데려다 먹일 수준은 못 되었다. 학식 맛없는데… 괜찮아요. 먹어보고 싶었어요. 반짝이는 눈을 보고 있자니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재민은 대학교를 유원지 정도로 착각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좋게 봐도 재밌을 것이 없었다. 자극으로 따지자면 재민의 삶을 따라갈 수 없을 테니까. 한 것도 없이 헛된 바람을 넣은 것 같아 죄책감이 좀 들었다. 제노는 좀 돌아가더라도 생과대의 학생 식당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개중에 그나마 메뉴 선정이 성의 있는 곳이었다.
지대가 높은 캠퍼스 곳곳엔 벚나무가 심겨 있었다. 3월 초순이라 날이 아직 추웠고, 파르스름한 빛의 정경에서 시큼한 겨울 냄새가 났다. 재민은 입을 헤 벌린 채 낡은 인문대 건물이나 학생회관을 돌아보았다. 제노는 그에게 중간고사를 칠 때쯤엔 이 입구를 따라 소복한 밥공기처럼 벚꽃이 핀다는 얘기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때까지 재민이 제노와 같이 살고 있을지. 재민이 모든 외출을 끝내도 벚꽃을 보고 싶어 할지. 이것도 헛된 바람이 될지. 알 수 없으니까.
생과대 식당의 중식 메뉴는 짜장밥과 순두부찌개. 뭘 먹겠냐는 물음에 재민은 제노와 같은 것을 먹겠다고 대답했다. 제노는 키오스크에서 식권 두 장을 발권하고 재민에게 식판을 건네주었다. 왠지 학교 온 거 같아요. (학교니까요.) 대꾸하는 대신, 제노는 재민이 신나게 비엔나소시지를 퍼담도록 두었다. 군대에도 배식은 있었을 텐데,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건지. 재민은 이제 요구르트까지 준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당신이 해준 제육볶음이 더 맛있던데. 제노는 이것도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다.
“어? 제노야!”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아 걷는데, 길쭉한 식탁 끝에서 동기 한 명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혹시 누군가 마주치면 곤란해질까봐 다른 생활관을 골랐건만. 곤란하진 않아도 공교롭긴 했다. 재민에게 괜찮겠냐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자아 없이 제노만 빤히 쳐다보는 눈을 보니 괜찮지 않을 건 없어 보였지만.
강건우는 마침 복학 타이밍이 맞아떨어져 최근 연락이 잦아진 과 동기였다. 제노와 A부터 Z까지 다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성정은 아니었지만, 넉살과 요령이 좋았다. 효율 좋은 족보만 쏙쏙 얻어 온다거나, 교수를 통한 인턴십 전형을 몰래 알아 오는 식의 도움을 몇 번 받은 바 있었다. 함부로 말을 전하는 성정도 아니라 전공과목 몇 개를 맞춰 듣기도 했다. 구태여 따로 자리를 나눠 앉기 민망해 그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재민이 제노를 따라 왼편에 앉았다.
“방학은 잘 보냈고?”
“전역하고 정신없었지 뭐.”
“너 공군 갔었나?”
“응. 그래서 다른 동기들이랑 타이밍이 잘 안 맞았어.”
“옆에는… 친구?”
제노는 밑반찬을 집어 먹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밥 먹으러 왔어. 그래? 되게 잘생기셨네. 이런 얼굴이 우리 과인데 제가 모를 리가 없거든요. 재민이 젓가락 끝을 문 채 제노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제노가 괜찮다는 듯이 턱을 끄덕이자 그제야 수줍게 건우와 말을 섞는다. 개…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주인이 먹으라 이를 때까지 착하고 얌전히 기다리는 개… 같았다.
“실례지만 나이가?”
“스물넷….”
“아 동갑?”
영양가 없는 인사치레가 몇 번 오간다.
그리고 재민은… 탕수육을 보고 있다. 젓가락에 집힌 튀김 옷이 눅져서 버드러지고 있었다. 수상쩍은 형태의 속고기가 밑으로 쑥 떨어진다. 망설이던 재민은 그것을 한 입 베어 먹는다. 그리고 도로 내려 두었다. 이것이… 대학교의 맛. 제노가 보내는 일상의 맛. 흐물거리고. 달금하고. 간이 슴슴하고.
“생각보다, 학식… 되게 맛없네요.”
“그쵸? 우리 학교가 또 학식이 맛이 없잖아요. 생과대는 그나마 나은데. 이거 탕수육 진짜. 심각하다.”
건더기 없는 짬뽕 국을 퍼먹던 건우도 열렬히 분노했다. 아 진짜 맛없다. 연신 맛없다고 하면서. 내 등록금은 다 어디로 가는지. 이래서 옛날에 대학생들이 다 사회 운동하고 좌파 됐나봐. 밥이 맛없어서. 재민도 그를 따라 맛없다. 말해놓고 제풀에 흐흐 웃었다.
맛없다. 맛없어요. 그쵸. 그리고 제노에게 동의를 구한다. 제노는 된 쌀밥을 입에 구겨 넣으며 또 고개를 끄덕였다. 맛없다. 또 한 번. 그리고 밑반찬을 우물거리며 또 희게 웃는다. 맛없는 게 뭐가 좋다고 웃는지 모르겠다. 짜장밥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않나. 이건 다 제노가 익히 아는 맛이다. 짜고. 달고. 맵고.
“제노 수업 뭐 듣더라? 너 금공강이었지.”
“응.
시간표를 보기 위해 휴대폰을 집어 들고서야, 액정 위로 비친 자신도 어느새 웃고 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인생은 영화다.」”
“나 그거 작년에 들었어.”
“「행동 언어와 인류학.」”
“그건 이름이 어려워 보여서 별로.”
“또 뭐 있더라… 아. 「죽음으로의 초대.」”
“와. 너도 그거 성공했냐? 난 작년에 못 잡아서 올해는 진짜 이 악물고 피씨방까지 갔잖아.”
“난 텐 형 친구들이 잡아서 양도해줬어.”
“그럼 이따 너도 경영대 다시 가겠네?”
“응. 커피 한 잔 사서 가려고.”
대화는 일상적이지만 폐쇄적이다. 같은 사회에 몸담은 동류가 아니면 알아듣기 어려울 것을 알았다. 나나는… 공부에 뜻이 있었을까. 건우와 근황을 나누는 중에도 제노는 대화 바깥의 동행인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재민은 대화에 끼지 못하고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맛없다면서, 그의 앞에 놓인 식판은 깨끗했다. 제노가 입을 다물자 재민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다 야구르트를 뜯었다. 왜 자꾸 눈치를 보지?
“대학은 강의를 골라서 들을 수 있다고 하던데 진짜인가 보네요.”
“아, 대학생이 아니세요?”
“네. 저는 대학 안 가고 바로 일 시작했어요.”
“그래서 한번 와보고 싶다고 해서. 놀러 온 거야.”
제노가 간단히 부연했다. 그리고 건우의 낯이 숨길 수 없는 외향성으로 번쩍 빛났다.
“헐. 그럼 저희 교양 강의 듣고 가실래요?”
재민이 다시 제노의 눈치를 살핀다. 악의 없고 선량한 눈.
대학교와 나재민.
문득 제노는 젓가락질을 멈춘다.
죽음으로의 초대
시대마다 변화해온 죽음에 관한 인식과 그를 뒷받침하는 과학, 인문학적 근거를 고찰한다.
[사람은 죽어서도 삼일간은 귀가 열려있다.]
김금희 작가가 쓴 문상이라는 글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실제로 사람이 사망했을 때, 청각이 가장 늦게 닫히는 감각으로 알려져 있죠. 생사의 기로를 헤매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을 고비를 넘기던 당시 들었던 소리를 기억하는 여러 사례들이 이를 뒷받침해줍니다. 주변에 돌아가신 분이 있습니까? 저는 지난주 친지의 장례식장을 다녀왔습니다. 아, 슬픈 표정 짓지 마세요. 살 만큼 살다 고통 없이 가셨으니까요. 입관 직전, 고별장에서 고인을 잠시 대면하는 시간이 주어졌지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고인에게 들려주라고 하더군요. ‘고인은 다 듣는다.’ 그 말을 듣는데, 소름이 쭉 끼쳤습니다. 전 그때 꼭 꿈에 나와서 로또 번호 알려달라고 했거든요.
와하하. 강의실에 있던 모두가 웃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동그란 뒤통수가 느리게 솟는다.
다시 느리게 꺼진다.
다시 솟는다. 다시 꺼진다…. 제노는 옆자리에 엎어진 동그마한 뒤통수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강의 시작 20분 후부터 줄곧 걸상 위에 널브러진 뒤통수의 주인은 강의실이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깰 생각을 안 했다. 처음엔 어디가 아픈가 하고 걱정했는데. 고개를 숙여 들어보면 색색. 평온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대학생들의 고충을 간접적으로나마 좀 느꼈을까? 매 수업이 스스로와 하는 사투와 투쟁임을.
“혹시 저 친구도 죽었나요?”
교수님이 사뭇 진지하게 지적했다. “혹시 모르니 삼일이 지나기 전엔 전해주세요. 다음 수업까지만 부활해달라고 말입니다.” 강의실이 다시 떠들썩하게 뒤집어졌다. 학생들의 관심이 한 점으로 쏠렸다. 힐끗힐끗 돌아보는 눈동자들. 잠든 재민을 발견하고, 쟤 무슨 과지? 속달거리는 소리. 제노는 난처하게 눈썹을 떨궜다. 강의 중 손 들고 질문할 때도 이렇게 많은 관심에 찔려본 적이 없었다.
오리엔테이션 조라 출석에도 반영되지 않았지만, 교수는 강의에 열성이었다. 강의를 꽉 채울 예정이라며 짧은 쉬는 시간을 주었다. 건우는 이만하면 됐으니 출튀를 하겠다며 몰래 가방을 싸고 있었다. 삽시간에 부산한 웅성거림이 강의실을 메웠지만 재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긴. 이 시간이 재민이 평소에 자던 시간이었다. 다음 전공 수업에 어차피 재민을 데려갈 순 없었고, 잠이라도 자게 좀 둬야겠다 싶었다. 제노는 그가 깨지 않게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제노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는 못 보던 것들이 잔뜩 생겨있었다. 우유. 초콜릿. 마이쮸… 가장 진풍경은 재민의 등판이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재민의 등 뒤로 다닥다닥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제노 친구 우리 학교에 자러 왔나요]
[잘 자요!ㅋㅋ]
[많이 피곤하셨나보다 이거 드세요!]
[교수님이 다 봤어요~ ㅎㅎ 잘 자요~]
[혹시 단팥빵 좋아하세요? ㅜ.ㅜ 버리셔도 돼요…]
재민의 머리맡에 보인 단팥빵까지 보았을 때, 제노는 참지 못하고 조금 웃었다. 건우가 떠나기 전 장난조로 붙인 쪽지가 시발점이 된 것 같았다. 떡갈나무에 걸린 노란 리본인가. 소원 나무 같다. 남산타워에 주렁주렁 열린 열쇠들 같기도 했다. 제노는 손끝으로 포스트잇을 가볍게 건드렸다. 여전히 잠든 재민의 등은 밤바다의 파도처럼 깊고 느리게 일렁이고 있다. 그 등이 게시판이 된 것도 모르는 채로. 제노는 문득 아주 가볍게 재민의 어깨를 짚는다. 최초의 목적이 깨우기 위함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이어 가볍게 두드린다.
재민 씨. 일어나봐요.
….
재민… 아?
일어나지 않아 슬쩍 흔들었다. 꿈찔. 그제야 어깨가 움직인다. 소조처럼 제자리에 늘어져 있던 머리가 느릿하게 제노 쪽으로 돌아눕는다. 마주친 눈은 반쯤 감겨 있다. 눈을 내리깐 재민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느릿하고 농도가 짙다. 가늘게 선이 진 눈꺼풀. 그림자를 아주 깊게 드리워 눈동자를 가리는 밀도 높은 속눈썹. 그 얼굴의 질감이 낯설게 느껴진다. 제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졸음이 옅게 엉긴 눈이 제노를 찾는다. 찾고. 웃었다. 천천히. 고양이가 눈인사를 하듯이 접히면서….
그리고 강의실 불이 사라졌다.
칠판이 사라졌다. 불편한 구조의 걸상이. 플라스틱 의자가 사라졌다. 일어나서 짐을 싸던 학생들이. 교재가. 커리큘럼 일정표가. 다음 강의 시간표가. 현실이 사라졌다. 제노를 구성하는 감각이 일시에 종말을 맞이했다.
문득 강의실이 무척이나 고요한 진공의 우주처럼 느껴졌다. 방금 일어났는데도 물기로 축축한 눈동자가 제노를 가만히 바라본다. 긴 속눈썹이 느리게 슴벅이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바람이 불었다. 몸을 가누기가 어렵다. 제노는 공연히 목을 가다듬었다. 작게 목소리를 깔지 않으면 세상이 윙윙 울릴 것 같았다. 거추장스러운 미사여구를 걷어볼까. 재민은… 예뻤다. 좀 말리는 느낌으로.
“대학도 별거 없죠? 막상 와보니까…”
반사적인 혼잣말이 바보 같았다. 하지만 그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제야 재민이 아직 잠 덜 깬 눈을 모두 뜬다. 커다란 창으로 이슥한 태양이 뜨는 것처럼, 작은 빛망울이 잇따라 나타났다 사라진다.
“와서 좋아요…….”
“거짓말. 졸았잖아요.”
“아니에요. 좋아요… 남들이 다 하는 그런 거, 저도 해보고 싶었어요…”
흐흐. 그가 말끝에 작게 웃었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놓칠 만큼 작은 웃음이다. 다시 숨소리가 느리고, 깊게 잦아든다. 이제 강의실에 조명이 들어왔다. 칠판이. 걸상이. 의자가. 아직 뭉그적대는 몇 학생이. 교재가. 커리큘럼 일정표가. 다음 강의 시간표가. 세상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모든 게 원래대로다. 이제 깨워야지. 깨워서,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야지. 10분만. 20분만 더 있다가… 꼭 깨워야지. 꼭.
강의실이 텅 빌 때까지, 제노는 그 자리에 앉아서 잠든 재민의 얼굴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재민의 등에 붙은 일상적인 호의. 제노가 익히 아는 일상에서 잠든 낯선 남자. 3월의 파르스름한 볕이 달라붙은 뺨. 물안개처럼 희미하게 떠도는 어떤 생각을, 제노는 안는다. 주의 깊게 듣지 않는다면 금방 흩어질 옅고 묽은 생각.
당신이 내 삶에 있었다면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내레이터
연애를 안 하던 짧은 시절. 소미 누나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다큐멘터리는 아주 이기적인 장르야. 사람들은 다큐라고 하면 되게 객관적인 줄 아는데, 사실 그것만큼 감독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담기는 장르도 없거든. 그걸 능숙하게 감추느냐, 아니면 들키느냐. 그 차이가 있을 뿐이지. 너도 집 가서 아무 다큐나 한번 봐. 감독 견해가 그대로 전해질걸.
그날 나나는 종일 집에 다큐를 틀어놓았다. 짜장면을 먹으면서도 보고. 씻고 머리를 말릴 때도 보고. 잠들면서 보고. 눈 뜨면서 보았다.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은 한 존재의 서식지. 잔잔하고 동요 없는 내레이션은 종일 나나의 곁을 채워주었다.
미디어가 범람하는 세상은 우리에게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환상적인 메시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정작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점차 주인공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맥주 한 캔을 들고, 소파에 앉아서, 이미 내 꿈을 이룬 사람들을 구경하며 꿈을 꾸기만 하면 됩니다. 미디어 세상은 이제 아주 거대하고 안락한 침대가 되었습니다. 다들 선뜻 현실이라는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죠. …
말보다 목소리가 간절했던 시절이었다.
§
눈을 떠보니 빈 강의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뭐지. 재민은 눈을 게슴츠레 끔뻑였다.
몸을 일으키자, 어깨에 덮여있던 옷가지가 주룩 흘러내렸다. 잘 보니 제노가 아침에 입고 나간 코트였다. 재민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두 번 접었다. 동그래진 옷가지를 품에 끌어안았다. 제노의 냄새가 난다. 건조대에 걸린 제노의 외투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픽 점퍼에서, 계절마다 바뀌었다는 그의 이불에서 나는 향이다. 이건 재민이 춥지 말라고 덮어준 옷가지일까. 재민을 덥히기 위한 이불이라고 생각하니 이 옷가지가 몹시도 소중하게 여겨졌다.
