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 19세 이상 관람가 분량은 추후 소장본에 수록됩니다

 

 

 

 

 

 

 

 

그놈이다.

처음부터 다시 짖어야 한다. 아다라시하게.

 

 

 

 

 

 

쿠조와 보바리

 

 

 

 

 

날지 못하는 새는 있어도 울지 못하는 새는 없다*. -박준

 

어느 시인의 문장을 '는 이렇게 바꾸어 쓴다. 뛰지 못하는 개는 있어도 짖지 못하는 개는 없다. 개는 짖는다. 반항을 타고난다. 깍듯이 엎드리는 복종의 자세를 취하면서도 언제든 짖을 수 있도록 낮게 목을 울리고 있다. 야성을 천진으로 꾸밀 줄 아는 영리함. 그러니 사람들은 발톱을 그대로 드러내는 미련한 자식을 더러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 목표 북경원 진입. 들어가서 마킹할 것.

- 롸져.

- 너 그 롸져인지 미쳐인지…….

 

.

 

무전이 끊겼다. 재민은 가게 앞에 서서 간판을 올려다봤다. 빨간 간판 위에 노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누가 봐도 나 중국집이요 광고하는 듯한 배색. 재민은 레자 자켓에 무전기를 찔러 넣었다. 입구로 걸어 들어가자, 홍콩 영화에 종업원 1로 넘버링될 법한 웨이터가 재민을 반겼다.

 

짜장면 하나요.”

 

안내를 받아 일인용 테이블에 착석한 재민은 메뉴판을 세워 하관을 가렸다.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저놈.

 

그놈이다.

 

야비하게 치솟은 눈썹. 쭉 째진 눈매. 매부리코. 얄따란 입술이 바삐 움직인다. 누가 봐도 나 빵잡이요 광고하는 듯한 몽타주다. 긴 설명은 필요 없고, 저놈은 현재 재민이 노리는 용의자다. CCTV 없어 보이는 후줄근한 음식점에 들어가서, 무전취식하고 토끼는 질 나쁜 놈. 파악된 전과만 벌써 9범이다. 이번 중식당에서 잡지 못하면 10범이 될 테지. 재민은 눈을 치켜뜬 채 면면히 그를 노려봤다. 수상한 낌새를 보이는 즉시 달려 나가 체포할 심산이다.

 

몇 분 후

 

옳지. 거의 다 됐다.

 

재민의 테이블에 짜장면이 놓였다. 김이 몰씬 풍기는 춘장 소스에서 맛있는 냄새가 피어 올랐다. 어떻게 할까. 짜장면은 불면 맛없는데. 재민의 건너편에 앉은 목표는 혼자서 짜장면에 짬뽕, 탕수육, 심지어 돈 없는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낸다는 칠리새우까지 해치우고 있었다. 지가 츠양이야, 땅개야? 들리지 않게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짜장면을 비빈 뒤 한입 먹었다.

 

환상이다.

 

순간 재민은 넋을 잃을 뻔했다. 수년간 민중의 지팡이 노릇을 해 오면서 대접하고 대접받은 짜장면만 총 128그릇. 단언컨대 지금 눈앞에 놓여 있는 짜장면보다 심금을 울리는 맛은 없었다. 촉촉하고 넉넉한 소스. 달달하게 간이 잘 밴 면은 장인의 손으로 한 땀 한 땀 내리쳐 뽑았는지 입 안에서 활어처럼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단무지였다. 절인 무김치가 이렇게까지 특별한 맛을 낼 리가 없는데. 마약이라도 탄 것처럼 사람을 홀린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웠다. 그릇에 남은 소스도 단무지로 싹 긁어 입에 넣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 312. 그야말로 순삭이다. 재민은 자신의 경이로운 속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목표물까지 잊고서 식사에만 전념한 것이다. 물컵에 비친 재민의 입가에는 탐욕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조용히 냅킨을 뽑아서 짜장을 닦아 내고 고개를 들었다. 목표는 이미 칠리새우의 마지막 조각과 단무지를 함께 처리하는 중이었다. 다행히 타이밍은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서비스입니다.”

 

예상외다.

 

새콤한 냄새가 풍기는 탕수육이 재민의 테이블에 놓였다. 재민의 별 볼 일 없는 아다마가 빠른 속도로 공회전하기 시작했다. 짜장면 한 그릇을 먹기까지 걸린 시간, 대략 3. 서비스로 나온 탕수육 네 조각은 그것의 1/3가량의 소요 시간을 지닌다고 치자. 그놈은 지금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한 뒤 밖으로 나갈 것이다. 물론 특유의 기백을 뽐내 서비스까지 받아낸 나조차 계산이라는 절차를 피할 수는 없다. 여기까지 총 예상 시간 5. 5분은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범인 하나를 잡고 놓치는 데에도 실로 막중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주방장의 인심을 이대로 저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계산을 하고 나가야 하는데, 고스란히 남긴 탕수육을 보기라도 한다면? 작금의 재민 얼굴을 스캔하면 연민 99%의 결과가 도출될 것이다. 오늘은 힘겨운 근무가 될 것 같군. 재민은 손을 뻗었다. 탕수육 한 조각이 입안으로 사라졌다.

 

역시. 존나 맛있었다.

 

정신없이 세 조각을 단번에 해치우자마자 넋이 돌아왔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계산대 앞에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나가는 중이었다. 재민은 황급히 일어났다. 여기서 포인트는 일어났다가 아니라 황급히. 급한 건 뭐든 체하는 법. 삼킨 탕수육이 목젖을 강타했다. 느낌이 왔다. 이것은 고도의 하인리히 요법 없이는 저절로 넘어가지 않을 음식물이라고. 재민은 궐기해 나서려다 말고 옆 테이블에 있는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

 

 

 

 

 

[마포서 경찰, 중식당에서 물 한 잔 시키고…… 마약 확신했다”]

[“진짜 마약 짜장면이네연남 중식당, 음식에 마약 넣어 팔다가 덜미……]

 

 

 

 

 

 

 

 

*

   

 

 

아다라시한 게 필요해.”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금방 끝내는 게 낫다. 이들을 소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 오늘은 통대창 5kg를 먹어 보겠습니다.

 

소파에 길게 가로누운 막내의 휴대폰 스피커에서 먹방 BJ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정도 기름이면 차도 굴러갈 듯].

 

그게 뭔 말이에여?”

새로운 게 필요하다고.”

 

눈을 부릅뜬 채 신문을 내려다보던 옥니가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1. 마음 씀씀이가 좁고 간사한 사람들이나 그 무리. 간신배. 컴퓨터용 싸인펜이 네모 박스 안에서 글자를 채워 넣었다.

 

- 오늘은 간단하게 불닭볶음면 열 봉지를 먹어 보겠습니다.

 

어느새 영상 주제를 바꾼 막내가 찝찌름한 표정으로 뱃가죽을 문질렀다. 2. [어떤 일에 익숙하거나 숙련되지 못한 것 또는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생짜].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불닭볶음면을 빨아들이는 소리와 싸인펜 촉이 갱지에 짓질리는 소리, 크레파스가 스케치북을 들이긋는 소리가 다발적으로 울렸다.

 

- 오늘은 중국당면과 분모자를 먹어 보겠습니다.

 

…….

 

막내가 벌떡 일어난 것과 옥니가 싸인펜을 내팽개친 것은 동시다발적이었다. 둘은 누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는 것처럼 정적을 유지했다. 막내의 입에서 조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심해여…….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볼 먹방도 없구여.”

난 십자말풀이 다 틀렸어.”

 

옥니가 신경질적으로 신문지를 집어 들어 1번부터 글러 먹은 답지를 보여 주었다. 옥니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새로운 게 필요해.”

새로운 거? 내가 가지고 왔다.”

 

그야말로 아다라시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성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의 구둣발이 마포경찰서 마약수사팀 바닥을 지르밟았다. 꽤나 공들인 등장에도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무료함을 호소하던 둘은 어느새 처음과 같이 고리타분한 자세로 복귀했다. 팀장이 서류철을 책상에 툭 던져 놓으며 말했다.

 

우리 서에도 마약 탐지견을 들여왔다는 기쁜 소식이다.”

그거 개비싸지 않아여?”

방구 뀌면 독방구인지 알아보나?”

 

스마트폰 화면을 스크롤 하던 막내와 잉크가 닳은 펜촉을 종이에 뱌비치던 옥니가 차례로 말했다. 팀장은 애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스케치북에 예술 활동을 영위하는 중인 성제의 정수리에 턱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팀에도 재배치가 생겼다는 게 나쁜 소식이다.”

…….

 

분위기가 정숙해졌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가운데 무엇을 먼저 들을지에 대한 의사도 묻지 않고 떨어진 청천벽력이었다. 막내는 소파 팔걸이에서 천천히 뒤통수를 떼고 일어 앉았다. 옥니 또한 괜스레 싸인펜을 정갈하게 놓으며 정좌했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시간이었다.

 

팀장님, 제가 여태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못 낸 건 압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부터 인간이 되어 보겠습니다.”

왜 팀장님이 힘들어하실 때 따뜻한 포옹 한번 전해 드리지 못했을까여? 전 좀 맞아야 해여.”

 

눈물의 읍소가 이어졌다. 명실상부 마포경찰서 내 최고의 개꿀 빠는 팀-마약수사팀-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은 절실한 목소리이리라. 옥니와 막내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몸을 일으켜 팀장의 손을 한쪽씩 부여잡았다. 무좀 때문에 발로 뛰기가 쉽지 않았네 실연의 아픔이 한동안 자신을 슬프게 했네……. 꼴같잖은 업무 태반 고백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본의 아니게 하렘 장르를 꾸려 나가던 팀장이 이윽고 입을 뗐다.

 

퇴출이 아니라 영입이다.”

 

마지막 동아줄마냥 꼬옥 그러잡혀 있던 팀장의 양손이 허전해졌다. 둘은 자리로 복귀해 다시 원상의 자세를 취했다. 그놈의 세 치 혀들이 징그럽지도 않은지 팀장은 다 타진 가죽 소파에 북 소리를 내며 걸터앉았다.

 

그래서, 누군데여?”

 

막내가 한쪽 뺨이 눌려 불퉁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팀장은 협탁에 발뒤꿈치를 턱 얹어 놓고 양말을 벗다가 말했다.

 

어어, 누구냐면.”

 

 

끼릭.

 

 

바퀴가 바닥을 구를 때의 마찰음이 끼어들었다. 모골이 송연해지게 만드는 소리였다. 옥니와 막내는 기름칠 덜 된 기계처럼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요주의 신삥 등장. (웅장한 BGM)

 

.”

뭐야?”

 

웅장한 BGM이 사그라든다.

마포서 식구들은 기쁜 소식과 나쁜 소식이 별개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드드득. 드드득. 굴러들어온 휠체어가 그들 앞에 멈췄다. 그 위에 탄 신삥이 정숙하게 인사했다.

 

하이.”

 

오늘부로 마포서 마약팀으로 이전한 나재민이에용.

 

 

 

 

 

狂犬時代

 

마약 먹고 죽은 거 아니었어여?”

니기럴 거.”

 

어느 누아르 영화의 대부마냥 휠체어를 끌며 등장한 나재민에게 날카로운 비난의 말들이 쏟아졌다. 축언을 받고 한 자리에 정착한 재민이 검은 마스크 속에서 첫 마디를 꺼냈다.

 

반갑슴다.”

 

팀장은 서류에 시선을 박은 채 무언가 중얼댔다. 옥니는 부조금을 걷는다는 명목으로 동료들에게 돌린 단체 메시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따뜻한 환대에 감복한 나재민이 짧게 탄식했다.

 

내가 여기만은 오고 싶지 않았어.”

나도 니가 다시 살아나기만은 바라지 않았어.”

 

옥니가 심통을 부렸다. 익숙하다는 듯 휠체어 등받이에 몸을 축 늘어뜨린 재민이 양손을 얽어 제 뱃가죽 위에 얹어 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팀장이 설명을 시작했다.

 

, . 치레 삼아 짧게 소개라도 할까? 강력팀에서 잠깐 빌려 온 나재민이다.”

어쩌다 이 모양이 된 거예여?”

 

수척해진 재민의 몰골을 보며 막내가 순진한 어퍼컷을 날렸다. 재민은 체념한 듯 고개를 절레 가로저었다. 팀장이 그런 재민의 어깨를 턱 짚으며 말했다.

 

잘 들어.”

…….

너에게는 마약을 감지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초능력과도 같은 거지.”

 

팀장은 마치 일루미나티설을 주장하듯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주장인즉슨 이러하다. 명색인 마약수사팀인 옥니와 막내도 쌔 빠지게 발품 팔아야 하는 뽕쟁이를 엉겁결에 두 번이나 잡은 나대갈. 이것은 필시 나대갈이 마약의, 마약에 의한, 마약을 위해 태어난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거는 재능이야. 재능. ? 이렇게 온갖 마약의 향미에 빠삭할 수 있나. 어디서 보고 배운 것도 아닌데 말야.”

 

- 오늘은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어 보겠습니다.

 

, . 아무튼 어깨에 힘 넣고! 우리 팀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아냐, ? 이 팀 들어오고 싶어서 밤낮 똥꼬 빠는 얼라들이 쌔고 쌨다?”

 

누구도 해당 방면으로 오줌마저 싸려 하지 않는 마약수사팀에 팀장의 기합 들어간 음성이 울려 퍼졌다. 좌중 침묵. 그의 휑한 정수리를 찬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 …….”

…….

그럼 펜타닐 건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하지.”

 

본격적인 사건 설명이 시작됐다. 팀장은 바퀴 달린 화이트보드를 직 끌어오며 구구절절 입을 뗐다. 요근래 중국 쪽에서 펜타닐 흘러들어오는 움직임 있는 거, 니네도 알지. 안테나 하나 심어서 삼합회 분파 간부 하나 싹 털어 봤는데. ? 이 새끼들이 꿀림빵을 옮긴 것 같단 말야. 도대체 사람이 수사 도중에 이사하는 심보는 대체 뭐냐? 것도 서울의 끝과 끝으로 말야. 얘가 마지막으로 찍힌 게 논현이란다, 논현! 팀장이 화이트보드를 탕 쳤다. 그곳에는 화질이 구진 사진이 붙어 있었다. 누가 봐도 나 조폭이요 광고하는 듯한 큰형님이 어느 건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해서 지금 관할이 바뀔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럼 골치 아픈 일 줄고 좋은 거 아니에여?”

, 인마. 너는 그래서 문제야.”

 

팀장은 입으로 딴 보드마카 뚜껑을 막내의 이마빡을 겨냥한 채 내던졌다. 단숨에 들이맞은 막내가 울상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애초에 우리 몫이었던 건인데 그쪽으로 넘어가게 해서 되겠냐? 안 되지. 절대 안 돼. 마포서의 위상이 허락 못 하지.”

 

옥니는 재민에게로 상체를 슬몃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논현서 마약수사팀이랑 우리 팀장이랑 사이가 안 좋아.”

왜요?”

아아…… 설명하려면 길지. 고등학생 때부터 이어져 온…….”

 

길어서 안 들었다.

팀장은 헛기침을 하면서 화이트보드에 사진을 붙였다. 종전의 사진보다 조금 더 확대된 비율로 찍힌 각종 사진이었다. 여럿이서 모여 담배를 태우는 사진, 다방 레지와 키스하는 사진, 동물병원에 들어가는 사진, 혼자 성인용품점에 들어가는 사진……. (아무리 그래도 저건 프라이버시 아닌가여? 막내가 마지막 사진을 지적했지만 팀장은 무시했다.)

 

이 사진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위화감이 뭐냐.”

 

줄곧 전당 맞은 촛대마냥 축 늘어져 있던 재민이 문득 어! 외마디를 내지르며 삿대질했다. 검지가 지목하는 곳은 간부의 측면 얼굴이 고대로 드러난 사진이었다. 팀장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나대갈이 뱉을 다음 한마디를 기다리며 모두가 숨을 죽였다.

 

최귀화 닮았다.”

 

. ? 진짜네여. 겁나 닮았는디. 최귀화 본인 아녀? , 그럼 뒤집어지져. 쓰잘데없는 말들이 중구난방 산발하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배로 총기를 되찾고 반짝이기까지 하는 듯한 재민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팀장이 조용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 나라고 너희처럼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 삼합회 간부가 아픈 동물을 돌보기 위해 동물병원에 갈 일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단 말이지. 진짜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제 범죄도시 12의 스토리를 비교하는 데에 여념이 없는 셋을 내버려 두고 팀장이 여러 장의 사진들을 착착 덧대어 붙이기 시작했다.

 

이것 봐. 뭐가 눈에 띄냐?”

데리고 들어가는 동물들이 다른데?”

.”

? 진짜네여.”

 

어떻게 된 게 이 새끼들은 범인이 영화배우 닮았을 때의 반응과 범죄 정황을 포착했을 때의 반응이 이다지도 똑같은가? 팀장은 휠체어에 앉은 재민의 머리를 펜 끝으로 톡 때렸다.

 

정답.”

 

재민이 본 바와 같이 삼합회 간부 쪽 인물로 추정되는 이의 떡대에 소중하게 매달린 동물들은 때마다 달랐다. 어떤 날은 말티즈, 어떤 날은 셰퍼드, 어떤 날은 스핑크스 고양이. 집 안에서 이웅종 소장 버금가는 동물농장을 꾸렸을 수도 있지만, 동물들은 순전히 매개체에 불과할 가능성도 간과할 수는 없었다.

 

 

근데 이게, 보다시피 다 정황일 뿐이란 말이지.”

흐음.”

하지만? 딱 한 가지 얄따꾸리한 점이 있어.”

 

한숨을 내리쉬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모두의 머리꼭지 위로 내려앉았다. 재민을 포함한 팀원들이 반문 없이 고개를 훌쩍 쳐들었다.

 

사실상 이놈의 간부가 동물병원에 가서 접촉하는 인물은 딱 한 사람이야.”

누군데여?”

그 병원 원장.”

 

말마디가 맺음 되는 것과 동시에 협탁 위로 사진 한 장이 툭 떨어졌다. 누가 봐도 페이스북 비인기 페이지에서 불따 해 온 것마냥 화질이 후진 상태였다. 낙후된 사진 속에는 응달진 얼굴 반편이 가느스름하게 드러나 있었다. 쓸데없이 분위기 있는 피사체. 아리송한 공간 속에서도 바짝 선 듯한 콧대를 들여다보며 재민은 공연히 콧잔등을 실근거렸다. 냄새가…….

 

이름은 이제노란다.”

 

나나?

 

이 남자가 삼합회 간부랑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몰라. 그냥 평범한 동물병원 원장일 가능성도 없지 않지, …… 너희도 알지? 경험상 빵잡이가 먼 곳에서부터 수고롭게 찾아가는 놈들은 뭐다? 죄다 그놈이 그놈이다. 근묵자흑이라는 말 알아, 몰라. 본인조차 알게 모르게 다 연루가 돼 있다, 이 말이야. 그래서, 이 원장 후다 따 볼 놈 있냐?”

 

적막이 이어졌다.

 

, 이 새끼들아. 니들이 그러고도 마약팀의 안녕과 보전을 위해 힘쓰는 오늘의 인재들이니?”

전 조만간 어머니 팔순잔치가 있어서.”

전 임영웅 티켓팅 때문에여.”

언제라고도 말 안 했는데?”

레크리에이션 준비하려면 오래 걸립니다.”

장민호 티켓팅도 있어여.”

봤지?”

 

성제의 보는 눈 탓에 가까스로 욕설을 삼킨 팀장이 재민을 내려다봤다. 재민이 들여다보고 있는 휴대폰 속에서 꿈의 집 오스틴이 말했다. 여보세요, 캐서린? 내일 혹시 시간 돼? 팀장이 재민의 휴대폰을 두툼한 손바닥으로 덮어 내리자, 재민이 탄식을 내뱉으며 팀장을 올려다봤다.

 

, 왜요!”

내일 혹시 시간 돼?”

왜 전데요?”

효도한다는데 어떻게 말리냐.”

 

재민은 주둥이를 가로물었다. 이렇다 할 핑계라도 대고 싶었으나 재민의 엄마 생일은 이미 지났고, 임영웅이나 장민호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 인마, 나대갈. 주둥이 안 집어넣어?”

그니까 나더러 가라는 거네.”
.”
새 팀 발령받고, 새 공무원증에 잉크도 안 말랐는데 대뜸 가서 짱깨 후다를 따라? 무슨 베트남 필리핀도 아니고. 논현동 동물병원에 가서?”

에이, 뭔 후다를 따라고. 너 말조심 안 해? 누가 거기 잠입을 하랬냐? 함정 수사 적법성 문제 있는 거 누가 몰라?”

그럼요?”

 

재민의 눈앞에 두 손가락을 바짝 세운 팀장이 나직이 속삭였다. 그냥 쓱 보고 오기만 해. 쓰윽.

 

 

 

후다

 

 

 

 

Make my wish come true~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캐럴도 다 헐었다. 재민은 귀를 후비면서 가죽 재킷을 조금 더 여몄다. 밀린 연애와 가족애를 벼락치기로 해치우러 나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각자 여유에 맞게 내놓은 크리스마스 트리들이 가게마다 빛났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남의 사정. 남의 사건.

 

드럽게 춥네.”


그의 사건은 여기. 해바라기 동물병원에.

 

기라면 까고 까라면 구릅니다. 남들은 신림동 고시촌 처박혀서 준비한다는 경찰공무원 덥썩 달고 민중 수호하러 지팡이 쥐었더니 이 좋은 성탄절에 동물병원이나 개처럼 얼쩡이고 있네. 개로 말할 것 같으면 마포서에서도 위로는 눈칫밥이요, 주위엔 좆밥, 밖에선 칼빵이고, 잡아다 깜빵 보내 놓으면 두고 보자는 공갈빵, 아주 밥도 빵도 배불리 처먹었는데 왜 이렇게 몸은 춥고 맘은 허전한가. 등 뒤로 세 쌍의 커플들이 깔깔 웃으며 우르르 지나갔다. 뭘 셋씩이나 같이 다녀. 바퀴벌레는 다리가 여섯 개다 이거냐? 시려 오는 코 밑을 킁 훔쳤다. 어차피 결혼만 해 봐라. 다 개발살 나지. 크리스마스엔 가정법원 쉰다고 그다음 날 이혼한 그의 부모님을 짧게 회상할까 했지만, 누아르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 관뒀다.

 

암만 캐럴 빵빵하게 틀어도 지금 나재민의 장르는 누아르다.

각 잡고 자, 다시 집중.

 

동물병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간판 불은 켜져 있지만 안쪽은 깜깜하다. 유리문은 자물쇠로 꽉 잠겨 있었다. 그래서 여긴…… 쉰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간판을 꺼 놓으면 망한 줄 알까 봐 휴일에도 켜 놓는 업장들은 종종 있다. 재민은 가늠한다. 이윽고 강행한다.

 

유리문의 잠금쇠가 조용히 열린다.

