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 19세 이상 관람가 분량은 추후 소장본에 수록됩니다

 

 

 

 

 

 

 

 

 

 

연천

 

 

양주 시의 본디 지명은 연천군이었다.

 

연천의 연은 인근의 녹둔 호수가 철수 도래지인지라 제비 연 자를 썼으나, 내지인들은 연기 연을 쓴다고 고 입을 모았다. 조그만 모래시계 모양의 연천군은 잘록한 부분이 산지이되 바닥으로 갈라져나온 녹둔 호수의 천이 좁다란 땅을 둘러싼 까닭으로 늘 안개가 기승이었다. 해가 떨어지면 한숨같은 안개가 밤거리에 내려앉기 일쑤였고, 골목골목 김 서린 듯 한 치 앞 사람 얼굴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양주 시는 신도시 개발 정책에 막바지로 끼어 2년 전 특별자치시로 승격했다. 청사 이전으로 일약 집값이 오르면서 짬짜미투기 의혹이 일었으나 늘 그렇듯 모종의 사정으로 금방 사그러지었다.

 

양주 시는 본 기능은 주거 도시였는데, 여러모로 애를 키우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첫번째로 일조량이 모자랐다. 낮에도 늘 볕이 입자 고운 설탕처럼 희미로웠고, 도시 전반은 우울에 잠긴 듯 흐렸다. 양주 시에서 자고 나란 어린애들은 한눈에 태가 났다. 피부가 밀도 있게 빽빽하고 창백했다. 제노도 종종 비슷한 오해를 받곤 했다.

 

두 번째로 교통사고가 잦았다. 안개로 자주 가시거리가 짧아지는 탓이었다. 제노는 올해 초 양주 시 북부 경찰서 교통과로 발령받았다. 북부경찰서의 형사과는 다른 지역 관할보다 규모가 작았는데, 일례로 마약팀이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양주 시에서는 마약 범죄가 발생한 적이 없었다. 양주 시 서에서 교통과는 한직이 아니었다. 때때로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길목이 사라지는 톨게이트 어귀에서, 신호등의 가시거리가 짧아지는 비 오기 전날 발생하는 교통사고들을 정리하는 것이 제노의 일과가 되었다. 이미 주먹이 오간 마당에 과실 비율을 두고 따지는 고성 속에 제노는 대체로 파리한 낯색을 한 채 서 있곤 했다. 양주 시의 나날이란 그랬다. 정해진 규모 속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들. 제노는 땅거미 위로 어둑하게 앉은 암적색 안개 속에서 경광봉을 흔들었다. 교통 정모를 한 번 고쳐 쓰고. 좁다란 챙이 우묵한 눈가와 뺨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눈동자를 번뜩이면서.

 

모로 봐도 제노는 교통과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목구비가 단정했고, 몸을 잇는 모든 선들이 곧았다. 군말이 많은 편도 아니었지만. 그와 별개로 눈빛이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양주 시 서에 발령이 나 책상 하나를 차지했고, 제 몫의 책상에 처음으로 데스크테리어를 꾸몄을 만큼 정을 안 붙인 것도 아니었지만. 제노는 늘 동료들을 홀연히 떠날 사람 대하듯 했다. 스스로도 그런 취급을 원하는 듯했다. 하지만 공무직을 업으로 삼은 이상 떠나고 말고는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강력반에서 마약반으로. 마약반에서 교통과로. 그린 듯한 좌천과 경질 속에서 제노는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양주 시에는 초록색 번호판이 드물었다. 번호판의 숫자는 전부 세 글자로, 길가에 나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차종들이었다. 신도심이니 인파가 적었고, 내지인이 쫓겨나 공무원 아니면 신혼부부뿐인 도시에는 아직까지 흉흉한 일이 드물었다. 낮에는 죽은 듯이 고요하고, 해가 지면 안개 속으로 사람들이 쏟아지는 도시. 양주 시의 교통과 공무원이 된 이후 제노의 삶은 운동폭이 좁아졌다. 법 밖을 벗어나는 것은 중앙선을 침범하는 차뿐이다. 양주 시는 항상 안개로 시야로 흐리고, 그래서인지 표정 없는 종이 인형들이 사는 도시 같았다. 생김새가 비슷비슷한 국산 차들. 제네시스. 현대. 기아. 개중에서도 프리미엄 라인만을 고르는 어중띤 과시욕. 전입 신고서를 낸 첫날부터. 도저히 마음 붙일래야 붙일 마음이 생기지 않는 도시라고 생각해왔다.

 

제노는 빈껍데기처럼 경광봉을 흔든다. 차선을 정리하고. 국산 순찰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는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공교로운 타인의 사고에 개입한다. 정복을 입은 제노는 건드릴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사탕 포장지다. 동그랗고 단단한 속알머리를 어디쯤 흘린 걸까. 스스로도 종종 고민했다. 제노의 영혼은 늘 양주 시의 안개 밖을 떠도는 듯했다. 삶이 평화롭고 좁은 규격 안의 관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양주 시의 희멀건 종이 인형 같은 주민들도, 저녁이면 하얗게 질리는 도시의 전경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노가 양주 시를 싫어하는 이유는 실상 자명했다. 그 스스로가 이 우울한 도시를 닮았기 때문이다.

 

 

 

새뜸마을 2단지에 애스턴 마틴 볼란테가 나타나기 전까진 분명 그랬다.

풍만한 차체 너머로 보기 드물게 해상도 높은 상판대기를 가진 그 남자 인사하기 전까지는 분명.

양주 시는 안개에 오염되었을 뿐 오폐수로부터 거리가 먼 청정도시였으니까.

 

 

 

 

 

 

 

 

하운디드

 

 

 

 

 

 

상리사거리

 

 

양주 시는 연말 연시보다도 장마철에 음주 단속이 잦았다. 6월 말만 접어 들어도 상습적으로 비가 왔는데, 7월 종전은 장마철 직전이라 날이 습하고 더웠다. 자연히 안개가 오간자 베일처럼 진해졌다. 조금만 정신을 놓아도 시내에서 추돌 사고 정도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양주 북부경찰서는 연천군 파출소에 기반했다. 만성적으로 근무 인원이 모자라 골머리를 빼고 있었고, 양주 시의 강력범죄 비율이 현저히 낮아 체제 자체가 불분명했다. 그러니 여름철엔 교통과의 사건사고가 성수기로 늘 촉각이었다. 조사과와 관리과의 양방향 지원도 찾았다. 한직이면 한직답게 일이나 없을 것이지. 동료들은 종종 불만을 토로했지만 제노는 늘 그렇듯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다. 차마 안에서 쉬어 터지기 직전의 김밥으로 끼니를 대신하는 것도. 어렴풋하고 성성한 불빛 속에서 눈을 홉뜨며 차량을 유도하는 일도. 제노가 생각하기에는 불행 축에도 끼지 않는 일이다.

 

제노는 갓길에 비스듬하게 댄 추적조 차량 안에서 치킨텐더 랩으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세계는 래알처럼 물방울이 맺힌 창에 의미없이 그림을 찍어 그렸다. 동그라미 두어 개. 또 세모. 주먹 한 번을 찍어 아기 발가락 모양을 그렸다가, P 경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에 아닌 척 앞을 보았다.

 

 

“어. 밥 먹었어요?”

“먹었습니다.”

“그럼 이제 교대 함 하자. 맨날 이 시간에 지원 부르고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어쩌겠어. 서에 미혼이 드물잖어.”

 

 

제노는 이렇다 할 대꾸 없이 다시 정모를 눌러 썼다. 철마다 외근이 잦다 뿐이지 수사과나 서 자체에 사건 사고는 많지 않았다. 3교대에 연차 사용이 빡빡하지 않아 서 중에서 워라밸이 좋은 편이었으니, 양주 시는 혼자 와서 둘이 나가는 도시였다. 대개 때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결혼을 했고, 제노는 서의 손꼽히는 미혼이었다. 전술한 것들은 모두 양주 시가 혼자 살기 적합한 곳은 아니라는 명제의 근거가 됐다. 양주 시의 명물은 산과 물과 안개였다. 새로 지어진 청사에 가로막힌 오지였다. 연고지가 아니라 마땅히 남는 시간을 보낼 곳이 없어 제노는 긴급지원이나 외근을 마다하지 않았다.