시간을 보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다. 제노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푹 주무셔도 돼요]
[오늘 그 강의실에 강의 더 없을 거예요]
[저는 바로 위층 강의실에서 수업 듣고 있어요]
마치 멀리 있지 않으니 안심하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정말로 안심이 되었다. 시간을 보니 거의 세 시간은 잤다. 문자가 도착한 시간으로 미루어볼 때, 슬슬 강의가 끝날 시간이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재민은 문자를 조심조심 쳤다.
죄송해요. 자려던 건 아니었는데…
[깼어요?]
[괜찮아요 저도 곧 강의 끝나요]
[건우가 이따 앞에서 갈매기살 먹자는데 괜찮아요?]
네. 너무 좋아요.
[너무 좋을 것까지야ㅎㅎ…]
[슬슬 나와요]
[내려갈게요]
네.
자리에서 일어나다 문득, 책상 귀퉁이에 수북이 붙어 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쓰레기인 줄 알고 떼어냈는데 장마다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재민은 그것을 한 장씩 넘기며 읽었다. 잘 자라는 말. 일어나라는 말. 무언가 단것을 먹으라는 말. 얼굴 모를 사람들의 목소리 없는 말들. 재민은 그 말들을 직접 소리 내서 읽어보았다. 말에 목소리를 입혀서 혼자 들었다. 반향 없는 목소리는 곧 제노의 것이 된다. 다정하기보다는 물기가 없어 담담하지만.
정말 좋았다.
마음을 놓아도 혼나지 않아서. 여기가. 제노 씨를 닮은 이 공간이. 정말.
와! 진짜 와주셨네. 아까 같이 교양 들은 애들이 형 데려오라고 난리 피웠거든요. 근데 형 맞죠? 막 삭아 보인다는 건 아닌데요. 그냥 좀 이 분위기가 묵직하다고 해야 하나. 아, 혹시 몇 살이세요? 아까 밥 먹을 때 물어볼걸.
강건우는 목소리가 풍부한 사람이다. 음성이 크진 않았지만 메아리가 넓었다. 여기서 말하는 목소리가 테이블의 끝까지 닿는다. 재민이 일하는 호빠에서도 잘나가는 애들은 다들 야부리를 잘 털었지만, 건우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 극적으로 구는 게 아니라 제 흥에 겨운 사람 같았다. 그런 풍부함은 샐러드처럼 건강하게 느껴졌다.
“건우야. 하나씩 물어봐. 체하겠다.”
함께 있던 제노에게는 과했던 모양이지만. 대학교 정문에서 건우와 합류한 그들은 곧 근처에 있는 대학로 입구에 큼직하게 들어선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연기가 자욱한 내부는 벌써 한잔 걸친 대학생들로 자리마다 왁자지껄했다.
“와! 죽은 오빠 왔다.”
“수영이 안녕.”
이미 도착해서 자리에 앉아있던 애들이 곰살맞게 인사를 건네온다. 근데 죽은 오빠라니…? 고개를 기웃거리는 재민 곁에서 제노가 조용히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뭔데요? 왜 웃어요? 뭔지 몰라도 당신이 웃으면 좋아요.
“우리 지금부터 귓속말 게임 할 건데. 오빠도 할래요?”
“무슨 게임이야. 밥만 먹는다며.”
“아니이. 뉴페이스 오셨잖아.”
자리에 앉기 무섭게 곁에 앉은 단발머리 여자애가 말을 걸어왔다. 제노가 곤란한 얼굴로 눈을 찡그렸다. 대학생들은 호빠 손님 못지않게 술 게임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면 제노가 유독 흥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가. 사람은 반대되는 사람에게 끌린다고 하니까. 이들의 생명력이 조용하고 음전한 제노를 들뜨게 해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야.
“그게 뭐예요? 귓속말만 하는 게임이에요?”
재민도 적극적이고 싶었다. 제노를 품은 이곳의 공기가 더욱 즐거워질 수 있도록. 자신이 끼어들었다는 이유로 이 자리가 평소와 다르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아. 이게 어떻게 하는 거냐면. 이렇게 가까이서 귓속말로…”
수영이 몸을 기울였다. 재민은 움찔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귓가로 더운 숨결이 느껴졌다. 향수인지 샴푸인지 모를 달콤하고 전형적인 향기가 낯설게 코 밑을 두드린다. 누나들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걸어 들어오는 작은 속삭임.
…여기서 제일 예쁜 사람.
네?
여기서 제일 예쁜 사람이요.
§
제노는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작고 보드라운 여자의 손으로 덮인 재민의 귀를. 은밀하고 사적인 구석을. 술잔이 하나씩 돌아가고 잔이 채워지는 사이, 귓속말을 마친 수영이 재민에게서 떨어졌다. 그녀의 눈가에 애교스러운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제가 방금 말한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돼요. 그럼 지목당한 사람은 뭐로 지목당한 건지 궁금해지겠죠?”
“아하.”
“귓속말 내용이 알고 싶으면 원샷하는 거죠.”
재민은 오래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정확히 제노를 가리켰다. 수영이 놀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지목임이 분명했다. 이어 재민과 제노를 연신 번갈아 보기까지 한다. 단순히 아는 사람이 제노뿐이라 짚고 시작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생소한 반응이다.
뭐라고 했을까.
기껏해야 부탁 거절 못 할 것 같은 사람. 그런 거겠지.
“오… 제노? 제노 가리킨 거 맞아요?”
의외로 욕 잘하게 생긴 사람. 돈 많아 보이는 사람. 그런 걸 수도 있고.
“뭐 말했대? 내가 마시고 싶다, 내가.”
아니면 여자 밝히게 생긴 사람? 하지만 난 굳이 따지자면 남자를 밝히는데.
“이제노 마실 거야? 원샷 가나요?”
뭘까.
제노는 앞에 놓인 술잔을 눈으로 쓸었다.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니, 알고자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가 제노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그건 정말 알 바가 아니었다. 쓸데없는 관심이다. 새로운 서식지만 찾으면 곧 떠날 선수에게 뭐하러. 제노는 그에게 철새의 도래지일 것이다. 어쩌다 목이 좋아 잠시 머물기야 하지만 두 개 이상의 계절을 보내진 않을 것이다. 술잔에서 시선을 들었다. 재민과 눈이 마주쳤다. 수영도.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서도 둥근 유대감을 뿜어내는 이곳의 모두가 제노를 바라본다. 관심은 짧았다.
“안 마시면 땡!”
“에이. 게임 재미없게 하네. 차례 넘겨.”
기회는 간단히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간절한 건 아니었지만. 무심코 재민의 표정을 관찰했다. 재민은 표정이 솔직한 편이니까. 그간의 동거 기간으로 말미암아 보았을 땐 그랬다. 그의 표정으로 어떤 단서를 읽어내고자 했지만, 재민은 실망한 건지 안도한 건지 모를 애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라고 했을까.
뒤늦은 궁금증이 질병처럼 도진다. 제노는 목까지 꽉꽉 찬 술잔을 들었다. 소주로 입술을 축였지만, 그런다고 귓속말을 들려주는 사람은 없다. 기회는 갔다. 괘념치는 않았다. 제노는 목이 말라서 술을 마신 것뿐이다. 금세 열이 오르는 목을 문지른다. 재민도 제노의 표정을 살피고 있을까. 제노는 싱겁게 눈을 깜빡인다. 다시 재민을 보지 않는다.
“야, 잠깐! 잠깐 멈춰봐.”
곁에 앉은 건우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손짓을 했다. 웃고 떠들던 소음이 차츰 잦아든다.
“지금 정환이도 일로 온다는데?”
탁.
시선은 반사적으로 제노를 향한다. 제노가 들고 있던 빈 술잔이 테이블을 때렸으므로.
§
총구를 겨누듯이.
제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재민은 이상기후를 눈치챘다. 수굿이 깔린 속눈썹이 날카롭게 들렸다. 입가에 희미하게 감돌던 예절바른 웃음기가 사라졌다. 건우가 정환이라는 이름을 내뱉은 직후였다.
정환.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재민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순대국밥집. 거기서 통화할 때 들었던 것 같다. 전 애인일까. 전 애인이랑 재회하는 상황에 대해 상상해본다. 재민은… 대체로 원하지 않았거나, 예상 범주 바깥의 이별을 해왔다. 재민을 서울로 상경시킨 싸모도 결혼을 이유로 재민을 방류시켰다. 다시 만난다고 싫을 것 같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고 싶었다. 만나는 상상만으로도 그리움이 사무쳤다. 그리고 그 마음은 옥주 누나에 이르기까지, 그가 겪어온 모든 전 애인에 해당되었다.
하지만 제노도 그럴까?
“화장실 좀 다녀올게.”
제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우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그래, 대답하고 말았다. 다시 곁에 앉은 사람과 수강 정정과 강의 티오에 관한 대화를 시작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노와 정환이 어떤 사이였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완벽하게 이해가 됐다. 같은 공간에서 떠들 시간이 많은 바닥일수록 소문이 빠르니까. 재민은 늘 감추는 걸 실패해서 소문이 다 퍼졌다(확성기 역할의 큰 지분을 쫑구가 차지하고 있다는 건 얼마 전에 알았다). 테이블을 떠나는 제노를 아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재민을 제외하고는.
“근데 어느 학과세요? 신입생? 우리 학부인가?”
“네?”
“아, 이쪽은 대학생은 아니신데, 그냥 제노 따라서 청강하러 오신 거래.”
곁에 앉은 건우가 대신 부연해줬다. 아. 어쩐지 한 번도 못 봤다 했어요. 오빠 같은 사람을… 그리고 제노 오빠도 누구 잘 데려오는 캐릭터는 아니잖아요. 제노가 없는 테이블에 추가로 주문한 갈매기살이 나왔다. 나나 형. 소주 드릴까요? 아뇨, 전 맥주 마실게요. 재민은 자연스럽게 집게를 잡았다. 헉, 제가 구울게요. 하는 안경잡이 남자의 말에 고개를 젓고, 불판에 고기를 올렸다. 갈매기살은 굽기 까다롭다. 재게 뒤척이지 않으면 금방 타기 십상이다. 재민은 능숙하게 고기를 구우면서, 물을 따르려는 건우에게 미리 채워둔 자신의 물컵을 건넸다. 얼떨결에 재민의 물컵을 쥔 건우가 짧게 감탄했다.
“시야 무슨 일이야…”
재민이 착착 움직이는 모양새를, 모두가 신비롭게 바라보았다. 재민은… 기껍지 않았다. 다들 속고 있다. 그가 호빠 선수라는 걸. 이곳의 유일한 짭이라는 걸 몰라서 그러는 거다. 조금만 말을 섞어도 들키겠지. 몸에 밴 섬김의 미덕일 뿐이라는 걸. 옆 테이블이 유별리 떠들썩했다. 낯선 생김새의 외국인이 끼어 있는 모임이다. 생각해보니 이 학교엔 외국인이 참 많다. 금발 머리 외국인이 음식점 TV에 벌어지는 축구 경기를 보며 무어라고 지껄였다. 잘 들어보니 일본어였다. 서구권 사람이 한국에서 일본어를 쓰다니. 하나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곳을 구성하는 모든 공기가 그랬다. 맥주와 돼지고기, 아디다스와 폴로, 중졸 호빠 선수와 멀끔한 대학생들.
문득 자리가 불편해졌다.
재민은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 당연한 방식을 재민은 모른다. 재민에게 당연한 방식은 그들에게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그 경계를 제노가 흐려놓고 있어서 몰랐던 거다. 재민은 여전히 침입자다. 집단 밖의 뻔뻔한 타자다. 제노의 집 문을 함부로 열고 들어간 첫날과 똑같이, 제노가 없는 이 자리에 함부로 엉덩이를 깔고 앉아있는 거다. 가장 이곳에 어울리는 건 제노인데. 제노가 가장… 예쁜 자리인데.
오빠. 쏘맥 드실래요?
괜찮아요.
아… 근데, 안 웃으시니까 되게… 쎄보이신다. 인상이 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웃지 않는 것보다, 아까까지 웃고 있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제노가 있을 땐 웃고 있었던 걸까. 근데 성함이 뭐예요? 나나요. 진짜요? 진짜 이름이 나나예요? 별명 아니고? 아… 누나는 이름이 뭐예요? 조현주요. 근데 막 누나라 그래. 제가 연상 같아요? 아뇨, 습관적으로… 아. 여친이 누난가봐요… 꼬박꼬박 내놓는 대답에서 점차 나사가 빠져갔다. 재민의 온 신경은 입구에 쏠려 있었다. 누군가 들어오면 제노인가, 했다가, 제노가 아니어서, 다시 제노를 찾았다. 곁에서 건우가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듣고 있어요, 형? 안 듣고 있었던 재민은 몸을 일으켰다.
“저 잠깐 담배 피우고 올게요.”
“앗, 그럼 저도.”
덩달아 일어나던 건우의 어깨를 도로 힘있게 눌러 앉혔다. 재민의 행동에 건우가 끔뻑 얼타는 표정을 지었다. 그를 내려다보면서, 재민은 웃지 않으면 냉해 보인다던 자신의 평가를 잠시간 반추했다.
“저. 혼자… 다녀올게요.”
느리게 짓누르는 어조였다. 건우는 왜냐고 묻지 못했다.
테이블에 빈 곳이 없다 했더니, 고깃집 앞에는 웨이팅이 있었다. 재민은 인파를 피해 으슥한 골목 쪽으로 들어갔다. 지리라곤 하나도 모르면서도 몰이를 당하는 양처럼.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던 때였다.
“그냥 안 마주치는 게 서로 편하잖아.”
“그래도 어떻게 딱 잘라서 안 볼 수 있어?”
라이터 휠을 돌리려던 엄지가 딱 멈췄다. 위에서 뚜렷하게 들려온 말. 분명 제노의 목소리였다. 재민은 고개를 들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에 서 있는 두 남자가 로우앵글로 보였다. 그중 한 칸 위에 서 있는 제노가 다시 입을 연다.
“너랑 내가 계속 얼굴 보지 않으면 못 살 만큼 좋아한 거 아니잖아.”
“…….”
“아니다, 그래… 넌 그랬나 보다. 항상 네가 날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불안하다고 그랬지. 너 그래서 그래. 앞으로 계속 안 보면 괜찮아져.”
“제노야. 너 되게 칼같이 끊는 애인 건 아는데… 너는 서로 사랑했던 사이에 그런 말밖에 못 하겠어?”
그럼 계단 한 칸 아래서 제노를 향해 절절한 이야기를 하는 남자가 정환일까. 위쪽 계단에 선 제노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정환아. 우리 사귈 때도 그랬는데. 사랑이라는 말은 좀… 과해.”
“뭐?”
“뭐 10년, 20년 만난 것도 아니야. 그마저도 군대 간다고 서로 계속 만날 정도도 안 되어서 헤어졌어. 나 전역했다고 연락하는 것도 솔직히 속 보이고. 너.”
“…….”
“그냥 서로 좀 알아가다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거고. 그래서 알아가길 그만둔 거지.”
정환이 안경을 벗었다.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너 참 독하다.”
“……”
“아무리 짧았대도 1년이야. 갈 곳 다 가고 놀 거 다 놀고. 심지어 너. 내 부모님까지 봤어. 그런데도 남은 게 없어? 그냥 알아가다 만 게 다야? 이제노.”
이제는 정말 담배에 불을 붙여야 했다. 남의 드라마, 남의 사연을 엿듣는 꼴이 되기 싫으면 그래야 했다. 무엇이든, 재민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우리 싸울 때마다 내가 했던 말 기억 나? ”
재민과는 상관없는 이야기.
“나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싫어한다고.”
상관없는 이야기가 맞는데.
“너 지금 또 그래. 헤어진 게 언젠데 이별을 반복하게 만들어.”
무심코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마음이 야금야금 베이는 듯한. 갉아먹히는 통증이 올라왔다. 재민과는 영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보고 싶으면 보고 싶었다고 제일 먼저 말했을 거야. 너도 나 알잖아.”
“…….”
“잘 지내.”
제노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계단 아래로 퉁퉁 내려가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재민은 끝내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 정환은 정말로 잘 지내게 될까.