 

소리를 죽이는 일만은 탁월했다. 팀장님은 쓰윽 보기만 하라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들었다가는 사흘 뒤에 이 사건은 환갑 때 해결할 거냐고 수동 공격을 당하기 십상이다. 책임은 지기 싫지만 부하는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기를 바라는 게 팀장 마음이지. 유리문을 등 뒤로 소리 없이 닫았다. 동물병원 내부는 어둡고 고요했다. 빈집은 털기 어렵지 않다. 내부는 결벽적으로 하얬다. 바닥엔 동물들이 딛기 어렵지 않은 600각 아이보리 포세린 타일이 깔려있다. 그 말인즉슨, 평범한 동물병원이란 뜻이다. 뭘 찾으라고, 씨발……. 암만 개코래도 이번엔 팀장님이 틀린 것 같은데. 카운터를 살그머니 돌아갔다. 장부라도 하나 안 나와 주나. 닫힌 문을 하나씩 열어 볼 때였다.

 

달그락.

 

소리를 죽이는 일만은 탁월한데. 나재민이 낸 소음은 아니었다. 빈집이라 여겼던 동물병원에서 갑작스러운 인기척이 들렸다. 재민은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엔 막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오던 남자가 서 있었다. 입에는 대만 샌드위치. 청순한 두 눈은 휘둥그렇게.

 

? 문 잠가 놨는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이후 10초 동안 벌어진 사건은 그의 많은 것을 설명해주었다. 말할 땐 입에 물고 있던 대만 샌드위치를 손으로 옮기는 깔끔한 애티튜드. 그러나 그 과정에 한 아름 들고 있던 차트를 바닥으로 촤르륵 쏟고 마는 우스운 실수. 말하자면, 단정함과 허술함이 공존하는 남자였다. ……. 짧게 탄식한 남자가 떨어뜨린 차트를 하나씩 줍는다. 그동안 재민은 살금대던 자세로 딱 굳어 있었다. 자신이 잠행했어야 하는 대상. ‘이제노의 무방비한 정수리를 멀거니 내려다보면서.

 

어쩌지? 생각이 빙빙 공회전을 돌았다. 평생 굴려 본 적 없는 머리에 예열도 없이 악셀만 연신 밟아댔다. 어쩌지? 튈까? 돌아설까? 그러는 사이 차트를 다 주운 수의사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진료 보러 오신 거예요? 그렇게 질문하며 수의사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쓴 안경만큼이나 모난 곳 없이 둥근 미소였다. 그마저도 수의사에 어울렸다. 짐승들은 둥근 것에 환장하고 덤벼드니까.

 

그러나 여기 서 있는 이 는 조금 달랐다. 둥근 공을 보면 터뜨릴 배꼽부터 찾아내는 노련미가 있었다. 재민은 함부로 짖는 대신 신중하게 상대를 탐정했다. 우선 첫 번째. 찾던 대상과 일치하는가? 남자는 수의사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서류상으로 본 얼굴과도 일치했다. 그는 이제노가 맞았다. 그러나 서류에 적혀 있던 건조한 디스크립션. 이 남자와 일치하질 않았다. 누가 보아도 시간에 쫓겨 한 끼 식사를 대충 때우는 수의사잖아. 게다가 대만 샌드위치라니. 개가 조사한 바가 맞다면, 남자는…… 그래선 안 됐다. 짱깨 앞잡이가 감히 대만 샌드위치를 먹다니? 국가 정세상 도리가 아닌 것이다. 재민의 탐정을 전혀 모르고 있을 동물병원의 원장은 대만 샌드위치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둔 채로 차트를 꺼냈다.

 

진료 보러 온 아이 성함이 뭐죠?”

나대갈.”

대갈이…… 이 병원에 처음 오신 거죠? 근데 아이가 안 보이네요?”

눈앞에.”

?”

 

수의사가 재민의 어깨 너머를 의아하게 기웃거렸다. 둥근 눈매는 어떤 다른 의도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아직 계획은 실패하지 않았다. 재민은 태세를 정비하기로 했다. 몰래 침입한 사람이 아니라 진료를 받으러 온 사람다운 태도로. 침착하게 턱을 들고 대답했다.

 

제가 대갈입니다.”

 

그리고 재민은, 예의 바른 선에서 가장 난처한 눈썹의 각도를 만들 줄 아는 이제노의 노련미에 다시금 확신한다. 결코 만만치 않아.

 

 

 

 

 

 

 

 

 

 

 

 

동물병원 진료실. 수많은 동물들이 오갔을 그곳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병적으로 하얀 인테리어에 엑스레이 등을 띄우기 위한 조촐한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재민은 진료실 의자에 앉으며 속으로 점수를 매겼다. 의자 쿠션감도 합격. 여기 몇 명이나 되는 약쟁이들이 엉덩이를 비비고 갔을까. 재민의 눈에는 전부 피상적인 장치로 보였을 뿐이다. 삼합회가 중국 영화계를 꽉 잡고 있다더니, 무대 연출에 아주 소질이 있어. 재민은 척추에 힘을 빼기로 했다. 긴장한 자세로 앉아 있으면 더 수상할 뿐이다. 의자에 건방 떠는 자세로 앉아 맞은편에서 대만 샌드위치를 기어코 해치우고 온 수의사를 꼬나보았다.

 

미안해요. 진료실이 좀 춥죠?”

 

수의사가 멋쩍게 웃었다. 가까이서 보니 수의사에게는 눈물점이 있었다. 그는 모니터 아래 놓인 물티슈를 딱 한 장 뽑더니, 빵가루가 묻은 손을 깨끗하게 닦아 냈다. 그래 놓고 입가에 묻은 크림은 그대로 두었다.

 

, 제가 오늘은 오전 진료만 하려고 했었거든요……. 누가 오실 줄 몰라가지고 난방을 꺼 놨어요.”

 

따지고 보면 재민이 침입한 거였다. 그 부분은 조금도 지적하지 않고, 도리어 미안하다, 사과하고 배려한다. 마치 재민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처럼. 그런 부분이 오히려 수상쩍단 말이지. 재민은 대답 없이 수의사의 입가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저기 묻은 크림이 존나 거슬렸다. 얼굴은 단정해가지고 애처럼 귀엽게도 묻혀 놨다. 까먹은 거겠지? 나랑 시크릿 가든 찍자는 건 아닐 거고. 맞지?

 

거기 입에도 묻었어요.”

 

재민은 참지 못하고 입가를 툭툭 가리켰다. ……. 짧게 탄식한 제노가 다시 입가를 닦았다. 입가를 닦을 땐 물티슈를 뽑지도 않았다. 손가락으로 훑어서 쪽 마무리를 한다. 자연히 놈의 단정한 손톱으로 시선 처리.

 

그래서, ……. 어디가 아파서 왔다고 하셨죠?”

 

근데 입술이 참. 수의사 입술이 참……. 재민은 억지로 입꼬리를 다렸다. 마음 놓지 마. 여기 드나드는 뽕쟁이들을 생각해.

 

어제부터 살살 배가 아파서요.”

 

얼마 전 팀장님의 사위가 코인으로 한탕 벌었다며 경찰서에 외제차를 끌고 왔다. 그걸 보는데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환통에 밤에 잠도 잘 오지 않는다고, 병명의 유력한 원인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러시구나……. 집 주변에 다른 병원이 없었나 봐요. , , 제가 사람 약이 잘 안 들어요. 그래서 동물 약은 들을까 하고. 아아. 수의사는 짧게 이해한 듯한 소리를 냈다. 뭘 이해했는지는 몰라도. 차트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태도나 표정에는 전문가다운 진지함이 배어 있었다. 이런 장난질에 저토록 진지하게 임해 주는 것만으로 그는 프로라고, 속으로 재차 점수를 매겼다. 컴퓨터 대신 종이 차트를 쓰는 의외의 고루함도 합격점. 아날로그는 영원하니까. 유순하게 처진 눈꼬리. 결곡한 콧대. 호선을 그리며 치솟은 입아귀. 언뜻 보니 호시절의 브래들리 쿠퍼를 닮은 것도 같다. 드르륵. 수납장을 닫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럼 이제 바지를 벗어 볼까요.”

?”

대장 박테리아 검사를 해야 해서요.”

 

수의사가 무해한 미소를 띤다. 그의 손에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막대가 들려 있었다. 대장 박테리아? 그게 뭔데? 뭔진 몰라도 대장 박테리아니까, 아마도 대장에……. 재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억지로 쳐올린 입꼬리가 긴장감 넘치게 당겨왔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이 막대가 제…….”

. 대갈 씨 항문이요.”

…….

괜찮아요. 살짝만 찔러 보면 돼요. 강아지들도 잘 참아요.”

 

 

 

 

니 운명을 사랑하라.

- 니체

 

독종이다.

여태까지 독종이라는 수사는 나재민의 전유물인 줄 알고 살았다. 재민은 모아 쥔 두 손에 턱을 얹고 자신의 앞에 앉은 독종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수의사는 인내심이 짙어 보였다. 재민이 바지를 벗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심산인 듯싶었다. 어서요. 그가 손에 든 막대를 한번 꺼떡였다. 재민은 막대를 바라보다가, 수의사를 보다가, 천장을 보다가, 벽을 보았다. 이윽고 차분하게 한 손을 들었다.

 

여태까지는 장난이었습니다.”

장난이요?”

사실 진료를 보러 온 게 아니고.”

 

들었던 손에서 검지와 엄지를 쫙 펼친 재민은 벽을 힘 있게 내리 찔렀다. 정확히는 벽에 붙은 모니터 근처에 붙은 한 장의 공고를. 툭툭.

 

알바생 구하신다면서요. 저 알바 하러 온 거거든요.”

 

해바라기 동물병원에서 붙은 알바 모집 공고였다. 재민은 그것만이 제 에널을 사수할 길이라고 믿었다. 제노가 예의 둥그런 눈 모양을 만들었다. 알바요? . 제가 요즘 돈이 없어서요 (레알이다. 말단 경찰 공무원 월급은 짰다.).

 

수의사가 턱을 괴었다. 재민이 가리킨 공고에 시선을 꽂은 채 볼펜 끝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린다. 그 생각의 박자에 무심코 호흡이 따라갔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제노가 이윽고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쪽으로 경력이 있나요?”

아뇨.”

지금 하는 일은?”

백수입니다.”

 

제노가 재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바코드 읽는 스캐너마냥 재민의 가격을 읽는 것같이 느껴졌다.

 

생업으로 삼기에 보조일 월급이 많지는 않아요.”

 

스캔한 결론이 그거?

 

괜찮습니다. 인생은 열정이죠.”

하하. 그런 스타일이시구나. . 이건 중요한 질문은 아니지만…… 혹시 개를 좋아하나요?”

동물병원에서 일할 거면 중요한 질문 아닙니까?”

수의사가 꼭 개를 좋아할 필요는 없거든요.”

 

그렇게 대답하고 제노가 미소 지었다. 대만 샌드위치를 떨어뜨리고 짓던 미소처럼 허술했다. 그래서 더욱 읽히지 않았다. 진짜로 수의사인지. 이게 다 연기인지. 재민은 눈썹을 들썩이며 대답했다. “개는 별로. 말을 모르잖아.” 제노가 미소를 그렸다.

 

그럼 하루 일해 보시고 결정하실래요?”

 

보기보다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거든요.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수사 기록>

해바라기 원장과 만남

브래들리 쿠퍼

대만 샌드위치

병원 깨끗함

대장 박테리아 검사

ㄴ 강아지들도 잘 참음

 

 

 

아다

 

범죄자들이 하나같이 나 범죄자요 마빡에 붙이고 다니진 않는다. 개중에는 아주 매력적이고, 아주 무고해 보이며, ‘세상에 이런 놈까지 나쁜 놈이면 대체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싶은 놈들이 왕왕 있다. 나재민도 꼴에 경찰 짬밥 6년이라고. 숱한 사건을 해치우며 깨달은 바가 있는데, 사람을 믿지 말라는 거다. 특히 무고하다고 믿고 싶게 만드는 페이스는 더더욱.

 

.”

아오, !”

 

재민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기급절사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옥니가 낄낄거렸다. 감히 태업을 하지 않는 자의 귓구멍에 입바람을 불어 넣는 것은 예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강력팀의 관행이었다. 재민은 썩은 얼굴로 부패한 귀를 감싸 쥐었다. 그의 좁다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종이쪽을 보면서 옥니가 물었다.

 

이건 뭐야? 그림일기?”

알콜스왑 있는 사람.”

해바라기 원장과 만남?”

나 귀에 지름 80 마이크로미터가량의 구균 붙은 것 같은데.”

브래들리 쿠퍼?”

 

, 보지 마세요. 재민은 종이 위에 손을 휘저었다. 그것은 할 짓 없고 호기심에 찌든 한 마리의 맹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를테면 나 잡아 드쇼하는 구애의 몸짓과 다름없었다. 옥니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 채 눈썹을 한차례 들척였다. 알았어. 미련 없이 돌아서서 자리로 복귀하는 척하다 종이를 쓱 빼냈다. 종이는 무사히 옥니의 손아귀에 안착했다.

 

에이, 거 참!”

벌써 그 병원 갔다 온 거야? 심지어 원장이랑 만났어?”

줘요.”

대만 샌드위치, 병원 깨끗함.”

보지 말라니까!”

……? 이건 뭐야?”

뭐가.”

나대갈, …….”

 

옥니는 흔들리는 눈으로 재민을 내려다봤다.

 

대장 박테리아 검사 받았어?”

?”

해바라기 원장한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서 전체에 울려 퍼졌다. 화면으로 빨려 들어갈 듯 숨을 죽이고 있던 막내가 모니터 위로 얼굴을 펀뜩 솟구쳐 올렸다. ‘지금부터 맛있는 라면을 끓여 볼까요?’. 스피커에서 슈 게임 BGM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나대갈에게 개전 신호와도 같았다. 이 재미 있는 이야기를 결단코 놓칠 수 없다는 전쟁광들의 지리는 눈빛.

 

막내야, 동물병원에서 대장 박테리아 검사는 어떻게 하냐?”

우리 뽀삐 장염 걸렸을 땐…….”

아니라고.”

애널에 면봉을 찔러 넣었는데여?”

애널이라고 하지 마.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이 자식…… 어쩐지 아침부터 어기적거리면서 출근한다 했어.”

저기요. 그쪽이 저보다 늦게 출근했잖아요.”

내가 분명 아다라시한 게 필요하다고 했는데.”

저 아직 숫총각이거든요.”

어디서 삼합회 분파 간부한테서 애널에 면봉을 찔러 넣는 방식의 대장 박테리아 검사를 받은 후다가…….”

누가 뭘 받아?”

 

굿 타이밍.

 

팀장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친 얼굴로 신코를 뻗으며 팀장은 강력팀 안으로 성큼 걸음을 들였다. 재민은 갈고리눈으로 옥니를 노려봤다. 이건 필시 드라마나 영화에서 상황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굳이 요약해 나불거리는 떡밥. 옥니는 히죽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쿨하게 한번 털어 보라고 했더니 위대한 대한건아로서의 자존심마저 탈탈 털려 왔네여.”

 

팀장은 재민을 흘깃 스쳐보더니 소파에 퍼더앉았다. 키가 작은 협탁 위에 발을 올려놓고 양말을 직 벗어 던졌다.

 

벌써 만났어?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골랐구만. 어때?”

역시 날 믿어 주는 건 팀장님밖에 없네.”

좋았어?”

에라이.”

 

팀장은 피로로 물든 얼굴로 가까이 오라는 듯 검지를 까딱였다. 재민은 바닥을 힘차게 굴러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협탁 옆으로 밀려 갔다. 재민의 수사 기록지로 비행기를 접은 옥니가 팀장에게로 종이를 날려 보냈다. 팀장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낚아채 펼쳤다.

 

일단 저의 위기마저 기회로 전환시키는 천부적인 자질 덕분에 대화 정도는 나눠 봤고요?”

후다 따인 거 아니고?”

두 번째 강조하는데, 저 아직 숫총각이고요?”

브래들리 쿠퍼? 감긴 거 맞네.”

잘생긴 건 인정하지만 첫 만남에 절개를 바칠 정도로 제 취향은 아니었고요?”

그래서, 헐리우드 초미남 스타 브래들리 쿠퍼를 닮은 삼합회 분파 간부가 뭐라디?”

 

재민은 양손으로 옆머리를 싹 밀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세상천지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이들은 한패였다. 신삥이 뛰어들면 피라냐마냥 살점을 물어뜯어 다진 고기를 만드는.

 

하루 일해 보라던데요. 보기보다 만만한 일이 아니라고.”

전개가 왜 그렇게 돼?”

 

어떡해. 마음에 쏙 들었나 봐. 어느새 저들끼리 붙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민은 입술을 비뚤게 맞문 채 찝찌름한 표정을 지었다. 드물게 팀장의 서늘한 눈빛이 재민을 관통했다.

 

몰래 털어 보려다가 따악 걸려서 알바 하러 온 척했으니까?”

 

일 났다. 이제 효자손으로든 단소로든 이마빡을 후드려 맞을 차례였다. 그 영광의 상처는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아물지 않는 흉으로 남겠지. 재민은 곧 눈앞에 내리칠 전뇌를 상상하며 뒷짐을 졌다.

 

호오.”

 

돌아온 것은 뜻밖의 반응이었다.

 

딱 좋은 상황인데?”

진짜로? 진짜 위법수사를 하라고요, 나더러?”

그럼 가짜로 할까? 너도 뒷일은 감수하고 구라 쳤을 거 아냐.”

건 그런데.”

 

어떡해. 나대갈 이제 남친 생기나 봐. 또다시 쑥덕거리는 소리가 넘어왔다. 고개를 돌려 눈을 부라리는 재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팀장이 꼬깃꼬깃한 종이 뭉치를 협탁에 툭 던졌다.

 

너무 깨끗해 보이는 사람이 사실 제일 더러운 거, 너도 알지?”

 

팀장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뒷짐을 진 재민과 눈을 맞췄다.

첫 만남에 대장 부르텔라 검사니 뭐니 시키는 거 보아하니 그놈도 보통은 아닌 것 같아. 수상해. 내 팀장으로서의 후각이 말하고 있다.”

후각 하면 전데요. 제 후각은 이 사건에서 빠지라고 말합니다.”

니 후각은 계급이 너무 낮아. 까라면 까, 새끼야.”

이렇게 위험한 일에 저 하나 꼬라박고 땡? 죽으라는 거죠.”

. 누가 너더러 범죄도시 찍으래냐? 한번 후다만 따 보라는 거잖아.”

후다는 제 후다가 살짝 따였고.”

진짜 남색이면 한번 감아 보는 것도 괜찮지.”

 

침묵이 흘렀다.

 

에헤이, 팀장님. 건 좀 그렇다.”

. 너 이쁘장하잖아.”

게이도 취향이란 게 있어요. XY 염색체라고 다 좋아하고 그러지 않는다니까.”

뭐져? 웬일로 맞는 말을?”

물론 상대가 저인 이상 어쩌면 가능하다고 볼 수 있겠죠.”

착각이었군여?”

하지만 싫습니다.”

.”

나중에 경찰 관두면 자기개발서 쓸 거라서요. 좀 더 멋들어진 일로 맡겨주시죠?”

 

재민은 짐짓 까리하게 머리를 쓸었다. 팀장의 눈빛이 짙어진다. 한때 현장에서 공로를 켜켜이 쌓아온 늙은 범의 눈이 날카로운 예지로 번들거린다. 그래. 계발서가 아니고 개발서란 말이지……. 노후한 목소리가 길게 늘어진다.

 

그놈한테 개발 당하고 쓰면 되겠네.”

 

마포서에서 나재민의 NO가 들어 먹힌 전적은 제로였다.

 

미쳤습니까?”

그래서, 그 새끼가 남자 역할이래냐?”

미치셨네. 여기 경찰서고 팀장님 경찰입니다.”

시끄러워, 새끼야. 불만 있으면 범인부터 잡고 인권 운동해. 몸 바칠 일 생기면 나한테 제일 먼저 보고하고. 비밀로 해 줄 테니까.”

 

팀장님! 나재민의 마지막 일갈을 묵살하고, 팀장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과연 뭇 경찰의 귀감이 되시는 분이다. 공권력의 부정buffet을 뿌리 뽑고자 하는 경찰 의식이 자극된다. 서류 싹 챙겨 자리로 돌아가던 팀장은 뒷덜미가 간지러웠는지 문득 뒤돌아 삿대질했다.

 

진심으로 감기지는 마라?”

 

영화 좀 그만 보라고.

 

 

 

 

 

 

 

언더독

 

- 언더독의 어원은 투견장에 있다. 위에서 내리까는 개를 탑 독. 아래 깔린 개를 언더독이라고 부른다. 계급주의에 혹사당하며 아득바득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을 쉽게 후자에 이입하고는 한다. 경찰 영화 백날 봐라. 다 짜 맞추듯이 주인공은 따까리. 힘없고 빽 없는 무대뽀 형사. 검찰에 밟히고, 범죄자에 밟히고, 마누라한테 밟히고. 한국인들 언더독 페티시 이거 고질병이라 이거야. 그래서, 나재민도 언제든지 황정민으로 대체될 수 있는 그런 흔하고 뻔한 언더독이냐? 따지자면 언더독이지. 맞지. 그러나 그는 탑독도 언더독도 싫었다. 뻔한 알탕을 거부하는 이 시대 참된 경찰 나재민은.

사모예드가 좋았다.

(어쩌라고?)

 

 

, 얘 진짜 사모예드예요?”

. 헤헤.”

고놈 참 복스럽다. 이 병원에서 키우는 겁니까?”
아뇨, 제가 키우는 개인데 원장님 허락 맡고 데려왔어요.”

 

접수원이 하얀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오전에만 일하는 보조원으로, 곧 야간 대학을 다닐 거라고 했다. 그 빈 자리를 메우는 것. 그것이 오늘부로 재민의 업무였다. 재민은 가죽 재킷을 벗어 걸고 개 앞에 쭈그려 앉았다. 사모예드가 나대갈의 무릎께에 코를 들이민다. 어유. 털 좀 봐. 덥겠다, 덥겠어. 머리를 쓰다듬고 웃었다.

 

애 이름이 뭐죠?”

봉식이요.”

 

나대갈보다도 사람다운 이름이었다.

 

 

 

분위기라는 게 묘하다. 영화에서도 비장한 장면에 동요 깔아 주면 아무도 긴장하지 않을 거다. 해바라기 동물병원을 이루는 공기도 그랬다. 창틈으로 햇살이 스며드는 진료실. 책상 위에 놓인 명패가 우윳빛으로 반짝인다. 그리고 진료실 한켠에 앉아 알약들에 대한 설명을 하는 이제노. 별로 어려울 거 없어요. 처방은 제가 할 거니까, 대갈 씨는 헷갈리지 않게 알약을 잘 분류해 놓으면 돼요. 동물을 안심시키는 데에 인이 박인 평온한 음성. 언더커버의 나사를 탁 풀어 버리기 좋은 그림이다. 설명을 들으며 조금 졸던 재민 앞으로 불쑥 견출지가 내밀어졌다.

 

이것 좀 약통에 붙여 줄래요?”