 

교통과로 발령받은 이래 제노는 매양 눌린 머리로 다니곤 했다. 오랜만에 입는 정복은 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하던 고민을 삭제해주어 마음에 들긴 했다. 날이 불쾌할 정도로 습하고 더웠다. 조끼까지 찬 몸을 미지근한 열기가 껴안는 듯했다. 열린 차로는 하나뿐이다. 제노는 음주측정기를 받아들고 칼라콘 뒤에 섰다. 퇴근 시간 직후라 차량이 적잖았지만, 음주 적발 차량은 현저히 적었다. 두어 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제노는 빗대 선 차체의 안 쪽으로 음주 측정기를 밀어 넣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협조적이었지만 태도 자체는 신경질적이거나 불친절했다. 음주 단속 있겠습니다. 아니 가뜩이나 이 시간에 밀리는데. 여기서 음주 단속을 하는 게 어딨어요? 유도리 없게……. 그때마다 제노는 무표정하게 음주 측정기를 차 내부로 깊게 찔러 넣었다. 예. 가시면 됩니다. 무의하게 차량을 보내고 다시 모자를 고쳐 썼다. 비슷비슷한 차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 언제까지 이런 나날이 계속되는 걸까, 생각하며.

 

시간이 지나고 서서히 지나다니는 차량이 드문드문해졌다. 뜸한 호루라기 소리에 고개를 한 번 돌렸다. 확연히 낯선 생김새의 차가 차선을 따라 순순히 들어오고 있었다. L 순경이 낮게 휘파람을 분다. 외제차다. 그것도 일반적인 카테고리의 것은 아닌. 마치 지나가는 사람을 희롱하듯 가볍고 날카로운 휘파람이다. 제노는 그를 한 번 흘겨본 후 경광봉을 흔들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차체는 아주 매끈하고 부드럽게 제노의 앞에 섰다. 틴팅이 유달리 짙었다. 차창이 내려간다.

 

“수고하십니다.”

 

제노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조금 당황한 까닭이다. 이런 차량 안에서 이런 화사한 인상의 남자가 나올 줄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때때로 바람과 물에 마모된 것처럼, 이목구비의 모든 마감이 잘 다듬어진 남자. 말투는 지극히 예의바르다 못해 순종적이다. 2인승이라 차체가 낮아 유순하게 올려다보는 각도. 제노가 짧게 머뭇거리고 있자 남자가 되물었다. 불면 되나요? 물음 끝에 제노가 든 측정기에 후, 부는 시늉을 했다. 말씨가 상냥하고 권태로웠다.

 

“요즘엔 안 부셔도 됩니다. 기기가 신형이라.”

“아 그렇구나…….”

 

제노는 뒤늦게 창 안으로 측정기를 밀어 넣었다. 감지기가 붉게 깜빡거렸다. 시동 끄고 잠시 내려주세요. 남자는 짜증난 기색 없이 순응했다. 지극히 협조적이라 언성을 높일 필요가 없었다. 제노는 순순히 차 문을 열고 나오는 남자를 짧게 흘끗였다. 만성적이고 습관적인 시선이었다. 눈높이는 제노와 비슷했지만 체구가 단단하고 컸다. 직물이 얇은 면티에 면바지. 옷감이 잘 다려져 있었고 주름이 잡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운전을 오래 한 것 같지 않았다. 천이 흐르는 선이 몸의 요와 철마다 두둑하게 걸리는 편이었다. 오랫동안 몸을 다듬어 온 사람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꾸준하고 편집적인 생활 양식과 습관이 켜켜이 쌓인 몸이 분명했으니까.

 

“술 드셨어요?”

“아뇨.”

 

제노는 무의식적으로 남자에 입가에 코를 댔다. 눈높이가 비슷했으니 많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술 냄새가 나진 않았다. 탐지기가 울릴 정도라면 어느 정도 술 냄새가 나야 할 텐데. 낯색도 열감 없이 건조했다. 엷게 달콤한 향과 민트 냄새가 났다. 무어라 이름 붙이기 좀 어려운 낯선 향내. 향수인가.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은은하고 연하다. 제노는 입가에서 좀 더 냄새를 맡다가,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뒤늦게 너무 가까웠나 싶어 L 순경을 더러 손짓을 했다. L 순경이 느리게 생수 한 통을 꺼내왔다.

 

“가글 하셨습니까?”

“네. 입이 텁텁해서 오는 길에 조금.”

“가글에 에탄올 성분이 있어서 걸리는 경우 종종 있습니다. 운전 중에는 안 하시는 게.”

 

제노는 말끝을 흐렸다. 생수 뚜껑을 따 내밀자 남자가 제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내 받아든다.

 

“입 헹구시고. 마시지 마세요. 네.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아.”

“이번엔 부세요.”

 

남자는 눈썹 위에 손날을 처마처럼 대고 있었다. 그는 성질을 따지자면 조소같다. 커다란 뼈대에 이것저것을 붙이고 정교하게 더듬은. 비를 가리는 데 큰 기능은 하지 못 해 옷이 젖기 시작했으나, 그는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색이 부분부분 도드라지는 부위에 진해지는 옷감을 내려다보다가, 제노는 정밀측정기를 내밀었다. 불면 되나요?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측정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기울어진 목이 필요 이상으로 곧고 길었다.

 

“네. 쭉 부세요.”

 

남자는 측정기를 향해 꽤 긴 숨을 분다. 물로 한 번 희석된 날숨이 제노의 목 언저리에 닿는다. 측정기의 수치는 정상이었다. 괜찮네요. 가셔도 됩니다. 직접 차 문까지 열어 안내했는데, 제노로서는 짜증 한 번 내지 않음에 대한 무난하고 건조한 감사 인사이기도 했다. 남자는 내린 바와 같이 다붓하게 차에 올라탔다.

 

“실례 많았습니다. 다음번에는 운전 중에 가글 하지 마시고.”

 

남자는 대답도 출발도 하지 않고 제노를 올려다본다. 그을음 같은 연무를 가르는 눈빛이 빤했다. 제노도 비로소,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신경을 써 보는 것이 달갑게 느껴진다, 는 것이 지배적인 인상이었다. 눈 밑이 살짝 패여 있고, 생활감이 느껴지는 피부로 덮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개 속에서 헤드라이트처럼 유달리 번쩍이는 눈. 지극히 상식적이고 사회적인 호감을 머금은 얼굴이다. 제노는 축축한 얼굴을 한 번 닦았다. 무슨 용건이라도. 똑 잘라 물으니 남자가 대답 대신 조수석으로 팔을 뻗었다. 콘솔을 뒤적거리면서 묻는다.

 

“북부 서에서 근무하세요?”

“네, 그런데…….”

“경찰도 칭송 편지 그런 거 쓸 수 있나 해서.”

 

친절하신 것 같아서요. 남자가 웃으면서 차창 너머의 제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 들린 것은 견직이 촘촘한 손수건이다. 요즘에도 손수건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니. 그리고 그걸 제노에게 내밀다니. 공무원은 이런 거 못 받나요? 근데 비 맞고 계시니까. 제가 쓰던 건데 빌려드린 걸로 할까요. 일련의 말들이 능란했다. 제노의 떨떠름한 얼굴에도 아랑곳 않는다. 조끼 주머니로 손수건이 밀려 들어왔다. 음주 측정에 걸려서 현금을 찔러주는 것도 아니고. 안 걸렸는데 손수건을 주는 남자라니. 참 이상하다. 고 생각한다.

 

“인기 많으시겠네요. 말투도 멋지시고.”

“…….”

“비 맞지 마시라고. 또 봬요.”

 

시동이 걸린 차는 금방 자리를 떴다. 제노는 황황한 낯짝으로 차의 뒤꽁무니를 따라보았다. 뭐가 오래 걸리느냐고, 건너편에서 구경하던 P 경장이 다가와 말을 건다.

 

“뭐래?”

“비 맞지 말라고 손수건을 받아서.”

“여자야?”

“아니오. 남자분.”

“어으. 아쉽겠네.”

“네? 뭐가.”