에피타시스
계단 위에서의 대화를 마치고, 정환은 결국 고깃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 것이다. 어쩌면 제노가 그를 불편해하는 것보다 더 큰 불편이 정환의 실연 속에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제노는 건우에게 양해를 구하고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재민에게는 더 놀아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내심 알고 있었다. 어색할 테니까. 그러나 누구도 집으로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술 더 드실 수 있어요? 네. 제노가 재민을 데리고 간 곳은 대학로를 벗어나 조금 외진 거리. 지하에 거의 파묻힌 칵테일 바였다.
“텐이 가끔 여기 데려왔어요. 대학가에는 이런 데가 많이 없어서.”
칵테일 바는 한산했다. 대학생들이 오기엔 중후하고 조용한 느낌을 주는 내부는 세련되게 꾸며져 있었다. 테이블에 동성 커플인지 친구 사이인지 여자 한 쌍이 앉았고, 바에는 머리가 산발이 된 여자가 훌쩍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재민과 제노는 테이블 대신 길쭉한 바에 앉았다. 재민은 혹시 양주가 있는지 물었다. 양주는 없는데요. 아…… 그럼…… 블랙 러시안 주세요. 재민을 물끄러미 보던 제노도 마찬가지로 블랙 러시안을 주문했다. 그거 좋아해요? 아니요. 저 칵테일 잘 몰라요. 그래서 똑같은 거 시켰어요, 그냥. 제노는 바텐더가 익숙하게 꺼내는 리큐르 병들을 좇아 보았다. 눈길의 끝에 재민이 닿았다. 이쪽을 쳐다보던 재민이 흠칫 시선을 돌린다. 무슨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처럼.
제노라고 호빠 선수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건 아니었다. 고교 동창 중에도 있었다. 친하지 않았지만 같은 반 동급생이었고, 밴드부였던 게 재민을 만난 후에 기억이 났다. 이름은 희태. 베이시스트로 잘 풀리지 않자 아는 형을 따라 덥석 호빠로 취직했다고 알음알음 소문이 돌았다. 희태는 두어 번의 동창 모임에 참석했고 기대에 부응하듯 여자와 돈 이야기를 했다. 그때마다 동창들이 열광했지만 제노는 희태의 삶이 어떤 이야기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으므로.
제노는 희태가 가졌던 상을 덧그려본다. 선은 굵었고, 눈은 옹졸했고… 이합집산의 이목구비. 재민과는 영 딴판이었다. 제노는 재민의 옆모습을 머릿속으로 되그린다. 전체적으로 유연한 선을 그리는 실루엣. 그러나 이목구비는 뚜렷하고 올바르다. 입을 다물면 냉하지만, 제노 앞에선 상글하게 잘 웃는다. 대학교에서 받은 환대만 보아도 그는 준수한 사람이었다. 주변 환경 때문인지 다소 엉뚱한 것만 빼면, 제노의 세계랑 그리 멀어 보이지도 않는… 평범하게 괜찮은 사람.
“왜… 그렇게 봐요?”
긴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빤히 봤나.
“칵테일 잘 아는 거 같아서요.”
“어 보통… 누나들이 좋아하니까.”
“고객 여정 관리 같은 거네요.”
“네?”
“저는 그런 걸 잘 몰라요. 그래서 텐이 맨날 게이 실격이라고 해요.”
“저도 잘 모르는데… 선수 실격인가.”
옆자리에서 요란스러운 울음이 엎질러졌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은 여자가 전화기를 쥐고 아주 서럽게 통곡하고 있었다. 생로랑의 호보백을 팔 안쪽이나 손 대신 목에 건 채로. 몸에서 나오는 것들을 바닥에 흘리지 않겠다는 일념처럼. 흐어엉, 개새끼야! 나 진짜 죽여버릴 거야! 나 진짜아, 죽어버릴 거야…. 죽이겠단 건지 죽겠단 건지 잘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재민과 제노에게 칵테일을 내미는 바텐더도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제노는 옆쪽을 난처하게 돌아보았다. 재민은 여자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 옮길까요?”
조용히 묻자, 재민의 고개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어떻게 그래요?”
“네?”
“어떻게 그렇게… 마음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어요?”
나나는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노는 갑작스러운 그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대학 생활 체험에 즐거워하던 그가, 왜 갑자기 제노를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철가면처럼 보고 있는 건지. 자리를 옮기자고 해서 그런가? 여자를 위로하지 않아서? 남의 드라마에 함부로 끼어들기엔 너무 배타적인 세상이 아닌가? 물론 그녀를 위해 택시를 잡아주거나 허울뿐인 위로를 해줄 수 있겠지만, 그녀의 울음은 오롯하게 스스로 끝맺어야 하는 감정이다.
아니면 우는 여자이기 때문에. 이것도 고객 여정 관리의 일종일지도. 제노는 재민이 그의 ‘어떻게'에 대해 더 말해주길 바랐다. 그가 대체 무엇에 그토록 질린 건지 더 이해할 수 있게. 제노는 힐난 받은 어린애가 된 기분으로 글라스의 남은 칵테일을 홀짝인다. 유리 조각처럼 쓰고 냉랭한 커피 향이 입에 밴다.
“한때 좋아했던 사람한테… 어떻게 그렇게 건조해질 수 있어요…?”
아.
바에 걸린 클래식한 시계가 그들의 침묵을 잰다. 1. 2. 3. 초가 발작하듯 흘러간다. 아까 다 들었구나. 계단 아래서 서성거리던 게 재민이었던 거다. 재민의 눈이 숙연히 까라졌다.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다는 듯이. 목이 말랐다. 결국 칵테일을 하나 더 시켰다.
“오늘따라 내가 헤어지겠다는데 죄를 묻는 사람이 참 많네.”
“죄를 묻는 게 아니라….”
“제가 저렇게 울지 않아서 이상해요?”
멀리 앉아서 울던 여자가 뭘 봐 씨발! 하고 뻐큐를 날렸다. 그녀를 보면서 제노는 희미하게 웃었다.
“덜 사랑한 것 같아요? 울지 않아서?”
“…….”
“없으면 당장 그 자리에서 울고불고 죽어야 진짜 연애예요?”
“그건 아니지만… 사람은… 사랑을 하고 살잖아요. 당연하게…”
“사랑이든 연애든 다 선택이에요. 내가 재민 씨를 따라서 블랙 러시안을 먹을지, 아니면 다른 걸 마셔볼지, 하는 그 정도 선택. ”
“......”
“그게 나를 더 좋거나, 나쁜 사람으로 만들 순 있겠지만 죽게 만들 수는 없는 거예요.”
재민은 말없이 빈 잔을 내려두었다. 그의 앞에 벌써 잔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저… 이제 갈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재민을 따라 일어났다. 저도 다 마셨어요. 자연스럽게 지갑을 꺼내는 제노를 재민이 막아섰다. 재민은 외투 주머니를 뒤적뒤적 휘젓더니, 오만원권 한 장을 꺼냈다. 왜 지갑도 없이 지폐를 들고 다니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 돈을 꺼낸 건 재민이지만 집어넣은 건 나나였으리라는, 편견일지도 모르는 가설.
“전… 어디 다녀올 곳이 있어서요. 먼저 집 가세요.”
이 시간에 호빠 선수가 다녀올 곳은 한 곳뿐이다.
“네.”
더 묻고 싶지 않았다. 무슨 대답을 들어도 마음에 찰 것 같지 않아서.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 누군가 간신히 맞춰놓은 시곗바늘이 어긋난다. 제노는 찬바람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재민의 어조가 다 지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제노는 정환이 말을 더 해주길 바랐다.
그가 대체 무엇에 그토록 실망한 건지, 더 이해할 수 있게.
럭키 사우나
옥주 누나를 만나기 전에 살던 반지하 집은 시도 때도 없이 수도가 얼었다. 뜨순물을 찾아 헤매던 나나를 살려준 것이 바로 이곳. 럭키 사우나였다. 논현 1동 선수촌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낡고 후미진 사우나. 나나는 곧 이곳의 단골이 되었다. 새벽 네 시에 오면 아무도 없는 탕에서 개운하게 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노의 집에서 머물게 된 지 일주일이 조금 안 되었을 때도, 나나는 이곳에서 외박을 했다. 손님이 옷에다 토를 해놔서 집으로 곧장 갈 수가 없었다. 온탕에 몸을 푹 담그고, 한낮에도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선수 물을 오래도록 뺐다.
제노 앞에서 나나는 늘 그런 식의 노력을 했다. 그가 재민이 아닌 나나로 보일까 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 자신을 죽여왔다. 이곳은 나나가 가진 몇 안 되는 안전지대였다. 나나가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더운물과 마른 수건을 제공 받을 수 있는 곳. 남들과 똑같아질 수 있는 곳.
어느 순간부터 나나는 마음이 피로한 날 이 사우나에 오게 되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너 어디 갔냐?]
김 실장의 문자는 늘 짧고 명료했다. 사담이 묻어나지 않는 군더더기 없는 목적성 문자. 나나는 답장을 했다. 2시쯤 가도 돼요? 답장이 왔다. 아주 길게 왔다. 열두 시가 피크인데 어디서 좆뺑이 치러 갔냐, 니 돈 안 아쉽냐, 얼마 전에 땡겨간 이백 그거 이번주 내로 갚아라, 안 갚으면 니 손목 잘라서 팔아버릴 거다… 갈수록 그라데이션으로 험악해지는 김 실장의 문자를 조용히 무시했다. 오늘은 더운물에 오래 삶아지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나나는 겁도 없이 자신의 감정을 조명했다.
그는 제노에게 분명 끌리고 있었다.
제노는 나나에게 집을 내어줬다.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내면이다. 대체로 개인이 선택하고 구성한 온전한 세계다. 그런 내밀한 공간 한 켠에 나나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옥주 누나마저, 잠깐 함께 사는 내도록 얼마나 돈으로 눈치를 줬던가… 그런데 제노는 어떤 조건도 없이 나나를 삶에 들였다. 잠깐 얹히게 해주었다.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어쩌면 이렇게 시작되는 사랑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나에게 가장 간절한 것을 주는 사람. 사랑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나나는 함께 사는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제노를 반질반질하게 쓸고 닦았다. 온전히 봉사할수록 그의 영혼은 보람으로 빛이 났다. 심지어 제노는 나나를 대학에도 데려가 줬다. 자신의 일상까지 나눠주었다. 그래서…
그래서 뭐…
기대라도 했나.
‘사랑이라는 말은 좀… 과해.’
그 말은 꼭 나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너의 사랑은 과하다고. 너의 영혼은. 너의 가난은. 불행은. 내가 감당하기에 과하다고. 아직 아무것도 고백하지 않았는데. 요구하지 않았는데. 벌써 나나는 과한 사람이 되었다.
과한 사랑… 과하지 않은 사랑은 뭘까.
사랑이 선택인 삶은?
사랑을 선택하지 않아도 그런대로 살아지는 삶은 뭘까.
나나에겐 한 번도 사랑이 선택이었던 적이 없었다. 삶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쩐이나 사랑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나나는 쩐으로 굴러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겐 억만금을 잃더라도 사랑이 필요했다. 사랑이.
머릿속이 온통 씹던 껌 같은 잡념으로 끈적였다. 당장 빡빡 씻어내고 싶었다. 오늘은 오늘의 즐거움만 남겨두고 싶었다. 제노의 곁에 한 발짝 비벼 넣은 기념비적인 날이잖아. 언젠가 이게 조금 더 자연스러워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 제노가 나나더러 꺼지라고 한 건 아니니까… 안주해도 되지 않을까. 지금은. 다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고들 하니까. 목욕탕의 문을 열자 더운 증기가 나나를 반긴다. 나나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흰 김이 걷히고 났을 때 텅 빈 목욕탕을 보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였다. 벌써 속이 한 꺼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오길 잘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분 좋게 목욕탕으로 한 발짝 밀어 넣던 나나는 그 자세로 멈춰 섰다.
“…….”
혼자가 아니었다.
온탕에는 이미 머리털이 성성한 노인이 등을 보인 채 몸을 삶고 있었다. 양팔을 온탕에 푸근하게 걸치고. 커어, 되직한 신음을 흘린다. 그뿐이었으면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인의 등짝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었다.
봉황이.
눈도 안 그린 봉황이었다. 왜…? 눈까지 그리면, 진짜 봉황이 되어 날아가 버리나…? 나나는 도저히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인기척을 느낀 노인이 뒤를 돌아본다. 위엄있는 인중, 갈매기 눈썹, 세월이 놓은 칼빵처럼 진하게 겹쳐진 주름들. 그리고 봉황. 눈알이 희게 빈, 늙은 등짝을 갑옷처럼 뒤덮은 봉황.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은 온탕 삘이 아니었다. 술도 마셨고. 술 마시고 온탕 들어가면 위험하니까. 실신할 수도 있댔으니까. 바깥은 춥지만, 여긴 따뜻하니까 냉탕도 나쁘지 않다. 샤워만 해도 좋겠다. 그러자. 그러나 나나가 샤워 존을 향해 한 걸음을 마악 떼려던 순간, 다시 커억! 와일드한 목울림이 들렸다. 헉. 부리부리한 눈이 나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나나의 두려움 같은 건 다 꿰뚫어 보는 듯한 포식자의 눈…
“죄, 죄송해요. 앉을게요.”
생각보다 먼저 말이 튀어 나갔다. 노인이 여전히 야리는 시선을 느끼면서, 나나는 어깨를 쭈구리고 온탕으로 엉금엉금 들어갔다. 물이 뜨거웠음에도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미 들어온 이상 나갈 수 없었다. 영감님 떠나면 얼른 도망치기로 했다. 대충 샤워하고 곧바로 내빼야지. 제노 씨한테 들려줘야지. 등짝에 눈 없는 봉황을 얹은 할아버지를 봤다고. 척 봐도 왕년에 한따까리 하던 분 같아서 너무 무서웠다고…
금방… 나가겠지?
삼십 분. 한 시간 내로는…….
§
나나가 연락을 받지 않는다.
별다른 연락은 아니다. 렌즈 통이 안 보이는데, 혹시 어디 치워두거나 가져갔는지. 아니지. 잘 때 입는 애착 티셔츠도 안 보이는데. 혹시 이것도 빨거나 어디 입고 갔는지. 아니다. 1.5리터 생수를 더 시킬까 하는데, 재민이 입주한 이래 생수를 주문하는 텀이 짧아졌다는 걸 알고 있는지. 그따위 것들을 묻기 위해 제노는 문자로 재민의 이름을 불렀다.
1 혹시
1 언제 와요?
1은 한 시간이 다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실로 이례적인 일이다. 평소에 1분이 지나기도 전에 1이 사라져서 휴대폰을 몸에 심어놨나 싶었던 인간인데.
불쾌한 죄책감의 찌꺼기가 손톱 끝에 걸린다. 제노는 집에 오자마자 세탁기에 옷을 던져 넣고 몸을 씻었다. 목이 말라서 생수를 반 통 정도 비웠다. 몇 개 안 쌓인 설거지도 했다. 하지만 소낙비에 젖은 옷을 미처 갈아입지 못한 것처럼, 선득하고 검질긴 감각이 일련의 행동에 들러붙고 만다. 재민은 왜 카톡을 읽지 않을까? 왜 같이 집에 오지 않았을까? 제노 스스로가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왜 자꾸 그가 평소와 다른 이유를 짐작하고 변명을 덧붙이고 싶어지는 걸까.
재민이 어디서부터 정환과의 대화를 관음했을지 궁금해졌다. 정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더라. 어떤 자세로, 말투로 대꾸했더라. 분명 다정하거나 부드럽진 않았을 것이다. 악감정이 있어서라기보단… 제노가 경계 바깥의 사람에게 으레 취하는 태도다.
정환의 얼굴을 다시 본 것은 어언 2년 만이다. 입대하기 전에 헤어졌으니까. 재민이 제노의 비정한 태도를 문제 삼는다면 제노도 할 말은 많았다. 여전히 정환과 다시 만날 만큼 지지부진하고 대단한 연애를 못다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헤어진 지 너무 오래라 뭘 하고 연애했는지도 까무룩한데. 이제 와서 절절히 끓는 척이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제노는 공군을 지원했고 격달마다 꼬박꼬박 휴가를 나오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간 정환의 살가운 연락을 받거나 미련을 엿본 적은 없었다. 전역 직후도 아니고. 이제사 알음알음 연락을 하고 얼굴을 들이미는 이유는 뻔하다. 어디서 제노의 소식을 주워들었을 것이다. 제노는 정환의 마음이 지극히 자기 편의에 따른 선택적인 미련임을 알았다. 그 편폐를 비난할 의향은 없었지만, 장단을 맞춰줄 의무도 없었다.