 

, . 퍼뜩 입가를 훔치고 견출지를 받아들었다. 수의사가 눈웃음을 지었다. 이상할 정도로 안심되는 눈이다. 진짜배기 사짜들이 저런 눈깔을 가졌지. 의사도 일종의 사짜긴 한데. 해바라기 동물병원 원장 이제노. 사람 좋아 보이고. 실력 좋아 보이고. 그냥 좋은 수의사의 표본으로밖에 안 보였다. 재민도 그가 삼합회 분파의 조직원과 컨택 중이란 정보가 없었으면 전혀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서 이런 마스크를 구했대. 그런 단정한 얼굴을 달고, 손엔 흉터를 장갑처럼 둘렀다. 워낙 하얀 사람이라 기스난 게 더욱 도드라지게 보였다. 이래서 차를 화이트로 안 뽑는다니까. 그리고 재민의 시선을 가장 사로잡는 것. 그건 약지에 끼워진 반지였다.

저걸 어제는 왜 못 봤지.

 

애인?”

 

재민이 은근하게 반지를 눈짓했다. 재민의 시선을 따라간 제노가 작게 미소지었다.

 

아내.”

 

 

 

<수사 기록>

유부남

(게이 아님)

 

 

 

남색 작전에 빨간 줄이 그어졌다. 당장 팀장님께 보고할 생각에 엉덩이가 들썩였지만, 재민은 자신의 언더커버를 망각하지 않았다. 알약은 빻는 대로 잘게 빻아졌다. 하얗고 쉽게 날리는 가루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 유골함에서 본 뼛가루처럼……. 문득 뒷덜미가 스산하다고 느꼈을 때. 재민은 놀라 펄쩍 뛸 뻔했다. 갑자기 뒷목에 온기가 와닿은 것이다. , 뭡니까? 어느새 뒤에 서 있던 이 원장이 자기가 더 놀란 표정으로 재민을 내려다보았다.

 

, 미안해요……. 목깃에 가루 묻어서.”

 

벌렁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옷깃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가루가 묻어 있었다.

 

겉옷 걸어 드릴게요. 코트에 약가루 묻으면 잘 안 지워지거든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반듯하고 정중하게. 재민은 그 손을 멀찐히 바라보았다. 지가 메이드야, 집사야? 그냥 옷 벗으라고 하면 되는걸. 와이프도 있는 주제에. 옷은 왜 털어 줘. 여사친 깻잎만큼이나 남의 옷에 묻은 먼지도 함부로 떼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다정한 손길로 그러면 더더욱 안 되지. 수작질과 같은 제스처를 쓰면 상대가 오해하지. 와이프도 있으면서. 재민은 롱코트를 벗어 떠넘기듯 건넸다. 그 옷을 옷걸이에 거는 수의사의 가운 등허리에 팽팽한 주름이 잡힌다.

역시 쎄해.

 

 

 

, 대갈 씨…… 우유 못 드세요?”

 

쎄하다고.

 

양손에 음료를 들고 온 제노가 양 눈썹을 똑 떨군다. 죄송해요, 미리 물어볼걸……. 라떼만 두 잔 시켜버렸는데. 점심시간에 쌩하게 나간다 했더니 음료를 사 온 모양이다. 자기 진료실인데도 남의 집에 온 것처럼. 그는 컵에 물기도 안 마른 라떼를 두 잔이나 들고 재민을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재민이 괜찮다고 하지 않으면 계속 저렇게 서 있을 것 같은 태도였다. 오히려 제 집처럼 진료실에서 삼각김밥을 까던 재민은 원장을 어처구니없이 올려다보았다. 음료 메뉴도 안 묻고 주문을 해? 게다가 저건 힘나프레소에서 가장 달다고 악명이 자자한 녹차라떼 아닌가? 재민은 단 게 싫었다. 게다가 유당불내증도 있었다. 역시 짱깨의 앞잡이라 대한민국의 싸가지에 낯가리시는 거지. 이 자리에서 영장 없이 체포하는 상상을 하며 묵묵히 음료를 받아들었다. 제노가 괜찮겠어요? 재차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먹고 죽는 것도 아닌데요. 먹으면 반추동물마냥 되새김질하느라 반나절 다 보내겠지만, 제가 놀면 그쪽이 손해니까요.”

제가 다시 사 올게요.”

괜찮다니까.”

뭐 사 올까요?”
아메리카노 샷 추가 라지 사이즈요.”

 

아메리카노 샷 추가 라지 사이즈. 심부름을 입속말로 되풀이하며, 이 원장이 다시 진료실에서 나갔다. 한 병원의 장이 커피 시다에 30분이나 소모하다니. 누가 이 광경을 봤으면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이 착하다고. 개같이 착해 빠졌다고.

 

하지만 난 아냐.

 

. 음료에 후각을 곤두세웠다. 오직 코 하나로 찜질방에서 마약 사범을 열셋이나 잡았다는 인재. 감식반에서도 이게 밀가루인지 코카인인지 긴가민가하면 우선 나재민을 불러 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후각은 범법의 향기에 유독 기민하게 반응했다. 아쉽게도 음료에서 불순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 혀를 찼다. 빨대를 이로 잘근잘근 씹으면서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진료실에 CCTV는 보이지 않았다.

 

원장은 자리를 비웠고, 10분 이내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재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데스크 너머 회전 의자에 털썩 엉덩일 붙였다. 이제노가 종일 앉아 있을 그곳은 생각보다 불편하고 딱딱했다. 고객들 앉히는 의자가 더 편하네. 등을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고, 원장의 손길이 닿았을 모든 곳에 자신의 손길을 겹쳐 댔다. 성의 없는 손길로 서랍장을 위에서부터 하나씩 툭툭 열었다. 첫 번째 서랍에는 클립, 스테이플러, 고무줄, 견출지, 주사기.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자기가 안 쓰면 다 잡동사니로 여겼다). 두 번째 서랍에는 종이가 몇 장 들어 있었지만 대체로 공문이나 뭐 그런 거였다. 한 장의 서류 뒷면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기는 했다. 아래 탕1 1 이라고 적힌 걸 보니 재민이 기대하는 삼합회의 연줄과는 조금 다른 짱깨 같긴 했지만……. 마지막 서랍은 흔한 사무용 서랍장답게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여기다. 여기부터 수사를 시작하자. 재민은 손가락을 뚝뚝 풀고 하나씩 비밀번호를 돌려 보았다.

 

0000

1111

9999

1234

4321

 

 

이과 재수 털려. 불만스러운 독백 이면에는, 그를 의심하고 미워할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는 자신이 있었다. 이거 아주 불편한 새끼다. 불편해. 멀쩡히 잘 사는 남의 인생 쑤시고 들어가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그의 무해한 태도가 불편하다. 이런 자괴감을 지우기 위해서는 이 서랍을 반드시 열어야 했다. 어떻게든 억지로 파고 들어서 찾아내야 했다. 나재민이 이제노를 의심해야 하는 당위성. 이제노의 세계에 한 발 비비고 들어가도 괜찮다는 확신을.

 

물고 있던 빨대를 신경질적으로 빨았다. 쪼르륵, 단맛이 입안에 퍼졌을 때 뒤늦게 떠올랐다.

유당 불내증.

 

 

 

<수사 기록>

라떼못먹음내가

 

 

제노는 자로 잰 것처럼 정확히 10분 뒤에 진료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5분 뒤 나재민도 화장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대갈 씨 괜찮아요? 피곤하면 일찍 퇴근하셔도 돼요.”

……아뇨. 배가 좀 아파서.”

배요?”

라떼르을…… 마셔서.

 

제가 듣기에도 죽어 가는 목소리였다. 제노가 조용히 웃음을 깨무는 게 다 보였다.

 

내가 아픈 게 웃긴가 봅니다?”

 

아파서 평소보다 혀끝에 바늘이 돋는다. 죄송해요. 입가를 가린 제노는 그러나 여전히 눈가에서 웃음기를 털어 내지 못했다.

 

저한텐 사회생활 안 해도 돼요.”

"……뭔 사회생활이요?”

원장이 줬다고, 못 먹는 걸 억지로 마시고 그럴 필요 없어요.”

아항. 그런 건 아니었는데. 변명하기 귀찮아졌다. 어떻게 해석한 건지 제노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웃는다. 웃을 때 조금 긴 앞머리가 그의 안경 위로 흘러내렸다. 자꾸 웃어서 미안해요. 대갈 씨 처음 왔을 때 생각나서요. 동물병원에 와서 그랬잖아요. 배 아프다고. 여기 오는 개들도, 주는 대로 다 받아먹다 탈 난 애들이 많거든요……. 재민은 불퉁한 낯짝으로 제노를 건너다보았다. 재민이 관찰해온 제노. 주사 놓으면서도 반드시 따끔.” 다정하게 속삭이고, 알아듣지도 못할 소동물을 상대로 안심시키는 말을 들려주고, 미소를 짓고, 눈을 마주쳐 준다. 그걸 그가 재민에게 그대로 하고 있었다. 개를 대하듯이. 무슨 진짜로, 나대갈이라는 아픈 개를 돌보듯이…….

 

그렇게 좀 웃지 말라고. 속이 더 꼬인다고.

등이 구부러진다. 식은땀이 흘렀다. 괜찮아요? 제노의 손길이 등을 문지른다. 구부러진 척추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손길. 그 길을 따라 열감이 홧홧하다. 원시적 수사 기법으로 간답시고 비아그라 잘못 처먹었을 때 같다. 어윽. . 허벅지 안쪽이 왜 이렇게 땅기는지…….

 

, 떼요…….

 

토할 것 같다.

여지껏 이런 적이 없었는데. 상한 기분이 든다. 내장 어디가 상했어. 온기에 너무 오래 둔 냉동식품이 상하듯이, 나재민은 아무래도 이 남자에게 오래 노출되면 될수록 나빠지는 것 같다. 자신조차 몰랐던 결벽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물끄러미 재민을 바라보던 원장이 손을 거둬 간다. 온기가 멀어지자 한층 더 속이 나빠졌다.

 

제노는 아픈 재민을 위해 카운터에서 배탈 약을 찾아 주었다. 개들은 조용히 앓는 애들이 많아요. 그래서 아픈 걸 눈치채기가 힘들어요. 자주 관찰해야 해요. 고통에는 입이 없지만 단서는 있거든요. 애들이 어딜 자꾸 혀로 핥아요. 그럼 아, 거기가 아프구나 하는 거죠. 재민은 말없이 알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제노가 물 한 컵을 내민다. 그것을 받아 벌컥 마셨다. 아직 알약을 침으로만 삼키는 스킬이 없었다.

 

그래도 대갈 씨는 사람이라 다행이에요. 혀를 더 능숙하게 쓰니까.”

 

그 말에 목구멍을 넘어가던 알약이 턱 걸릴 뻔했다.

 

……혀를, ?”

…… 아프다고 말할 줄 아니까. 대갈 씨는.”

 

제노가 완만하게 정정했다. 그걸 누가 그렇게 표현하냐고.

 

 

 

 

<수사 기록>

말본새가 상스러움

(아내도 있는 주제에.)

 

 

 

 

아프면 일찍 퇴근하세요.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사회생활 필요 없다는 팁 접수하고 단칼에 박찼다. 행거에 걸린 롱코트를 낚아채서 도망치듯 진료실을 벗어나는 재민을 향해 이 원장이 잠깐, 붙잡았다.

 

그러고 나가면 사람들이 강아지인 줄 알아요. 털 떼 줄게요.”

 

제노의 손에 돌돌이가 들려 있었다. 재민은 그가 내민 친절을 멀거니 건너다보았다. 돌돌이를 쥔 손. 그 하얗고 흉터 많은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에헤이. 제가 가다가 테이프 사서 떼면 됩니다.”

 

겉옷에 묻은 털을 떼어 주려는 손길을 쳐냈다.

 

원장님이 떼 주면 또 묻잖아. 원장님한테서.”

 

어떤 더러움의 근원을 대하듯이.

 

제노는 별다른 반응 없이 가만히 있었다. 재민이 은근히 겨눈 경멸을 피하거나, 멋쩍어하지 않았다. 그저 그러네요.” 담담하게 말하고 손을 거두어갔다. 그러나 재민은 보았다. 제노의 눈썹이 보일 듯 말듯, 상냥한 기울기에서 조금 덜 상냥한 기울기로 기울어지는 것을. 그 미세한 변화를 감지한 순간, 정체불명의 흥분이 나재민의 뇌간을 치고 올라온다. . 상처가 돼? 더러운 취급을 받아서 억울해? 어쩔래. 꼬우면 발톱 꺼내. 악한의 진면목을 드러내라고. 그러나 침묵은 잠시. 제노는 담담하게 지갑에서 명함을 건넸다.

 

혹시라도 내일까지 아프면 이 번호로 연락주세요. 출근은 조금 늦어도 되니까.”

 

그는 끝까지 이 원장이었다.

 

 

 

 

 

 

 

무고하다고 믿고 싶어지는 얼굴.

 

아마도 그것일 테다. 이 부자연스러운 거부감의 근원은. 주차장에 삐딱하게 세워진 K5에는 먼지가 잔뜩 묻어 있다. 재민은 고급지에 인쇄된 명함을 오랫동안 만지작거렸다. 긴 속눈썹 아래 그늘 같은 시선이 숫자 위를 열없이 오갔다. 그리워라, 간통죄 징역 2년아. 불륜에서 형사법이 슬쩍 발 빼니까 이런 놈들이 앞으론 멀끔한 남편 직함 달고 뒤로는 문란하게 노는 거잖아. 아내 있는 사람이 이러셔도 돼? 외간 남자 애널, 아니 항문에 면봉 막 쑤셔 넣으려고 하고. 외간 남자 옷에 붙은 먼지 털어 주고. 라떼 사 주고. 아프다고 등 두드려 주고. 번호까지 주고.

.

짱나네?

미워할 구실이 이렇게나 많은데.

 

의심하고 싶어서 의심하고 있나. 그다지 수상하지도 않은데, 어떻게든 수상하게 보고 싶어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까이서 관찰한 이제노는 정적인 인간이었다. 경로 일정하고. 바운더리 확실하고. 개 좋아하고. 예의 있고 교양 있고. 무서울 정도로 따뜻하지만, 그게 거짓은 아닌 게 분명한. 오늘 하루 지켜봤을 뿐인데도 일 년치를 본 것처럼, 자신에게 허락된 작은 일상을 함부로 벗어나지 않는 남자.

 

나재민은 명함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하면 숨겨진 글자라도 딱 나타나 주면 좋겠다. 놈을 마음껏 미워할 이유가 생겨나면 좋겠다. 정말 오해일까? 삼합회 짬찌 놈은 그냥 치와와가 아파서 병원에 오는 게 맞았나? 하긴 그래, 나 같아도 개가 아프면 나와는 다른 손을 가진 수의사한테 데려가겠어. 금속과 시신의 온도가 익숙한 차가운 손보다는, 개를 돌볼 줄 아는 따뜻하고 흉터 많은 손에……. 어느새 명함을 너무 꽉 쥐고 있었다. 종이가 엄지손톱에 눌린 자국이, 꼭 그 수의사처럼 나재민을 향해 부드럽게 웃는다. 나재민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오해인 게 낫다. 누군가 무고한 게 나쁜 일은 아니니까. 무죄 추정의 원칙. 우린 무고함을 찾기 위해 의심하는 존재다. 차라리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자. 이 원장이 진실로 좋은 수의사라는 걸 밝히자는 취지로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거라고.

 

차창 밖으로 틱 명함을 날렸다. 부르릉.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머릿속으로 쓰레기 무단 투기 과태료가 잠깐 떠올렸으나 금방 지워졌다. 들키지만 않으면 죄 아니지, .

 

 

 

 

 

 

 

 

 

나재민의 차가 떠난 직후.

목격자는 명함을 집어 들었다.

 

단정한 시선이 명함을 훑는다. 시선은 자신의 이름을 따라 걷다 눌린 손톱자국 앞에서 멈춰 섰다. 목격자는 소리 없이 웃었다. 왼손 약지에 새겨진 반지를 엄지로 조용히 돌렸다. 웃는 일도 반지를 돌리는 것도 단지 버릇이었다. 단지 습관이 된 그의 결혼 생활처럼.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동물병원 앞에 흰색 벤틀리가 서 있었다. 제노는 열린 운전석 차창에 고개를 숙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웬일로 마중을 다 나왔어.”

 

핸들을 쥐고 있던 여자가 눈썹을 까딱였다.

 

자꾸 남편이 딴 데로 새는 것 같아서.”

딴 데로 새는 건 너 아니야? 평소보다 화장이 짙다. 은혜야.”

. 나 오빠 집에 내려 주고 다시 내연남 보러 갈 거야.”

나중에 번호라도 알려 줘. 우리 은혜 잘 부탁한다고 인사라도 하게.”

죽었어, 오빠.”

 

은혜가 차 문을 보란 듯이 잠갔다. 그대로 차를 출발시키려는 은혜를 달래기 위해 제노는 10분의 시간을 허비했다. 겨우 조수석 한자리를 내어주고도 은혜는 토라져 있었다. 자주 화를 내도 그 깊이가 깊지 않다는 것이 그녀의 장점이었다.

 

뭘 들고 있는 거야?”

내 명함.”

그걸 왜 들고 있어?”

오늘 새로 온 알바한테 줬는데. 그냥 버리고 가더라.”

 

싸가지가 없네. 은혜가 중얼거렸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제노는 하하, 소리 내서 웃었다. 돌돌이를 쳐내던 남자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살짝 찡그리고 이를 드러내던 표정. 수의사로 일하는 동안 제노가 가장 많이 보아 온 표정이기도 했다.

 

버릇도 없더라고.”

 

자국 난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온 개가 있다.

 

 

 

 

*

 

 

 

 

 

 

 

진실의 방

결과는 환희 57%에 기쁨 32%, 자연스러움이 11%.

결과는 평온이 83%에 행복함이 17%.

결과는 아무 생각 없음 88%에 경멸이 12%.

 

위는 차례대로 막내, 옥니, 나대갈의 표정 분석 결과이다.

 

 

뭐져? 이 사소하고도 찝찝한 4퍼센트의 경멸은?”

그러게. 대놓고 높은 것도 아니고 아예 낮은 것도 아니야. 상당히 거슬리는 수치인데?”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본 막내가 얼굴을 찌부러뜨렸다. 어깨를 맞댄 채 분석 결과를 응시하던 옥니가 거들었다. 재민은 의자 등받이 아래로 상하체를 미끄러뜨리고 팔만 뻗어 마우스를 움직였다. 구글 검색창에 해바라기 동물병원을 입력해 넣고 후기란을 클릭했다. 얼마 없는 후기에 온통 별이 다섯 개씩 찍힌 것을 훑으며 눈을 굴렸다. 입에서는 무성의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런~ 나도 이제 철이 들어 버린 걸까? 애초에 일하면서 환희와 기쁨과 평온을…….”

몸은 괜찮아여?”

……느끼는 인간들은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 무슨 몸.”

 

등골이 섬찟함을 느끼고 뒤돌아봤을 때는 어느새 막내와 옥니가 재민의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재민은 쏜살같이 날아 자신의 폰을 낚아챘다. 켜져 있는 화면을 스쳐보자 문자 메시지가 보였다.

 

010-5345-959*

[몸은 괜찮아요?]

 

틀림없이 해바라기 원장이었다. 첫날 형식적으로나마 자기소개서를 제출한답시고 나대갈이라는 이름 석 자 밑에 깨알 같은 연락처를 휘갈겨 쓰고 나온 것이 생각났다. , 문안 인사 좋지. 인간이 간밤에 똥간에 갇혀서 고독사했을지도 모르니까. 근데 하필 이 타이밍에? 금수 같은 이 두 사람 앞에서? 재민은 큼, 목을 가다듬은 뒤 책상에 휴대폰을 던져 놓았다.

 

몸은 괜찮냐니여? 꼭 지난밤에 몸 호되게 쓴 사람이 받을 법한 문자네여.”

자기는 아직 아다라시하다고 그렇~게 빡빡 우겨 대더니.”

누구예여?”

설마…… 애널을 탐한 그 사람?”

 

재민의 머리가 짧은 순간 시원스레 구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어떤 대답을 내놓는 게 옳을까. 우선 로 특정되지는 않는 방향이 최선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독하게 놀림 받던 모쏠 인생을 청산하는 김에 궁지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여친이야.”

?”

?”

 

막내와 옥니가 벙 찐 얼굴을 했다. 후훗. 어떠냐, 하바리들아. 이게 바로 아다라시한 신의 한 수다. 주둥이를 벌린 채 굳어 있는 그들을 뒤로한 채 재민은 그리고 이건 갠적으로 꼽는 장점이지만.. 원장샘 너무 잘생기셧어요^^’라고 적힌 후기 창을 닫았다.

 

교제가 확실한 인물과의 첫날밤은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네여.”

난 아냐. 나대갈 착한 줄 알았는데 섹스했네.”

 

시르죽은 듯 자리로 돌아가는 막내의 옆에 있던 옥니가 중얼거렸다. 합당한 육체적 관계가 천인공노할 사안이라도 되는 양 이를 가는 옥니를 각다귀 쫓듯 쫓아 버린 재민이 코웃음을 치며 메시지로 시선을 돌렸다.

 

[몸은 괜찮아요?]

 

수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하지만 낚은 건 없었다. 나재민은 오로지 타고난 -적어도 자신은 그렇다고 굳게 믿고 있는- 형사적 직감에 의지하는 중이었다. 비근한 예를 들자면 월척이 낚이기로 정평 난 터에서 하염없이 미끼를 꿰며 기다리는 식의. 그러는 와중에도 재민은 모종의 경계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를테면……

 

이 남자와 더이상 엮이면 위험하다는 식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모골이 송연해지는 듯했다. 머릿속에서 한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팀장님한테 지금이라도 그만두겠노라 고할까. 위기를 직감한 후 뒷걸음질하는 것은 사고하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습성이기도 했다. 재민은 고민에 오랜 시간을 소요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메시지 창을 끄고 팀장의 전화번호를 찾아 입력해 넣을 때였다.

 

 

누가 신성한 일터에서 성행위를 해?”

 

현명한 도피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팀장이 문틈에 발코를 끼워 몸을 들이밀었다. 오셨습니까. 오셨어여. 당장이라도 밀고의 장을 열 것마냥 옥니와 막내가 동시에 일어섰다. 재민은 입맛을 쩝 다시며 책상 위에 폰을 던져 놓았다. 이 팀 인간들이 언제는 양반이라도 됐나. 채신머리없이 인사치레조차 않는 재민을 힐끔 하며 팀장은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나대갈, 너 어제 뭐 먹었냐?”

갑자기 웬 호구 조사.”

잔말 말고 대답해. 뭐 먹었냐고.”

대만 샌드위치요.”

거 말고는?”

새벽에 직화배달삼겹?”

그럼 됐다.”

 

재민은 됐다'라는 종결 어미와 대만 샌드위치, 그리고 직화배달삼겹 사이의 관계성을 당최 짐작할 수가 없었다.

 

힘쓰는 일 하게 나와.”