 

P 경장은 딱하다는 기색이다. 기울인 고개의 각이 노골적이었다. 이어 그는 눈매를 찡그리며 차종을 확인했다. 풍만한 고치 모양의 트렁크. 양쪽으로 날개가 퍼진 엠블럼. 그가 목구멍 깊이 끓는 소리를 낸다. 여기 살기 많이 좋아졌어. 저런 차가 굴러다니고. 제노는 그를 따라서 다시 멀어진 차를 흘끔거렸다. 안개의 포자 속으로 엷게 번진 백라이트. 번호 표지판이 보일까 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왜 그런 걸 보려고 했을까, 하는 의문으로 후회했다.

 

“좋은 차 모시네. 저거 비싼 건데.”

“제가 차를 잘 몰라서요.”

“어엉. 영국 차. 수제로 만드는 거. 제네시스가 다 저기 따라하는 거잖아.”

 

제노가 꺼내 든 손수건을 P 경장이 거침없이 낚아챘다. 거리낌 없이 냄새를 맡는다. 남자 맞어? 분내 나는 것 같은데. 비 맞는다고 이걸 줘? 그니까 좋은 육체에. 어. 좋은 정신이 깃드는 거야. 비싼 차 모는 사람은 달러. 제노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조끼 속으로 손수건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그것으로 얼굴이나 몸을 닦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비가 온다기보다, 공기 중에 산란한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강수량이 적었다. 안개가 들러붙는 것에 가까운 습도였으니까.

 

“이 경장은 남자한테도 잘 먹히나봐. 하긴 찐하잖어. 얼굴도 글코 눈빛도. 빡.”

 

P 경장은 끝까지 혓바닥이 길었다. 내가 진한가. 어디가. 제노는 성의 없이 얼굴을 문질렀다. 제 콧맥을 더듬는 일은 짧다. 아무렇지 않게. 없던 일인 양 다음 차를 유도했다. P 경장이 혀를 차며 건너편 차도로 건너가는 것은 알았다만 장단 맞추는 일은 늘 제노에게 조금 어려웠다. 다시. 제노는 입력된 것들을 끝마친다. 경광봉을 휘젓고. 짜증을 받아내고. 차창 너머로 음주측정기를 죽창처럼 찔러 넣는다.

 

 

다만 정모 아래로 눈을 번뜩이는 까닭은 그런 것들이다. 보통 경찰한테 또 뵙자고 말하는 사람은 잘 없으니까.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던 건 논외로 치더라도. 좋은 육체에 좋은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떠올렸다. 좋은 육체기는 했지. 다시 줄줄이 이어지는 비슷한 생김새의 국산 차. 제네시스를 보면 이게 예의 그 차를 따라했다는 게 생각나긴 했으나, 크게 달라지는 바는 없었다. 그뿐이었다. 양주 시의 나날이란 그러하니까. 그런 것들이 이미 궤도를 잘못 탄 제노의 삶에 미처 영향을 끼치진 않을 테니까. 영원히.

 

 

 

신원 미상의 여성에게서 마약 신고가 접수된 것은 그날 새벽이었다.

 

 

 

 

 

 

 

 

 

 

112신고 접수 녹취록

일시 및 사건번호: '00. 07.08. 01:20 / No. 7814번

 

 

통화자: 여보세요. 여보세요.

경찰관: 112 경찰입니다. 말씀하세요.

신고자: 남편이요. 제 남편이. 걔를 잡아다 주실 수 있나요?

경찰관: 배우자분 말씀이세요? 개? 남편분이 지금 어디신데요?

신고자: 저도 몰라요. 찾아서 집에 좀 보내 주세요.

경찰관: 남성분은 현행법상 실종신고가 안 됩니다. 지금 실종 신고를 하시는 거예요?

신고자: 아니, 어디 있는지는 대충은 아는데요. 양주 시. 

경찰관: 양주 시 어디신데요? 자세한 주소를 알아야 저희가 가죠.

신고자: 아, 양주 시! 최지민이 거기 살아요. 걔 지금 약 빤 것 같아요. 

경찰관: 배우자분이 지금 마약을 한다는 말씀이세요? 지금 어디신데요.

신고자: 저는 됐고요. 남편은 지금 양주 시에 있어요.

경찰관: 실례지만 지금 어디세요? 신고자분 위치 확인이 안 돼서요.

신고자: 제 위치는 왜요? 재민… 나재민… 그 사람 아버지가 김을환이에요. 네, 경찰청장… (맞지? 지금 간대.) 청장 아들이 그래도 돼요?

신고자: 걔 진짜 약 먹어서 그러는 거 같애요. 미친 새끼들 같애.

경찰관: 여보세요? 여보세요?

 

 

 

 

 

다시 말하지만 북부 경찰서에는 마약수사팀이 없다.

 

 

 

 

 

 

 

 

 

 

 

 

 

 

양주 북부경찰서 형사과 마약범죄 특별수사팀 긴급 신설 공지

인사발령 0720-20**A****

 

소속

직급

성명

강력 1팀

경위

K

강력 1팀

경사

P

강력 2팀

경사

M

지능수사팀

순경

L

교통조사계

경장

이제노

 

 

 

 

제노는 묵묵히 인트라넷의 공지를 들여다본다.

 

 

모처럼 꾸민 데스크테리어인데. 아쉽진 않았다. 제노는 그날 점심부로 짐을 모두 쌌다. 인원 절반 이상이 외근을 나가 썰렁한 사무실에 인사를 한 번 했다. 이제 교통 정복을 입을 일은 없겠네. 그건 좀 별로였다. 아침마다 옷 고를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어차피 더러워질 옷이면서도. 부서를 옮기면서 제노는 짧게 고민했다. 이건 복귀일까, 아니면 또다른 유예일까.

 

 

북부 서 형사과에는 마약범죄 전담 수사팀이 없었다. 마약류 유통망도 범죄도 드러난 바가 없기 때문이다. 강력 범죄조차 드물어 형사과 규모 자체가 크지 않았고, 자연히 수사경찰의 수도 모자랐다. 살기 좋은 도시. 안전한 밤. 창조와 미래의 양주. 그것이 바로 정확한 슬로건이었다. 그러니 야심한 밤에 걸려온 신고 전화 한 건에 수사팀의 편제 자체가 개편된 것이다.

 

신고는 서울 소재였으나 내용만큼은 정확히 양주 시를 짚었다. 피의자는 양주 시 외곽에서 신고 내용과 같이 포착되었고, 인근 관할에 마약 수사팀이 전무했다. 북부서 형사과에 1차적으로 배정된 사안이었으나 업무 과중이라 다들 곡소리를 냈다. 마약 수사 인프라가 있었던 것도, 담당 인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신고 전화 한 건에 긴급 수사팀이 편제되어 TO가 났다.

 

지원, 면접, 발표까지 모두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다섯 명의 초라한 팀 구성. 각각 강력팀에서 차출된 셋, 지수사팀에서 하나. 그리고 교통조사팀의 이제노. 수사 경찰 경력 5년 이상에 다른 부서의 일까지 신경 쓰고 자처할 만큼 한가로운 사람은 몇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 몇 중 하나가 이제노였으니까. 수사팀 가장 최소단위의 초라한 인선이었다. 서울 지방경찰청에서 마포경찰서로. 다시 여기로. 두 번의 좌천으로 미끄러진 위인도 이제노뿐이다. 알음알음 사정은 들어 알 테지만 과연 서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제노를 제외하고 전부 달갑잖은 일에 끼었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 그럴 만도 했다.

 

 

김을환은 전 경찰청장이니까.

 

 

아들이라는 얘긴 진짜일까. 일단 피의자는 그와 성이 달랐다. 열람한 등본상 호적에 등록된 가족은 모친과 이혼 진행 중인 아내뿐이었다. 정밀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오기 전까지 마약 수사는 불구속이 원칙이었는데, 제노를 제외한 수사팀 전원은 피의자 마주치기를 찝찌름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마약 수사는 단순 투약자를 조지는 것보다 매매 혐의로 유통망을 일망에 타진하는 쪽이 수확률이 좋았다. 강력반과는 다르니, 한 명 잡아넣어봤자. 거기다 그게 전 경찰청장의 혼외자라는 얘기가 돈다면 더더욱. 별수 없이 피의자 조사는 이제노의 몫이 되었다. 연연하지 않은 게 그뿐이었으며, 무엇보다 경험자이니까. 정말 경찰청장이 아빠라는 사람이 여기 있었네. 이제노는 신고 기록을 조회하며 생각했다.