제노는 재민이 아니다. 돈 들고 나른 옥주는 물론이거니와 그냥저냥 평균치의 연애를 끝마친 남자친구와 다시 마주치는 일이 달가울 순 없었다. 정환과 제노는 같은 학부였고, 연애를 할 적에야 공통의 커뮤니티가 이점이 되었으나 지금은 반대였다. 정환의 갑작스런 연락을 받거나 마주칠 때마다 계단을 잘못 디딘 것처럼 가슴이 내려앉긴 했다. 하지만 그를 보며 달콤한 사랑을 속삭였던 나날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징징거리는 정환을 보고 있으면 정환의 투정에 변명하거나, 피로했던 급급한 시간이 떠올랐다. 재민이 정환에게 제자신을, 제노에게 옥주를 이입해서 상황을 해석한다면 정말이지… 억울하고 곤란한 일이다.
제노가 재민이 아니듯 재민은 정환이 아니다. 그는 만나는 여자에게 더 다정했을 텐데. 늘 최선을 다했을 텐데. 재민은 제노에게도 아주 잘해주니까. 쉽게 제노의 일상을 다듬어주고, 그를 위한 끼니를 챙기니까. 몇백만 원을 꼴아박고도 잃은 것이 돈이 아니라 사랑임에 슬퍼하니까. 재민에겐 사랑이 습관인 것 같았다. 누구든 그와 만나면 넘칠 만큼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게 뻔했다. 연애가 끝났다는 이유로 재민을 매섭게 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노였다면. 제노가 옥주였다면 분명 정환과 다르게 재민을 대했을 것이다…
…라고 나는 재민에게 말하고 싶은 걸까?
그렇다면 왜?
제노는 개수대에서 라면 냄비를 헹구다 수도꼭지를 잠근다. 애초에 대화를 엿들은 재민이 잘못했다. 왜 내가 변명을 하고 앉았어. 제노는 수챗구멍을 청소하며 몇 가지 명제를 떠올린다. 재민이 제노의 행동에 설명을 필요로 하는가? 재민이 상처를 받았는가? 그렇다면 내가 그를 달래줄 의무가 있는가? 재민의 잠수에 마음을 쓸 필요가 있는가? 내가 재민과 연애를 하고 있는가? 따라서 죄를 지었는가? 공통된 답은 모두 ‘아니오'이다. 제노는 고무장갑을 벗고 핸드폰의 화면을 뒤집어 놓았다. 다시 수도꼭지를 연다. 수세미로 냄비를 벅벅 문지르며 이 정체 모를 죄의식과 불안한 포만감이 떠내려가기를 바란다.
제노는 신경 쓰지 않기로 다짐한다. 재민이 어디서 술을 팔고 있든 말든. 떡을 치고 있든 말든.
떡을 치고 있든 말든…….
불필요한 상상이…
제노는 헹군 냄비를 다시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생수병을 까 붓는다. 불을 올린다. 떡. 떡을 치는 재민…을 상상하지 않기 위해 열라면 한 봉지를 까 넣었다. 하지만 생각의 길을 들일 순 없다. 한 번 물꼬가 터지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제노는 면이 익는 짧은 시간 동안 좁은 자취방을 배회한다. 걸음걸음마다 헛된 상상이 새로이 피어나고, 제노는 부러 다른 생각을 한다. 라면을 냄비째로 식탁 위에 올리고, 유튜브로 EBS 다큐 프라임에서 호랑이 다큐멘터리를 켰다. 괜히 그런 다짐을 해서……. 하지만 궁금해진다. 재민은 술을 팔 때도, 떡을 칠 때도 그렇게 친절할까. 나한테 하듯이. 어쩌면 그보다 더?
베란다에 꺼내놓았던 소주 한 병을 들여왔다. 마땅히 따를 잔도 없어 스타벅스 머그컵에 따랐다. 순식간에 반병이 사라진다. 입술도 속도 매웠다. 수저질 몇 번, 입술이 퉁퉁 부은 채로 눈밭을 거니는 호랑이를 노려보기를 몇 번. 그는 메시지 하나를 더 전송한다. 화면을 두들기는 손가락이 자못 전투적이다.
1 어디세요??
24시간 나라시
두 시간이 지났다.
나나의 몸에 있던 알코올이 전부 끓어 날아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조금 졸던 나나는 물이 촥 쏟아지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어슬렁 온탕 밖으로 나가는 영감의 뒷모습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출근하기로 한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드디어 나갈 수 있다….
“큼.”
등 뒤에서 아주 큰 헛기침이 들렸다. 샤워기 앞까지 당도한 나나는, 그래선 안 됐지만, 또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부리부리한 눈과 마주쳤다.
허리를 짚고 선 영감님이 고개를 까닥인다. 나나는 멀찐히 자신을 가리켰다. 영감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다시 큼. 까닥였다. 노령의 남자가 턱짓한 곳에는 투박한 글씨가 위용 있게 박혀 있었다.
‘세신은 선불입니다’
아이고, 형님 또 때 밀러 오셨습니까?
큼.
아직도 얜 눈깔이 없네. 제가 형님 그림이랑 아이 컨택을 하도 해서 이제 맨 등짝은 보기 허전해요. 근데 청년도 때 밀러 왔어요?
네….
잠시만요. 여기 형님 등부터 밀어드리고 금방 밀어드릴게요? 이 형님이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이 동네에서 한따까리 하는 나라시 대빵도 형님 등짝 앞에만 서면 얼굴이 팍! 굳어요. 하하!
…….
근데 형님, 얼마 전에 심장 안 좋다고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큼.
아이구 저런. 검사는 받아보셨어요?
뭣 하러.
그래도 연세가 있으신데 한 번 받아보시지 않고…
심장은 쉽게 뒈지지 않아.
그럼요. 사람이 의외로 참 뒈지지 않죠.
(나나는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급한 용무가 생겼다고 토깔지 고민했다. 그러나 실천에 옮기기 직전 영감이 입을 열었다.)
내 친구 중에, 방사능에 피폭된 놈이 있는데… 심장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았다. 그래서 뼈랑 살이 다 문드러질 때까지 죽지도 못했어.
저런… 아주 고통스러우셨겠네. 하기야, 심장은 암도 안 걸린다잖아요. (팡) 등짝은 다 밀었고. 돌아누워 보세요.
큼.
그래도 대한민국에 제일 흔한 게 심장병이라던데요.
…….
그냥 검사받아봐요. 건사해줄 가족도 없으신 양반이.
심장만 뛰면, 그게 사는 건가? 쩐 없고, 마누라 달아나고, 집도 절도 없는 놈이… 심장만 뛰어서 뭣해.
세신사는 그 이후 조용히 때를 밀었다. 이태리 때밀이가 착 떨어지고, 영감이 몸을 일으켰다. 나나는 세신 다이에 엎드린 채 돌아나가는 영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아까까진 공포스럽기만 하던 뒷모습에서 조금은 병약하고 조금은 초라한 세월의 냄새가 난다. 그 노쇠한 남자가 왠지, 멀지 않게 느껴졌다.
“큼.”
멀지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가까울 필요도 없었다.
또 영감이 있다. 이번엔 넓은 공간도 아니고 사방팔방 밀폐된 사우나 흡연실. 나나는 이제 달아날 곳이 없다. 방금 탈의실에서 들고 온 휴대폰으로 가냘픈 도피를 시도했지만, 그곳도 안전하지 못했다. 일단 알림 최상단을 차지한 8통의 부재중 전화와 25통의 문자 속에서 김 실장이 무시무시한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미리보기로 뜬 문자들의 나열은 최종적으로 이렇게 끝났다 : 어디세요
빡빡 밀린 등으로 식은땀이 흐르니까 따가웠다. 나나는 빠르게 답장했다. [논현ㄴ동 럭키 사우나요]. 문자를 치는 동안에도, 온 신경이 문신 할아버지한테 쏠려 있었다. 불편했다. 불편해서 미칠 것 같았다. 담배를 하나 꺼내 물자 할아버지가 다시 헛기침을 했다. 도로 담배를 집어넣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나나는, 자신이 문자를 잘못 보냈다는 걸 깨달았다.
[논현ㄴ동 럭키 사우나요]
수신자가 제노로 되어 있었다. 두둑히 쌓인 문자가 전부 김 실장이 보낸 것이라고만 여긴 것이다. 아. 이게 아닌데. 잘못 보냈다고 해야겠다. 근데 왜… 어디냐고 물어봤지? 잠깐의 혼란이 공백을 만들었다. 그 순간 질 나쁜 운명처럼, 전화가 걸려 왔다.
김 실장이었다.
나나는 전화를 잽싸게 받았다. 실장님. 제가 그러려던 게 아니라요… 재빠른 변명을 지까렸다. 그러나 기다리던 욕설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나는 귀를 기울였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어떤 요란한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깨지는 소리.
욕설.
말리는 소리.
괴성.
이윽고 흐느낌.
나나에게 익숙한 소리들.
[나나.]
그리고 조용한, 김 실장의 목소리.
[오늘 출근하지 마라.]
“네?”
[여기 경찰 다녀갔어. 지난번에, 네가 받은 손님이……]
이어지는 말을, 나나는 침묵 속에서 들었다. 휴대폰을 든 손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노인이 그런 나나의 옆모습을 말없이 훔치고 흡연실을 나갔다. 이제 나나는 나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가장 죽기 좋은 자세를 발견한 나비처럼. 그 자리에 정지한 나나의 손목에서 온기가 흐려져 간다.
제노 씨.
세상이 충분히 높지 않게 여겨진 적 있어요?
미끄러지고 다시 미끄러져도, 깨지지 않고 구르기만 하는 삶이 진저리난 적 있어요?
럭키 사우나와 언럭키 보이
[논현ㄴ동 럭키 사우나요]
[잘못 보내썽요]
나나는 알까. 이 동네에 럭키 사우나가 두 개라는 것을.
이제노는 두 번째 럭키 사우나 앞에 앉아있다.
문자는 베란다의 소주병을 몇 병 더 꺼냈을 때 왔다. 제노는 알람 소리에 젓가락을 내팽개치기까지 했다. 럭키 사우나. 눈까지 찡그리며 지도 맵에 검색을 했다. 논현동 소재의 목욕탕이 두 곳 떴다. 이제노는 비척비척 점퍼를 주워 입고 슬리퍼를 꿰어신었다. 한밤중인지라 바람이 대바늘처럼 따갑고 찼으나, 술기운 때문에 미처 몰랐다.
첫번째 럭키 스파는 여성 전용이었다. 하필 네이버 지도에 가장 먼저 떠서 그곳을 찍고 콜택시를 불렀다. 도착하고서 남자는 못 들어간다는 걸 알았다. 여성 전용. 네 글자를 봤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다시 본 문자엔 오타가 범벅이었고, 잘못 보냈다 정정하기까지 했고, 심지어 사우나는 영업이 종료되어 불이 꺼진 채였다. 출장… 뭐 그런 건가? 안 내리고 머뭇거리니 택시 기사가 호통을 쳤다. 안 내려요? 불이 꺼져 있어서……. 아 그러게 여성 전용엔 뭐 하러 가? 한 팔백 미터 가면 럭키 사우나 또 있어요. 새벽까지 하는 데. 거기겠지! 제노는 얌전히 차 문을 다시 닫았다. 할증이 붙은 택시비가 초 단위로 자릿수가 바뀌었다. 두 번째 럭키 사우나는 과연 영업 중이었다.
이제노는 럭키 사우나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훈김이 가득 찬 유리문을 보고서야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재민이 있어도, 없어도 무서울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재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이라는 냉랭한 여자의 목소리가 대신 제노를 반겼다. 야간 할증이 풀리기까지 20분이 남은 시각, 제노 건물 1층 계단에 처량하게 엉덩이를 붙였다. 테라조 타일 바닥에서 냉기가 스몄다. 제노는 슬리퍼 바깥으로 드러난 맨 발가락을 옴직였다. 술기운이 깨면 분명 추워질 테고, 내일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왜 내 연락은 안 받으면서 통화 중일까. 누구랑. 원래 럭키 사우나라는 대답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명치가 싸늘할 정도로 서운했다. 한편으론 서운한 스스로가 웃겼다. 뭐 어떤 사이라고. 얼마나 봤다고. 술에 취해 마음이 말랑해진 까닭이다. 다시 홧김이 뒤통수를 욱 민다. 아니? 이건 사람으로서, 지성인으로서의 예의가 아니다. 내가 객식구라고 나나를 천대한 적 있나. 학교도 데려가고, 모임도 데려가고. 어디 가면 간다, 오면 온다 꼬박꼬박……. 그런데 사람을 이렇게 걱정시키고. 먼저 모르는 약속이 있다고 제노를 길바닥에 팽 내팽개쳤다. 이렇게 추운데. 나 감기 걸릴 것 같은데. 내가, 내가 정환이랑 사귈 때도 맨발로 어디 뛰쳐나간 적이 없는데. 뒤늦게 입술이 삐죽였다. 앞으로는 정말로, 어디서 떡을 치든 빵을 굽든 1초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다. 나나는 정말 순 자기 마음대로야. 제멋대로야. 나름대로 평화로운 내 일상에 돌을 던져서.
“제노 씨?”
이 순진하고 착한 얼굴로.
이만한. 정말로 큰 돌을 던져서…….
제노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계단 위에 선 뿌연 실루엣. 취한 눈을 한 번 더 깜빡였다. 사우나 유리문을 등지고 서 있던 실루엣이 제노를 향해 걸어 내려온다.
“제노 씨… 맞아요?”
낯선 앵글이었다.
제노는 올려다보고. 남자는 내려다본다. 그런데도 제노는 그보다 더 낮아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순진하고 착하기만 하면 됐지. 왜 슬프기까지 한 표정이지?
저벅.
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떴을 뿐인데도 무언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두 눈동자가 점차 선명해진다. 아까까진 만나지 못할까 봐 겁이 났는데. 막상 만나니까 심장이 내려앉았다. 괜히 왔나. 추운데. 감기 걸릴 것 같은데. 내가 정환이랑 사귈 때도 이런 적이 없는데….
저벅.
저벅.
이제 그는 제노보다 한 칸 아래에 있다. 제노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몸을 낮췄다. 왜 왔는지. 자길 기다린 건지. 술 많이 마셨는지. 그런 빤하고 쓸모없는 대사를 뱉지는 않았다. 단지 손을 움직였을 뿐이다. 사우나의 열기를 머금은 두 손이 제노가 신고 온 슬리퍼를 벗겼다. 새빨갛게 추워하는 맨발을 감싸 쥐고, 더운 피가 돌 때까지 오래도록 문질렀다.
“겨울에는 잠깐도 맨발로 다니지 마요.”
그의 목소리가 하얗게 흩어졌다. 발은 추워지기 쉽거든요… 눈에서 제일 머니까, 잘 안 보이잖아요. 제노는 자신의 가장 낮은 곳을 돌보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눈과 먼 게 추운 것과 무슨 상관이지. 취해서 잘 이해가 안 가는 걸까. 제노는 내려다보고. 남자는 올려다본다. 비로소 평소의 앵글로 돌아왔다. 비로소 그가 좀 재민으로 보였다. 아닌가. 나나인가. 뭐가 다른진 몰라도… 재민은 제노의 발을 자기 허벅지 위에 가져다 놓였다. 겁도 없이. 제노는 코를 훌쩍였다.
“발만 추운 거 아닌데요.”
“또 어디가 추워요?”
“발끝도 코끝도, 몸에 난 모서리가 다 얼어떨어질 것 같은데요….”
“…다 따뜻하게 해주면 좋겠어요?”
당연하죠. 누구 때문에 이렇게 추운데. 왜 전화를 안 받아요? 럭키 사우나 두 개라서 택시 기사 아저씨한테 혼났어요. 이 시간에 할증 붙는데. 제가요, 꼽 주는 것도 생색내는 것도 아닌데요
그래도 늦으면 늦는다고 말은… 해줄 수 있잖아요. 무엇이든 쏟아내려고 했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추위에 혀가 얼어버린 게 분명했다. 연신 목울대를 울컥이는 제노를, 재민은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입술이 파래요…”
추워.