 

마치 개를 산책시키기 전 가슴줄을 준비하는 것마냥 대수롭지 않은 지시였다. 이미 그 남자'에 대한 번뇌만으로 체력의 3할을 탕진한 재민이 책상을 가볍게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솔직히 어제 논현까지 특근 뛰고 온 사람은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불만을 제기하는 재민에게 팀장은 [알 바?]라는 삶의 표어가 형상화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관할 아니라 이거지. 확 광수대한테 사건 넘기고 튀어? 모든 직무를 유기하고 오로지 나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떠나 봐? 재민은 손윗사람에게 미처 표하지 못한 넋두리를 입속말로 주절거렸다. 허공을 나도는 독백을 익숙하게 흘린 팀장이 즉기시 입구를 턱짓했다.

 

홍대 클럽 거리 인근. 2분 전에 마약 사범 신고 들어왔으니까 날래게 튀어가.”

 

 

.

기라면 까고 까라면 구릅니다.

 

 

 

 

 

*

 

 

마포서에 들어오는 마약 신고는 대체로 잡범이다. 제대로 뽕 빠는 놈들은 다 강남 이런 곳에 있지. 업소 룸 걸어 잠그고, 종일 피 갈아 가면서 주사기 꽂아 대는 강남 뽕쟁이들은 돈도 많아서 다루기가 힘들다. 그래. 그 동물병원이랑 멀지 않은 동네. 거기야말로 바로 범죄의 온상이다 이 말이야.

이 근방은, , 대충 싹 돌아보면…… 떨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요. 이 정도? 자타가 공인한 개코인 나재민의 선에서 정리가 되는 콤팩트한 약쟁이들이 대다수다. 이렇게 만만한 동네에 기골 장대하고 허우대만 멀쩡한 장정을 둘이나 달고 행차하는 건 인력 낭비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재민은 클럽 앞에 널브러진 쓰레기봉투를 파헤치고 있는 옥니와 막내를 멀뚱히 구경했다. 입안에서 츄파춥스가 들쩍지근한 맛을 풍기며 굴렀다.

 

니는 재깍재깍 안 뒤지고 뭐 하냐, 미친놈아?”

마음의 준비.”

간만에 개코의 역량 좀 발휘해 봐여. 떨 냄새 안 나여?”

전혀?”

악랄한 범죄의 향기는?”

안 나는뎅.”

 

이제는 저들의 반신만 한 쓰레기통 속에 얼굴을 거의 집어넣고 까마귀 부리마냥 쓰레기를 뒤져대던 짭새 둘이 재민을 벼락같이 쏘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야 한복판에서 재민은 비죽 밀려 나온 엄지손톱의 큐티클을 뜯적거리는 중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굽히고 있던 몸을 세운 옥니가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두덜거렸다.

 

에휴, 황금 같은 주말에 내 팔자가, 팔자가. 하여간 요즘은 어린놈들이 더해요. 청소년이고 2030이고 토토로 까이는 놈들이 그렇게 많다며?”

그러니까 주 5일제를 없애야 돼. 애새끼들이, ? 주말에 할 짓이 없으니까 자꾸 마약 하러 기어 나오잖아.”

저는 나대갈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니 혼자 주말까지 풀근 해 볼래?”

, 뭔 냄새 난다. 저쪽에서.”

말 돌리지 마라!”

아니, 진짜.”

 

재민은 클럽 입구 방향으로 검지를 죽 뻗어 두어 번 까딱였다. 겨울바람 한 가닥이 생풀을 태우는 듯한 냄새를 몰고 왔다. 이번에는 지극히 일반적인 옥니와 막내의 코로도 명명백백히 분간 가능한 잡내였다. 삽시에 인상을 굳힌 옥니가 같은 방면을 턱짓했다. 나대갈, 가서 검문. 우리가 도주로 막을게. . 보무도 당당하게 척척. 명을 받은 재민은 클럽 입구와 가까운 주차장 근처에 퍼더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제 몸 하나 건사 못 하면서 팔을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푹 숙인 꼬락서니가 언뜻 보기에는 취객 같아 보였다. 그러나 묘하게 각이 다르단 말이지. 떨이 무슨 마약이라고(마약이다) 여실히 맛탱이가 간 놈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잠시 검문하겠습니다?”

 

남자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핏발이 서 붉게 충혈된 눈알 두 개가 재민을 마주 바라봤다. 그러나 술인지 타액인지 모를 액체로 번들거리는 입술은 도통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재민은 더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이런 사람인데요. 단언컨대 나재민은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사랑했다. 한껏 꺼드럭거리며 경찰 공무원증을 내미는 순간. 극단적으로 소명하자면, 오로지 그 찰나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경찰이 되기를 택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니가 뭔데?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하는 고릿적 대사로 지시에 불응하는 범법자들의 면상에 주머니에서 멋들어지게 빡, 뽑은 경찰 공무원증을.

.

. 이렇게.

. 뽑아야 하는 거지.

.

…….

 

뽑지 못했다. 빈손을 훅 두려뺐다. 이번에는 반대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상의를 더듬고, 허벅지를 더듬고, 급기야 레자 재킷에 달린 본새용 주머니 각각을 뒤져대는 재민을 옥니와 막내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뭐 해여?”

수갑 두고 왔냐?”

아니…….”

 

더 중요한 게…… 없다.

 

 

 

 

<수사 기록>

(비상) 경찰 공무원증 분실

 

 

 

 

*

 

 

 

보통 형사들은 이런 상황에서 굉장히 당황할 거야.

그렇지만 난 아냐.

? 신삥일 때부터 이런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지.

 

<도둑들>의 예니콜에 빙의해 홀로 지껄여 봐도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야 물론 그가 종종 공무원증을 잃어버리기는 했으나, 마약왕(으로 의심되는 동물병원 원장)을 수사하는 과정에 있는 현주소에는 경중이 달리 매겨지기 때문이다. 이제껏 방치했던 대갈을 바삐 굴려 봤자 재민의 행동반경은 좁기 그지없었다. 공무원증이 있을 만한 곳 또한 양자택일의 경지였다.

 

마포서.

OR 동물병원.

 

[옥니: 나대갈신분증 마포서에 없음]

[막내: 팀장님이또무슨사고쳣냐는대여]

[막내: 걍솔직하게말해도되여?]

 

말하지 마!!!!!!!!!! 라고 답장해 줘, 시리야!!!!!!!!!!”

 

 

 

곳곳이 오그라들고 찌그러진 K5가 로켓처럼 강남대로를 누비는 동안, 무수히 많고 성대한 크기의 클랙슨들이 그의 인생 곡선에 갈채를 보냈다. 구가에도 불구하고 나재민은 여느 때와 같이 차창을 열고 뻐큐를 날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동물병원까지 숨도 쉬지 않고 날아갈 뿐이었다. 백미러에 비친 눈썹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건 과속 딱지 몇 개쯤은 감수해야 할 만큼 막중한 위기 상황이라고.

 

경찰 공무원증을 손 닿는 곳에 되는대로 꽂고 다닌 것이 화근이었다. 언제는 코트에 넣고. 언제는 뒷주머니. 언제는 그냥 바지 고무줄에 쑤셔넣은 적도……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 어디에 넣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거짓말이다. 사실 종전부터 재민의 머릿속은 노박이로 단 한 가지의 가설만을 받들고 있었다.

 

동물병원.

 

그렇다면 작금의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최악의 상황 또한 단 한 가지였다.

 

봤을까?

 

이 원장이 경찰증을 봤을까. 나재민의 이름은 나대갈이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해하고 무능한 아르바이트생이 사실 형사라는 걸 알아차렸을까. 그랬다면 잠복 수사는 종결이다. 아니? 수사만 종결이면 다행이지. 상대는 삼합회가 아닌가. 반도의 짭새 하나 녹여서 드럼통에 담고 어디 멀리 자작도 바닷가에 던져 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닐지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배어들었다. 태생부터 시네필과는 거리가 먼 나재민도 흥행한 누아르 영화는 본다. 박훈정의 신세계는 멀리 있지 않았다…….

 

 

 

K5가 동물병원 앞에 던져졌다. 조금만 더 급하게 멈췄다면 백플립도 가능했을 차를 개좆같이 대 놓은 재민은 우선 흐트러진 몸가짐을 가다듬었다. 다행히 적어도 자신이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는 경찰이라는 자각 정도는 남아 있었다. 우선 태연하게. 아직 안 들켰어. 운 좋으면 주차장에 있을 거다. 아니면 병원 가는 길목에. 최악은 병원 내부다. 거긴 사악한 중국발 수의사의 나와바리다. 그나마 동물병원 화장실 바닥에 떨어뜨렸으면 다행이지……. 주변 일대를 수색하기 위해 건물을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리고 동물병원 뒤편에서 그는 발견했다. 드디어 공무원증을? 아니. 수의사를.

 

이 원장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

 

원장의 입술에 가느스름한 담배가 물려 있다. 척 봐도 국산은 아니었다. 수의사 주제에 담배를 피워? 수상해. 재민은 온몸에서 날 법한 소리를 죽인 채 천천히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진다. 그는 쓰레기통과 물아일체를 이루는 재민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조금씩, 통화 내용이 크게 들렸다. 언어가 뚜렷한 형태를 띄기 시작한다.

 

그것을 알아듣는 순간,

전신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내가 뭐랬어.

내가 뭐랬냐고.

 

 

 

 

……有可能还在上海, 找找吧. 下周去.”

 

저거 중국어 쓰잖아.

 

 

 

 

 

 

 

 

 

 

 

 

 

 

 

 

 

 

 

 

 

평범한 수의사가 중국어로 통화할 일이 몇 가지나 될까.

안타깝게도 재민은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다. 놈이 아는 중국어라고는 초등학교 방과후 교실에서 배운 뚜이부치나 아직도 그 뜻을 모르는 니쉬팔러마가 전부였기 때문이다해바라기 동물병원. 삼합회 간부. 스핑크스 고양이. 600각 아이보리 포세린 타일과 대만 샌드위치. 재민의 머릿속에서 이제노에 대한 키워드가 산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부각되는 삼합회에 대한 정의.

 

중화권의 마피아.

 

통화를 엿들음으로 인해, 재민이 해야 할 일은 더욱 명확해졌다.

 

공무원증을 찾아야 한다.

지금 당장.

 

 

 

 

대갈 씨.”

 

철렁. 이름을 불렸을 뿐인데 -이름도 뭣도 아니지만- 심장이 심해까지 가라앉았다. ? 새된 대답을 외치며 벌떡 일어났다. 아까부터 이상한 시선으로 재민을 보던 견주들이 더욱 이상한 시선을 건넨다. 그러나 재민의 눈에는 오직 제노밖에 보이지 않았다. 방금 주사를 맞았는지 시무룩한 강아지를 안고, 둥근 눈을 끔뻑이며 서 있는 정체 모를 수의사.

 

왜 그렇게 놀라요?”

어유. 요새 제가 이래요. 갱년기인가 봅니다.”

…… 어제 알약 빻으신 건 어디 두셨어요?”

 

간신히 동선이 기억난 나재민. 맞다. 알약을 빻았지. 저기 선반에 넣어뒀는데…… , 거기 있구나. 고마워요. 미소와 함께 돌아서는 제노를 왈칵 붙잡았다.

 

, 제가 찾을게요. 가서 진료 보셔야죠?”

 

돌아서는 전 여친을 붙들 때도 이렇게 격정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놀란 눈을 뜬 제노가 고개를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수상하게 보이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변을 휙휙 살피고 선반 문을 벌컥 열었다. 공무원증은 없었다.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캐비닛 아래에도 공무원증은 없었다. 배로 이 병원을 전부 닦아 위생사 분들의 노고를 덜어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응달진 구석을 전부 훑었다. 역시 공무원증은 없었다. 어디에도.

 

 

오늘 업무 내내 그런 식이었다. 재민은 병원 내부를 날래게 날아다니며 온갖 자질구레한 뒤치다꺼리를 했다. 제노가 손가락 까딱할 틈도 주지 않았기에, 접수원이 혹시 원장님이랑 마리 앙투아네트 놀이라도 하냐고 넌지시 물어볼 정도였다.

 

대갈 씨, 오늘 엄청 고생하시네요. 샌드위치 드실래요?”

 

제노가 바닥에 엎드린 재민에게 조용히 묻는다. 걱정이 드리운 목소리다. 지금 진찰해야 하는 게 개인지 재민인지 아리까리하다는 뉘앙스였다. 재민은 고개도 안 들고 캐비넷 아래를 휘휘 손바닥으로 훑었다.

 

아뇨, 저 앞으로 대만 샌드위치 안 먹을 겁니다.”

…… 안 좋아하시는구나.”

원장님도 드시지 마시죠.”

? 저도요?”

. 그거 원장님은 진짜 드시면 안 되는 겁니다. 저 아래 차이나 타운에서 공갈빵이나 사 드세요. 아이 참 여기 먼지가 왜 이렇게…….”

혹시 찾고 계신 거라도 있어요?”

 

보다 못한 제노가 재민의 곁에 쭈그려 앉았다. 같은 캐비닛을 세 번째 뒤지던 재민은 좀비처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원장님. 혹시…….

 

최후의 수단에 앞서 마른침이 넘어갔다.

 

보셨습니까?”

뭐를요?”

그러니까, …… 신분증 말입니다.”

 

의아와 염려를 섞은 빛깔로 어두워지던 제노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 민증 잃어버리셨어요?”

 

재민도 긴장을 풀었다. 다행이다. 아직 못 찾은 듯.

 

, 민증이 어제부터 안 보여서요.”

일단 주운 건 없는데…… 저도 같이 찾아 드릴까요?”

아뇨괜찮습니다.”

아니에요, 같이 찾아요. 저 지금 진료가 없어서 도와 드릴 수 있어요.”

아니진짜괜찮습니다.”

그래요?”

 

사람이 괜찮다는데도. 이 원장은 공연히 진료실 서랍을 뒤적이거나 쌓인 서류철을 들춰보며 도우려는 듯한 몸짓을 보였다. 괜히 물어봤다. 저놈이 괜히 관심 갖게 했어. 그럼에도 우선은 일차적 안도감그러니까…… 안 들킨 거다. 아직은.

   

, 오늘은 병원 문을 좀 일찍 닫을 거예요.”

 

이 원장이 소매를 걷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재민의 시선이 그의 손목으로 날아가 꽂혔다. 딱 봐도 겁나 비싼 시계다. 의외로 허영이 있는 걸까. 그런데도 손목시계보다 손목이 더 비싸 보였다. 원래 비싼 건 대개 수수하고 심플하면서도 라인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 법이니까.

 

역시 거래인가. 다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일 청기백기를 몸소 선보이는 재민의 광증을 제노는 상냥하게 외면했다. 병원에 CLOSED 팻말을 거는 이 원장 뒤로 바짝 붙었다.

 

왜 일찍 닫습니까? 어디 약속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돈을 주고받는 식의 약속이라든가…….

 

재민이 누구인가. 코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경찰 중의 견찰. 썩어도 준치라고, 공무원증으로 넋 빠진 와중에도 재민은 기민하게 캐치해 냈다. 마지막 말에 미세하게 경직되는 이 원장의 목 빗근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요.”

 

딱 걸렸어, 이 새끼야.

 

그러나 요기 베라가 남긴 명언을 상기해 보자. It ain’t over, till it’s over.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레이다가 빡 서더라도 의심하는 티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참된 형사들만의 기본 신조였다. 나재민은 섣불리 자극하면 도리어 차 빼고 도망치는 것이 빵잡이들이라는 사실을 모를 만큼 생짜가 아니었다. 재민은 제노의 어깻죽지에 팔을 턱 걸쳤다. 용의자의 도주로를 차단할 때와 같은 포즈로. 다 이해합니다. 심지어 저도 가끔 그런 충동을 느낄 때가 있어요. 아니? 사실 저도 합니다. 요새도 그것만 생각하면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니까. 은근한 시선을 쏘아 댔다. 존심 죽이고 알랑방귀를 뀌어서라도 어떻게든 끼어들어 한탕 잡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제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어깨가 조금 긴장했다. 그는 분명하게 불편해하고 있다. 재민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좌로. 다시 정위치로.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이 태도. 여태 검거해온 범인들과 똑같다. 찔리는 거지. 제 발을 저린 거야.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제노의 고개가 점차 낮아진다. 귀 끝이 붉다. 당황했다는 신호다. 모든 사인이 그의 결백치 못함에 확신을 배로 더한다. 냄새가 나. 범죄의 냄새가……. 재민은 예민한 후각을 곤두세웠다. 코끝으로 희미한 향기가 스친다. 범죄 냄새…… 는 아니고. 향수다. 제노의 옷깃에서 짙은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숙였다. 뭐지? 한 가지 향인줄 알았는데 짙은 향기 아래 희미한 다른 향이 깔려 있다. 두 가지 어울리지 않는 향이 억지로 뒤섞여 있다. 마포서의 마약견은 의미불상의 향기 위로 더욱 고개를 숙였다. 짙은 쪽은 장미 향기다. 만다린 향이 나고…… , 이거. 전에 사귄 누나가 종종 뿌리던 향수다. 펜 할리곤스 어쩌구 로즈였던 것 같은데. 이 원장이 뿌리려고 산 건 아닐 것 같았다. 다른 하나는 뭐지? 여자 향수에 거의 깔려 죽어 가고 있어서 맡기 힘들다. 왜 지 향기를 훨씬 연하게 죽이고 다니는 거야. 조금만 더 진하게 나면 알 것 같은데. 조금만 더 가까이서 맡으면…….

 

그만.”

 

희미한 제지가 들려왔다.

잠깐 향에 취했던가. 어느새 제노의 하얀 목덜미에 코끝이 거의 닿을 듯 가까워져 있었다. 의식하기 무섭게 뒷목이 빳빳해져 왔다. 뭐야. 뭐 하려던 거야, . 제노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정중하지만 너무 차갑진 않은 거리. 여전히 그 자리에 굳어 있는 재민의 턱 아래로, 조심스러운 손길이 닿았다. 괜찮아요? 수의사의 손이 개의 턱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그는 끓였다가 한 김 식힌 물컵처럼 적당한 체온을 가지고 있었다. 온기가 뺨으로 무섭게 옮겨붙는다.

 

손이 떨릴 정도로 생각나면…… 그건 중독이에요.”

 

개의 동공 변화를 확인하듯 가벼운 손짓과 간단한 진단. 정말이지 수의사다운 태도다. 그런 식으로 다뤄지면 주둥이에 무엇을 물려도 삼킬 것이다. 그러나 재민은 거북해졌다. 무언가 견디기 힘든 것을 삼킨 기분이었다. 중독. 중독이라고? 내가? 중독 : 1. 생체가 음식물이나 약물의 독성에 의하여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일. 2. 술이나 마약 따위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 3.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 이중에 어떤 중독? 아무래도 1일 것이다. 저 인간은 우유로 만들어진 게 분명하니까. 하얗고 부드럽고, 먹으면 소화 안 될 것 같고. 유당불내증을 가진 재민은 보기만 해도 속이 부글거리는. 생리적으로 몸이 반응하고 마는 숙적. 제노가 미소를 짓는다.

 

중독이 별게 아니에요. 적당한 선에서 손 털면 괜찮을 걸 과하게 쫓다가 망가지는 게 중독이지…….

범죄처럼 말입니까.”

 

아차. 무심코 내뱉었다. 제노의 미소가 안개처럼 흐려졌다. 재민의 턱을 쥐고 있던 손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꼽았다. 주머니가 벌어진 틈에서 희미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범죄랑은 다르죠…….

 

제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할 만해서 쉽게 손을 대는 건 비슷하지만, 중독은…… 어느 선에서 멈추기만 하면 손을 털 수도 있어요. 그 자리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얼룩이 남기 전에요. 재민은 인상을 썼다. 제노의 의미심장한 말에는 유경험자만이 낼 수 있는 전지적인 뉘앙스가 묻어 있었다. 일부러 이렇게까지 힌트를 주나 싶을 정도였다. 짧게 고개를 흔든 제노가 병원 문을 향해 걸어갔다. 중독될 정도면 하지 않는 게 나아요. 그는 유리문을 열고, 나가는 대신 한 발자국 물러나 기다렸다. 시중드는 게 몹시 익숙해 보이는 태도였다. 그는 누구를 위해서 문을 잡고 기다리는 태도를 익혔을까. 아마도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여자겠지. 아내 좋으라고 밴 친절이겠지. 더욱 속이 꼬였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갑시다, ?”

 

내 눈에 집중해.

다 알지. 당신 아까 굉장히 당황했어. 귀까지 빨개질 만큼 난처했어. 맞지. 그냥 나한테 넘어가고 싶을 거야. 나를 턱 믿고 싶을 거야. 당신 편일 거라고. 당신의 비밀을 들켜도 당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그래. 그렇게 믿으면 돼. 공사 당하면 돼. 그렇게 당신을 몰아붙여서. 기필코 그 희고 청순한, 입술의 맺음새가 남들보다 선량한, 길지만 누구도 찌르지 못할 것처럼 부드러운 속눈썹을 가진 당신의 그 얼굴 너머의 진짜 오리지널을, 내가.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내가 반드시.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제노는 밖에. 재민은 안에. 한쪽은 빨리 나오길. 다른 쪽은 거침없이 걸어 들어오길 기다리면서. 첫날과 같은 대치 상태였으나 이번에 코너에 몰린 쪽은 재민이 아닐 것이다. 기다렸다. 제노가 먼저 침묵을 벌리기를. 예의 그 위선을 입고 대갈 씨, 못 이기는 척 미소와 함께 그를 부르기를.

 

대갈 씨.”

 

그리고 제노가 입을 열었다.

재민이 상상한 그대로인 표정과 목소리로. 그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안 돼요.

 

 

 

 

 

 

한국말 중 당기시오안 돼는 묵음 처리

 

 

연말이라고 도로가 꽉 막혔다. 재민은 시려 오는 두 손을 호호 불고 다시 핸들을 잡았다. 깜빡. 깜빡. 신호가 바뀐다. 앞의 앞차가 출발한다. 그리고 앞차가 출발. 마지막으로 재민이 출발한다. 앞차는 다음 좌회전에서 빠졌다. 앞의 앞차가 다시 앞차로 바뀐다. 앞차가 된 벤틀리와 적당히 간격을 벌렸다. 살짝 열어 둔 창에서 불어 오는 바람이 다시 재민의 손을 차게 식혔다. 이런 때 딱 생각나는 온도가 있다. 레쓰비 뺨치게 따뜻하던 체온. 아마 앞차의 핸들이나 데우고 있겠지.

 

역시 거래인가.

 

하얀 벤틀리는 주인을 닮아 하얗고 우아했다. 재민은 앞차 간격을 조절하며 캡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검은 마스크로 가려진 하관 위로 드러난 두 눈깔에 집념이 번들거렸다. 그래. 쉽게 넘어올 리가 없지. 쉬웠으면 연말마다 전쟁을 치르는 마포서에 이 사건이 배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노는 재민을 자신의 꿀림빵에 초대하지 않았다. 그토록 나는 아군이다, 임과 함께 뽕 한번 따러 가 보고 싶다 어필했는데도 거절당했다. 나대갈은 의문했다.

 

왜 안 됩니까?’

제가 더 나쁜 인간이 되기 싫어서요.’