 

이건 정황상 던지기일 확률이 더 컸다. 아니면 인생사가 심심해서 공권력을 끌어들인 개인적인 치정 싸움이거나. 형량을 낮추기 위해 무고한 피해자를 신고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신고자 한미지의 거주 관할 지역 서에서도 수사가 시작됐을 것이다. 실로 이상한 사건이긴 했다. 아내가 남편을 마약 투여로 홧김에 신고하고. 신문조서에 앞서 제노는 지원팀에서 전달받은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사건 개요는 단출했다. 진행된 수사가 아직까지 전미한 까닭이다. 전부 제노가 알아본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의자는 올해로 만 31세의 남성.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 신고 당시 진행한 간이 시약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지만, 간이 검사 결과는 결정적인 증거로 활용될 수 없었다. 소재지. 새뜸마을 2단지. 제노는 새뜸마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밑줄을 쳤다. 전입신고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내와는 협의 이혼을 마쳤고 현재 숙려 기간이라고 했다. 차량, 전화, 인터넷 사용 기록 모두 특이한 점은 없었다. 피의자는 아주 협조적이었고, 그냥 한 개의 특이 사항 정도만을 자기 입으로 먼저 실토했다고 했는데.

 

 

체모가 없더란다.  

 

 

애초부터 체모는 제2의 수단이다. 모발을 체취하기 어려울 때 체모를 사용할 뿐, 왁싱을 한다고 법망을 피하는 데 효용이 있지는 않았다. 마약 수사는 협조적이지 않을수록 참작이 어려웠으니까. 탈색이나 삭발, 왁싱. 모를 가지고 하는 장난질은 다 옛것이었다. 그리고 제노는 데스크 건너편의 남자를 본다. 체모가 없다고 먼저 고했다는 남자.

 

 

나재민. 만 31세. 8월생의 외지인.

 

“마약범죄는 감경 많이 되는 거 아시죠. 전력도 없으시고.”

 

제노가 알고 있는 얼굴이다.

손수건을 주었던 남자.

 

애스턴 마틴을 타고 손수건을 내밀었던 남자. 나재민은 성긴 직물의 니트를 입고 제노의 앞에 앉아 있다. 그는 서의 노골적인 조명, 오래된 암록과 지극히도 어울리지 않는다. 재민은 불필요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맺음새가 날카로운 입매가 연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 구태여 겁을 주지 않아도 그는 수사에 아주 협조적인 편이다. 제노의 물음에 말을 돌리거나 더듬지 않는다. 몸을 흔들거나, 눈을 왼쪽 위로 굴리지도 않는다. 거짓말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고 당시 같이 있던 최지민 씨랑 어떤 사이신지?”

“대학교 동기입니다.”

“최근까지 만난 적 없으시던데.”

“네. 지민이가 먼저 연락을 했어요.”

 

신문조서는 단순한 선문답이 아니다. 단순한 녹취가 아니며 담당 형사의 재해석이 들어가기 마련이니까. 그림을 그려놓고 짜맞추는 일. 막다른 길로 연기를 피우고 몰아가는 일이다. 재민은 간이 시약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을 뿐, 다른 상황적 정황에서는 모두 무고했다. 그리고 제노는 재민을 위한 질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준비해 왔다. 분명 모멸적이거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도 리스트에 있었고.

 

“체모는 최근에 제거하신 겁니까?”

“이런 걸 묻기도 참 곤란하시겠어요.”

 

재민의 대답은 비꼬는 기미가 없다. 이런 질문을 입에 담게 해 정말 미안하다는 투다. 제노는 비로소 목덜미가 조금 뜨거워지는 걸 느낀다.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시면 됩니다. 모발 검사에 의도하신 건지. 아닌지에 사안이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재민은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컴퓨터 화면에 반쯤 가려진 제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저번 달에도… 예약 내역이 있어요.”

.”

“주기적으로 해요. 청결한 걸 좋아해서, 제가.”

 

제노의 손가락이 키보드의 C와 P 위에서 멈춘다. 제노의 주변에는. 주기적으로 왁싱을 하는 유부남이… 있나. 그런 걸 서로 얘기하진 않으니까. 내가 경찰이라서 없는 건가. 와이프와는 이혼 진행 중이면서 섹스리스는 아닌 걸까. 조서는 제노의 주관적인 해석을 곁들이는 것이니, 모든 것을 다 쓸 필요는 없었다. 제노는 백 스페이스를 몇 번 누른다. 검지 끝에 황망함이 묻어났다. 반면에 재민은 만성적인 피로가 좀 배어 있으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저 얼굴로… 코 밑으로 털이 없다니.

 

“아내분이랑은 평소에 사이가 안 좋으셨습니까?”

“최근에 강아지를 보러 간 적이 있긴 해요. 계속 얼굴 볼 사이는 아닙니다.”

“한미지 씨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런 신고를 하셨다는 겁니까?”

 

느리고 꾸준한 속도로, 제노는 재민의 대답을 기록한다. 재민의 자세는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는다. 좁다랗고 불편한 의자 끝까지 허리를 밀어넣고, 바른 자세로 대답한다. 재민이 왼손으로 뺨을 문지른다. 얼굴과 달리 손끝이 두툼하다. 제노는 결이 고르지만 질감이 짙은 눈 밑의 살갗, 그리고 그 위에 덮인 네 번째 손가락을 본다. 흔적이 남지 않은 손가락의 뿌리. 반지를 원래 끼지 않았을까.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당시에 미지가 엄청 흥분했을 거예요.”

 

지민이가 미지한테 연락을 했다더라고요. 저 만난다고. 미지가 열 받으면 공권력까지 좀…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신고를 하면 제가 곤란해질 거라고 생각했나봐요.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했고. 미지가 나쁜 애가 아닌데. 그는 말씨가 느리다. 청자에게 종전의 어휘를 곱씹을 시간을 제공할 만큼. 제노는 재민이 발음한 ‘흥분'을 곱씹는다. 종전선언을 눈앞에 둔 유부남이 흥분을 논한다. 그가 흥분을 발음하는 방식이 아주 이상하고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제노는 죄를 지었고, 그 죄를 덮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태도를 알고 있다. 대체로 뻔하다. 진술 끝마다 핍진성을 얻기 위해 듣는 이의 동의를 구한다. 재민은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 머리 위에 추를 달고 당기는 것처럼, 피로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다. 삶에 마모되었으나 무류한 눈으로.

 

“이제노 형사님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예. 편하신대로 부르세요.”

“원래 교통과 아니셨나요. 제복 입으셨잖아요.”

“편하신 대로 질문하란 뜻은 아니었는데.”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주의는 단면이 거칠다. 그러나 재민은 민망해하지 않았다. 제노가 제복을 입건 말건. 그런 건 왜 기억하고 있는 걸까. 교통경찰이 신문조서를 쓸 만큼 막되어먹은 서인지 묻는 걸까. …인사 이동이 있었어요. 제노가 뒤늦게 대답하자 재민이 엷게 웃었다. 공무원도 그런가요. 제가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최근에 감기약 드신 적 있습니까? 비염약이나. 향정신성 약물이나. 에페드린 같은.”

“제가 비염이 있어서 약을 먹긴 하는데. 성분까지는 모르겠어요.”

“비염약에 에페드린 성분이 들어 있어서요. 정밀 검사 결과에 다 나옵니다.”

“가글이랑 비슷한 거네요.”

 

제노는 마약 사범의 얼굴도 잘 알고 있다. 나쁜 것의 몽타주들은 늘 분분하고 고만고만했다. 그린 듯한 인상, 거푸집에 찍어낸 것 같은 말씨. 제노는 그런 이들을 보면 대체로 고요한 분노를 느끼곤 했다. 마약 사범은 극단적인 수분 손실이 많아 입을 쩝쩝거리거나 숨이 밭았다. 약물 성분을 체내에 남기지 않기 위해 염색이나 탈색도 상습적이었고. 재민은 건조한 인상이긴 했으나 그건 오랜 시간에 걸쳐서 벌어진 일 같았다. 숙성시키듯. 천천히, 수분을 남에게 나눠주면서 살아온 사람 같았다. 제노가 아는 마약 사범의 몽타주와는 완전히 반대쪽에 있다. 눈밑이 깨끔하고 손톱이 짧았다. 머리칼이 습기 때문에 고슬고슬했지만 잘 정돈되어 있었다. 눈동자의 경계가 명확하고, 무엇보다 좋은 냄새가 났다. 이런 사람은 범죄에 적을 두고 살지 않는 게 좋다. 한눈에 기억되는 인상이기 때문이다.