“따뜻하게 해주면 좋겠어요?”
맞다. 베란다에 있던 거 다 마셔서 이따가 분리수거해야 하는데. 라면도 안 치우고 나왔는데. 뇌를 흐르던 알코올이 저릿하게 뒷목을 감돈다. 재민이 그곳을 감싸서, 작은 전류가 흐르는 것 같다. 두 눈이 이제는 아주 가까웠다. 또 아무 말 없이도 많은 말을 하고 있다. 제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멍하게 그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정환이는요. 제가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나와도 발 안 만져줘요.”
“……."
“저도 맨발을 이유 없이 만져주는 사랑이었다면 울었을 거예요.”
하려던 말과 다른 말들뿐이다. 집에서부터 혓바닥에 서리처럼 달라붙어 있던 말들이, 재민이란 온기를 만나 줄줄 흘러내렸다. 저도 잘 울어요. 울줄 알아요. 제가 어릴 때 얼마나 잘 울었는지 알아요? 맨날 엄마한테 혼났어요…. 취한 사람이 늘어놓는 말을, 재민은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었다. 그의 입가가 어색하게 기울어졌다. 아주 오랜만에 웃어보는 사람처럼.
제노 씨.
취하면 좀… 귀여우신 거 같아요.
그게 뭐냐고, 따지려던 말 위로 입술이 겹쳐졌다.
부드러운 키스였다.
아직 열기를 머금은 재민의 입술은 따뜻했다. 생각들이 첫눈처럼 흔적 없이 녹았다.
§
그런 날이 있다.
일 년에 일어날 일들이 하루에 한꺼번에 몰아치는 듯한 그런 날.
술 마시고 피운 담배 한 대처럼, 키스란 취기를 깨우긴커녕 더 강하게 끌어올리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있는 힘을 끌어모아 견뎌온 체력이 바닥났거나. 키스 후 제노는 문자 그대로 녹았다. 기울어지는 몸을 나나가 급하게 붙들지 않았더라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을지도 모른다.
“택시 타야 해요. 택시… 근데 택시 타면 할. 할증 붙으니까 첫차 타야 해요. 근데 진짜 추워요… 양말 신을 걸. 어어. 지금 택시 부르려고 했죠. 돈 많아요? 나는, 오늘 택시비를 너무 많이 썼어.”
청기 백기 같은 주문을 중얼거리는 제노에게 네 네, 안 부를게요, 장단을 맞춰주면서 재민은 우선 자신의 신발과 양말을 제노에게 신겨주었다. 제노의 슬리퍼는 재민이 신었다. 발 사이즈가 꼭 같았다. 취객을 추슬러 업기까지도 시간이 좀 걸렸다. 끙. 등판에 간신히 제노를 엎어놓았을 땐 땀까지 송글송글 나고 있었다. 힘겹게 수습한 제노를 업고 거리로 나섰다. 처덕. 처덕. 나나가 신은 슬리퍼가 인적 없는 골목의 아스팔트를 때린다. 머리 위로 칼바람이 씽 불었다. 나나는 입술을 까물었다. 선택지가 몇 개 없었다. 다시 사우나냐. 아니면 택시냐. 등에 붙은 입술이 다시 종알거린다.
“택시 비싸다니까.”
“제가 할증 낼게요. 우리 택시 타요.”
“할증 안 돼!”
“안 돼요? 그럼 조금만 탈까요? 저 발이 너무 추운데….”
“발… 발 추우면 안 되니까요. 조금만 타…….”
조금만 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나나는… 취객을 업고 가는 게 제일 힘들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옆에 앉혀 놓으니, 갇힌 공간에 딱 붙어 앉는 게 진짜 위험한 거였다.
“되게 크다….”
“네……”
“한 근 나오겠다.”
“그… 그만…….”
근육이 빡 경직된다. 허벅지에 힘을 준 채 나나는 제발 기사님이 뒤를 돌아보지 않기만을 바랐다. 술에 취한 제노는… 거침이 없었다. 손이 특히 그랬다. 그는 그것을 잠시도 재민의 허벅지에서 떼려고 하지 않았다. 취해서 고개도 잘 못 가누면서, 재민의 어깨에 조그만 옆통수를 툭 기대놓고 온종일 주물주물… 가지고 놀 걸 찾아서 기쁜 고양이처럼 계속. 우측수납 하지 말걸… 원래 대학생들은 이런가… 택시에서 막… 사람 만지고. 아니면 설마 나나가 호빠 선수라서…….
마지막 가능성을 떠올리자 울적해졌다. 오래 울적할 순 없었지만. 제노의 길쭉하고 마른 손가락은 취객답지 않게 노련했다. 그가 한 지점을 더듬을 때마다 헛숨이 목젖을 탁 치고 올라왔다. 헉. 허벅지에 더욱 힘을 줬다. 근육을 아무리 쥐어짜도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슬며시 겉옷 자락을 끌어다 제노의 손 위를 덮었다. 가려놔도 코트 자락 아래로 꿈틀거리는 움직임은 고스란히 보였다. 도가니 안쪽이 바짝 쪼인다. 이를 악물었다. 아래턱 근육이 불뚝 발기했다. 나나는 울고 싶었다. 제발. 제노 씨…
“기, 기사님.”
“예?”
“그냥 건너서 세워주세요.”
멀리 떨어지지 않은 모텔촌 앞에 택시를 세웠다. 정말 조금만 탈 수밖에 없었다. 택시에서 사정하는 미친놈이 될 순 없었으니까.
§
대실이 되나요. 재민은 모텔의 어귀에서 물었다. 이 시간에 되겠어요? 중년의 여성이 대답한다. 재민의 팔에 빨래처럼 걸린 제노가 한 차례 미끄러졌다. 재민은 다급하게 그를 추켜 올렸다. 남는 방. 남는 방 주세요.
2박.
네?
지금 시간 너무 늦어서 2박 3일로 들어가요.
카운터에 앉아있던 중년의 여성은 그렇게 말했다. 뿌리 염색을 안 한 지 반년은 된 것 같은 모양새로, 턱을 괸 채 당연하게 쏘아붙였다. 대실도 아니고 2박. 늦게 왔으니까 반박 아닌가. 왜인지 이유가 궁금했으나 나나는 토 달지 않았다. 첫 번째로 그럴 성격도 못 됐고, 두 번째로 바지 사정이 너무 급급했다. 토를 단 건 이제노다. 재민은 거의 소스라치며 제노를 끌어안았다. 네, 네. 키 주세요. 눈을 찡그려 아줌마와 눈싸움을 하는 제노를 거의 엎어 매쳐야 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제노는 가는 눈으로 그녀를 야리고 있었다.
객실은 생각보다 멀끔했다. 유색 조명을 쓰지 않았고, 침대보가 눅눅한 감 없이 흰색이었다. 나나는 그게 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텔의 주인을 노려보긴 했지만, 제노는 반항하거나 부축을 방해하지 않았다. 침대 위에 눕자마자 얌전히 눈을 감았다. 침대 위에 제노를 내려놓고 겨우 한숨을 돌렸다. 한겨울에도 몸을 써서 그런지 이마가 축축했다. 사우나에서 세 시간이나 삐댄 보람이 없게.
빠르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제노는 여전히 10분 전 눕혀놓은 자세 그대로 누워있었다. 원래도 잠버릇이 험한 편은 아니었다. 눈을 감은 모습이 실컷 놀다 잠든 아이처럼 곤해 보였다. 그의 곁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뭘 하지. 잠은 오지 않는데. 리모콘이 있기에 아무 생각 없이 TV를 켰다. 곧바로 화면이 한 가지 색으로 물든다.
[⑲ 슈퍼스타와의 하룻밤 : ‘먹고 싸고 사랑하라’…]
채널을 돌렸다.
[⑲ 아이도 있는 집에서?! 유부녀와 하룻밤 일탈…]
채널을 돌렸다.
[⑲ 술 취한 동기와 모텔에서 첫경험! 노모…]
돌리는 채널마다 살색 향연이다. 옅은 충격이 뒤통수를 치고 갔다. 지금이 새벽 시간대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일관된 행위를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 섹스할 생각 없이 방문하는 커플도 있을 텐데. 아니, 심지어 커플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냥 취한 게이 대학생과 호빠 선수가 건전한 목적으로 모텔에 방문할 수도 있는 건데. 이렇게 쉽게 에로 컨텐츠를 노출시키다니. 모텔의 성의없는 채널 선정 속에서 허우적대던 나나는 간신히 다큐멘터리 채널을 찾아냈다. 살색만을 출력하던 화면이 곧 건조한 바닷빛으로 물들었다.
돌고래는 의식적으로 숨을 쉬는 동물입니다. 잠을 잘 때도 결코 의식을 잃지 않죠. 의식을 잃는 순간 익사할 테니까요. 숨을 쉬기 위해, 그들의 뇌는 절반씩 교대로 수면을 취합니다. 한쪽 뇌가 잠들어도 다른 뇌로 호흡할 수 있도록. 심지어 그들은 자면서도 두 눈을 감지 않습니다. 늘 한쪽 눈을 뜨고, 자신을 습격할 포식자를 경계하고 있죠. 잠들고 나서도 완전히 안심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분명 무척이나 피로한 삶일 것입니다…
다큐멘터리는 아주 이기적인 장르야. 소미 누나의 말이 떠오른다. 그것만큼 감독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담기는 장르도 없거든. 그걸 능숙하게 감추느냐, 아니면 들키느냐. 그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이 감독은 돌고래의 삶이 무척이나 피로하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조금 돌고래를 연민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보기에 돌고래가 참. 불쌍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의식적으로 호흡하는 삶….
나나는 매 순간 쩐을 의식했다. 옷을 고를 때. 밥을 먹을 때. 길거리를 걷다가 문득 횡단보도 건너편에 선 행인들을 볼 때. 계절에 맞게 피어난 꽃을 볼 때.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 살을 섞을 때조차 돈에 관해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누가 혼이라도 낼 것처럼. 나나를 당장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호흡을 의식하는 삶과 호흡이 부채가 되는 삶…. 어느 쪽이 더 불행할까.
사람들은 보다 더러운 각도를 원했다. 그들에게 나나는 최고의 포르노였다. 날조가 아니라고 강조해야 할 만큼 진짜배기 생생한 다큐 포르노. 제가 지어낸 게 아니라요. 정말 아빠가 누군지 몰라요. 엄마는 제가 초등학생 때 애인이랑 달아났어요. 빚이 많아요. 갈 곳이 없어요. 시청률이 올라간다. 사랑스러움이 올라간다.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은 나나가 가진 몇 안 되는 재주였다. 그러나 포르노에 사랑스러움이 얼마나 필요할까. 사랑한다는 말이 오갈 때마다 대본도 없이 홀로 뺨을 붉히는 배우. 컷이 나오면 끝나야 할 연기에서 깨어나질 못하는 머저리. 그를 향해 내레이터는 어떤 사족을 보탤까. 그렇게 살면 무척이나 피로하겠다고? 구차하고 찌질하다고?
내레이터가 아닌 다른 감독은.
제노는.
나나의 포르노를 자신의 다큐멘터리 속으로 끌어들인 그는.
나나의 삶을 어떤 각도로 보고 있을까.
“아까 왜 키스했어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나나는 펄쩍 놀랐다. 뒤를 돌아보자, 베개에 비뚜름히 고개를 기댄 제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직 취기가 안 가신 건지, 아니면 잠이 덜 깬 건지, 나나를 응시하는 눈이 몽롱했다.
“어, 언제 깼어요?”
“방금….”
턱. 제노가 함부로 팔을 휘둘러 나나의 몸에 얹었다. 흡사 팔이 아니라 죽도 같은 걸 올리는 줄 알았다. 나나의 시선이 부산스러워진다. 티비 화면을 봤다가, 거울을 봤다가, 침대 모서리를 봤다가… 다시 제노를 본다. 제노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는 선형이다. 그의 시선 끝이 가운의 어드매를 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나나는 조용히 옷자락을 여몄다. 가운에 새겨진 모텔의 이름을 노려보면서, 제노가 다시 낮게 웅얼거렸다.
“전 옥주 누나도 아닌데… 왜 키스했어요?”
그 말은 많은 의미를 함유하고 있었다. 나는 옥주 누나가 아닌데. 옥주 누나는 여자지만 나는 남자인데. 정환이라는 동성의 애인을 둔, 당신과는 꿈에도 키스할 리가 없는 사람인데. 축약된 질문 속에서 나나는 멍하게 생각했다. 그러게. 왜 키스했더라… 머릿속이 텅 비었다. 그래서 당장 떠오르는 이유를 아무거나 뱉었다.
“추… 춥다 그러셔서.”
“네?”
“입술이 파래서… 따뜻하게 해주려고.”
“…그게 다예요?”
그러게요. 그땐 그게 정말 좋은 생각 같았는데… 키스하는 게 아주 옳은 행동 같았는데. 나나는 여들없이 입만 우물거렸다. 아직 입안에 혀의 느낌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나나를 응시하는 건조한 눈이 점차 무겁게 까라진다.
“사람 오해하게….”
제노가 몸을 일으킨다.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여전히 곁에서는 다큐멘터리가 방영 중이었다. 화장대 앞에 가 앉은 제노는 렌즈를 빼기 위해 애썼다. 아야. 혹시 인공 눈물 있어요? 건조해서 잘 안 빠져… 제노가 눈을 비비려고 하기에 무심코 손목을 잡았다.
“제가 빼 드릴게요.”
제가 누나들 렌즈 잘 빼줬거든요… 방금은 불필요한 변명이었을까. 나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제노의 턱에 손가락을 댔다. 작은 얼굴이 손에 다 들어왔다. 엄지로 포시러운 눈 밑 살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조금 크게 뜨인 제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운 사람처럼. 너무 건조한 눈은 너무 축축한 눈과 어느 정도 닮아 있었다. 나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기울였다. 가까이. 더 가까이. 제노의 속눈썹이 나나를 찌를 만큼 가까이.
이렇게 가까운 앵글에 담긴 적이 있었던가. 지금 나나는 도구다. 아직 샤워실의 습기를 머금은 축축한 도구. 집게손가락으로 살살 렌즈를 건드렸다. 제노가 흠칫, 반사적으로 여러 번 깜빡거린다. 아주 가까이에 놓인 속눈썹이 파르르 떨었다. 그 떨림은… 벽에 내리꽂힌 칼날이 털어내는 분노 같기도 했고, 지친 나비가 살려고 하는 날갯짓 같기도 했다. 아프구나.
화면 한편에서 나나는 생각했다. 건조해서 아플 수도 있구나.
저도 맨발을 이유없이 만져주는 사랑이었다면 울었을 거예요.
무정한 성정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를 적실 줄 모르는 거라고. 물기가 없어서 쉽게 부러지고 아파할 수 있지만 그걸 새삼스럽게 여기지 않을 뿐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물을 멀리해왔다고. 제노의 글썽한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나는 검지에 묻어 나온 마른 렌즈를 휴지로 감쌌다. 제노는 아직 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쪽짜리가 된 시야가 나나의 양면을 지켜본다. 나나는 나머지 한 쪽의 눈에도 손을 가져다 댔다. 렌즈를 살살 건드리면서. 담담하게.
“손님이 죽었어요.”
제노는 나나가 어떻게 살아남아 왔는지 모른다. 검은 개처럼 쫓아오는 가난으로부터, 나나가 어째서 무고해질 수 없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그러는 거다. 고작 키스 한 번에 오해를 하는 거다. 알려줘야 했다. 나나가 어떤 사람인지.
“아까 실장님이 전화해서 알려줬어요. 몇 번 본 누나였는데요. 호빠 온 걸 들켜서, 애인이랑 싸우다가… 사고가 좀. 있었대요.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방금 호흡기 뗐대요. 오늘 경찰이 업소에 찾아왔다고 하더라고요. 제 이야기를 듣고 싶었나 봐요. 제가…”
“.....”
“제가 그 누나 마지막 술잔을 채워준 사람이라서요.”
제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어떤 대답을 골라야 하는지 몰라서 침묵을 지키는 것 같았다. 나나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없는 것에 가까웠다.