 

들켰나? 역시 그가 경찰이라는 걸. 그러나 간 보기 어려웠다. 나쁜 인간이 되기 싫다. 그 말에는 분명한 진심이 박혀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일까. 더 나쁜 인간 되기 싫은 게. 사상 빨간 마약범이랑 내통한 삼합회의 압잪이 주제에, 직접 약 팔면 사람이 더 나빠져? 무죄 추정을 아주 무시해 치울 순 없지만, 재민의 눈에 이제노는 이미 훌륭한 나쁜놈이었다. 햇볕의 따스한 향기가 난대도, 그를 낮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언뜻언뜻 비치는 그늘이 지나치게 짙었다. 후다를 따기 시작한 이유가 애초에 그런 그늘의 중첩에서 태어난 단단한 심증이었다. 체념한 척 돌아서고 동물병원 근처에서 대기를 탔다. 먼지 쌓인 K5 앞으로 익숙한 하얀 벤틀리가 지나갈 때까지.

 

이제노가 더 나빠지러 가는 길을 뒤쫓았다. 앞서가는 벤틀리를 따라가며 재민은 흘끗 도로 표지판을 올려다보았다. 올림픽대로 방면. 그가 조사하기로 이 원장의 가택은 논현동 펜트하우스다. 현재 이제노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명백하게 반대였다. 재민은 앞에 다른 차가 끼어 들도록 놔두었다. 백미러에 비친 한 쌍의 눈동자는 하얀 벤틀리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원장이 왜 병원을 일찍 닫았는지. 어디 약속 있는지. 구체적으로, 돈을 주고받는 식의 약속이, 약속이라는 이름의 거래가 예비되어 있는지.

 

 

 

한편의 소리 없고 시시한 추격전은 한 주택가 골목길에서 끝이 났다.

 

경찰들도 경찰 영화를 본다. 현직 경찰에게도 영화에 등장하는 멋진 액션을 선보이고 싶어 하는 환상이 쬐끔은 있다고. 그렇지만 그건 아홉 살짜리 코흘리개들이 호그와트 부엉이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막연한 판타지일 뿐이다. 에이, 설마. 그래도 설마하니 여기서 내릴까. 그러나 이제노가 정말 여기서 내렸을 때. 재민은 자신만의 호그와트 부엉이가 전두엽을 딱따구리마냥 두드려 오는 긴장감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벤틀리가 멈춰선 곳은 구로2동에 위치한 허름한 주택가였다. 재민은 10미터쯤 밖에 차를 멈춰세운 채 천천히 주변을 탐색했다. 빨간 벽돌 빈틈없이 들러붙은, 구옥 밀집 골목이다. 보살집과 미용실. 슈퍼마켓. 애저녁에 문을 닫은 대폿집. 그 사잇길로는 녹슨 방범창에 라면 박스를 끼워 둔 주택들. 그 앞에 묶인 생활 쓰레기봉투에 되는대로 비죽이 튀어나와 있는 몇 개의 주사기들.

 

어디서 많이 보던 그림 아닌가?

 

BGM을 선정하자면 카로 에메랄드의 tangle up. 코 밑으로 짙은 죄악의 냄새가 내리깔린다. 재민은 이런 곳을 안다. 아주 전형적이고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외부와의 단절을 꾀하는 라면 박스야말로 이곳의 주민들이 대낮에 떳떳할 수 없는 짓거리를 일삼는다는 방증이다. 득시글하게 모여든 각다귀들이 깜깜이를 치거나, 심심해지면 서로 사이좋게 팔을 찔러 주고 있을 것이다. 그런 후줄근하고 가난한 풍경 속에 정차된 깔쌈한 벤틀리는 도무지 그림에 어울리지 않았다. 거기서 내린 차주는 말할 것도 없다. 수의사 가운 대신 구김 없는 회갈색 코트를 정리하고 선 남자. 이제노는 그야말로 그림에 잘못 떨어진 잉크였다.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아서 무서울 정도로 선명했다.

 

이제노는 곧장 한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건물에는 낡은 간판이 하나 튀어나와 있었다. ‘광동낙시'. 낚시라는 단어에서 기역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손끝이 근질거렸다. 당장 차 문을 열고 따라가야 마땅히 나대갈다운 선택. 그러나 재민은 그저 차에 앉아 있었다. 머리꼭지부터 경찰 정신이라는 이름의 찬물이 등골을 서늘하게 적신다.

 

확실한 한 방을 노려야 한다.

이 개는 소리를 죽이는 일만은 탁월하다.

 

재민은 그가 목도한 모든 증거를 사진처럼 뇌리에 남겨 두었다. 주소를 거듭 외우며 천천히 핸들을 꺾었다. 그가 탄 K5가 소리없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수사기록>

구로1xx번지 광동낙시

 

 

 

 

 

 

일관성의 법칙

 

반복적이고 예측 가능한 루틴은 인간을 안정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마포경찰서 마약팀은 일상의 범주에 속했다. 육하원칙에 의거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일으켰을지 모르는 사건들과 달리 지극히 평범하고 상시와 같은 나날들. 어김없이 떠들썩한 업무 환경.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다르다.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옥니와 막내 또한 비일상의 범주를 알아채고 함부로 냅뜨는 일이 없었다. 옥니는 십자말풀이를 위해 컴퓨터용 사인펜을 쥐지 않았다. 막내는 쥬니어네이버 사이트 로그인 창에 아이디 첫 글자조차 입력해 넣지 않았다. 고즈넉한 수사팀 내부에는 간간이 마우스 클릭음만 울려 퍼졌다.

 

재민은 팀장에게 보고 올릴 수사 기록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일평생 키보드를 쪼아먹다시피 하는 독수리 타법만 고수해 온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해 손가락을 최대 4개까지 활용했다. 재민의 눈깔은 오로지 이 원장에게 포승줄을 묶는 상상으로만 번들거리고 있었다.

 

기다려라. 꼭 다시 찾아가 줄 테니까. 모두가 잠든 시간에. 이제노가 없는 시간에. 확실하게 정탐해서. 증거를 찾고. 지원 요청을 넣고. 잃어버린 경찰증도 찾아서…….

그땐 혼자 보내지 않을게.

절대로 니 손목을 따뜻하게 두지 않을게.

꽤나 스윗한 상상.

 

[……이와 같은 정황이 발견되었으므로, 수사인력 지원을 요청합니다.]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 재민은 줄곧 엉덩이 뭉개고 있던 의자를 훅 두려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팀장님, 제가 드디어 인생의 첫 보고서를…….”

나재민.”

 

모니터 너머로 얼굴을 감추고 있던 팀장의 목소리가 무지근하게 내려앉았다. 재민은 무의식중 눈을 끔벅였다.

 

동물병원에서 손 떼라.”

 

일순 전과 다른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제까지의 일상 속 비일상은 명함도 못 내밀 만큼 느닷없는 분부.

 

……?”

위에서 지시 내려왔어. 지금 그거 할 때가 아니고 강남 클럽 먼저 조사하란다.”

 

등마루를 응등그린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막내가 조용히 수사물 단골 대사 빙고판'에 밑줄을 그었다. 동시에 재민의 책상 앞으로 무언가 얄찍한 물건이 탁 내던져졌다. 뻥하니 서 있던 재민이 시선을 돌렸다. 경찰 공무원증이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오늘 경찰서로 배송 왔다. 한 선량한 시민이 논현동 노래방 앞에서 주웠단다! , 인마. 거기 동물병원이랑 불과 20미터 떨어진 곳이야. 너 이거 들켰으면 모가지 어쩔 뻔했냐. ?”

 

벼락같은 호통이 쏟아졌다. 재민은 경찰증에 박힌 앳된 얼굴에 말없이 시선을 붙박았다.

 

이거 우리가 감당할 싸이즈 아니야.”

 

막내가 빙고판에 두 번째 줄을 그었다.

 

광수대에 넘길 거니까 그렇게 알고, 빠릿하게 딴 데 착수해.”

 

3x4.

 

그날을 기억한다.

공무원증에 넣을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관에 찾아갔던 날. 새빠시 경찰복을 차려입고, 이맛머리에 왁스를 치덕치덕 덧발라 안 그래도 짧은 머리를 억지로 넘겼던 날. 막상 웃으라니까 또 웃기지가 않아 카메라 렌즈를 노려보고야 말았던 날. 입사 동기와 사진을 대조해 보고 나서야 넥타이가 비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날을.

 

영문 모를 회상에 잠긴 재민을 팀장이 휙 지나쳐 갔다. 팀장이 떠난 뒤에도 재민은 한참을 침묵했다. . . 공연히 쥐고 있는 동물병원 명함이 손톱에 의해 맥없이 튕겨진다.

 

막내야.”

 

줄곧 드리워진 정적을 가르고 재민이 조용히 말문을 텄다.

 

왜여.”

 

작달막한 뒤통수를 빙고판에 붙박고 있던 막내가 고개를 훅 쳐들었다. 재민은 여전히 어딘가에 시선을 붙박은 채로 뇌까렸다.

 

강남 클럽 건…… 내 몫까지 커버 쳐 줄 수 있겠냐?”

 

막내가 불퉁하게 투덜거린다. , 이 대사도 빙고에 넣을걸.

 

 

 

 

다시, 일관성의 법칙

- 철로를 달리는 기차와 같이

 

오늘은 또 새해 전날이라고 도로가 붐볐다. 재민은 손을 호호 불고 핸들을 잡았다. 가죽장갑을 끼고 호호 불어봤자 체온이 전해지지는 않았다. 1231. 모두가 함께 같은 기대를 나누는 기념일에, 크리스마스에 이어 또다시 왕따 당한 비련의 경찰이 하나. 나도 말이야. 이런 날에는 집 가서 엄마 아빠랑 제야의 종소리 카운트나 하고 싶거든. 동해 일출 보면서 파이팅도 한 번 외쳐 주고. 사랑하는 가족들이랑 먹을 떡국도 미리부터 한 솥 끓이고. 그러고 싶었는데…….

 

인간은 자신의 선택이 최고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한번 어떤 길을 선택한 인간은 쉽게 그 경로를 벗어나지 못한다. 철로를 달리는 기차와 같이. 재민이 작성한 짤막한 수사 기록 속에는 여전히 해갈되지 않은 질문이 더께로 쌓여 있었다. 모든 의문이 완전히 해소될 때까지 나대갈은 순순히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공권력의 압박 따위로 자빠지기에는 지나치게 반골이었다고 해 둘까.

 

대망의 1231.

재민은 광동낙시 아래 서 있다.

 

광동낙시는 2층에 있었다. 층계를 한 칸씩 밟아 올라서는 내내 재민은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려 댔다. 문 뒤에 칼잽이가 숨어 있을 경우. 뽕쟁이들이 주사기를 들고 덤벼들 경우.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총기류가 튀어나올 경우. 그러나 삐걱이는 경첩 너머에는 칼잽이도, 뽕쟁이도, 총으로 무장한 삼합회도 없었다. 보이는 것은 너구리굴처럼 담배 연기와 냇내가 자욱이 깔린 마작장. 아마도 불법. 사람이라고는 꼴랑 훤칠한 양복쟁이 한 놈과 메리야쓰 차림의 산적 두목 하나. 명약관화한 건달들. 충분히 험악한가? 비일상의 축에 끼기에는 모자랐다. 적어도 재민에게는…… 제노를 체포하기에 모자란 요소들이었다.

아직은.

 

입구를 넘어 살며시 들어서려 할 때, 뒷등 근처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刘伟?”

 

중국어다.

 

재민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암막한 계단 위. 누군가의 실루엣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덩다란 허우대. 손등까지 털이 무성한, 무식한 백정 같은 생김새를 가진 사내. 장비 같은 사내가 부리부리한 눈알로 재민을 내려다본다. 어둠 속에서도 분간이 확실할 만큼 형형한 총기였다. 술병이 든 비닐봉지가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잡음이 한차례 기어들었다. 사내는 생긴 것만큼이나 굵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오리냐?

 

 

목통이 조여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딸그랑. 검은 비닐봉지가 한 박자 늦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안에서 굴러나온 고량주 병들이 바닥의 경사를 알리며 데구르르 굴러간다. 재민은 자신의 모가지를 틀어쥔 넉가래 같은 손을 움켜쥐었다. 떼어내려고 힘을 주어도 억센 곰덫처럼 숨통을 놔주질 않는다. 눈앞이 노래지는 진공 상태. 재민은 어금니를 사려물고, 힘을 쥐어짜 놈의 두툼한 귀뺨을 훅 후려갈겼다. 쨉이다 이 새끼야. 얻어맞은 남자는 잠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태산만 한 덩치가 허공을 더듬자 쌓여 있던 박스 더미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러나 남자도 얌전히 있지 않았다. 쨉을 다시 거센 훅으로 되돌리는 놈의 주먹에 재민도 우당탕 바닥을 굴렀다. 내려가는 계단 바로 앞에서 멈춘 머리꼭지가 허전했다. . 다시 악력에 재민의 호흡이 가로막혔다. 두툼한 손마디가 목 빗근을 지르눌렀다. 투견에 능한 놈이다. 짐승의 힘을 빼놓으려면 목을 조르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걸 안다. 일순 복부의 장기까지 쪼그라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재민은 한쪽 눈가를 째긋거렸다. 위에서 형형히 번득이는 빛. 불분명한 이목구비에서 괴귀와 유사한 안광만이 번들거렸다. 손아귀에 졸린 헛웃음이 흘렀다. 내가 뭐랬어. 여기 아지트라고 했지…….

 

대갈 씨?”

 

급소를 찾아 손등을 젖히던 나재민의 귀로 익은 목소리가 꿰뚫었다.

 

순간 숨통이 돌아왔다. 목이 놓이기 무섭게 산소가 치고 들어온다. 콜록콜록 거세게 기침하던 재민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입구 문 앞에 두 남자가 서 있다. 말쑥한 양복을 입은 남자. 그 옆엔공갈빵을 입에 문 이제노.

 

뭐야. 이 사장 손님이야?”

 

양복쟁이가 눈썹을 느물느물 굽힌다. 입에 문 빵을 천천히 씹어 삼킨 제노가 고개를 젓는다.

 

우리 병원 알바.”

알바? 알빠 쓰레빠의 그 알바?”

打工.”

아하…….

 

양복쟁이가 길게 말을 끌었다. 그러나 장비는 전혀 해명을 납득한 기색이 아니었다. 재민에게 얻어맞은 뺨을 문지르며 송충이 눈썹을 비딱하게 찡그린다. 그 눈빛이 묻는다. 그 알바가 왜 여기 있냐고. 제노도 눈으로 묻는다. 당신이 왜 여기 있냐고. 재민은……. 계획에 없는 상황 앞에서 잔대갈을 빠르게 굴렸다.

 

사실은……

.”

스토킹했습니다.”

?”

마약…… 얻고 싶어서.”

……?”

 

제노의 눈이 커질수록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 약이요? 아연하게 되묻는 목소리는 정말로 놀라는 것 같았다. 이 새끼 연기 잘해. 고개를 뻣뻣이 들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다고 했잖습니까! 그때 데려갔어야죠! 재민, 제노가 뭔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를 밀치고 잽싸게 문을 연다. 문짝에 달려 있던 릴과 찌들이 일제히 달그락거린다. 그를 반기는 마약장의 종소리다. 이 새끼, 딱 걸렸어. 이 문 너머에서 가루 한 톨이라도 나오는 순간 넌……

 

…….


재민은 멍하게 내부를 쳐다보았다. 장은 장인데, 마약장이 아니다. 넓은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작탁 세 개. 그 주변에 앉아 마작을 두는 쭈그렁 늙은이들. 쥐어터진 재민 뒤에 서 있던 이제노가 손에 묻은 빵가루를 탁탁 털었다.

그때 하신 게 마약 얘기였구나.”

…….

마작이 아니고.”

“.......”

둘 다 중독성이 있긴 하죠

 

일단 오신 김에 들어오실래요? 공갈빵을 손에 쥔 제노가 마장을 턱짓했다.

 

 

 

 

마작

 

 

맞은편에 앉은 놈. 손가락 두 개가 짜가다.

재민은 조용히 관찰했다.

 

올랐다.”

 

따악. 마작패를 내려놓은 가라 손가락의 사내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올해 마지막을 구련보등으로 장식할 줄이야. 내년에 운이 아주 좋겠는데. 뭐야! 너 아까 그 패 버렸잖아, 유위! 같은 마작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난다. 커다란 덩치며 험상궂은 생김새 하며. 영락없는 조폭이다. 유위라고 불린 양복 차림의 남자가 부자연스럽게 뻣뻣한 두 손가락을 흔들어 보인다.

 

내가 이 손으로 구라를 친다?”

뭐래, 손가락 하나로 여자 속옷도 벗기는 놈이! 넌 새해 전날까지 장난질이냐!”

아마추어같이 왜 이래, 왕평. 현장 검거 아니면 무죄라고.”

정확히 무죄는 아니죠. 무죄 추정인 겁니다.”

 

재민이 불쑥 끼어들었다.

시선이 일시에 재민에게로 쏠렸다. 여실한 짱깨들 사이에서, 재민은 홀로 늘어지게 앉아 마작패를 만지럭거렸다. 불편한 접이식 의자 위에서 흘러내릴 듯한 앉음매를 고수하면서도 여유를 놓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처음부터 이 그림 속에 있었다는 듯이. 왕평과 유위라고 불린 남자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근데 야터, 아니, 이 사장. …… 우리가 이 친구랑 이러고 있어도 되나?”

. 싫어?”

싫은 건 아닌데……. , 거 어깨가 좀 뻐근하다?”

놔둬. 왕평은 얻어맞은 게 분해서 저래.”

 

곁에서 유위라는 남자가 느물느물 끼어들었다. 재민은 동체 시력으로 그가 마작패 하나를 바꿔 치는 것을 캐치했다. 이 새끼 밑장 빼는데. 알려 주고 싶어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제노는 동요하지 않고 패를 버렸다. 귀신같이 유위가 바꿔 친 패를 불리하게 만들 타패였다(유위가 짧게 탄식했다).

 

평소에는 순해. 네가 물릴 만한 행동을 한 거겠지.”

 

놈은 사람과 개를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없는 게 문제다. 낄낄대며 다시금 마작패를 쌓아 올리는 달거니들을, 재민은 어두운 눈으로 주시했다. 유창하게 한국말을 구사하고는 있지만, 드문드문 섞여드는 특유의 억양. 아까 재민을 공격하던 놈이 외치던 중국어. 정황은 선명했다. 여기는 짱깨 앞잡이의 소굴이다. 최근 마약을 풀고 있다는 삼합회 간부와 이놈들 사이에,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다면 그쪽이 더 놀랄 노자겠다. 이쪽은 이런 통박을 굴리는 중인데. 놈들은 재민에게 아주 마음을 턱 놓은 모양이다. 이제는 그냥 대놓고 중국어로 떠들고 앉았다.

 

新恋人吗?”

不是啊.”

也是, 都有老婆了, 应该不是恋人吧.”

但是, 天不怕地不怕的野头真的只让兼职生单纯的坐在这里吗? 现在处理他还来得及.”
刘伟, 王平. 平时也看电视剧吧, 太无聊, 所以总觉得我的人生像电视剧一样.”

鸭头的人生故事可比电视剧有意思多了!”

所以, 不是恋人是男朋友?”

刘伟, 够了.他看着也不像是同类.”

 

제노가 이쪽을 눈짓했다. 재민은 그쯤에서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저기요. 여기 한국입니다.”

 

, 이게 진짜 기분이 나쁘네. 너네, 이 새끼들아. 제일 나쁜 게 사람 앞에 두고 귓속말하는 거야. 왕평과 유위라는 놈까지는 이해한다. 그렇지만 이제노는 안 된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를 거면 적어도 애국해야 한다. 그게 나재민의 지론이다. 중국어 대화가 뚝 멈췄다. 두꺼비 같은 눈을 데굴거리던 왕평이 돌연 호탕하게 웃는다.

 

이 친구 아주 웃긴 친구네! , 대갈. 너 정말 마약 구하러 여기 온 거 맞냐!”

 

솥뚜껑 같은 손이 재민의 등을 탕탕 쳤다. 소싯적에 먹은 엄마 젖까지 올라올 만큼 강한 타격이었지만 제스처에서 친밀함이 느껴졌다. 친밀함이라니. 고작 이제노와 안면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달거니가 친밀함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나재민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젊어서부터 마약 같은 거 하지 마! 차라리 술을 마시라고! 그렇게 외친 왕평이 테이블에 고량주를 텅 올려 두었다. 아까 재민과 몸싸움을 할 때 굴러다니던 그것이다.

 

이 고량주 수익의 일부가 심장병 환자들 돕는 재단에 기부된다는 거 아냐? 이게 사람을 살리는 술이야! 의술!”

크크. 쩐이 돌고 도는구만. 자기들이 망가뜨린 심장 고치는 데에 다시 자기들 돈을 쓰고.”

유위! 좋은 일 한다는데 그따위로 말할 거야! 아무튼 마셔, 알바생! 마작은 내가 가르쳐 줄게!”

그래, 원래 마작은 손이 젖어야 잘 붙는 법이지.”

 

유위가 재민 앞으로 꼴꼴 술을 따랐다. 재민은 눈앞에 놓인 술잔을 노려봤다. 첫 타자가 재민이라면 결코 마실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미천한 아랫것이 먼저 술을 받겠습니까. 원장님 먼저 한잔 드시지요. 잽싸게 잔을 돌렸다. 수상한 걸 탔다면 못 마시겠지. 그러나 기미 시도가 여실한 권유에도 제노는 아무렇지 않게 잔을 받았다. 빼갈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중얼거린 것과는 다르게 한입에 털어 넣었다. , 짠도 안 하고 마시냐? 낄낄 웃는 왕평이 다음 타자였다. 이후로는 고무 손가락의 남자까지. 결국 재민을 뺀 모두가 술잔에 입을 댄 상황이었다.

 

뭐야? 너 술 못하냐? 요구르트를 줄 수도 없고, 이거…….”

마십니다, 마셔.”

 

간단하게도 도발에 넘어가는 이 몸이 싫다. 재민은 앞에 놓인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 나이에 술 대신 요구르트를 찾기에는 그의 가오가 너무나 빳빳했다.

 

 

 

 

 

 

~ Lost In The Rhythm ~

 

 

 

잔이 돈다.

짠이 돈다.

다시 잔이 돈다.

다시 짠이 돈다.

세상이 돈다.

지구는 돈다!

 

 

방금 엄청난 진리를 깨달았어요.”

뭐냐, 술 마시다가.”

뭔데?”

비밀.”

뭐야?”

너무 엄청나서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려고요. 이거 밝혀지면 학계 뒤집어지고 난리 납니다.”

 

재민이 술잔을 높게 치들었다. 나의 이 비밀스러운 지구 팽팽이설에 건배! 왕평과 유위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멀쩡한 얼굴로 별 못 알아들을 소리만 하네. 그래서 얘 이름이, , 대갈이라고? 대갈……. 이름에 강단이 있구만. 그러게. 한국인들 이름 짓는 규칙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주거니 받거니 짠이 오간다. 재민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친 제노가 작달막하게 웃었다. 흔한 이름은 아니지……. 술을 마시면서도 제노의 한쪽 손은 바지런히 작탁 위를 오갔다. 하얗고 길쯤한 손가락이 마작패를 골라내고, 주워 가고, 점수봉을 던지고.

 

.”