 

제노의 수사 형태는 늘 통계치와 계획에 기반했다. 제노는 감을 믿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철저히 눈금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파악한 만큼. 알아버린 만큼. 발로 뛴 만큼. 준비한 만큼. 이 남자의 눈금은 높지 않다. 나쁜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최지민 씨랑 오피스텔에서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지민이가 거기 살아요. 제가 이사 온 거 들었다고 연락해서… 만났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셨어요?”

“이혼한 거 대충 얘기 들었다고. 미안하다고. 미지까지 다 대학교 동기거든요.”

“그리고요?”

“어…….”

 

그가 조서 중 최초로 대답을 망설인다.

 

 

키보드에서 잠시 손을 뗐다. 제노가 고요 속에서 눈을 홉뜬다. 재민은 제노의 손끝을 보고 있다. 말을 고르고 있다. 아주 곤란하고 염려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제노는 한미지가 신고했을 당시를 재구성한다. 행위자: 나재민과 최지민. 양주 시 외곽 최지민의 오피스텔에서. 밥을 먹었을까. 술을 마셨을까.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왜 최지민이 그에게 이혼을 말미암아 미안해했을까.

 

“정황 자체가 수상한 건 저도 알아요.”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경찰이 안 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게 마약이나… 범죄 행위는 아닐 겁니다.”

 

마우스의 휠을 굴린다. 조서 일지와 재민의 진술 기록을 되짚는다. 재민은 짧은 침묵 끝에 느리게 말했다. 지민이가 로스쿨에 다녀요. 간통죄는 폐지됐으니까. 미지와 저의 경우 결혼 관계가 이미 붕괴되어 서로 지속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숙려 기간 중에 일어나는 일은 이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했어요. 제노는 알 수 있다. 그가 변죽을 울리고 있다. 본론을 짚고 있지 않다.

 

“진술 판단은 제가 하니까. 저를 설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제노는 준비한 질문 몇 가지를 남겨두고 있다. 마우스의 휠이 멈추고 화면은 하나의 문장을 가리킨다. 피의자 특이사항. 지속적인 체모 제거. 어떤 질문은 평이하고. 어떤 질문은 매섭고. 어떤 질문은 짓궂고. 어떤 질문은 끈질기다.

 

“무슨 일을 하셨나요?”

 

재민이 입을 열어 대답한다.

 

“키스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대답도 제노를 당황시키기 위해 준비되진 않았을 것이다.

비로소 제노는 재민의 속뜻을 이해한다. 요컨대 마약보다는 덜 불순하지만, 경우에 따라 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될 행위를 저질렀다는 뜻 같았다. 제노는 조용히 사건 개요를 넘긴다. 제노는 재민의 혐의를 덧씌우기 위해 이곳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말을 잇지 않는 까닭은 그런 것 때문만이 아니다.

 

제노는 다시 재민을 바라본다.

 

“최지민 씨는 남자인데.”

 

그리고 시선이 데스크 너머, 아래를 향한다. 체모가 없다던 다리 사이. 재민은 여전히 난난한 얼굴로 웃고 있다. 피로하고 미안하기까지 한 것처럼 보였지만 당황한 기색은 분명 아니었다. 재민의 봉긋한 뺨이 제노에게 다가온다. 자못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런 것도 수사에 불리하게 적용될까요?”

 

제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경장 이제노는 모처럼,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다. 이제노가 세운 계획 밖의 것들은 제노에게 짜증이나 분노를 유발할지언정 당황시키진 않으니까. 하지만 이 남자는 제노에게 좀 여러 번, 처치불가한 미상의 감정들을 선사한다. 제노는 최지민과 입을 맞추는 그를 상상해본다. 통 믿기지 않아 위증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혐의를 벗기 위해 남자와 키스했다는 진술을 하진 않는다. 제노는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제노가 준비한 질문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남은 신문들이 이 조서의 그림을 원하는 대로 그려줄 거란 확신은 들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모든 수사 과정은 원래 지지부진하다. 마약 수사라면 더더욱 그랬다. 한 번에 끝날 리 없었다. 혐의를 완전히 입증할 수도, 뒤집을 수도 없다. 오늘의 조서도 수확은 미미했다. 제노는 책상 위에 서류 모서리를 탁탁 모아 끝을 정리했다. 재민은 물끄러미 그것을 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재민은 제노의 아래에 있다. 올려다보는 시선이다. 제노는 작금의 이 구도를 먼 각도로 상기한다. 네모난 사무실. 네모난 데스크를 사이에 두고 무장해제의 재민은 앉아 있으며, 제노는 서 있다. 

 

“내주 중에 정밀 검사 결과가 나올 텐데요. 나중에 탈색이나 염색은 마시고요. 추후 가중 처벌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네.”

“다음 일정은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재민은 발가벗겨지는 것 정도는 상관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낱낱이 해체되기를 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제노의 일단락에 재민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바라본다. 이를테면 제노의 단정한 손끝. 제복을 입지 않아 형태가 좀 더 완연하게 드러난 PK 티 속의 몸 같은 것. 도리어 머리의 방향을 빼앗기고 검사당하는 기분이다. 그의 시선은 무류하나 결백하지 않다. 제노는 자기도 모르게 볼펜 꼭다리로 나룻을 득득 긁었다.

 

“그때도 형사님이 오세요?”

 

제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사무실의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웃으며 목례하는 재민에게서 여전히 달콤하고 숨이 졸릴 만큼 좋은 향기가 났다.

 

 

 

 

 

 

 

새뜸마을

 

 

양주 시는 지나치게 정형화된 규격의 도시였다. 길은 전부 네모반듯한 직선도로. 길에 서 한쪽을 바라보면 반대편 길목의 끝까지 가려지는 곳 없이 전부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양주 시는 정상 가족을 위해 지어진 도시다. 1인 가구가 살기 적합한 평형의 집이나 오피스텔이 많지 않았다. 대체로 신혼부부나 핵가족을 대상으로 한 분양권 아파트. 집을 구하는 것부터 난조이니 혼자 살기에 적합한 도시는 분명 아니었다. 하기사, 이런 안개 속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면. 누구라도 혼자가 아니기 위해 주변을 더듬거리게 될 것이다.

 

새뜸마을은 개중에서도 그나마 평형 수가 좁다랗고 가구 수도 적은 아파트였다. 매매가에 비해 전세가가 저렴했고,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 세입자가 유리했다. 지하 주차장 공간이 좁은 게 좀 단점이지만. 대체로 퇴근이 늦거나 불규칙적인 제노로서는 항상 지상 주차장에 한 자리쯤을 겨우 댈 수 있었다. 제노는 차량의 시동을 끄고 깊게 들숨을 쉬었다. 나재민이 사는 곳. 수사와 조사의 일환이 아니다. 제노는 이제 막 퇴근을 한 참이다. 그러니까…

 

나도 새뜸마을에 산단 말이지.

 

양주 시의 30대 언저리 1인 가구는 대부분 새뜸마을에 거주할 것이다. 그러니 피의자와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이 아주 공교롭거나, 못 일어날 일은 아니다.

 

제노는 신원 진술을 위해 출석했던 최지민을 상기했다. 지방국립대 로스쿨에 다닌다던, 콧대가 가늘고 얄궂은 인상의 남자. 최지민이 신고가 들어오기 한 시간 전 한미지에게 문자를 보내긴 했다. [소식 들었어 재민이 마침 양주 이사 왔다길래 오늘 술 한 잔 하기로 했네 ㅋㅋ] 안부를 묻는 평범한 문자. 이 문자 하나 때문에 한미지가 남편을 마약 투여로 신고까지 한 것이다. 제노는 핸들 위에 조용히 이마를 댔다.