“저는 숨 쉬는 것만으로 죄를 짓고 사는 거 같아요.”
나나는 내일을 살아갈 것이다. 하루가 지나면 그가 손님을 죽인 바로 그 업소에 앉아있을 것이다. 앵두콘에 양주 타먹는 창놈이 돼서, 놀러 온 누나들에겐 재주를, 울러 온 누나들에겐 위로를 꾸며낼 것이다. 담배 연기 자욱한 대기실에 앉아 토토나 달팽이 경기 따위를 들여다 볼 것이다. 몸도 마음도 너덜해진 여자들이, 이곳의 너절한 남자들에게 돈을 뿌리러 오길 기다리면서. 마른 웃음이 났다. 사는 것도, 살아지는 것도 아닌, 단순히 죽기까지 남은 시간을 하루씩 셈할 뿐인 삶. 돈을 물처럼 쓰고, 시간을 막 쓰고, 존재 의미라던지, 내일이라던지, 소소한 행복 한 자락조차 찾을 수 없고, 사랑을 속여 판 죄로 평생 사랑에 속아야 하며, 망가지거나 망가뜨리는 일이 호흡보다 당연해지는,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는, 중독자나 다름없는, 남의 목을 졸라 얻어낸 사랑으로 연명하는 각다귀 같은 생.
“그래서 키스했어요. 위로받으려고요. 별거 없죠.”
사랑이 선택이라니. 그 말을 개처럼 뜯어놓고 싶었다. 제노 씨는 해요? 그런 배부른 사랑. 그럼 그런대로 살아지지 않는 사람은 어떡하죠? 그게 아니면 죽게 되는 사람은? 의식해서 숨을 쉬어야 간신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은요? 사랑으로 살면 안 돼요? 왜 쥔 게 없을수록 안 되는 것만 많아져요? 왜? 당신은 죄인이 될 수 없는 곳에 살잖아요. 안심하고 사랑해도 되잖아요. 햇빛도 많이 받고. 비도 많이 맞고. 사랑으로 울어도 보고. 건우 씨나 텐 형님 같은 좋은 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위로도 받고. 그럴 수 있잖아요. 이런 안전한 세계에서, 마음 놓고 슬픔에 젖어도. 아무거에나 진심을 쏟아도. 제노 씨는 죽지 않을 텐데.
아무도 죽이지 않을 텐데.
사랑해도 괜찮을 텐데.
내가 아니어도.
꼭 나는 아니어도…
청자는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다기보다 고르는 것 같았다. 마땅히 할 말이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쓰레기 같은 발화였는데. 나나는 고개를 숙였다. 물먹은 솜처럼 머리가 늘어졌다. 그럼에도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습기가 한 톨도 없었다. 제노에게서 건조함이 옮아온 것 같다. 아니다. 진짜 건조한 건 처음부터 나나였다. 건조해서, 건조하니까, 스스로 어둡고 축축한 자리를 찾아 들어간 거겠지.
반대편 렌즈가 빠졌다. 제노가 나나의 표정을 똑바로 볼 수 없을 테니 다행이었다.
“재민 씨.”
마침내 제노가 입을 열었다. 저 좀 봐요. 나나는 힘없이 눈을 들었다. 아까보다 또렷해진 제노의 시선이 각다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알고 있어. 지금부터 아주 무서운 말을 할 거지. 그런데 왜 그런 부드러운 표정이야. 아까부터 나한테 왜 그렇게.
“왜 저한테 계속 극존칭 써요?”
“네?”
“아니… 내가 살짝 말 놨는데 무시하길래….”
전혀 무서운 말이 아니었다.
나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제노를 바라보았다. 설마 아직도 취했나? 하얀 손이 뺨에 닿았다. 아주 단단하고 마른 촉감이다. 렌즈를 빼줄 때와는 반대로, 이번엔 제노가 나나의 얼굴을 감싸 쥐고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숨이 막혔다.
“혹시 직업병 같은 거예요? 아니면… 저도 손님이에요?”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요. 저 군필이에요.”
“네… 네?”
“생존력 좋다고요.”
“.......”
“누가 나 쉽게 해꼬지 못 한다고요… 손님 해도 괜찮다고.”
어… 음. 제노의 말이 얼른 와닿지 않았다. 그러니까. 손님이… 하고 싶다는 건가? 제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정환이랑은 끝났고. 지금 남자친구도 없고. 솔직히 남자친구… 보다 항상 제가 셌던 것 같아요. 재민 씨 힘세요? 저는 세요. 제노는 여전히 나나를. 재민을 보고 있다. 생각해보면 제노의 시선은 언제나 곧고 흔들림이 없다. 그 성정을 닮았다. 스스로에게 건강한 확신을 가진 이의 눈이다. 제노의 무게 축은 바깥이 아닌 그 속에 있다. 나나가 이곳저곳을 볼 동안 그 끝을 따라가거나 피하지 않고, 늘……. 제노는 재민이 잘 보일까. 시력이 좋지 않을 텐데. 얼마나 희미하게 보일까.
“그러니까. 내가 재민 씨 죄인 만들 일은 절대 없다는 건데…”
하지만 지금 재민은 제노를 잘 볼 수 있다. 기왓장 같은 속눈썹이 어떤 각도로, 얼마나 첩첩하게 심겨있는지. 눈동자의 경계가 얼마나 명징한지. 한 낱의 오해도, 왜곡도 없이 재민을 보고 있는 그 눈이.
“위로… 키스로만 받나 해서.”
그의 방식을 따라 하며 얼마나 수줍어하고 있는지.
§
이쪽 눈치는 있어서 다행이다.
고개가 젖혀진다, 고 생각했을 때 목구멍이 열렸다. 쏟아지듯 혓바닥이 들어온다. 재민도 마찬가지로 힘이 센 게 분명했다. 오래 몸을 씻긴 탓에 축축하고 부드러운 손이 억세게 뒷덜미를 움켜쥐고 있다. 구겨 쥔 손가락 사이로 엉기는 샤워가운의 촉감. 재민이 제노를 눕히는 과정은 아주 자연스럽다. 팔꿈치 안으로 허리를 걸고, 무게중심을 옮긴다. 너무 세게 무너져 뒤통수가 부딪히지 않도록 힘을 써서.
문득 그가 자신의 외투를 언제 벗겨놓은 건지 궁금해졌다. 입고 왔던 얇은 외투는 화장대 앞 카우치에 곱게 접혀 있었다. 씻고, 씻고 싶어요. 나도 씻으면 안 되나요. 떨어진 입술 새로 중얼거렸으나 재민은 완고했다. 어차피 씻을 거잖아요. 하지만 더러울 텐데. 괜찮아요. 전 호빠 선수예요. 그런 자학적인 말 마시고요… 제노는 밀고. 재민은 당긴다. 끝끝마다 촉수가 박힌 것처럼 거친 손가락이 맨투맨과 티 쪼가리를 거쳐 살갗으로 파고든다. 헉. 제노는 작게 숨을 터뜨리고, 또 삼킨다. 재민의 손바닥이 무언가를 움켜쥐듯 가슴팍의 빈 곳을 휘저을 때까지.
“…….”
“…죄송해요.”
“괜찮은데.”
정말 괜찮았다. 완연하게 드러난 가운 새를 보면… 재민의 것은 거의 배꼽 너머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으니까. 몸에 익은 습관은 의식 밖에 있음을 알고 있다. 제노는 침대 시트를 짚어 반쯤 상체를 일으켰다. 무수한 비눗방울 속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 팔다리가 쑥쑥 빠진다. 그때마다 무수한 방울이 터지는 것처럼 시야가 아득해졌다. 그럼 저 진짜로. 씻고 올게요. 진짜 빨리. 재민이 (마지못한 게 분명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터 잃은 길짐승의 표정을 지을 줄 안다니.
제노는 가구 이곳저곳을 짚으며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정말이지 비틀거리고 싶진 않았는데, 화장실 앞에선 다리에 힘이 풀렸다. 힘 세다고 말했는데. 비웃을지도……. 문을 완전히 닫고서야 겨우 주저앉았다. 화장실 벽은 반투명 유리였다. 물 얼룩처럼 번진 재민의 그림자가 명백한 걱정과 함께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쪽팔렸다. 일단 해바라기 샤워기를 틀고 머리통부터 들이밀었다. 따뜻한 물이 쏟아졌다. 재민이 맞춰두었을 샤워물은 갑자기 물을 맞아도 놀라지 않을 만큼 상냥한 온도를 띠고 있었다.
촉감과 온도가 남은 입술을 매만졌다. 재민의 입술은 뜨거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단단하고 미끄럽고, 한 번 디디자 열감이 옮겨붙었다. 제노는 어쩔 줄 몰라 물을 맞으며 서 있다. 빨리 나가야 한다. 재민은, 재민은 지금 위로를 필요로 한다. 손님이 죽었다는 사람에게… 자신은 아주 세고 죽지 않는다는 철없는 소리나 했다. 제노의 안일한 생태계에서 그런 일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편의점 알바를 하는 친구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난 진상 손님으로 투덜거리는 대학교 동기가 그가 아는 서비스업의 전부였다. 그는 재민이 몸담은 ‘서비스’의 세계를 모른다. 그가 제공하는 용역이 어디까지인지. 그것을 제공하기 위해 재민이 얼마나 낮아져야 하는지 들어도 알 수가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제노는 본 적이 없으니까.
‘저는 숨 쉬는 것만으로 죄를 짓고 사는 거 같아요.’
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재민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민을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짧게나마 함께 살면서 파악한 바로 재민은…. 그는 멸종위기종 같은 사람이다. 들과 길 위에서 배를 곯지만,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긍지를 가진 동물처럼 유약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기엔 물렀다. 재민이 어떤 직종에 종사하든지, 그 직업에 대한 제노의 개인적인 호오와는 별개로…. 그를 기꺼이 집에 들인 이유도 아마 그랬던 것도 같다. 품을 내어주고 싶었다. 힘없고 어린 개체를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동물처럼.
이것도 호빠 선수의 재주일까? 상대로 하여금 한없이 연민하여 곁을 내어주고 싶게 만드는 것. 무해함을 가장하고 사랑을 위장하는 기술의 일종일까.
그래…
설령 맞다고 쳐도.
재민이 나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이건 무분별한 편애가 아니다. 제노는 대체로 타인에게 무정하고, 그래서 정확하게 해석하는 편이므로. 무언가를 뜯어내고자 하는 탐욕이 그에게 있었으면 제노도 눈치챘을 것이다. 망설이지 않고 재민을 쫓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저 당장이라도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은 남자는
맛없는 학식이 진짜 맛없다고 웃고,
강의실에서 마음 놓은 길짐승처럼 허겁지겁 잠들던 남자는….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 위로 물방울이 맺혔다 낙하하기를 반복한다. 비탄에 잠긴 선수 하나 위로하겠다고 일이 여기까지 왔다. 그 위로가 정말 재민에게 유효할까. 제노는 타인을 달래는 일에 재능이 없는 편이다. 게다가 이 분야로는…. 정도로 따지면 제노가 훨씬 무지할 게 분명했다.
이제는 물의 온도가 조금 뜨거운 것도 같다. 제노는 묵묵히 몸을 닦았다. 술기운이 조금씩 씻긴다. 열기가 식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정말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를. 그는 분명 섹스도 많이 해봤겠지. 난 마지막으로 섹스한 게… 언제였더라. 이쪽은 그냥 목석같은 대학생. 상대는 유흥을 업으로 하는 남자. 그에게 무작정 입술을 들이댄 건 취기가 빌려준 용기였지만. 정말 위로가 될지. 내가, 그에게. 나는. 그리고 그는….
재민은…
무엇보다 거기… 가 너무 크던데…….
걱정은 양가적이다. 재민에 대한 염려이기도, 제노에 대한 우려이기도 하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도 존재감과 양감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거. 배꼽 넘어갔었지. …들어갈까? 인간의 몸에는 본래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의지가 있다. 오래 안 쓰면… 좁아진다. 항상성이란 게 그렇다. 경험을 기준으로 한다면 재민은 예비역이 아니라 민방위다. 그런데 재민은, 그 남자의 것…은 제노가 한참 현역일 때도 들이는 데 무리일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그냥 뺄까. 입으로만 하자고 할까. 어쨌든 위로도 입으로 하는 건데 안 되나. 아니면…
손이 무심코 뒤로 간다. 아주 오래도록 다물려 있던 곳으로……
똑똑.
노크 소리가 정신을 번쩍 깨운다. 손이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일부러… 오래 씻는 거 아니죠?”
바깥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갇힌 거 아니죠? 그 말이 혹시 후회하느라 못 나오는 거 아니냐는 말처럼 들렸다. 거의 다 씻었어요…. 먹먹한 목소리가 났다. 씻다가 물을 먹었나 보다. 다시 플래시백. 삼십 분 전에 느낀 입술의 촉감이 총성처럼 뇌리를 가로지른다.
모텔은 비무장 지대다. 대학생과 호빠 선수,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없는 성적 중립 공간이다. 섹스는 흔하니까. 섹스는 모두에게 공평하기에. 그들이 함께 찾아와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 장소. 어느 누구도 두 사람의 출처와 행선지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 곳. 갓 전역한 무정한 대학생이, 혹은 여수에 젖은 선수가 하나의 목적 아래, 모두가 똑같은 싸구려 침대에 누워 밤을 보낼 수 있는.
빨리 씻는다고 했으면서. 문에 비친 실루엣이 중얼거렸다.
불투명한 유리문에 손바닥 모양 그늘이 졌다.
“들어갈게요.”
열쇠도 없는 문이 버틸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화면 조정
그리고, 어떤 이야기는 송출이 불가하다.
……
다시, 채널 고정
둥. 둥. 둥…
낯익은 리듬이 들린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혼자 잠을 자지 못하는 제노를 위해 등을 두드려주던 어머니의 손길. 어린 개체를 손쉽게 재우던 그 무해한 리듬을 닮았다.
둥. 둥. 둥…
제노는 더욱 품으로 파고들었다. 귀를 가까이 대보면 다른 박자의 리듬이 들려온다. 둥. 둥. 둥….
심장 소리.
누군가의 생명이 제노의 귓가에서 뛰고 있다.
눈을 떴다. 귓불이 따뜻하고 단단한 팔을 누르고 있었다. 팔. 그리고 가까이에 재민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제노는 자신이 재민의 팔을 베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섹스를 하고 있었는데…. 언제 기절했지. 섹스하다 정신을 놓는 경험은 처음이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재민이 때린 게 분명했다.
재민은 제노가 깬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자고 있을 제노를 배려하듯 볼륨이 작았다. 제노는 재민의 목소리와 전화 너머의 아득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갚을게요. 금요일까지 이백. …아직 한도 남아있어요. 네. …옥주 누나가요? 지금 쫑구랑 있어요? …아니에요. 누나 또 오면 연락주세요. 얘기라도 해볼게요…. 제가 갚을게요. 그 정도는 제 힘으로 갚을게요….
금요일에도 안 들고 오면 쫓아낼 줄 알라는 윽박이 어슴푸레하게 들렸다. 통화를 마친 그가 휴대폰을 다시 탁자에 눕혔다. 그 움직임에 제노가 벤 뜨끈한 베개가 들썩였다. 후… 긴 한숨. 그는 지금 분명 담배를 피우고 싶을 것이다. 제노 때문에 피우지 못하고 참고 있는 거라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재민이 문득 제노를 돌아본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제노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반사적으로 일어나기 위해 목에 힘을 넣는데, 커다란 손이 제노의 이마를 감쌌다.
“더 자도 돼요.”
“…몇 시예요?”
“아직 새벽이에요. 4시.”
“방금 통화한 건 일터예요?”
재민은 대답 없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반쪽 얼굴로 창백하고 푸른 불빛이 물그림자처럼 어른거렸다. 제노는 다시 목에 힘을 풀고 똑바로 누웠다. 닿은 살갗마다 재민이 간직한 온도는 새삼스러울 정도로 뜨겁다. 끄지 않은 모텔 TV는 여전히 같은 다큐멘터리 채널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름답고 고요한 사각형의 바다. 방 안으로 축축한 파도 소리가 밀려든다.
[이들은 멸종 취약종인 향고래입니다.]