뭐야. 벌써 올랐어?!”

 

장인이 따로 없었다. 어떤 행위의 경지에 올라 반사적으로 신체가 먼저 반응하고야 마는 부류 말이다. 그러니까…….

왜 잘 치시냐고. 마작을. 동물병원 원장이.

 

당신도 말이야.”

?”

왜 손가락이 가짜야, ?”

 

방심할 만한 타이밍에 돌발 신문이다. 재민의 예고 없는 삿대질이 유위에게 날아가 꽂힌다. 유위는 입때껏 기울어진 자세로 마작패를 만지며 눈썹을 들척였다. 이야…… 눈썰미 좋은데? 그래도 멀리서 보면 꽤 진짜 같은데. 일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유위가 문득 씩 웃었다. 질 나쁜 작당질을 하는 악동처럼.

 

잘렸지. 쓰촨성에서.”

 

!!

 

그때 노름에 미쳐서 남의 돈을 좀 빼돌렸거든.”

 

!!!!

 

"그랬다가 무시무시한 아저씨들한테, 그냥…… .”

 

!!!!!!

 

혹시.

?”

쓰촨성이라면, 혹시…… 삼합회…… 한테?”

, 예리한데?”

 

역시. 역시. 역시의 연속이다. 봐 봐. 내가 보통내기들 아니라고 했지. 나대갈 개코 아직 살아 있다 이 말이야. 낮은 데시벨로 입속말을 중얼중얼거리는 재민을 보던 제노가 눈썹을 으쓱했다.

 

혹시 취했어요?”

안 취했어.”

그래요?”

하지만 난 취해도 일만큼은 똑바로 하지.”

기특하다.”

 

제노가 미소를 그렸다. 재민은 그 웃는 얼굴을 노려보았다. 조금은 뚱하게.

 

그렇게 웃지 마.”

제가 어떻게 웃는데요?”

…… 숫자 6…… 시프트 키를 눌렀을 때 나오는 기호를…… 두 번 쓴 것처럼 웃지 말라고.”

하하, 제가 그렇게 어렵게 웃어요? 대갈 씨 취하신 것 같아요.”

원장님 좀 어렵지. 나 안 취했고.”

 

실제로 재민의 발음은 누구보다 멀쩡하다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쿵쿵. 천장 방향에서부터 둔중한 소음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우당탕. 무언가 구르는 소리가 딸려 왔다. 재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유위가 능갈지게 웃었다.

 

신경 쓰지 마, 대갈. 위층에 약쟁이들이 살거든.”

 

천장을 물끄럼 노려보던 왕평이 고개를 저었다. 몸도 못 가눠서 어디 자빠지느라 맨날천날 저 지랄이다. 저놈들이 아침마다 주사기를 한 다라이씩 내다 버려서 가끔은 대문도 안 열린다고. 재민은 다시금 천장을 올려다봤다. . . 무언가를 힘주어 빻는 듯한 소리. 그 새새로 희미하게 개 우짖는 듯한 소리. . 그 삼합회 간부가 반려동물을 한가득 키운다고 하지 않았던가. 광동낙시가 불법 마작장이라면, 위층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재민은 곧장 주저앉았다.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다. 다시 주저앉았다. 얼레.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갑자기 시야가 어질하다. 나무 의자를 짚으려다 우당탕 쓰러뜨리기만 했다. 채신없이 휘청이는 재민을 받아 주는 팔이 있었다.

 

대갈 씨?”

 

언젠가부터 몽롱한 상태였던 것 같다.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나재민이야말로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친놈들. 나한테 약을 먹였어. 빌어먹을 새끼들. 다 깜빵에 처넣을 거야. 앞으로 허우적거리는데 몸이 안 움직인다. 어떤 팔은 아직도 재민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었다.

 

취했어요.”

 

아주 잠시 동안, 초점이 또렷하게 잡혔다. 재민은 상황 파악에 주력했다. 누군가의 팔이 넘어지려던 재민의 몸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다. 그 팔 위를 더듬어 보았다. 수의사의 팔은…… 단단했다. 말 그대로 실속 있고 굳건했다. 무거운 걸 자주 드는 사람도 아닐 텐데.

 

놔 봐…….

어디 가려고요?”

 

가슴팍을 엇지르는 팔에 힘이 쏠린다. 꼭 재민이 아무 데도 가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하는 사람처럼. . 이 건물에 꿀이라도 숨겨 놨나 보지? 나한테 들키기 싫은 게 있나 보지. 불신으로 찌든 생각을 하면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화장실 간다고, 화장실…….

어딘지는 알아요? 데려다줄까요?”

 

제노가 반쯤 몸을 일으켰다. 재민은 게슴츠레한 눈을 틔웠다.

 

저기요, 원장님.”

 

이 인간. 나재민을 볼 때 열에 아홉은 저런 표정이다. 걱정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돌봐 주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꼭 모자란 놈 보는 사람마냥. 눈깔 순하게 뜨고 저러니까 깜빡 속았잖아. 주는 대로 죄다 받아 마셔 버렸잖아. 잊고 있었다. 범죄는 꼭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걸.

 

원장님, 나랑 뽀뽀할 수 있어요?”

 

범죄는 존나게 이쁘장한 유부남 수의사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

근데 왜 따라와. 남 물 빼는데…….”

 

아연한 표정의 제노를 힘차게 뿌리쳤다. 줄곧 재민을 받쳐 주던 힘은 맥없이 떨어져 나갔다. 조용해진 세 남자를 뒤로하고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뭔 놈의 약을 처먹였길래 이따위로 몸이 무겁냐. 거북하게 의문하는 재민의 등 뒤로 왕평의 혼잣말이 뒤따랐다. 뭐야. 저 새끼 언제 이렇게 많이 마셨어?

 

 

 

 

 

계단을 올라가는 나부

 

옷을 벗는다는 행위에 음란함을 씌우는 각도가 문제야.

 

인간은 선악과를 베어 문 창세기 29절부터 자신의 깨벗은 누드를 수치로 동일시해 왔다. 여기서 누드'란 무엇인가. 단순히 옷을 벗은 상태? 아니. 계단을 오르는 나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옷은 몸을 싸서 가리거나 보호하기 위해 덧붙인 피륙에 불과하다. 진정한 누드는 정신적 누드다. 일명 빤스 벗기. 취객은 관념적인 알몸이다. 빤스는 술용성이라 알코올만 들어가면 살살 녹기 때문이다.

다들 용서해라. 이 개는 취하면 철학자가 되는 습성을 가졌다.

 

여기 만취 상태로 계단을 오르는 개가 있다. 개는 마포서에서 갓 마약팀으로 발령 난 광수대 지망 베테랑 경찰로, 현재 한 동물병원의 수의사를 수사 중이다. 왜 그토록 수의사를 미워할까? 마땅한 단서조차 발견하지 못한 상황인데 말이다. 그 출처 불분명한 미움의 기원을 복기해 보자면.

 

개의 아버지는 공연음란죄로 체포를 당한 적이 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개의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빤스를 벗는 인간이었다. 관념적 빤스만 벗었어야 했는데, 진짜 빤스도 수시로 벗었다. 인터넷 보급이 10년만 앞서 시행됐어도 개는 아버지를 소개할 때 구글에 길거리만취알몸남을 검색해 보라고 안내하면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다 서른 초입에 공연음란죄로 체포당한 개의 아버지는, 경찰서 유리문 밖으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면서 이제는 진짜 술을 끊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놀랍게도 당해, 그는 정말로 술을 끊었다. 그간 아빠 술심부름하느라 고생했다고 어린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인자하게 웃어 주던 아버지는.

 

약에 취했다.

 

그래. 술 끊고 작대기에 손을 댔다. 같이 짬짬이 고스톱 치던 친구한테 비타민 주사라고 권유받았다고 한다. 종종 아들 주라며 비싼 장난감을 안겨 주고 가던 고스돕 아저씨. 웃는 소리가 호탕하던 그 아저씨. 아직도 기억난다. 딱 그런 와꾸였다. 저 사람이 범죄자라면 세상에 어떤 몽타주를 믿어야 하나 싶은, 누가 보더라도 선한 인상의 얼굴.

 

그로 인해 깨달았다. 사회악은 감기와도 같다고. 술보다 약이 나쁜 건 그 전염성 때문이다. 적어도 술 앞에서는 아버지 홀로 빤스를 벗었지만, 이후부터는 제 마누라와 함께였다. 개는 자신의 모친과 부친이 나란히 주사기를 팔에 꽂는 광경을 매일같이 훔쳐봤다. 비타민에 절어버린 부모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사이좋게 응급차에 실려 나갔다. 그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개는 어린 상주가 됐다. 고스돕 아저씨는 장례식장에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딴 착한 얼굴을 달고서 말이다.

 

.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개에게는 수의사를 미워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 저 사람이 범죄자라면 세상에 어떤 몽타주를 믿어야 하나 싶은, 누가 보더라도 선한 인상의 얼굴. 지나치게 무고해 보인다. 그래서 싫었다. 분명한 개새끼보다 은근한 개새끼가 백 배, 천 배로 싫었다. 그런 놈들은…… 마음 탁 놓고 미워하지도 못하게 만드니까. 의심하는 쪽만 죄인이 되니까. 근데 사실 의심은 죄가 아니거든. 따지고 보면 의심은 갑옷이다. 믿고 벗는 순간 나락까지는 한 걸음이고, 사람 병신 되는 것도 순식간이지.

 

그러므로 개는 나부가 되는 것이 결코 두렵지 않다. 암만 취해도, 정신적 빤스를 훌훌 벗어도, 분명한 한 겹의 의심만은 벗지 않으니까. 의심이라는 갑주만 두르고 있다면 그는 지지 않는다. 취한 개는 용감한 나부다. 위층에 있는 뽕쟁이 쉬키들은 그의 누드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하하!

 

(고작 한 층을 올라오는데 이딴 긴 상념에 잠겼던) 나재민은 난간을 꽉 붙잡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마지막 한 계단을, 힘차게,

 

 

위층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업소였다. 유리문에는 불투명 테이프. 바둑알 그림과 함께 운우 바둑 기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간판. 재민은 유리문을 노려보았다. 마작장 천장을 시끄럽게 두드리던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게 폭풍전야로 고요했다.

 

아다라시하지 못해.

 

문 뒤에 라면 박스까지 겹겹으로 처발라 둔 본새가, 아주 경찰 교과서에 실릴 것 같은 마약장이다. 문 틈새로 고약한 악취가 풍긴다. 이것은 유기된 삶의 악취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한 자들에게서 나는 쿰쿰한 냄새……. 재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유리문을 발로 걷어찼다.

 

 

 

 

 

 

 

*

 

 

 

. . 마작패가 돌아간다. 아까까지 왁자하던 마작장엔 오직 패 돌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就这样不管他吗?”

저대로 둬도 돼?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위였다.

 

他从论岘到九老都跟在你后面. 你不会信了跟踪狂这个借口吧?”

논현에서 구로까지 네 뒤를 따라왔댄다. 설마 스토커라는 변명을 믿어 주는 거야?

 

취기가 불콰하게 오른 왕평이 거들어 성냈다. 그래! 애인도 아니라면서! 약쟁이치고 눈깔도 또릿하고, 주먹도 엄청 맵고, 수상하다고! 제노는 남은 고량주로 입가를 적셨다. 삼촌이 좋아하던 싸구려 빼갈은 아무리 마셔도 친해지기 쉽지 않았다.

 

有什么奇怪的, 论奇怪我更怪…….”

수상하긴 내가 더 수상하지…….

 

고량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마약을 파는 사람이라는 오해까지 샀잖아. 세상에 날 오해하는 사람은 은혜 한 명으로 충분한데. 며칠째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것을 꺼냈다. ‘ligun’이라고 적힌 담뱃갑. 연초를 한 대 빼 무는 제노의 눈에 손목에 찬 값비싼 시계가 들어왔다. 싸구려 마작장 조명 아래서 반짝이고 있는 시계. 은혜가 신혼 한 달째에 준 선물이었다.

 

'신혼집 당신이 고른 거지. 내가 천장이 높은 집을 좋아하는 줄 알고…….’

 

은혜는 이 시계를 볼 때마다 자기 생각을 하라고 했다.

제노는 그 시계를 검지로 훑었다. 시간을 덮은 유리가 지문 아래에서 미끄러진다. 제노가 가진 것 중엔 그 물건이 가장 정직했다. 적어도 그 시계가 알리는 시간만큼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제노는 시계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들여다보면서 은혜를 떠올렸다. 유리 아래로 초침이 돌아간다. 정직한 바늘이 제자리까지 한 바퀴를 돌았을 때, 그가 떠올리고 있는 건 은혜가 아니었다.

 

他为什么怀疑我?”

그 남자는 왜 나를 의심하는 걸까?

 

낮게 중얼거렸다. 빈 병에 담배꽁초를 쑤셔 넣던 유위가 눈썹을 끄떡였다.

 

所以说嘛. 从外表上看, 没有比你更普通的人了.”

그러니까. 겉만 봐서는 너만큼 평범해 보이는 놈도 없는데 말이야.”

 

제노도 동의했다. 무해한 인상은 타고난 위장색이었다. 누가 보기에도 선량한, 수의사라는 직업을 듣는 순간 다른 직업의 이제노는 상상할 수조차 없어지는 온난한 본새. 그런 이제노의 어디서 마약을 연상한 걸까? 연쇄의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담배를 걸친 손가락 끝으로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골똘한 생각에 잠긴 사이, 곁에 앉은 왕평이 문가를 곁눈질했다.

 

话说回来那家伙不会是掉厕所里了吧?”

그 녀석, 똥둣간에 빠져죽은 거 아냐?

王平.”

왕평.

?”

?

租楼上的这帮人... 你知道是哪伙的吗?”

위층에 세든 놈들어디 쪽 애들인지 알아?

 

 

 

 

 

 

 

샬롬shalom

 

정적의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재민은 불변하는 성질 한가운데 서 있다. 고요하고 괴괴하다. 약쟁이들이 누워 뒹구는 그림을 상상했으나, 막상 도착한 곳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신중히 주위를 휘두르며 유리문 너머로 걸어 들어갔다. 바닥에 널린 쓰레기가 걸음마다 뒤스럭거렸다. 자욱한 어둠 속. 빛을 발하는 모니터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재민은 나뒹구는 주사기들을 사뿐히 지르밟으며 책상으로 다가갔다. 아홉 컷으로 분할된 CCTV 화면이 몸집을 넓히는 중이었다. 종전의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아마 재민이 접근하는 모습을 미리 확인하고 똥이 빠져라 튄 거겠지. 뽕쟁이가 아니라 뿅쟁이라고 불러 주마. 창 위에 마우스를 클릭해 대던 재민의 귓결에 무언가 희미한 잡음이 기어들었다. 달팽이관을 살살 간지럽히듯 작고 높은 소리. 재민은 상체를 훌떡 추켰다. 이유 없이 목 근육이 수축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재민은 깨닫는다. 그게 개의 울음소리라는 사실을.

 

소리의 근원을 좇아 나아갔다. 움푹 패인 벽 귀퉁배기에 케이지가 놓여 있었다. 철창 너머로 어렴풋한 숨기척이 새어 나왔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안에 있던 생명체는 역시나 개. 검은 주둥이에서는 침이 흘러내렸고 세모꼴로 접힌 귀가 극한의 두려움을 방증했다. 며칠 굶은 것처럼 비쩍 꼴아 앙상한 갈비뼈가 살가죽 위로 툭툭 불거졌다. 케이지를 열어 주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자물쇠가 굳게 잠겨 있었다. 재민은 손가락을 비집어 우격다짐으로 철창을 잡아 벌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술을 마시지 말걸. 그러나 강력팀에 있을 때에도 힘만큼은 장사였던 나대갈이다. 가느다랗고 견고하게 빗장을 지른 철창이 점차 휘어진다. 개 한 마리가 겨우 드나들 수 있을 만한 구멍을 벌려 놓고, 재민은 잠시 숨을 골랐다. 물기로 척척하게 젖은 눈망울이 재민을 올려다봤다. , 인마. 안 해쳐…… 낑낑거리는 개를 향해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시꺼먼 그림자가 재민을 거머삼켰다. 목 빗근을 뚫고 날카로운 통각이 파고들었다. 그것이 주삿바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약이다.

 

재민은 휘뚝하니 뒤를 돌아 들이닥친 상대를 뿌리쳤다. 주먹을 억세게 틀어쥐고 놈의 얼굴에 후려갈기려 하는 순간, 바닥이 훅 꺼졌다. 역으로 카운트를 세듯 온몸의 힘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 목을 더듬거려 가까스로 주사기를 뽑아냈다. 실린더의 내용물이 텅 비어 있었다. 이런 씨팔……. 세상이 돈다.

 

재민은 바닥에 털버덕 엎어졌다. 뭘 놓은 거지. 히로뽕?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보니 아편 계열? 차차로 호흡이 가빠졌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더 심각한 약물일 가능성도 있었다. 단 한 번만으로도 인간의 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 시야가 농몽하게 물들어 갔다. 곧 넘어갈 듯한 숨을 껄떡이며 바닥을 뒹구는 재민의 시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개가 보였다. 뼈다귀 같은 몸이 열린 문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다행이다. 개는 살렸으니까. 이 정도면 팀장님도 정상 참작해 주겠지. 사력을 다해 고개를 꺾었다. 근처에 널브러진 맥주병에 얼굴이 비친다. 얄따란 유리를 사이에 두고 자신의 얼굴과 줄다리기하는 것처럼, 너비가 늘어났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재민의 동공이 한 점으로 줄어든다. 하필 이런 때 경찰봉도 없어서…….

 

이 씨발…… 나한테 뭐…….

 

호흡이 가빠진다. 폐부 깊숙이 고여 있던 숨이 목구멍을 긁고 어렵사리 빠져나왔다. 갑자기 공기가 밀가루 반죽같이 느껴졌다. 있는 힘껏 들이켜도 넘어가지 않고, 배배 꼬이다가 어느 순간 뚝 끊어질 것처럼 갑갑했다. 가물한 시야 귀퉁이에 덥수룩한 머리꼭지가 걸렸다. 놈의 옆으로 기척 하나가 더 다가왔다.

 

저거 상태 왜 저래?

, 주사 찔렀어. , 급해서, 아무거나 찔렀는데…….

씨씨티비는 뒀다가 국 끓여 먹냐, 새끼야!

, 봤어. 봤다고……. 아래층에서 올라온 노, 놈인데. , 거기 짱깨 새끼들 쇼, 숀님, 숀님인가 봐.

, 숀님 이 지랄. 아오, . 걔네는 건들면 진짜 좆되는데……. , 방 빼, 방 빼. 저쪽 뒷문으로 나가면 비상계단…….

 

주고받는 목소리가 점차 멀어져 간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귀가 먹먹하다. 귓구멍이 웅웅 진동한다. 마치 물속에서 걷는 것마냥 팔다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재민은 아래팔로 바닥을 쓸며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유리문을 향해. 그러나 가까워지지 않는다. 닿지 않는 문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 순간, 유리문이 천천히 열린다.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한 인간은 도리어 현실감을 잃는다. 가령, 자신이 열려라 참깨를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상당히 물색없고 대중없는 생각. 재민은 눈을 치떠 위를 올려다본다. 아무리 톺아 올라가도 다리까지밖에 보이지 않는다. 검은 슬랙스와 검은 구두. 그 사이로 드러난 한 뼘짜리 아킬레스건. 하얀데 어둑한 발목. 그늘인지 빛인지 도통 구분이 가지 않는.

 

그는 누구지.

 

그가 이제노인지, 이 원장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남자가 개 앞에 쭈그려 앉았다. 고통에 떨고 있는 어깨를 감쌌다. 그 손을 박정하게 쳐낼 기운이 없었다. 호흡 곤란으로 헐떡이던 재민의 목덜미를 꿰고 다시금 따끔한 통증이 전해졌다.

 

방금 주사한 건 날록손이에요.

 

조금씩…….

 

아편 계열 해독제니까 곧 나아질 거예요.

 

아득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입된 게 모르핀이라 다행이네요. 펜타닐이면 어쩌나 했는데.

 

진료할 때와 똑같이 평이한 어조였다. 남자의 모습이 지나치게 일상적인 탓에 재민은 이것이 당최 현실인지 섬망인지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다.

 

진짜라면 묻고 싶었다. 왜 빠삭하냐고. 여기 사는 사람들이랑 무슨 관계길래 그딴 걸 아냐고. 나한테 주사한 게, 날록손이 맞긴 하냐고.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이 안 좋냐고……. 물어봐야만 했을까. 오늘만 두 번 뚫린 뒷목을 움켜쥐었다. 힘을 덜 찾은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다 바닥에 이마를 짓찧었다. 마치 기합을 받는 듯한 자세로, 발끝으로 바닥을 괴롭게 밀어 나갔다. 속이 왈칵 요동쳤다. 견딜 수 없는 욕지기였다. 울대를 역류하는 구토감을 이기지 못한 채 결국 모조리 게워 냈다. 빈속에 때려 넣은 고량주가 소매를 축축하게 적신다. 그런 재민을 멀끄러미 내려다보던 제노가 말없이 뒷목을 주물러 주었다. 흐리마리한 시야로 상이 갈라진다. 재민은 손을 치들어 제노의 팔을 턱 부르쥐었다.

 

그만해…….

 

짐승이라면 누구든 의지하고 싶어질 만한 온도였다. 머리를 사붓이 기울이고, 어깨를 마주 대고. 기대고 싶게 만들지 마라. 나 대한민국 경찰이야. 입으로는 그만하라면서 자신의 팔을 부러뜨릴 듯 꽉 쥔 재민을, 제노는 여전히 말없이 응시했다. 한참 위에서 붉은 입술이 달싹인다. 뭐라는지 잘 들리지 않아. 이윽고 제노가 입을 다물었다. 뒷목을 굽혀 고개를 숙인다. 불그죽죽하게 달아오른 목덜미에 거의 코가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재민은 겨우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살렸나요?

 

 

듣는 것과 알아듣는 것은 달랐다. 제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도 가까운 거리만 가까스로 인지했을 뿐. 더운 숨결로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당신이…… 그 개를 살렸어요?

 

재민은 입가로 흘러내린 침을 힘겹게 닦아 냈다. 뭐라는 거야, 새끼야……. 손등이 잘게 떨렸다. 호흡은 상시의 상태를 되찾아 가는데, 맥박은 끊일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한다. 모르핀인데 왜 맥박이 이 모양이냐고. 유당불내증 때문이다. 경황이 없어 보이는 재민에게 제노는 더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일어나요. 그가 재민의 한쪽 팔을 어깨에 걸쳤다. 천근처럼 무거운 몸이었는데, 깃털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뿐히 껴붙들었다.

 

…….

.

옷 더러워져……. 나 토했어…….

 

그 와중에 그런 게 신경 쓰였다. 이게 다 후각에 의지하는 습성 때문이다. 이제노에게서 무척이나 청결한 향기가 나서. 그래서 그런 거다. 제노는 완만하게 웃어 보였다. 당신이 저보다 깨끗할 거예요. 그의 팔이 재민의 허리춤을 단단히 감아 일으켰다. 재민은 구겨진 코트 어깻죽지에 코를 처박고 멍하게 떠올렸다.