  

아이가 살지 않는 아파트 단지는 온통 고요하다. 주차 공간을 한 칸 띄우고 애스턴 마틴이 서 있었다. 제노는 그 차를 안다. 세 번을 마주쳤다. 아마 재민의 차일 것이다. 양주 시에 두 대씩이나 돌아다닐 만큼 수수하고 뻔한 차는 아니니까. 그 주인도 양주 시에 산다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 늘 연무 탓에 어렴풋하고 습도 높은 신도심. 제노는 핸들을 두른 거죽 위로 눈을 깜빡거리면서 그 차주를 생각했다. 볕에 바짝 말려 부드럽게 색이 바랜 것 같은 남자. 마약에는 도저히 손 댈 것 같지 않은. 근데 남자와 입술은 댔다는. 경찰청장의 혼외자.

 

재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제노는 여전히 교통과에서 근무하고 있었을까. 영영 양주 시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제노는 차문을 닫고 내렸다. 야릇할 정도로 풍만한 차체. 여전히 틴팅이 짙고. 안에 누가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다. 신문 조서가 끝난 지도 오래니 재민은 이미 집에 돌아갔을 것이다. 제노는 천천히 차체로 다가갔다. 운전석의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시야가 어두워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고요하게 차체의 프레임 위로 손을 얹는다. 단단하고 매끄럽다. 뭉긋한 화로처럼 잔열이 남은 차체를 둥글렸다…

 

지이잉.

예고 없이 차창이 내려갔다.

 

“악.”

“제 차에 무슨 문제라도…….”

 

겨우 비명을 삼킨 제노가 차고 위에 주먹을 얹었다. 재민이 예의 그 눈매로 제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노가 멋대로 차를 만져서가 아니라, 도리어 놀라게 해 미안하다는 양 눈썹을 누인 채로. 제노는 뒤늦게 차체에서 몸을 뗐다. 뜨거운 것을 겨우 삼킨 듯, 비명이 넘어간 목구멍 뒤가 날깃거렸다.

 

“실례했습니다. 차가 멋져서 그만.”

“저 따라오신 건가요?”

“…여기 삽니다. 저도 그렇게 경우 없이 따라다니진…….”

“아니에요. 따라다니셔도 괜찮은데.”

 

아파트 단지로 귀가한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휘저었다. 어둠에 반쯤 잠긴 재민의 얼굴 위로 불빛이 드리운다. 재민은 대체로… 세상에 어떤 사정을 빚진 듯 지나치게 관대한 경향이 있었다. 문득 제노는 이 남자가 화를 내기는 할지. 타인을 힐난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궁금해졌다.

 

저 공권력에 거부감이 있진 않아서. 맨날 지켜보셔도 돼요. 여기 사신다면 집도 가까운데. 정황상 너무도 수상하고 무례한 미행으로 비쳤을 텐데. 기분이 나쁠 만도 한데. 재민은 조서 내내 그랬던 것처럼 평온하고 음전했다. 화난 기 하나 없는 목소리가 나긋하고 부드러웠다. 발바닥과 맞닿은 지면을 살짝 울리는 것 같은 음성이라, 아마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무던 귀를 기울일 것이다.

 

“저는 104동에 살아요. 아무 때나 찾아와서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손수건은 다음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재민이 해사하게 웃는다. 그 얼굴을 비췄던 헤드라이트가 사라지고서야, 제노는 재민이 걸치고 있는 옷감이 아주 얇다는 걸 알아차린다. 마실을 가는 사람처럼. 일전에 입고 온 셔츠와 분명 다른 옷이다. 네크라인이 넓고 깊은 티. 그 위에 가디건을 걸치고 있다. 측정기에 바람을 불 때 그랬던 것처럼, 옷감에 구김이 없다. 그는 외출을 하기 위해 차에 있었던 걸까.

 

차체에서 완전히 몸을 뗀 제노가 목례하자, 재민이 같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확실히…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제노가 집에 오는 길을 톺듯이 지켜본 후에야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양주 시는 밤에 돌아다니기 좋은 곳은 아니다. 해가 지면 안개의 포옹을 받는 도시니까. 가시거리도 짧고, 유흥가도 많지 않다. 도심의 근방은 문을 닫아 삽시간에 고요해진다. 전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시각. 저 남자는 이 자정에 어딜 가는 걸까? 집에 돌아오기까지 의문이 이어졌다. 제노는 집에 돌아와 거실의 협탁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바로 씻거나, 몸을 누이지 않았다. 분명 피곤한데도.

 

제노는 창밖을 내다본다. 날카로운 헤드라이트가 손톱 끝처럼 어둠을 할퀼 때마다. 눈을 깜빡이면서. 이미 이곳을 떠난 재민과 그 차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파트 단지가 완연히 고요해지고서야 제노는 비로소 귀가했다. 몸을 씻기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처럼 덮은 양주 시의 암적색 어둠이 완연히 낯설게 느껴졌다. 피부밑에 도사린 감각이 남의 것처럼 이상했다.

 

그건 분명 제노가 아는 기분이 아니었다.

 

 

 

 

 

 

 

분리수거

 

 

마약 수사는 완전한 내사 종결이 어려웠다. 단순히 검사가 음성이라고 혐의를 벗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재민의 경우 최초 간이 시약 검사에서 일부 양성 반응이 나왔으므로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늘. 조서에 협조적이었다. 묻는 말에 올곧게 거짓 없이 대답했다. 대체로 재민의 신문조서는 제노가 담당했으나, 그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재민이 제노의 안부를 물었다고 했다. 제노는 재민의 신문 내역과 소식을 전해 들을 때마다 목덜미를 주물렀다.

 

 

재민의 재산 목록, 현금 출납 기록은 조사를 명목으로 모두 공유되었다. 그가 얼마만큼의 규모 안에서 여유로운지. 벌이에 비해 씀씀이가 얼마나 큰지. 양주 시의 아파트를 누구에게 증여받았는지. 어느 정도의 돈이, 얼마나 사소한 목적으로 쓰이는지. 마약 긴급 수사팀의 인원은 두 명 이상 모이면 모두 입을 모았다.

 

경찰청장 아들 맞다대.

 

재민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청장 김씨인데? 그 사람은 나 씨고.

엄마 성, 엄마 성. 혼외자 맞대. 전 청장이랑 그 엄마랑 같은 학교 다녔다던데. 내 동기가 와이프 관할 수사팀인데 간부랑 회식하다가 들었대.

전 청장 자식이 다 딸이잖아. 그 사람 엄마가 갤러리도 하고 좀 있는 집이라서. 그냥 아들 지 성 주고 키운다구. 그 신고한 와이프도 애초에 기름집 딸이던데. 그래서 뭐라도 긁으면 나온다고 그쪽 팀장도 난리래. 뭐 하러 여기서 긴급수사팀까지 짜. 전 청장이랑 지금 청장이랑 사이도 안 좋잖아.

 

제노는 사무실 구석에 정물처럼 앉아, 마우스를 딸칵거리다 그런 소식을 얻어듣곤 했다. 사람들이, 참 조심성이 없어. 주둥아리에. 그렇게 생각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민은 신문 조서에서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 정말 아빠가 경찰청장이기 때문일까. 정밀 검사 결과에서도 이변은 없었다. 에페드린을 포함한 암페타민 성분에선 일부 양성 반응이 나왔지만 기타 마약류에서는 전부 음성 반응이 나왔다. 재민은 이비인후과 처방전을 제출했다. 모발 정밀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온 건 최지민 쪽이었다. 일전의 태국 여행에서 대마초를 피웠다고 했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재민의 혐의는 희미해졌고, 요지는 투약을 했느냐에서 알고 있었느냐로 옮겨갔다. 제노는 재민과의 신문 조서에서 배제되었다. 제노가 담당한 마지막 조서 내역을 보고 K 경위가 언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아니, 조서를 그림을 짜두고 물어봐야지 왜 이렇게 맹숭해요? 감 떨어졌어? 그 말투는 가히 신랄하고 상스러웠다.

 

긴급수사팀은 경찰청장 혼외자의 단순 투약 건에 의욕을 잃어갔다. 최지민조차 대마초 흡입에 초범이라 기소유예가 나올 판이었다. 재민에 관한 문서를 열람하는 이는 제노뿐이다. 재민의 안위를 끈질기게 신경쓰는 것도. 팀장은 이제 의료용 마약과 인터넷 마약류 유통망 타진에 업무의 방향을 두었다. 뭐든 긁으면 부스럼이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따라서 재민의 신문은 점차 잦아들었는데, 재민은 경장의 윽박지름에도 피로하지만 성실한 태도로 대답한 후 마지막에 꼭 묻는다고 했다.