TV 화면에는 수면 근처에 미동 없이 정지한 고래들이 나오고 있었다. 바다 위를 향해 고개를 들고 가만히 표류하는 고래들. 그들의 피부 위로 노란 물비늘이 포스트잇처럼 뒤덮여 있었다. 내레이터는 이것이 향고래가 완전히 잠든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반만 잠든 것이 아니라. 두 눈을 감고 숙면을 취하고 있다고.
하루에 고작 7%. 향고래들이 숙면할 수 있는 시간은 그정도입니다. 턱없이 짧았던 수면이 끝나면, 그들은 다시 위험이 도사리는 바닷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TV를 보던 제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편안해 보이는데. 재민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하루에 7프로라도 안심하고 숙면할 곳이 있다면… 나머지 하루는 눈을 반씩 뜨고도 버틸 수 있다는 거잖아요. 내 귀엔 대단하게 들리는데…… 되게 불쌍한 것처럼 말하길래. 나레이터가.
…….
그래도 고래는 예쁘네요.
…….
재민 씨?
맞아요.
네?
고작 그 잠깐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거예요. 그 정도면 충분한 건데….
그렇게 말하는 재민의 옆모습은 어딘지 울적해 보였다. 청색 그늘이 드리워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블루는 울적한 색이니까. 제노는 이불을 더듬어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다른 거 봐요. 채널을 돌리려는 제노를, 재민이 급하게 말리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살덩이. 그리고 신음. 팔을 벤 목덜미가 태가 나게 굳는다. 살색 향연은 제노가 전원을 꺼버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TV가 꺼지자, 다시 룸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제노는 발끝을 꿈지럭거렸다. 이불 속에서 발이 닿았다. 재민의 발은 따뜻했다. 재민이 제노를 돌아본다.
여긴 이불이 정말 따뜻한 것 같아요.
제노는 말없이 두툼한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이불이 따뜻한 건 당연한 게 아닌가… 하다가. 문득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갓 빨아서 깨끗한 향기가 나는 이불은 당연하지 않을 수 있겠다고. 모텔은 돌봄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주 적당히 데워진 방 안. 따뜻한 이불. 전화 한 통이면 나를 위해 준비되는 편의들. 이 모든 건 내일 아침 11시가 되면 사라진다. 찰나의 돌봄이었다.
“아직도… 자기가 죄인 같아요?”
“……그거는 죄송해요. 제노 씨한테 괜한 말을 했어요.”
“…….”
“아직도 사랑이란 말은 좀 과해요?”
“…….”
“생각해봤는데… 제노 씨가 맞는 거 같아요. 전남친이 제노 씨한테 너무 욕심 냈잖아요.”
“갑자기 왜…….”
“나는 내가 더 사랑해도 괜찮은데… 좋다고, 하루에 한 번만 좋다고 해주면 그거로 배부르게 잠들 수 있는데.”
제노는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어떤 말도 하기가 어려웠다. 따뜻한 이불처럼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재민의 불행은 제노의 것이 아니고, 그의 사랑이 급급함을 알았다. 얼마나인지는 몰라도 어째서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 간극을 생각하면 가슴과 배꼽 사이에 빈 공간이 생긴 것 같았다. 있는 줄도 몰랐지만 그곳에 있었던. 앞으로도 여전히 존재할 예정이며 이제는 알고 살아갈.
여전히 부연 시야에 보이는 게 없었다. 재민의 얼굴도. 팔도. 손도. 인간은 뵈는 게 없으면 용감해진다던 말이 떠올랐다.
“…돈 빌려줄까요.”
“네?”
“전화 들었어요. 이백… 옥주란 사람이 들고 가서 곤란한 거잖아요.”
“.......”
“그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최악의 멘트라는 걸 알면서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입밖에 뱉는 즉시 후회했지만 끝마쳤다. 재민도 가지고 있을, 가슴과 배꼽 사이의 빈 곳. 그는 얼마나 오래 그 허공을 안고 살아왔을까. 최악의 멘트라는 걸 알 텐데도 재민은 화내지 않았다. 조금 커졌던 눈이 다시 유순히 가라앉았다.
“제노 씨는 제 손님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재민 씨한테는 중요한 돈이잖아요.”
“이제노 씨.”
“…….”
“제가 은인한테 땡사 치게 만드실 거예요?”
이런 말은 또 똑 부러지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제노는 한숨을 쉬고 돌아누웠다. 하긴. 가족 빚도 갚아주지 말라던데. 하지만 섣부른 동정으로 한 말이 아니다. 제노는 개인을 연민하지 않는다. 타인의 불행은 영원히 제노가 알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니까. 따라서 함부로, 안 지 일 년조차 되지 않은 사람에게 돈을 내어주는 일은 그를 구성한 상식 밖의 일이다. 제노라면 말조차 꺼내지 않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민은. 나나는…… 생각이 많아지자 도리어 무엇도 생각하기 어려워졌다. 멍한 머리로 혀끝에 말을 굴렸다.
곧 체크아웃하겠네요.
…네.
어렵게 떨어진 입은 시시하게 닫혔다. 고마워요. 재민이 마지막으로 감사를 덧붙였다. 무엇이 고맙다는 건지 제노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등에 닿는 체온은 따뜻했고. 눈을 감으면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있다. 재민의 품에서, 제노는 조금 몸을 웅크렸다.
체크아웃까지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 창밖이 감빛에서 쪽빛으로 변해간다. 분명 제노는 잠을 청할 수도 있었고,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혹시 자나요. 거기 있나요. 아직 가지 않았나요. 어슴푸레하고 서늘한 새벽녘을 보며 재민을 불렀다. 그때마다 재민은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네. 여기 있어요. 가지 않았어요. 잔물결 같은 어둠이 가시고 햇무리가 뺨을 적실 때까지.
재민 씨. 동기 위생 이론을 알아요?
그게 뭐예요?
재민 씨가 강의실에 자고 있을 때. 위층에서 그걸 배웠거든요. 대학교에서는 그런 것들을 배워요. 나중에 돌아보면 이상하게 기억나진 않고… 안다고 살면서 딱히 도움이 되지도 않는 것들. 어쨌든, 동기 위생 이론은 쉽게 말해서… 만족과 불만족은 서로 전혀 다른 요인이라는 거예요.
쉽게 말한다면서요.
…음. 그러니까,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다 해소된다고 그 사람이 만족스러워지지 않는다는 거죠. 남들이 보기엔 아주 좋은 환경의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들 힘들다고 투덜거리잖아요. 정상적인 인간은, 아무리 돈을 준대도 의미 없는 일을 못 한대요. 환경을 위생적으로 꾸민다고 사람들 의욕이 알아서 생기진 않는다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만족한대요?
동기.
동기?
자신이 진짜 원해서 하고 있다는 마음. 어떤 보람. 그런 게 있어야 한다더라고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재민 씨의 동기는 어떤 걸지.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
…….
…아무 동기도 없이, 단순히 돈을 벌고 싶은 거면… 다른 일도 있을 텐데. 호빠에서 일하는 이유가 뭐예요?
…….
…….
…그냥. 음… 좀 위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요. 제가 볼 때 그런 사람들이 여기 제일 많았어요. 매주 한 명쯤 보는 거 같거든요.
그런 사람들?
저 같은 사람들.
제노는 눈을 깜빡였다. 재민과 같은 사람들. 따뜻한 불행과 우울을 가진 사람들일까. 그렇다면 재민은 누가 위로해줄지 궁금해진다. 그의 몸 안에 장기처럼 도사린 빈 곳을 제노가 조금쯤 채워주었을까. 그의 파랑은 누가 닦아주게 될까. 제노는 재민의 대답들이 퍽 쓸쓸하게 느껴졌다.
있잖아요. 3월이 끝날 때쯤에 교정에 벚꽃이 피어요.
…….
학교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하얀 게 한 번에 보이거든요. 그게 참 예뻐요.
재민은 짧은 침묵 끝에 웃었다. 제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이 붓끝처럼 재민의 팔 안쪽을 간지럽힌다고 했다. 그게 참 못 견디게 간질간질하다고. 그가 속삭이는 말 하나하나가 부드러운 온기를 가진 입맞춤처럼 느껴졌다. 붙었다 떼어지는 순간이 더 선연하게 느껴지는. 같이 보자는 얘기처럼 들릴까. 부담이 된다면 그게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그냥 제노의 세상에는… 그런 광경도 가끔 있다고.
제노 씨가 예쁘다니까. 정말 예쁠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슴과 배꼽 사이로 서늘한 줄 하나가 그인 것 같았다.
어떤 날카롭고 선득한 예감 같은 줄이.
렌즈의 건너편
찬이와 대판 싸운 날. 줄담배를 피우던 정 마담이 문득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사랑은 창문이 아닌 거울이라고. 훔쳐보기 급급해 종일 거기 매달려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여된 부분을 돌아보게 되는 그런 사랑도 있다고.
남자는 제노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검은 눈동자를 따라 동그랗게 잘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어떤 모습인지를 깨달을 만큼 충분한 시간 동안,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깨닫는다.
퇴실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퇴실 절차
체크아웃의 종전에 인터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곧 퇴실이세요. 기묘한 높임말로 앳된 남자가 말했다. 새벽 새에 자리를 지켰던 중년의 여자는 퇴근한 걸까. 그렇다면 다행인 셈이다. 재민을 등쳐먹는 게 얄미워 눈싸움했던 것 정도는 기억났으니까. 제정신으로 나갈 때 얼굴을 보기 조금 민망할 것 같았으니까.
재민은 제노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재민은 누군가를 돌보는 일에 의외로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의외가 아닌가. 그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몇을 알고 있다니까. 머리칼 사이사이를 뒤채고 너무 뜨겁지 않게 거리를 벌리는 조심스러운 손끝이. 목을 받치는 손가락이. 고개를 뒤로 젖혀 재민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퇴실 시간을 오래 남기지 않고 나왔다. 제노는 오후에 전공 수업이 있었다. 챙길 짐이랄 것도 없었다. 입고 왔던 옷을 그대로 꿰어 입고 나왔다. 슬리퍼는 재민에게 빼앗겼다. 신발을 바꿔 신은 채로 논현역을 향해 걸었다. 해가 떠도 기류가 싸늘했다. 재민의 발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분명 같은 사이즈인데, 발볼이 헐떡거리는 그의 신발을 벗는 시늉을 하자 재민이 삼 미터쯤 도망갔다 다시 돌아왔다.
학교 갈 거잖아요. 그쵸. 맨발은 추우니까.
저 추위 잘 안 타는데.
아닌 것 같던데요.
학교 가는데 가방도 없이 가요? 전공 책 사물함에 있어요. 펜은? 빌리면 돼요. 대학교는 그래도 되는구나……. 재민은 제노를 논현역 앞까지 바래다주며 시시콜콜한 얘기를 했다. 학교에 바로 가겠다고 이르자, 재민은 한참을 역 앞에 제노를 세워두곤 입술을 달싹거렸다. 결국 재민이 덧붙인 얘기는 옷을 따뜻하게 입으란 얘기였다. 슬리퍼를 신을 때는, 양말이라도 꼭 신으라는 얘기.
저 수업 끝나면 집에 갈 거예요. 먼저 집 가 있어요.
…….
좀 늦을 수도 있고…….
재민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역 앞 입구를 가르고 바람이 분다. 제노는 손을 흔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한 차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재민은 여전히 제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노가 한 번 더 손을 흔들자 재민도 그를 따라 손을 흔들었다. 이번엔 뒤를 돌지 않은 채 역의 개찰구 안까지 완전히 들어섰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제노는 신발까지 신은 발이 여전히 좀 춥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핏기가 언 재민의 발을 떠올렸다.
전공 수업에는 늦지 않았다. 이제 정정 기간이 모두 끝나 출석을 성적에 반영하니 다행인 일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교수에게 제때 대답할 수 있었지만, 제노는 종일 강의에 집중하지 않았다. 필기를 해야 하는데. 주워들어야 중간고사를 공부할 때 괴롭지 않을 텐데. 제노는 교수가 소비자 행동론에 대해 떠드는 동안 모바일 뱅킹의 계좌들을 확인했다.
중독과 과몰입은 다릅니다. 마약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마약을 시키면 중독이 되지만, 게임을 안 하는 사람한테 억지로 게임을 시킨다고 중독이 되지 않아요. 과도한 몰입은 언제나 다른 요인으로 인해 벗어날 수 있다는 거죠. 정부는 성숙한 개인이 이를 구별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어릴 때부터 들어 놓았던 적금. 깰 수 있겠지만 좋은 생각 같진 않았다. 대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제노는 엄마에게 대뜸 200만 원을 빌려달라 손을 벌리는 생각을 한다. 엄마는 분명 이유를 묻겠지. 이유. 어느 날 우리집에 굴러들어온 호빠 선수에게 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면 엄마는 무슨 대답을 할까. 정말 돈을 빌려줄까. 물론 200만 원을 준다고 재민의 삶이 완전히 완성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200만 원으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없다. 고시원의 보증금이 겨우 되는 금액이다. 옥주에게 할애한 재민의 마음이다.
제노는 뒤늦게 수업의 필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쓰지 않고 모아두었던 군 월급 계좌에서 돈을 인출했다. 연민도 아니다. 공사를 당한 것도 아니다. 사랑은 더더욱 아니다. 재민의 삶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럴 의향도 없었다. 스스로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노의 손에는 도톰한 돈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렇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던가.
그냥.
그렇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있다.
처음엔 단지 막연한 느낌이지만, 막상 벌어지고 보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기분이 들게 하는, 어떤 초우주적인 감. 언제부터였을까.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재민이 처음 자취방에 무단으로 침입했을 때. 이불 속의 그를 끌어안아 아주 부드럽고 달금하게 옥주의 이름을 속삭였을 때. 햇볕 속에 홈빡 젖은 눈을 마주 보았을 때. 차가운 맨발을 그가 아무 거리낌 없이 안고 온기를 주었을 때. 이 외로운 멸종위기종에게 기꺼이 한 평의 마음을 내어주게 되리라고.
그 값이 이백이라면. 아깝지 않을 정도로….
ᅠ
그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유독 시선을 붙드는 것이 많았다. 인형 뽑기. 재민 씨를 닮은 인형이 있는. 노래방. 선수면 노래도 잘하겠지. 할인 마트. 다음번엔 같이 장 보자고 말해볼까. 짧았던 거리를 길게 걸었다. 이백 만큼 걸었다. 자취방을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었다. 집안으로 들어섰다. 희미한 이변을 눈치챈 건 그때였다.
신발장에 제노의 슬리퍼가 없었다. 재민이 신고 갔을 슬리퍼. 제노는 가슴과 배꼽 사이를 가로질렀던 선득한 줄 하나를 떠올린다. 재민 씨. 제노는 기이한 확신을 담아 재민을 부른다. 왠지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재민이 집으로 가 있으라는 말에 대답했던가. 제노는 재민의 신발을 벗고, 집 안에 들어선다. 집의 공기가 손에 설다.
제노는 천천히 주방과 침실을 살핀다. 재민의 옷도, 신발도 없어져 있다. 설거지와 청소가 모두 끝난 제노의 집엔 딱 한 평만큼의 난 자리가 있다. 원래의 형태로 모두 돌아가 있다. 원형과 다른 것은 책상에 펼쳐진 일기장 한 권뿐이다. 제노가 든 자리의 증거를 위해 썼던 일기.
그는 일기장 옆에 봉투를 내려놓았다.
2월 00일
원래 일기를 잘 안 쓰는데 일단 써본다
혹시 내가 실종되면 이 일기를 참고해주길
물론 나나 씨는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정말요?
엄마한테 모르는 사람이랑 같이 살게 됐다고 말은 안 했다
어차피 나는 나나 씨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
나나 씨는 보통 밤에 나가서 아침에 들어온다
무슨 우렁각시처럼 몰래 들어와서 설거지를 해둔다
절대 일부러 미루는 게 아니다 나는 원래 설거지를 좀 모아서 하는 타입이다
식기세척기를 고용한 기분이다
잘생기고 말 잘 듣는 식기세척기
└저 잘생겼어요?
2월 00일
나나 씨가 리조또를 해줬다.
의외로 요리에 재능이 있던데 왜 그쪽으로 안 가고…
엄마가 반찬을 보내줬다 정리하는데 나나 씨가 좋겠다고 했다
뭐가 좋겠다는 걸까? 반찬이 돼지갈비랑 감자조림이라서? 아니면 반찬을 보내주는 엄마가 있어서?