 

그 향수다.

메종 레플리카…….

 

 

 

 

 

 

 

 

 

 

 

 

 

 

 

 

 

 

 

 

 

 

 

 개를 살렸다. 

 

 

 

 

 

 

 

 

 

 

 

 

 

 

   

 

 

 

 

 

 

 

미안해요. 늘 차에 여벌 옷을 들고 다니는데…… 오늘은 마침 두고 왔네.

 

제노는 벤틀리 한켠을 더러워진 개에게 내주었다. 왜 여벌을 들고 다니냐 물었더니 마누라가 동물 털 묻혀 들어가면 싫어한단다. 동물 싫어하는 여자가 용케도 수의사를 만났다 싶었다. 왜 그 여자만 떠올리면 배배 꼬이는지 알 수 없다. 재민을 태운 차는 매끄럽게 논현으로 돌아갔다. 병원에 내려 주려나 싶었는데 그 지점을 한참 지나쳤다. 차가 멈춘 곳은 서울 노른자위가 분명한 부촌의 한 높은 주택 건물 앞이었다. 보는 즉시 재민은 이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논현동 펜트하우스.

 

이제노는 자신이 누굴 자가로 데려온 건지 알긴 할까?

 

재민이 털고 싶었던 건 늘 악한들의 본거지였다. 그게 집이면 집을 털고. 사무실이면 사무실을 털었다. 그러나 둘의 역할이 완벽히 분리되어, 오로지 집으로만 기능하는 범죄자(추정)의 집에 들어서긴 처음이다. 이런 농담 없는 고급 저택은 더더욱 초면 되시겠다. 이곳은 현대 노예의 뼈에 황금 발라서 지은 궁전인가? 건물이 지닌 무시무시한 때깔 앞에서, 재민은 처음으로 자신의 경찰 정신을 회의했다.

나도 그냥 뽕이나 팔 걸 그랬나.

(이 개는 불효자다.)

 

공동 현관이 안면 인식인 점은 정말 재민의 소년 같은 심장을 충족시켜 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쯤엔 온몸이 제 기능을 되찾았다. 간신히 바르게 서서 제노를 경계할 수 있게 되었을 땐 이미 상대가 도어락을 누르고 있었다. 왜 공동 현관은 안면 인식인데 집은 홍채 인식이 아닌가? 척척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제노를 노려보면서, 재민은 후각을 곤두세웠다. 익숙한 향기가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향기. 제노가 덮고 있던, 그러나 제노의 것이 아닌 향기다. 누구의 향수인지 자명해졌다.

 

마누라 있는 집에 외간 남자를 막 데려옵니까?”

 

남자가 재민을 응시했다. 제 아내 이름은 소은혜입니다. 단 한마디가 많은 의미를 시사했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빡추 나재민으로 하여금 알아듣기 어렵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아니. 사실 알아들었다. 알아들었는데.

 

어쩌라고. 내 이름은 나대갈이야.”

 

가짜 이름을 처당당하게 읊었다. 귀를 벅벅 긁으면서 뻔뻔떠는 재민을, 제노는 말로 형언하기 힘든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도무지 읽히지가 않는 놈이다. 소파에 앉아 계세요. 옷 가지고 나올게요. 됐습니다. 서 있을게요. 제노는 더 권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늘 친절을 전면으로 내세우지만 오버는 하지 않는 놈의 애티튜드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발자국마다 액수가 찍힐 것 같은 집이었다. 펜트하우스 중에서도 유독 층고가 높은 천장. 모던하지만 독특한 디자인이 들어간 가구들은 집주인이 하나하나 엄선해서 심은 듯했다. 무엇보다 문. 문이 참 많았다. 저 문이 전부 방이 맞나, 몇 개는 장식으로 달아 놓은 문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문득 손끝이 근지러웠다. 그때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문이 많은 집에서 일어날 만한 사건은 뭐. 뻔하지 않나.

 

제노가 옷을 들고 나왔을 때, 재민은 본래 서 있던 자리에 정확히 서 있었다.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인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게 아마 대갈 씨한테 맞을 거예요. 그가 건네는 그가 건넨 옷을 대강 받아들고 태연하게 물었다.

 

샤워도 해도 됩니까?

전부터 생각했는데…… 대갈 씨는 부탁을 되게.

되게?

안 들어주면 큰일 날 것처럼 하네요.

건방져서 싫어요?

 

왜 대답 안 합니까?

안 싫어요.

 

 

 

*

 

 

오랜만에 온수 바로 나오는 샤워를 했다. 해바라기 동물병원 원장이라 그런가. 샤워기도 해바라기고 지랄이다. 나재민은 마음껏 더운물을 맞았다. 몸이 수육처럼 수분을 가득 머금고 탱탱한 빛깔을 되찾을 때까지. 용의자 집에 수도세 한 푼이라도 보태 주는 것. 그것 또한 경찰 정신이다. 대궐 같은 욕실에 홀리느라 받은 옷을 늦게 펼쳐본 게 화근이었다. 젖은 머리에 수건 한 장을 걸치고 서서, 재민은 심란해졌다.

 

혹시 멕이는 건가?

 

옷을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한 가지 의도밖에 읽히지 않았다. 와이셔츠 위에 핀 것은 꽃. 날아다니는 건 벌. 컬러는 블랙. 무늬는 요란. 사이즈는 분명 재민에게 맞는데 디자인이 아무리 봐도 절대. 절대. 절대로 이 원장'이 입을 옷이 아니었다. 같이 준 게 슬랙스라는 점에서 실내복은 더더욱 아니다. 장난하나. 누가 이런 옷을 집에서 입어? 맨날 하얀 와이셔츠만 입고 다니면서 이런 옷은 대체 언제 산 거야? 이 패션 초이스의 교묘한 점은 브랜드에 있었다. 와이셔츠 목덜미에 대문짝만하게 붙은 상표. 구찌였다. 구찌. 장난하냐고 지껄이는 주둥이를 셔츠에 붙어 있을 무수한 공이 틀어막는다. 도대체 그 돈 주고 왜 이런 옷을 샀는지는 좀 묻고 싶었지만. 샤워실 문을 열었을 때, 그는 꽃과 벌의 사나이가 되어 있었다. 알몸으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집안은 고요했다. 재민이 샤워를 하러 들어온 욕실은 2층에 있었는데, 적어도 이 층에선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오래 씻는 손님을 기다리다 지친 집주인이 어디 방에 들어간 모양이다. 아니면 지금이 바로 한 대 빨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고 나갔을 수도 있다. 그의 코트 주머니엔 분명 담배가 있었으니까. 아래층에 홀로 틀어진 TV에서 캐스터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온다. 새해까지 세 시간이 남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제야의 종을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그러고 보니 아내는 어디 갔을까.

 

적막한 집안에 다른 사람의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나. 보통 이런 날엔 가족들과 붙어 지내지 않나. 어차피 재민과도 상관없는 얘기다. 마포서에 뼈를 묻은 미친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계획에 없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먼저 자리를 비워 준 덕분에 그럴싸한 당위성이 생겼다. 재민은 제노를 찾아다니는 것뿐이다. 우선 2층 욕실에서 가장 가까운 방문을 열었다. 한 걸음 들어서기 무섭게 향기의 그물이 훅 날아들었다. 이 집안을 가득 메운, 제노의 귓가를 떠돌던 짙은 향기. 재민은 코를 감싸 쥐고 전등 스위치를 더듬어 눌렀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잘 가꾸어진 화장대였다. 한 면을 차지하는 유리창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다른 면에는 벽걸이 TV만 한 사이즈의 거울이 있었다. 풍경으로 미루어 보아 부부의 침실, 혹은 아내가 혼자 쓰는 방이다. 척 보기에도 본색을 철저히 숨기는 놈이 마누라 시선 닿는 곳에다가 켕기는 흔적을 숨겨 놨을까? 그래도 혹시 모른다. 부부가 합심해서 뽕을 만졌을 수도. 누구보다 가까이서 그 예시를 본 것이 나재민 아니던가…….

청승은 미소로 털고.

방문을 등 뒤로 조용히 닫았다.

 

나대갈은 그리 얌전하고 신중한 형사가 아니었다. 그의 수사학을 조명해 볼까. 방을 한 바퀴 휘 돈 놈은 다짜고짜 침대 매트리스를 이불째 걷어찼다. 잘 정리되어 있던 이불과 베개가 소리 없이 바닥을 굴렀다. 뒤집힌 매트리스 아래로 원목 침대 프레임이 누드를 드러냈다. 딱히 감춰진 건 없었다. 침대 프레임 아래도 살폈다. 발견한 점이라곤 보이지 않는 구석조차 깨끗한 바닥과 방주인의 신경증적인 결벽뿐이다.

 

매트리스를 낑낑대며 돌려놓았다. 이불이랑 베개는 나중에 나갈 때 정리하고. 금번에 재민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화장대였다. 저런 곳에 의외로 귀중품이 많지. 걸음을 옮겼다. 화장대 거울 속에서 점차 가까워지는 자신의 모습이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재민은 거울을 보며 턱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팍 상했어. 남들 좆뺑이 칠 때도 10시간씩 처자면서 지켜온 내 꿀피부가. 그러고 보면 이제노가 피부 하나는 기깔나게 좋았다. 곧바로 우유를 연상할 정도잖아. 화장품 모델로 써도 손색없을 것이다. 걸어 다니는 도화지. 어떤 색이든 놈에게 묻으면 배로 두드러지겠지. 이제노에게 어울리는 건 검은색이 아니다. 이제노에게 어울리는 색은…….

 

시선이 뚝 떨어진다. 화장대 위로 주르륵 놓인 화장품들 중엔 향수도 있었다. 그중 재민이 제노에게서 맡았던 향기를 검거하는 데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펜할리곤스와 레플리카. 그중 레플리카 향수를 집어 들고 허공에 난잡하게 뿌렸다. 아내의 향기를 남편의 향기가 먹어치워 간다. 그제야 숨이 좀 덜 막혔다.

 

다음으론그 옆으로 주르륵 놓인 루즈들. 이 원장과 결혼한 여자는 테이스트가 뚜렷했다. 하늘 아래 같은 레드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 붉은색이 유독 많은 루즈 중 가장 붉은 것을 집어들었다. 뚜껑을 열고 킁 냄새를 맡았다. 역시 이것도 평범한 화장품이다. 그렇겠지……. 루즈를 손등에 직 그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노는 어쩌다 날록손을 가지고 있었을까. 동물병원에서도 취급하는 약물인가. 아니면 역시 업자라서? 그럼 다시. 왜 날 구했을까. 내가 귀여워서인가. 그래도 되는 건가. 아내도 있는 주제에……. 루즈 묻힌 자릴 엄지로 꽉 짓눌렀다. 벅벅 문질렀다. 이 붉은 색깔이 마치 그 여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나 붉음은 번지기만 하고 지워지질 않았다. 끊임없이 문질렀다. 손등 위로 붉은 얼룩이 질 때까지. 빡빡.

 

어느 선에서 멈추기만 하면 손을 털 수도 있어요. 그 자리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얼룩이 남기 전에요.’

 

이곳은 한 평범한 아내의 정원이다. 나재민에겐 하등 볼 일 없는 꽃밭이다.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 이 정도 얼룩은 지울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묻혔냐는 듯이 흐려질 것이다. 그럼 더는 궁금하지 않겠지. 아내와 키스할 때 이제노 입술에도 같은 얼룩이 남을지 따위는. 엄지와 검지로 루즈를 집었다. 간격 좁게 주차된 화장품들 사이 딱 루즈 하나 들어갈 공간이 비었다. 그 자리를 향해 루즈를 신중하게 가져갔다. 신중하게…….

 

손이 떨릴 정도로 생각나면…… 그건 중독이에요.’

 

루즈 끝이 덜덜 떨린다. 이건…… 분명 마약의 후유증이다. 제대로 해독해 내지 못한 거다. 아니면 이게 바이브레이터 기능이 있는 루즈인가 보지, 씨발……. 포기하고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다. 설마 나재민이 아내 화장품을 훔쳤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오래도록 숙이고 있던 몸을 찌뿌드드하게 폈다. 화장대 거울과 눈이 마주쳤다. 거울 속에 팔짱을 끼고 방문에 기댄 남편이 비치고 있었다.

 

거울 속 이제노가 웃었다.

마침내 자신을 발견한 개를 칭찬하듯이.

 

 

 

 

 

 

 

계획에 없는 일은 절대

 

 

엄마 립스틱 훔치러 왔어요?”

 

재민은 움직이지 못했다.

거울 속 방문이 열려 있다. 분명 재민이 닫았는데. 거울 속에서 그가 다가온다. 실내용 슬리퍼는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소리 없이 다가온 그림자는 이제 바로 등 뒤에 서 있다. 재민의 옆구리께를 스친 손이 화장대의 빈자리를 짚는다.

 

하나가 모자라네…….”

 

혼잣말인지 추궁인지 분명치 않았다. 그래서 재민은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죄송하다고, 지금이라도 죄송하다고 루즈를 꺼내야 하나? 하지만 재민은 죄송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도 않은데 사과하는 건 죽일 마음도 없이 죽여 버린 살인 사건처럼 우발적이고 시시하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나재민이 지껄이고 다니지 않았던가. 손끝이 곱아든다. . 그게. . 뭐냐. 변명을 간신히 한 걸음 뗐다. 목소리가 갈라진다. , 목을 닦았다. 사실 내 취미가 코스메틱 유튜버인데…… 평소답게 뻔뻔한 거죽을 뒤집어쓰고 잡아떼려고 했다.

 

나가 주시면 좋겠어요.”

 

거울 속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범행 후 닦인 현장처럼 청결하고 스산한 미소였다.

 

재민 씨가 지금 제 낮을 밟고 계시거든요.”

 

그가 발음한 게 낮인지 낯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다른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가달라면서. 제노는 몸을 비켜주지 않았다. 거울 속에 보이는 제노는 여전히 등 뒤. 귓가에 숨결이 닿을 만한 거리. 팔이 재민의 골반에 스친다. 재민의 눈깔이 천천히. 천천히 굴러갔다. 장난스러운 강아지처럼 찡그린 미소가 보였다. 화장대의 빈자리를 짚은 손도. 손가락을 문 반지. 결혼반지도.

 

.

엿 같네.

 

남자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이 공간을 구성하던 정적인 공기가 단박에 끓어올랐다. 그대로 팔을 꺾자 남자의 균형이 단숨에 무너졌다. 거울 속에서 꽃과 벌이 춤을 춘다. 난투극의 배우가 화장대에 거칠게 부딪혔다. 정갈하게 세워져 있던 립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이 방의 정원사가 봤으면 나대갈 머리통을 후드려 팼을지도 모른다. 개의치 않았다. 팔 꺾인 이제노의 상박을 화장대 위로 찍어 눌렀다. 아래서 짧은 신음이 들렸다. 개의치 않았다. 이름을 부른 순간 다 끝났다. 논현동의 선량한 시민? 개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이 새끼잖아. 이 새끼가 가져갔던 거잖아. 알고도 모르는 척했어. 신분증 운운하면서 사람을 갖고 놀았어. 이 개새끼가.

 

재민 씨…… 팔꿈치 아래 깔린 제노가 콜록 기침을 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바닥을 괴롭게 밀치는 발끝으로 하여금 고통을 짐작할 뿐. 자리가 순식간에 뒤바뀐다. 전복. 이제는 나재민이 탑독이다.

 

삼합회랑 무슨 사이야.”

 

오래도록 억눌려 있던 질문이 목을 긁었다. 공무원증을 들킨 이상 위장 수사는 끝났다.

화장대에 뺨을 댄 제노가 눈을 감는다. 긍정도 부정도 없다. 머리칼을 움켜쥐고 억지로 들었다.

 

무슨 사이냐고.”

 

닫혀있던 눈꺼풀이 들렸다. 남들보다 살짝 무거운 눈꼬리 끝으로 시선이 고인다. 늘 눈에 드리워져 있던 연한 햇빛이 나재민의 그림자에 어둑하게 파묻힌다. 그늘 속에서. 이제노가 웃었다.

 

왜 화가 났을까.”

 

그런데도 웃어?

웃는다고?

 

찬물을 들이붓는 것 같다. 연극이 끝났는데도 연기를 이어 가려는 배우가 있다. 누구는 민낯을 죄다 까발렸는데 혼자 꽁꽁 싸매고 어떤 단서도 주지 않으려고 든다. 손목을 더욱 세게 쥐었다. 쥐어 본 느낌이 수상쩍지 못해서, 단단하고 이쁘기만 한 손목이라, 정신이 나갈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개새끼. 얼마나 더 속여야 속이 시원해. 당장 잡아 처넣어야 한다. 쇠창살 너머에서 식판을 긁을 땐 놈도 더는 웃지 못할 것이다. 오른손으로 손목을 짓누른 채 왼손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 누가 불편하게도 슬랙스를 주신 덕분에 주머니에 어렵지 않게 감추고 있던 덫. 수갑에 손목을 덥썩 물렸다.

 

이제노 씨. 당신을 불법 도박장 운영 혐의, 마약류 관리 위반 혐의, 마약류 판매 총책 혐의로 긴급 체포 합니다.

 

이제노는 나재민을 위해 날록손을 사용했다.

 

당신에겐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 어떤 권리. 어떤 권리가 있고…….

 

무기질한 미란다 원칙.

체포당하는 자가 아닌 체포하는 자를 지키기 위한 긴 권리 독송.

 

반대쪽 손목도 끌어다가 고리를 채웠다. 수색 영장도 구속 영장도 없이, 독직 폭행에 가까운 체포 과정 속에서, 이제노는 단 한 번도 저항하지 않았다. 증거도 없이 난폭한 체포 과정에 완전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어깨에서 힘 쭉 뺀 게 한두 번 차 본 것 같지도 않았다. 이쪽은 손이 떨리는데. 뒷일만 생각하면 미치겠는데. 이런 공산국가의 씹썁이를 봤나. 이마를 덥썩 움켜쥐었다. 나중에 딴소리하기만 해봐. 수상하다고. 누가 봐도 수상하잖아. 내가 틀린 게 아니야. 이 새끼는 범죄자라고. 만약 아니면 어떡하지? 진짜 무고한 놈이면? 내가 트라우마에 휘둘린 거라면? 이런 생각조차 속고 있는 건가? 이마에 떨리는 손을 갖다 짓누르고 숨을 골랐다. 역시 해독이 덜 됐어. 호흡이…….

 

괜찮아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괜찮아요. 수갑 채워도 돼요. 겁먹지 마요. 자극 없이 순한 말들. 나는 경찰이고 넌 죄인인데. 잡힌 건 이제노인데도 이제노가 안심을 시킨다. 그가 등 뒤로 묶인 손끝을 살살 구부린다. 이리 와요. 재민은 홀린 듯이 고개를 숙였다. 제노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이서 보인다. 선한 눈동자에 재민이 한가득 비쳤다. 눈동자는 마음의 창이라는데, 내 마음만 비춰서 어쩌자는 건가…….

 

무서워요?”

…….”

안아 줄까요?”

 

속이 뭉근하게 끓었다. 확 넘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진정하지도 못한, 배탈이 나기 직전과도 같은 불편함. 당신…… 이상해. 낮게 중얼거리자, 제노가 하하, 웃었다. 귀엽다는 듯이. 결코 경찰을 보고 느낄 속성은 아님에도.

 

제 눈에는…… 재민 씨가 더 이상해요.”

 

내가? 내가 뭐가 이상한데. 경찰이 범죄자 쫓는 게 이상해? 그런 것 대신 다른 게 묻고 싶었다. 취조해야 할 내용에서 자꾸 어긋났다. 불편하게 화장대에 엎드린 남자 위로 몸을 숙였다. 화장대를 짚은 나재민의 손이 붉었다. 루즈를 훔쳐 바른 자리.

 

날 왜 알바생으로 받아 줬어?”

 

그 얼룩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글쎄요……. 그냥 그러고 싶어서.”

명함은. 그건 왜 준 건데?”

그냥.

그냥이 왜 이렇게 많지?”

그것도 재민 씨의 이상한 점 중에 하나죠. 이유가 잘 안 찾아지는 게.”

날 좋아합니까?”

 

새해까지 두 시간이 남았습니다. 아래층에서 캐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노가 몸을 슬쩍 비틀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재민은 속눈썹을 척 깔고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포서 개꼴통 나대갈이 아니고서야 꽂을 수 없는 꽉 찬 직구였다. 돌려 말하는 건 성미도 아니고, 아니라면 비웃음 한 번 사고 말면 될 일. 제노는 말이 없었다. 그가 화장대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틀었다.

 

입술이 손등에 닿았다.

루즈가 칠해진 그 자리였다.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재민은 불시의 습격을 받은 듯 흠칫 떨었다. 턱 근육이 불거졌다.

 

뭐 하는…… 거야.”

 

목소리가 떨렸다. 남색도 아닌 새끼가……. 이 상황이 꼴려? 경찰 장구가 무슨 섹스 보조 기구인줄 알아? 질타하고 싶었다. 누구보다 날뛰고 있는 변연계의 흥분을 감추고 싶었다. 그런데 손을 치우지 못했다. 그저 떨리는 목소리로, 뭐 해. 뭐 하는 거냐고. 탑독이 아니었던가? 아래 깔린 언더독은 여전히 제 색깔을 잃지 않는다.

 

표시해 두신 줄 알았는데요. 여기까진 괜찮다고…….”

 

그가 자신의 발목처럼 웃는다. 아내 생각이 나서요. 그게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라서.

 

끝까지 아내 핑계.

속이 역류한다.

제노 턱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니까. 거기까진 괜찮다고? 무슨 립스틱이 인감이야? 위임장이야? 찍어 두면 그 사람이 돼? 아내가 좋아하는 색이면 막, 입술 부벼도 돼? 약지로 루즈 뚜껑을 날려 버렸다. 겁도 없이 경찰의 손등을 희롱한 입술. 붉은색을 처발랐다. 이러면. 이러면 당신이 그 여자가 돼? 당연히 이런다고 그 여자가 될 리가 없다. 전면에 궤변을 내세우고 정당화시키는 거다. 다 알면서. 알면서도 나재민은 멈출 수 없었다. 놈의 멱살을 잡아 왈칵 들었다. 색채가 확 다가온다.

 

이대로 당신이랑 떡치면, 내가 그쪽 아내를 따먹는 거란 말이지?”

 

왜 이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발성. 논리. 욕망. 이 순간 무엇 하나 옳은 것이 없었다. 우유처럼 부드럽고 순하고, 소화 안 되는 말간 낯에 함부로 칠한 붉은 색이 두드러진다. 너무 하얘서 무엇을 칠해도 토해 낸다. 차라리 검은색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재민 같은 미친개가 뭔 색을 떡칠해도 묻혀 버릴, 그런 검은 놈이어야 하는데. 숨을 씨근대면서. 알 수 없이 분노하면서. 어째서 눈알이 뜨끈한지, 왜 배 속이 묵직한지, 나는 경찰인데, 경찰이 되어 가지고, 자기가 수갑 채운 범죄자에게 꼴리고 있는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원장의 흰 셔츠 깃이 우그러졌다.