 

“이제노 형사님은 바쁘신가요?”

“예?”

 

제노는 반사적인 대답 뒤에 볼캡 챙을 꾹, 잡아 눌렀다. 되묻지 말았어야 했다. 음조를 올리는 대신 내렸어야 했는데. 제노는 재민과 새뜸마을 분리수거장에서 다시 마주쳤다. 비번이라 못다한 잠을 자고 쌓인 쓰레기를 정리하러 나왔다가. 같은 아파트에 사니 단지 내에서 재민을 마주치는 일 정도는 예상치 못하지도 않았다만. 재민이 직접 그렇게 물을 줄은 몰랐다.

 

“요즘 서에서 얼굴 뵙기 어려운 것 같아서요.”

“제 얼굴 안 보면 좋은 거 아닙니까.”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재민은 경찰에게 다시 보자는 말을 하는 게 무섭지 않은 것 같다. 그의 대답에 재민이 제노를 돌아보았다. 라벨을 깔끔하게 뜯어낸 페트병을 통에 넣다 만 채로.

 

“좋은데요. 잘생기셔서.”

 

이 남자는… 무슨 반응을 바라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제노를 당황시키려고 하는 말이라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제노는 다시 볼캡을 깊게 쓰며 대답했다.

 

“제 낯에 금칠한다고 제가… 봐드리진 않습니다.”

“안 봐주시면 전 구속되나요?”

 

재민이 입매를 길게 트며 웃었다. 다른 형사님이 그러던데. 아마 불기소 처리 될 거라고. 제노는 이렇다 할 말 없이 통 안에 플라스틱 쓰레기를 던져 넣었다. 애초에 에코백 하나만큼의 쓰레기를 가져왔던 재민은 분리수거를 모두 끝마친 후에도 제노의 옆에 서 있었다. 제노가 무성의하게 던져 넣는 조그만 배달 용기를 유의 깊게 들여다보더니 묻는다.

 

“혼자 사세요?”

 

제노는 대답하는 대신 눈매를 살짝 찡그렸다. 혼자 살면, 뭐. 어쩌게. 그 떨떠름한 낯색에도 재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노가 던진 배달 용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잘 안 챙겨 드시는 것 같아요. 쓰레기 보니까.”

.”

“종종 식사하러 놀러 오세요.”

 

그렇게 말하는 재민은 도무지… 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친절하다. 달콤하고 밀도 높은 상식을 몸에 두른 채로 말을 잇는다. 저도 딱 1인분 만드는 게 버릇이 안 돼서. 여기는 날씨가 유달리 습하니까, 음식이 남으면 금방 쉬고. 친구도 없고 연고도 없어서. 좀 심심하고 외롭네요. 그런 재민에게 차마 최지민 씨를 만나지 그래요, 따위의 정나미 없는 말로 일갈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저희 집 와서 밥 먹으면 좀 곤란해지나요? 형사님이.”

.”

“저 이제 차에 가글 안 들고 다녀요. 비염약도 안 먹고. 그래서 지금 목소리도 좀 맹맹하네요. 그죠.”

 

왜일까. 이제노는 주취자나 강력범보다도, 이 선량한 남자를 대하는 일이 훨씬 어렵게 느껴졌다. 제노야말로 일선에서 당황하지 않는 인물인데. 재민은 난색 하나로 손쉽게 제노를 뒤집고, 요리하고, 당황시킨다. 재민의 다정함과 선량함은 제노의 매뉴얼 바깥에 있는 것들이다. 재민이 휘우듬한 고개로, 이번엔 제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저희 집 주소는 이미 아시잖아요.”

 

그렇다면 재민은 알고 있는 걸까. 종종 제노가 자정 무렵 아파트를 벗어나는 그의 차를 내려다본다는 걸. 그게 실상 재민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는 전혀 도움되지도 않고,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민이 이 양주 시의 어디쯤으로 가는지. 어떤 밤을 보내는지. 그의 알리바이가 못 견디게 궁금해져 불쾌하게 잠을 청한다는 것을.

 

준비한 모든 쓰레기가 버려졌다. 제노는 한미지와 최지민을 생각했다.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 까닭은. 제노가 준비되지 않은 충동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재민이 정말 무고한지, 확신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민이 비염약을 먹지 않아 잠긴 목소리로 제노를 부를 때. 너무 닳아 차라리 마모된 호의를 베풀 때. 도저히 그가 완전히 무류하다고는 믿을 수 없게 된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밤을 추격하고 싶어진다. 

 

“이따… 저녁 먹으러 가겠습니다.”

 

따라서 제노는 이 점도 높은 선량함 앞에서 준비한 매뉴얼을 폐기하기로 한다. 

 

 

 

 

 

1158호

 

제노에게 의식주의 의미는 크지 않다. 직업적인 숙명이다.

집은 자는 곳. 옷은 입는 것. 밥은 배를 채우는 것. 그 이상의 차원을 꾀하기엔 제노에게 삶이 늘 좀 퍽퍽했고, 양주 시에서 진행되는 삶의 전개도가 더더욱 그리했다. 섭식과 배설의 날. 채우고 비우는 행위의 연속. 양주 시의 이제노는 끝이 보이지 않는 선형. 생활 기능이 없는 무기체. 신문 4면의 궐기한 청년 이제노는 두 번의 경질 속에 죽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사망했다. 욕구가 거세되어 양주 시에 무단으로 투기되었다.

 

그러나 재민의 의식주는 다르다. 똑같은 새뜸마을의 가구지만 평형과 전용면적이 다른 것처럼. 그 생김새가 다르다. 제노의 집과는 강마루, 벽지, 화장실의 타일, 벽의 형태까지 다른 집. 재민의 집은 벽의 마감이 모두 둥글다. 넘어지거나 부딪쳐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집의 모든 공간과 가구와 소품이 유기적인 목적을 위해 제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재민이 제노를 그곳에 들였다. 제노만이 이 촘촘한 유기의 결합 속에서 이물질로서 앉아 있는 것이다. 조개탕을 떠먹으며.

 

새뜸마을 단지 내로 엷게 비가 내린다. 재민은 운두가 얕은 그릇을 내주었다. 마침 날이 흐려서 백합 비단 조개를 해감했는데 잘되었다고. 이런 날엔 조개탕을 먹어야 한다고. 제노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제노는 따지자면 미맹에 가까운 편이었지만 그래서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재민은 요리를 하는 데 익숙한 게 분명했다. 냉장고를 여닫거나, 인덕션과 그릇장을 오가는 동선에 망설임이 없었다. 제노는 국자로 조개를 골라내는 재민의 뒷모습을 본다. 여전히 자세가 곧고, 그의 집처럼 도드라진 곳곳이 단단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재민은 연한 옷감을 선호하는 걸까. 이런 얇다란 거미줄 같은 집에서도 옷을 갖춰 입는 걸까. 몸에… 체모가 없어서. 더 살에 닿는 것들에 예민한가.

 

“이번 주 중에 잠깐 서울에 가요. 이런 건 형사님한테 말 안 해도 되나요?”

“나쁜 짓 하러 가는 것만 아니면. 뭐.”

“나쁜 짓 되게 싫어하시네요. 직업병인가.”

 

접시에 조개껍데기를 발라내며 재민이 웃었다. 제노가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 쓰는 게 미지 차인데, 저는 영 불편해서. 원래 쓰던 걸로 바꾸기로 했어요. 저는 2인승 차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미지가 강아지를 데리고 있어서, 누가 데려갈지도 정할 겸.”

“강아지를 키우세요?”

“네. 두 마리인데. 한나랑 몬타나라고.”

“나자 돌림이네요.”

“오. 그거 알아차리는 사람 별로 없는데. 제가 나 씨니까.”

 

지레 신난 재민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보세요. 귀엽죠. 두 사람 모두 화면 속에 머리를 묻는다. 원래 강아지를 들일 때… 퇴역 군견이나 경찰견도 많이 알아봤거든요. 근데 미지가 나이 많은 개는 같이 오래 못 사니까 슬프다고 해서. 그때는 미지랑 제가 신혼 초라 같이 오래 살 줄 알았어요.

 

“그냥 생각이 났어요. 형사님도 그런… 강아지랑 인상이 참 비슷하네요. 단단하고. 딴 데 안 보고.”