└제노 씨가 많이 사랑받아서
개인적으로 전자였으면 좋겠다. 나나 씨는 이런 때에 생판 남의 집에 얹혀 살 만큼 사고무탁해 보이니까. 그런 걸 부러워한다면 유사 시에 나가라고 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다.
생판 남을 거둬주는 나는 뭘까?
이건 다 나나 씨가 잘생겼기 때문임
눈이 좀만 덜 컸어도 왕십리역에서 신문지 덮고 잤을 거다
└……
2월 00일
오늘 저녁은 배달 감자탕
사람이 둘이니까 전골을 시켜 먹을 수가 있어서 좋다
밥을 먹는데 나나 씨가 왜 자길 거둬주냐고 물었다. 그걸 3일만에 묻다니 상당히 배은망덕하다
└죄송해요…
솔직히 나나 씨가 청소기도 돌리고 리조또랑 새우 파스타도 해주고 빨래도 널어주는데..
거둬준다고 할 수 있나?
말을 돌렸는데 안 통했다 생각해보니 나나 씨는 내가 게이란 걸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내가 신고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왠지 나나 씨한테라면 커밍아웃이 그렇게 못할 일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무슨 나쁜 짓이나 하겠어… 그래서 그냥 말해줬다
내가 게이라서 그런 걸로 하자고 이유 엄청 불순하지 않냐고
└불순하긴 했는데 괜찮았어요
제노 씨는 하얗고 얌전하고
소화 잘 되는 우유 같고
또 예뻤고
나나 씨는 한참을 주저하더니 자긴 게이가 아니라고 말했다
알아요 애인이 옥주 누나라고 하셨잖아요, 했더니
아… 그래도 노력해볼게요. 라고 대답했다
(뭘?)
└ㅎㅎ
나나 씨는 또 새벽에 나갔다.
과연 집에 들어올까?
└저 기다렸어요?
4일 차.
집에 안 들어왔다
└미안해요
5일 차.
오늘도 안 들어왔다
가출인가?
└사우나에 있었어요
6일 차.
드디어 들어왔다. 사흘 동안 술독에서 잠을 퍼질러 잤나보다. 어디 집에라도 갔다왔냐고 물었는데 쫄딱 젖어 술냄새 풀풀 풍기는 나나 씨는 헤어졌다는 짧은 대답만 전했다. 옥주 누나를 만났다고. 그런데 자기 자리가 없었다고. 돈은 전부 누나의 전남친 치료비로 들어갔고, 아니, 전전남친, 이제는 나나 씨가 전남친을 꿰찼으니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대화 토씨 하나까지 다 기억난다. 나중에 나나 씨가 옥 어쩌고 여자를 고소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써둔다.
그래서 그 돈을 안 받게요?
못 준대서…
못 준대도 어떻게든 받아내야죠.
못 받을 거예요.
그 말을 하던 나나의 목소리는 젖은 나무처럼 단호하고 울적했다.
“제가 뭘 달라고 해서 받아본 적이 없거든요.”
그게 정말 돈 얘기였을까.
└음
제노 씨가 한 동기 위생 이론 얘기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역시 제 동기는 돈이 아닌 거 같아요
그냥 돈 모양으로 된 사랑이 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니면 아주 작은 온기
뭐든 제가 여기 있다고 증명해주는 작은 부딪힘
그게 제 동기인가봐요
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받아본 건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제노 씨한테 고마워요
또…
나중에 꼭 맨발을 이유 없이 만져주는 사랑 만나세요
전 그거 만지려고 이유를 많이 만들어야 했거든요
제노는 일기장을 내려놓았다. 방에 갇힌 공기를 환기하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3층짜리 투룸 창밖으로, 너무 이르게 온 봄이 하얗게 떨어지고 있었다.
제노는 일기장과 봉투를 함께 겹쳐서 책상 서랍에 두었다. 그리고 열쇠로 잠갔다.
그 일기가 더는 자신의 다큐멘터리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학기 좀 지나니까 술 마시는 것도 재미없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이고.
그때 술자리 존나 재밌었는데. 제노 요즘 나나? 걔랑 안 놀아? 걔 지금 뭐 한대? 부르면 안 돼?
아니 무슨 나가요야? 오빠 재미없다고 부르게?
너네도 재밌었잖아. 제노야 연락해봐. 술 사준다고.
근데 그 사람 진짜 뭐하는 사람이에요? 대학생 아니라며.
나나 아니에요.
응?
나나가 아니고 재민이에요.
뭐야. 너 취했냐?
취할라면 멀었지. 술 더 시킬까?
좋다, 라이어 게임 또 한 판 가자!
……
……
재민이에요.
어떤 사막에는 우기가 온다.
하얀 침대보 같은 모래사막이 젖을 때도 있다. 백 년 만에 내린 비에 기다렸다는 듯 모래 속에 뿌리내린 꽃이 핀다. 언제든 머리를 치켜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처럼.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려 꽃을 피우겠다는 것처럼.
제노는 재민이 멸종되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긴 숨을 쉬면서, 기왕이면 그 호흡이 아주 힘에 겹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의 찬 발을 감싸줄 같은 개체를 만나 그 사랑을 간직하고 사랑하기를. 그 따뜻한 우울을 무겁지 않게 이고 지며, 파란 낭만주의의 안에서. 이 세계 어느 구석에서라도 반드시 발견되기를.
제발 나중에 둘이 손잡고 벚꽃 핀 교정... 서로 사진 찍어주면서 볼 수 있기를.. 아제발요....
내 마음에도 하얀 꽃송이가 떨어지다... 너무 재밌어요 ㅜㅜ 제 시기에 찾아온 봄엔 나나와 제노가 함께하는 그림이기를 바라며 메리 크리스마스
둘이 벚꽃나무 아래서 꼭 같이 걷게 해주세요...제발요........사랑하고 감사합니다
#welove427
닉값중입니다
꼭....제발 둘이 다시만나게해주세요............
제발 둘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교정에서 만나길꼭....
뭐가 더티 앵글인 건데... 모스트 뷰티풀 앵글이잖아요...
감사합니다 제 크리스마스가 뜨끈해졌어요... 이후에 둘이 만날지 안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논현역을 떠도는 두 남자가 눈이 보이네요... 혼자 학식 먹으러 갈 것만 같은 대학도 안 다니는 24세 남자도... 교양 수업을 들으며 살풋 웃는 하얗고 예쁜 남자도... 그리고 그 둘을 보며 우는 (많은)여성들도...
지금 제 베개가 축축해요,, 제노와 나나가 논현역에서 헤어질때부터 눈물고이더니 일기장에서 눈물 폭팔했어요 크리스마스에 우는 여자가 되다..
왜... 저를... 눈물 흘리게 만드세요... 나나야... 벚꽃 봐야지... 어디가...
ㅠㅠ나나야... 재민아... 제노야.... ㅠㅠㅠㅠㅠㅠ
버석한데 축축하고 추운데 따뜻한.. 이런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글이ㅠㅠ 둘이 어떻게 만날까 만나서 어떻게 될까 너무 궁금했었는데
마치 원래 만날 것으로 예정되어 있던 것마냥.. 이 자연스럽고 완벽한 이야기에 감탄하고 좋아하고 슬퍼하다 갑니다..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 감사해요
네다섯 번 정도 읽으니까 이젠 첫 만남 장면부터 시야가 흐릿해져요 남겨진 제노가 근심되면서도 누구보다도 무던하게 잘 지낼 것 같아서 더 가슴이 아리구요 별개로 제 크리스마스 기억은 427 프로젝트 덕에 멋지게 갱신 됐어요 사랑합니다 언제나 가장 따뜻하고 반짝이는 겨울 보내세요 ♡
제발.... 제발 저 둘이 사랑하게 해주세요 이유없이 발을 만져줄 수 있는 사랑을 ㅠㅠㅠㅠㅠㅠㅠ
자꾸 슬리퍼만 신고 떠난 나나 생각이 나네요...
떠나는 발이 시렵진 않았을까
떠나는 가슴 또한 시렵진 않았을까
...
제노의 집에 생긴 딱 한 평 만큼만의 난자리도 시렵지 않길
제노도 제노의 집에 난 공간도 나나의 온기로 채워지길 바라며...
발을 만지기 위해 많은 이유를 만들어야 했다고... 마음이... 찢어져요
재민이가 나나라는 이름을 내려두고 이유없이 발을 만지기 위해 돌아오면 좋겠어요. 떠날때 발은 시렵지 않았는지, 마음이 더 시렸던건 아닌지, 일기장을 보고 내려두고 떠날때 아파서 울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이제는 함께 벚꽃을 보면 안되는건지
잠시 쉴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오래도록 포근한 집이 될 수 있는지
제노는 묻고싶은게 참 많을텐데, 벚꽃이 피는날 다시 돌아와주면 안될까 재민아
이 둘의 만남은 참 겨울과도 같네요.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거라더니 제노가 졌네요.
재민이는 사랑이 필요하다더니 너무 사랑해서 떠났고요.
이런게 사랑이라면 저는 평생 모르고 싶어요...
둘만의 세상에서 따뜻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떠나는 재민이의 마음이 이해가 가긴 해요
벗
돌아와주면 안될까......
하지만
제노를 떠나는 게 나나의 사랑방식이었다면?...
네버더레스
제노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ㅠㅠ 가슴이 찢어지네요
둘의 만남은 정말 상상도 못했는데 이렇게 만나도 둘이 너무 잘 어울리는 걸 보니 잼젠은 역시 운명인가봐요 좋은 글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재민이가 제노 옆에 머무른 시간이 정환이와 제노가 사귄 시간보다 훨씬 짧은데 제노는 관계의 종지부도 찍지 못한, 아니 시작도 없었던 관계를 이따금씩 떠올리며 살아갈 것 같아요. 마음을 쓴 만큼 기억에 남고 눈물도 흘리게 되는 법이니까요. 우연히라도 만나기 어려웠을 둘일텐데 그 짧은 순간 운명인듯 부딪혀 서로의 마음에 흔적을 남긴 이야기가 너무 아름답네요...상상치도 못한 이들의 만남을 성사시켜주신 두 분께 감사 말씀 드리면서 남은 겨울도 춥지 않게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고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꼭 새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다시 만나요.
이런게사랑이면not오케이...
조은 글 감사합니다...
제노는 많이 사랑받아서
그게 익숙해서
사랑을 잘 모르는 사람 같아요
그게 재미있고 좋았어요
비밀번호를 첫사랑 생일로 해 뒀는데요
이제는 다른 숫자로 하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고래는 폐로 숨을 쉬지만 육지에서는 살 수가 없잖아요. 생각해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올레카 나나와 헤다 제노가 잠깐은 공존할 수 있었지만 결국엔 나나는 다시 바다로 돌아가야 했던게 아닐까 싶어요. 공교롭게도 이원장님 역시 축축한 바다같은 분이란게 나나에겐 그래도 행운이지 않을까 해요. 또, 나나가 일기 답글에 쓴, 제노 발을 이유없이 만져줄 사람이 헤다 재민이인거 같고요.(작가님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혹시 틀렸을수도 제가 무지할수도....)
이걸 읽으면서 아 역시 원래의 짝을 만난 이유가 있구나 생각하면서도 이들의 필연적인 헤어짐을 슬퍼하는 저...비정상인가요?ㅠㅠ
벚꽃 핀 대학가에서 이유 없이 우는 여자 보신다면... 접니다...
이 댓글 덕분에 저는.... 더 웁니다 너무 멋진 해석이에요
I will dive into you..
둘 모두 이유없이 언 발을 만져주는 사랑을 만나게 될거에요.. 제발...
나나 어디갓어.. 왜 떠낫어.. 하..... 흐엉엉엉ㅇ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진짜
따뜻한 겨울같은 글...
글 속 제노학생... 분명 꿉꿉했던 재민의 삶을 비춰준 햇살같은 존재였을 것이에요.
사랑은 향기를 남긴다더니 엔딩에서 어쩐지 잘 마른 빨래의 유연제 냄새가 나네요.
빨래...끝. (하지만 계속되길, 끗나지말길~.ㅠ)
행복해라...
둘이... 확실한 관계를 맺지 않아서 많이 표현하지 않아서 그럼에도 서로는 서로를 아껴서... 몇 문장으로 마무리된 사랑이라 더 좋았어요... 그리고 평생 서로를 못 잊을 것 같아요
..... 이런 글을 전기장판위에 누워서 뜨뜻하게 볼수있다니 .....난 정말 행운아야 ........................
슬리퍼 신고 나간 나나 ...... 제노 ... 가끔 재민이 떠올리며 양말 안신고 겨울에 나갈것가틈 .............
제발 돌아와... 제노 발 꽁꽁 얼엇다 지금...
학생들... 다시 돌아와... 공짜로 해줄게...
2박동안 같이 있으라는 뜻이었어 학생.... 돌아와......
세 시간 동안 울고 웃으며 이 글에 푹 젖어서 읽었어요
축축한 재민이가 건조하게 말라있던 제노를 만나서 햇빛을 쬐는 느낌이 들어서 덩달아 마음이 들뜨기도 했고요
두 사람의 짧고도 따뜻했던... 그래서 더 달콤했을 시간들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멋진 글을 읽을 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어여쁘고 사랑스럽고 가련한 우리 나나... 반드시 기필코 행복해지길(제발)
이 둘이 다시 만나는 날엔 머리 위로 벚꽃잎이 온몸을 적시도록 떨어지는 곳에서 같은 양말과 신발을 신고 걸어가 사우나도 가고 이유 없이 서로를 사랑하는 나날을 보내길 바래요
오랜만에 다시 읽고 또 한밤중에 오열하는 사람됐어요. 모든 재미니.캐릭터 중에서 절 가장 슬프게 하는 재미니 캐릭터가 올레카 재미니거든요..마음이 너무 아파요ㅠㅠ평행세계 그 어딘가에서는 꼭 행복해지길...발이 더는 차갑지 않길..이유가 없어도 발을 따뜻하게 만져줄 수 있고, 차가워진 재미니의 발을 따뜻하게 뎁혀줄 수 있는 사랑을 만나길
크리스마스가 곧이네요
사랑받기엔 너무 졸리고 추운 계절 자꾸 여기에 다시 와요 소장본도 있는데
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새로고침하고 두근두근 스크롤하는 게 아까워 애타는 마음으로 읽었던 겨울이 생생해요
읽고 나면 뭔가 멋진 감상을 남기고 싶었는데 마음이 앞서나가서 결국은 감사한다 사랑한다 그런 댓글밖에 남기지 못했던 순간들이 모두 추억이 됐어요
작년 한 해 중요한 일을 앞두고 다사다난했는데요 현실이 버거우면 여기로 도망쳤었어요 그렇게 몇 년 동안 목표였던 걸 결국 이뤘구요 그래서인지 이 공간이 너무 애틋해요
모를 땐 다른 차 뒤를 따라가라고 했지. 어떤 차 뒤를 따라갈지는 내 마음이다
그런 문장들이 머릿속에 문득문득 떠올라요
힘들 때 손 내밀어준 사람을 잊는 건 어렵겠죠 여기 글들은 그런 존재였어서 계속 제 안에 남을 거 같아요
이젠 도망치러 오지 않고 위로해주러 오는데요
힘겨우면 여기로 도피했던 나 자신 제 안에선 이미 떠나보낸 모습이지만 어쩐지 여기서는 아직 서성이고 있는 거 같아서
고작 일이년 차이인데 어렸고 불안했어서 그냥 덮어두고 싶은데
글이 좋아서인지 그렇게 미워 보이진 않아요 다시 돌아올 때마다 그때의 나를 조금씩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것도 같고 스스로를 버티지 못해서 여기로 왔던 나와 화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지금 가진 걸 아직 이루지 못했던 그때도 이미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사이트 오래오래 유지해 주셔서 감사해요
무엇보다도 좋은 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세 분께서 언제나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또 봐요... 둘이 만나서 이쁘게 사랑하는 상상할래요
으앙..... 사랑하게 해주세요
크리스마스 아침부터 오열을 하다 ...
좋은 글 너무 감사드립니다 이 날만을 기다렸는데 정말 잊지 못 할 크리스마스가 될 거 같아요 .. 칠두나도 해피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랄게요 ...(눈물을 흘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