 

괜찮겠어? 내가 당신 아내랑 잔다는데.”

 

벽에 걸린 전자식 시계가 붉은 숫자를 깜빡이고 있었다. 107. 새해까지 1시간 53.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고, 진짜 아내는 없다. 정반대의 효과를 일으키는 두 약물이 나재민의 몸속에서 용틀임을 한다. 모르핀과 날록손. 중독과 해독. 죄책감과 흥분. 어느 쪽이 나재민을 이토록 미치게 만드는가. 하얀색과 대비되는 붉음이 번진 입을 보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치닫는다. 제발. 이제 제발 본색을 드러내. 나만 알몸으로 있게 하지 말란 말이야.

 

괜찮아요.

 

그러나 이제노는, 씨팔…… 붉어진 입술로조차 웃었다. 아무리 덧칠해도 이 원장이길 그만두지 않았다. 한쪽으로 번진 입술은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하나의 얼룩 같았다. 무섭도록 붉은 얼룩. 지워질 수가 없는 얼룩. 하얗다고 안심하고 손 댔다가 피처럼 붉은 그에게 순식간에 침범당했다. 반쯤 눈꺼풀에 덮인 탁한 눈이 재민을 향했다. 얼룩진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당신이 내 향수를 뿌렸잖아요.

 

 

 

 

 

 

 

 

 

 

 

 

 

 

 

.

 

 

 

 

누군가의 타종 인사

 

다들 싫음에 어떤 계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싫다. 그런 마음이 들면 우선 타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하죠. 하지만 사실은요. 그냥 싫은 겁니다. 뚜렷한 이유가 있어 보여도, 그냥이라는 것만큼 솔직한 이유는 없어요. 태어나면서부터, 혹은 살아가면서 형성해온 나의 영혼 어딘가에서 그냥 안 받는 겁니다. 알레르기처럼. 그럼 싫다는 마음은 불치일까요? 아닙니다. 거부감은 생각보다 무척이나 쉽게 뒤집히기도 합니다. 싫다는 마음 이상으로 좋아지는 사건이 일어나면요.

 

 

 

 

 

 

 

 

잠시 후

새해 맞이 카운트다운이 시작됩니다.

 

10. 9. 8. 7. 6.

5.

4.

3.

2.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묵직한 기둥이 종을 두드린다.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가 온 집안을 깨끗이 훑고 지나간다. 넓은 거실. 물기가 완전하게 날아간 욕실. 열린 2층 방문 틈. 엉망으로 구겨진 시트. 바닥에 나뒹구는 베개들. 뜯다 만 콘돔. 사방팔방에 묻은 붉은 루즈 자국.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대에 퍼질러진 재민과 제노의 틈새.

 

자신의 것이 아닌 침대에 누워서, 뻐근한 고개를 꺾었다. 벽에 걸린 거울로 재민의 모습이 비친다. 입가에 살짝 붉은 얼룩이 져 있었다. 이래서 색깔 있는 것은 함부로 축축해지게 두면 안 되는 거다. 쉽게 물들어.

 

아파요…… 재민 씨.”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 온다. 뻐근한 목이 다시 반대쪽으로 삐걱삐걱 돌아간다. 하얀 등이 보인다. 다 구겨진 옷가지가 걸려 있는 손목에는 여전히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재민을 등진 남자가 몸을 뒤척인다. 뒤집을 힘은 없나 보다. 기진맥진한 뒤통수가 다시 한번 말을 걸어 온다. 이제 수갑 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재민은 근육이 욱신대는 팔뚝을 베고 돌아누웠다. 엄살은. 섹스 중엔 단 한 번도 아프단 말이 없더니.

 

고집쟁이.”

 

어쭈.

 

먼저 접근한 건 재민 씨였어요.”

그러게 누가 수상하랬나.”

증거도 없이 체포하셨고.”

증거 없다는 증거 있어?”

함정 수사 매뉴얼엔 수갑 채운 사람 따먹으라던가요?”

 

……

 

지금 풀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재민은 얼굴을 쥐어 감쌌다. 짙은 현타가 발꿈치로 엄청난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제노 옆에서 이불을 찰 수는 없어서 죄 없는 시트만 벅벅 밀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요동치는 매트리스의 움직임에 제노가 큭큭 웃는다. 또 웃네. 저거 상습웃음범이야.

 

빼도 박도 할 수 없게 언더독이다.

나재민은 완패했다. 유부남 강간마로 옷 벗고 콩밥 먹기 싫으면 그를 이 자리에서 풀어 주는 수밖에 없다. 증거도 불충분. 영장은 당연히 없어. 무슨 깡으로 냅다 수갑을 채웠어. 경찰 장구가 무슨 섹스 보조 기구인줄 아는 건 본인이었던 거다. 좆됐다. 새해 선물이 당연퇴직이라니. 이제야 막 마약 잡는 귀신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던 차에(그 정도로 잘나가진 않음) 범죄자 잘못 만나서 봉변당했다. 그렇지만 이쪽의 사정도 들어 보시라. 재민은 분명 그와 이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분명 수사 기록에 의하면 이런 황당한 사태가 발생할 일이 없었단 말이다. 그러니까……

말하다 보니 뭔가 중요한 게 떠오른 것 같은데…….

 

 

 

 

<수사보고서>

유부남

 

 

띵동.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아득하게 공명한다. 그 이후의 한층 선명한 소리. 삐빅. . . 삑삑. .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다.

 

아니, 씨팔! 바지 어디 있어! , ! 이제노! 받아, 이거, 이거! 수갑 열쇠! 입술, 입술 어떻게 해 봐, ? 빨리! 혼비백산하는 재민의 발등을 찧고 무언가 툭 떨어졌다. 수갑이었다. 언제, 어떻게 빼냈는지 모를 그것을 손목에서 풀어낸 제노는 차분하게 일어났다. 화장대 앞으로 가서 머리를 빗어 넘기고, 아내의 클렌징 티슈를 한 장 뽑아 벌겋게 저지레 된 입술을 지워 나갔다. 그저 단순한 행위의 연속이었음에도 그는 손쉽게 이 원장으로 돌아왔다.

 

괜찮아요.

 

일련의 과정을 멍청하게 지켜보고 있던 재민의 어깨 위로 이 원장의 손이 올라앉았다. 하얗고 깨끗한 손이 재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시야 외로 아금받은 손목이 언뜻 들어찼다. 그곳에 난 붉은 줄은, 이 원장이 손을 거두는 것과 동시에 소매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뭐가 괜찮아? 당신은 뭐가 그렇게 다 괜찮아. 괜찮을 게 하나도 없는데. 뒤돌아 문고리를 잡고 홀연하게 퇴장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목통이 조여들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홀로 방에 남아 개판 오 분 전인 방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얼굴의 핏기가 싹 가셨다. , 진짜 좆됐다…….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방의 주인이 기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할 만큼의 원상으로 복구해 놓을 자신은 더욱이 없었다. 허방지방 맵시를 정돈한 뒤 문간을 넘고 방문을 꽉 닫아걸었다. 쥐새끼마냥 층계를 도드밟고 내려간다. 뭐야, 저 신발? 손님 왔어? , 우리 병원 알바생. 여자? 남자. , 그 명함 버리고 갔다는 사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말소리가 가까워진다.

 

현관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도 나재민이 잡아먹던 색깔의 입술을 지닌 여자가.

 

차 막힌다고, 친정에서 자고 온다더니.”

 

제노는 태연하게 자신의 아내를 맞이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던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고 웃었다.

 

우리 엄마 알잖아. 아버지랑 호텔 잡아 놨다고 딸을 쫓아내더라. 그래서 나도 그냥 근처에 친구들이랑 약속 잡았어. 신발만 갈아 신고 갈 거야. 그런데 당신은 왜 집에 있어? 출장 간다더니.”

으응. 비행기표를 못 잡아서 취소됐어.”

뭐야. 그럼 말해 주지. 친구들이 기다려서 나 가봐야 하는데.”

괜찮아. 나도 동물병원 직원들이랑 회식하다 온 거야. 토해서 옷만 빌려 드리려고.”

 

평이한 대화가 이어졌다. 웃지 못하는 사람은 나재민 하나 뿐이었다. 눈썹 하나 안 바뀌고 거짓말을 이어 가는 이 원장이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소시오패스 새끼.

 

, 맞다. 나 방에 뭐 두고 왔는데.”

 

심장이 저 바닥까지 떨어졌다. 제발 그 방이 2층에 있지는 않기를. 하고 많은 문들 중에 하필이면 그 문을 열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기를. 재민은 어린아이마냥 두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극진하게 입속말을 뇌까리는 동시에, 제노가 여자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거지?”

, 맞아. 어떻게 알았어?”

맨날 들고 다니는데 두고 갔길래.”

 

미소를 지어 보인 여자가 루즈를 받아 들었다. 미친 새끼. 제정신이 아니다. 돌아도 단단히 돈 거지. 하고 많은 루즈들 중에 하필이면 그걸. 제노가 뒤를 돌아본다. 이리 와요, 재민 씨. 손짓하는 손목으로 언뜻 붉은 자국이 비쳤다. 여자는 재민을 보느라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알바분이시라고…….”

…… .”

상사 집에 오시기 불편하셨죠? 저희 남편이 좀 저래요. 사람이 너무 허물없어.”

…… 그게…….”

재민 씨. 오늘 많이 드신 것 같은데, 택시 잡아 드릴 테니까 집 가서 푹 쉬어요.”

 

눈이 마주쳤다. 제노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듯이. 속이는 사람은 자기 하나로 충분하다는 듯이.

 

재민은 거칫하게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층계를 마저 밟고 내려갔다. 두 사람의 사이에 서서 버벅버벅 머리통을 숙여 보였다. 굽은 자세 그대로 현관에 놓인 제 신발에 맨발을 꿰어 넣었다. 가죽 재킷 주머니에 쑤셔 둔 양말은 미처 신을 틈도 없었다. 여자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예의는 갖추되 반색은 담지 않고 웃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부부가 쌍으로 우아하다. 그녀는 알까? 견고한 성에 쳐들어온 들개가 있다는 걸. 그 개가 당신 남편을 방금 전까지도 물고, 오줌을 깔기고, 영역 표시를 하고…….

 

실례했습니다.”

 

정말로 실례를 했으므로. 재민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고 뒤돌아섰다.

 

나도 가 볼게. 먼저 자도 돼. 아내가 남편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방금 전까지 개가 깨물던 입술이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다가온다. 재민은 식은땀이 나는 손으로 엘리베이터 하강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방금 전까지 뒹굴던 남자의 아내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니. 문이 닫히기 전 제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현관문을 쥔 채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시중드는 게 몹시 익숙해 보이는 태도였다.

 

침묵이 감도는 엘리베이터 안. 거울 속에 두 남녀가 비친다. 우스꽝스러운 구찌 셔츠를 입은 개와 붉은 루즈를 덧바르는 여자. 둘 다 같은 남자의 손을 탔던 물건이다. 여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남편이 향수도 빌려줬나 봐요.”

 

재민은 셔츠 깃에 코를 킁 묻었다. 섹스하기 전에 뿌렸던 그 향수다. 자신에게 묻은 레플리카의 향기가 충분히 날아가지 못했다. …… 토해서요. 재민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가 볼게요. , 들어가세요. 짧은 인사를 주고받고, 그녀와 건물 앞에서 헤어졌다. 여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병적으로 예민한 후각이 잡아낸 시시한 의문. 왜 친구들이랑 노는데 제일 좋아하는 루즈를 챙겼나 하는. 그런.

 

 

 

 

 

 

 

 

 

다시,

쿠조가 돌아왔다

 

 

표시등이 꺼진 택시가 미끄러지듯 돌아 들어왔다. 뒷좌석 차창에 옆통수를 기댄 재민의 눈꺼풀이 불규칙적으로 깜빡거렸다. 차 문을 밀고 아스팔트 바닥을 디디자마자 꼽사리가 쏟아졌다.

 

니 차는 어쩌고 경찰이 택시야, 인마?”

 

담배 연기와 입김을 한꺼번에 뿜어내며 퉁을 놓는 팀장의 앞에서 재민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드물게도 야마리 있는 부하의 침묵에, 팀장의 눈빛이 한결 부드럽게 풀렸다. , 삼합회 건 철수하길 잘했다. 그거 우리가 공안 쪽 안테나까지 싹 다 털어 봤는데, 그냥 개 애호가야. 동물병원 원장이 중국어를 잘해서 그쪽으로만 다니는 거라더라. ? 반면에? 강남 클럽 건은 빵 터졌다는 거 아냐. 펜타닐 공급 총책부터 따까리들까지 싹 다 잡아넣었다. 내가 뭐랬냐, 인마. 너 내 말 듣길 잘했지!

 

강남 클럽 쪽으로 머리도 두고 잔 적 없는 재민은 여전히 침묵했다. 팀장도 점차 이 침묵이 상명하복의 자세보단 무관심으로 읽혔는지 재민의 뒤통수를 툭 때렸다. 나 먼저 들어간다. 이제 공급책 몇 놈만 잡아넣으면 돼. 얼어붙은 손으로 머쓱하게 뒷목을 문질렀다. 차를 구로동에 두고 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왜 구로동에 갔는지, 거기서 뭘 했는지, 올 땐 누구 차를 타고 왔는지, 어디서 내렸길래 택시인지. 단 한 가지도 올바르게 대답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바늘이 살갗을 꿰뚫었던 흔적이 검지 지문의 요철 아래로 갈씬거렸다. 기왕이면 둘 중에 더 하얗고 이쁜 놈이 뚫어 준 거면 좋겠는데.

 

하잘것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나대갈은 몇십, 몇백 명이나 되는 약쟁이들이 넘나들었을 마포서의 유리문을 통과한다. 한 발. 또 한 발. 또다시 한 발을 내디뎠을 때, 어떤 소리가 귓결을 긁었다. 아주 낯설고도 익숙한 소음이. 모가지에 난 두 개의 구멍을 만지작거리던 재민은 무의식중 고개를 휙 돌렸다. 소음의 근원은 아마 주차장이었다. 코너 끝에서부터 어렴풋이 개가 낑낑대는 소리가 넘어왔다. …….

 

?

마작장 위층에서 보았던 마른 개가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레 백 리 밖에서도 집을 찾아 돌아왔다는 하얀 마음 백구의 미담까지도. 재민은 곧장 걸음을 물려 미끄러지듯 건물의 코너를 돌아 들어갔다.

 

개는 없었다. 경찰서 모퉁이에 놓여 있는 거라곤 한데 묶여 쓰러져 있는 사내자식들 뿐. 재민은 순간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니주가리들이 피떡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미친놈이 시체 유기를 경찰서에다가?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꿈틀거린다. 꼴에 살겠다고 낑낑대고 있다. 개소리가 인간 입에서 나고 있었다. 피멍이 든 콧대의 복점이 꽤 익숙한데. 잘 보니 어디서 본 상판대기.

 

이거 나한테 작대기 꼽은 시키들 아냐?

 

생활 쓰레기를 투기하듯 검정색 테이프로 대충대충 묶여 있는 놈들은 실신한 것처럼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개중 한 놈은 오줌을 지렸는지 진회색 코듀로이 바지가 검게 물들기까지 했다. 도무지 다가가기 괴로운 악취가 코를 찔렀다. 본능적으로 걸음을 물리려는 순간, 다른 한 놈의 주둥이에 물려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얄따랗고 네모진 무언가. 한 손으로 코를 덮싸쥔 재민은 그것을 단숨에 톡 빼냈다. 드러운 잇자국이 남기는 했지만 척 보기에도 값비싼 종이로 만든 엽서였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종이를 명함이나 엽서에 쓰는 놈을, 재민은 안다. 암모니아 냄새가 질펀하게 풍기는 마포경찰서 구석빼기에서 재민은 엽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약쟁이의 침이 묻은 귀퉁머리만 북 찢어 냈다.

우아한 엽서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두고 가셨어요 ^^]

 

정갈한 글씨체였다. 이름 없이도 주인을 알리는 엽서를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역시 숫자 6에 시프트 키를 눌렀을 때 나오는 기호를 두 번 쓴 것처럼 웃잖아.

 

뛰지 못하는 개는 있어도 짖지 못하는 개는 없다. 개는 짖는다. 반항을 타고난다. 깍듯이 엎드리는 복종의 자세를 취하면서도 언제든 짖을 수 있도록 낮게 목을 울리고 있다. 야성을 천진으로 꾸밀 줄 아는 영리함. 그러니 나재민은 발톱을 숨기고 눈을 빛내는 늑대개를 더러 이렇게 부를 것이다.

 

 

 

쿠조와 보바리

 

 

,

개 같은 놈이라고.

 

 

 

 

 

 

 

 

 

 

 

 

 

 

 

 

 

 

 

 

 

 

 

 

 

 

 

 

 

 

 

 

 

 

 

 

 

 

 

 

 

*

 

 

 

 

 

앙상한 개를 보았다.

오래 굶주렸으나 죽지 않은 개였다.

 

 

 

 

 

 

 

狗臉的歲月

개 같은 내 인생

 

 

계단에서 마주친 개는 힘겨운 숨을 쌕쌕 몰아쉬고 있었다. 불행으로부터 달아나느라 기진맥진해 보이던 개는, 날록손을 손에 든 제노를 지나쳐 다시 빠르게 달려 내려갔다. 골상이 훤히 보이도록 마른 몸 어디 그런 힘을 감추고 있었을까. 제노는 개가 사라진 자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자신이 살려야 할 개가 기다리고 있을 층을 향해.

 

제노는 결코 낮과 밤을 만나게 두지 않는다. 그것을 잘 아는 유위와 왕평은 제노의 처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재민의 본래 직업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면 더욱 거세게 반발했을 것이다. 다행히 개의 존재는 시시하고 견고한 오해에서 그쳤다.

 

新恋人吗?’

새 애인이냐?

不是啊.’

아니.

也是, 都有老婆了, 应该不是恋人吧.’

하긴. 부인이 있는데 애인은 아니겠지.

但是, 天不怕地不怕的野头真的只让兼职生单纯的坐在这里吗? 现在处理他还来得及.’

하지만 천하의 야터우가 과연 단순한 알바를 여기 앉혀 놨을까? 참고로 아직 처리하기 늦지 않았어.

刘伟, 王平. 平时也看电视剧吧, 太无聊, 所以总觉得我的人生像电视剧一样.’

유위, 왕평. 평소에 드라마도 보고 그래. 심심하다고 자꾸 내 인생으로 드라마 쓰지 말고.

鸭头的人生故事可比电视剧有意思多了!’

야터우 인생 이야기가 드라마보다 재미있긴 하지!

所以, 不是恋人是…… 男朋友?’

그래서, 애인이 아니면…… 남자 친구?

刘伟, 够了.他看着也不像是同类.’

유위, 그만해. 그가 이쪽을 보잖아.

 

개는 불퉁하게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대화를 부당한 따돌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표정을 떠올리자 자연히 미소가 그려졌다. 성격이 나쁜 개일수록 충성심이 높다. 그를 길들이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한 번 손을 타면 그만한 번견이 없을 텐데.

 

휴대폰을 열었다. 개의 코트를 걸어 주던 날, 이미 일찌감치 훔쳤던 물건은 이제 제노의 휴대폰에 사진으로 잠들어 있다. 뒤지고 다니는 게 딱해서 원본은 돌려주었지만. 개는 사진발이 별로였다. 지금보다 깍둑 자른 머리. 성미를 끝까지 졸라맨 경찰 정복. 개 목걸이를 견디지 못하는 자의 비딱한 넥타이. 그 아래 적힌 이름 세 글자. 나재민. 나대갈이라는 이름에 비하면 친근감은 떨어졌다. 나재민은 지나치게 예쁜 이름이니까.

 

예쁜 것에는 늘 감상하기 적정한 거리가 있다. 작품과 관람객 사이를 떼어 놓는 붉은 울타리처럼. 제노는 자신의 울타리를 느리게 매만졌다. 왼손 약지를 감싼 반지가 미지근하게 존재를 알려 왔다.

 

 

 

 

개가 화장실로 사라지고 15분 뒤. 위층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반드시 갈 것 같던 장소로 기어코 올라간 모양이다. 제노는 업소용 냉장고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만약 개가 조금만 더 타이밍이 좋았다면 어땠을까. 제가 없을 때 저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면. 수상쩍음을 느끼고 이곳의 음료를 핥았다면. 혹은 서랍 속 주사기를 물었다면.

 

王平.’

왕평.

?’

?

租楼上的这帮人…… 你知道是哪伙的吗?’

위층에 세든 놈들…… 어디 쪽 애들인지 알아?

 

 

 

 

 

 

누군가 개를 살렸다.

 

 

 

개를 살렸다는 건 개를 죽이려던 존재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질환인 경우에는 제노의 분야지만. 학대나 유기. 그보다 더한 경우는 누구의 분야일까. 그래도 나랏밥을 먹은 개라고. 그는 경찰 노릇을 했다. 그것이 제노에게 어떤 의미를 끼쳤을지 알까.

 

아까 그 새끼 오줌 싸는 거 봤어? 크크. 유위가 작두 손잡이만 쥐었는데도 막 질질. 드러운 새끼들.”

약쟁이들이 괜히 소변줄 차겠어. 그나저나 아깝네. 두 개만 잘라서 내 손가락에 붙이려고 했더니.”

 

유위와 왕평이 컨테이너 바닥에 깔린 비닐을 떼어 낸다. 제노는 제 발치에 앉아 뼈를 갉아먹는 개를 내려다보았다. 계단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피골에 비하면 확실히 살이 붙었다. 힘차게 뛰쳐나가더니, 다시 광동낙시 주변을 서성이던 개. 약쟁이들의 손에 죽을 뻔했던 그 개는 이제 약쟁이들이 죽을 뻔한 자리 위를 즐겁게 뛰어논다. 그 개를 보면 붙여 주고 싶은 이름이 하나 있었다.

 

아르바이트생

 

여전히 연락처에는 그의 번호가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아마 오늘쯤 선물을 전달받았겠지. 선물은 잘 받았냐는 안부를 걸 수 있는 좋은 변명이었다. 번호 위를 배회하던 손가락이 느리게 액정을 문질렀다.

 

신호가 간다.

 

[여보세여?]

 

그의 목소리가 아니다. 앳된 남자가 다시금 여보세여? 특이한 발음으로 답을 종용한다. 제노는 기계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차분하게 인사를 건네려던 차였다.

 

[나대갈! 여친한테 전화 왔는데여?]

[뭐라는 거야. 내가 여친이 어디 있어?]

 

수화기 너머로 희미한 일갈이 넘어왔다. 제노가 들을 것으로 예상했던. 아마도 듣고 싶었을 목소리다. 지가 저장명에 여친이라고 적어 놓고…. 작게 투덜거리던 앳된 남자가 큼큼 목을 다듬는 소리가 수화기로 넘어온다.

 

 

[나대갈 지금 일 내팽개쳤다고 팀장님한테 기합받고 있어서여. 누구한테 전화 왔다고 전해 드릴까여?]

 

주변을 맴돌던 개가 구두코를 핥는다. 언젠가 나대갈이라는 이름이 붙을 개의 턱을 감싸고, 제노는 작게 미소 지었다.

 

 

"여친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