“보통 그런 개를 강아지라고 하나요.”

“귀여우면 다 강아지니까……. 아. 얘가 한나. 얘는 몬타나.”

 

제노는 재민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사진 속의 강아지를 보았다. 희고, 풍만하고, 큰 개다. 귀가 처진 리트리버가 몬타나, 맹한 인상의 사모예드가 한나. 이름은 누가 지은 걸까. 묻지 않았다. 재민이 지었다고 대답하면 솔직히 좀 웃길 것 같았다.

 

“몬타나는 저를 별로 안 좋아해요. 미지를 더 좋아하고.”

“한나는요?”

“글쎄요… 한나도 제 말을 잘 안 듣긴 하네요. 강아지한테 인기가 별로 없나, 제가.”

“좋아할 것 같은데. 강아지는 착한 사람 좋아하지 않습니까.”

 

갤러리를 넘기던 손길이 멎었다. 입을 벌린 한나가 바보처럼 웃고 있다. 재민이 되물었다. 제가 착한가요? 질문이 귀에 닿고서야 재민과 머리카락이 엮여 있었다는 걸 알았다. 들숨이 안개만큼의 투명도를 갖고 있었다면 아마 미처 앞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제노는 수저로 사이로 맑은 국물을 휘젓는다. 입을 벌린 백합 조개가 저들끼리 달각거리는 소릴 냈다. 재민이 정말 무고한지 일말의 근거를 찾고자 왔는데. 왜 이런 시덥잖은 이야기나 나누고 있는지, 스스로가 좀 한심해졌다. 재민이 태가 나게 말수가 적어진 제노를 보며 입가를 문질렀다. 이내 그의 앞으로 정갈하게 반찬이 정리된 접시를 밀며 말했다.

 

“저를 안 좋아하는 것들은 어떻게 다뤄야 할지 참 어려워요.”

“…….”

“형사님은 저에 대해서는 별로 안 궁금하신가 봐요.”

 

뭘 또 궁금해해야 하나. 이미 곤란할 정도로 그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데.

 

“이혼은 왜 하셨습니까?”

“제가 답변하면 수사에 도움이 될까요?”

“아니오. 그냥 제가… 궁금한 겁니다. 개인적으로.”

 

재민은 양주 시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선량한 양지의 인간 같다. 누군가 부딪힐 모서리를 모두 갈아버린, 결격 사유가 없는 남자. 이런 인간이 왜 한미지와 협의 끝에 이혼했는지. 왜 한미지는 재민을 신고했는지. 제노의 좁은 상식으론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재민이 웃는다.

 

“미지가… 제가 남자랑 키스하는 사진을 봤대요.”

 

왜 체모를 제거했냐고 물었을 때와 꼭 같은 웃음이다.

 

“어떤 사진이었는진 잘 모르겠어요. 한 십 년 전 얘기니까. 그게 아마 지민이었을 거예요. 지민이가 미지한테도 연락할 줄 알았다면 안 만났을 텐데. 미지도 아마 열받아서 그랬겠죠. 이해해요.”

“원래 남자를 좋아하십니까?”

“남자도… 좋아해요.”

“…….”

“근데 미지는 모태 신앙이거든요. 저는 아니고.”

“양주 시에는 왜 오셨습니까? 연고가 없으시던데.”

“증여받은 아파트가 있는데, 양주 시가 조정대상지역이라 실거주 기간이 필요하다고 해서요. 생각 정리도 할 겸 왔어요.”

“생각 정리하기 좋은 도시는 아닐 텐데요.”

“그러게요. 교통 정복 입는 형사가 있을 줄 몰랐거든요.”

 

그래도 아버지가 저를 예뻐하시니까. 이런 아파트도 증여해 주시고. 싫지 않아요. 심심해서 그렇지. 재민의 일련의 대화 동안 단 한 순간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식사가 이어진다. 이른 저녁 동안 새뜸마을의 단지 위로 울울한 안개와 밤이 드리운다. 재민이 몸을 당겨 거실의 불을 켰다. 재민은 제노가 말끔하게 비운 그릇을 겹쳐 정리했다. 제노가 돕는 시늉을 하자 손을 내저었다. 이어 냉장고를 열어 반찬통을 꺼내더니, 조그만 락앤락 통에 꼬막장과 갈치속젓, 오이고추무침 따위를 옮겨 담았다. 재민은 만듦새가 정갈한 락앤락 통을 제노의 손에 들려주고 만다.

 

“다음에 반찬통 가져다 주세요.”

 

이건 빚지는 것들이 많아진단 뜻이다.

 

제노는 습지고 어렴풋한 비를 갈라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재민과 한미지와 최지민을 생각했다. 체모가 없는. 남자와 키스하는 사진을 남긴. 그리고 한 번 더 그와 키스한. 남자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남자도, 좋아한다고 답변하는. 결백하지만 무죄가 아닌.

 

재민.

 

제노는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 가장 깊숙한 곳에 반찬통을 밀어 넣었다. 보이지 않게. 재민을 만나면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위험을 직감하는 본능이라기엔 지나치게 연하고 녹진하다. 재민에게 빚진 손수건과 반찬통. 그리고 갈피를 잃어버린 신문 조서. 예상하지 못했던 저녁 식사. 상기한 것들은 과잉 진압으로 쪼개버린 피의자의 코뼈, 위장 수사에 대버린 본명 같은 실수와는 또 다른. 완전히 다른 차원과 감각으로 자신의 삶을 바꿔놓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건 그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부드럽고 달콤한 형태의 정복이니까.

 

 

 

 

 

 

북부경찰서

 

 

“나재민 담당 형사 되세요?”

 

북부경찰서는 본관과 별관으로 건물이 분리되어 있다.

본관에 수사과, 그리고 별관에 종합민원실과 교통계 사무실이 있었다. 불과 몇 주 전까지 제노는 별관에서 근무했으나 신규 편제와 동시에 본인 몫의 데스크테리어를 모두 이관했다. 그러니 누군가 민원실에서 제노를 찾는다고 했을 때, 제노는 민원대에서 멋대로 교통과의 사무실을 안내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양주 시에서 어떤 사람이 품과 시간을 들여 이제노를 찾아온단 말인가. 종합민원실에서 제노를 기다리고 있던 이는 체구가 나뭇동처럼 길고 단단한 여자였다. 커다란 눈이 자기 확신으로 가득찬.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제노는 그녀가 한미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구신지.”

“저는 한미지예요. 재민이 신고한.”

 

한미지는 제노가 생각한 것보다 키가 훌쩍 컸다. 이마 선이 가파르고 눈은 온실의 열전구 같았다. 양지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재민과 비슷했지만 속질이 완전히 달랐다. 이런 여자가 양주 시에 산다면 하루도 못 지나 말라비틀어지고 말 것이다. 재민의 말을 빌려 모태신앙이라고 했던가. 재민은 그녀와 차를 바꾼다고 했는데. 한미지는 뭘 위해서 양주 시까지, 그것도 제노를 찾아온 걸까.

 

“예. 제가 나재민 씨 담당 형사 됩니다.”

“재민이 불기소 처분 됐다면서요?”

 

제노는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기소 서류를 작성하느라 쓰고 있던 안경을 주머니에 걸쳐 넣고 눈가를 주물렀다. 재민은 고발인의 신고 외에 혐의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 증거 불충분으로 불송치가 결정되었다. 그래서. 고발인으로서 재정 신청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제노는 눈썹을 찡그리면서 한미지를 타일렀다. 이럴 때 한미지를 더러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호칭을 입에 담기가 좀 어려웠다. 한미지 씨. 아내 분. 고객님. 여보세요. 저보세요. 무엇 하나 입에 붙는 게 없다.

 

“재정 신청하시려고요? 그게 참 말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걔 그때 최지민이랑 있었던 거 맞죠?”

“예?”

“최지민도 불기소 처분 나왔어요? 걔 로스쿨 다닌다던데. 이런 건 문제 안 되나요?”

 

미지가 열받으면 공권력까지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어요. 재민이 그렇게 말했던 게 생각났다. 이해가 갔다. 그의 전처는 그런 경우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경우가 없는 것 같았다. 서초 서에서는 자꾸 관할이 아니라고 안 알려주잖아요. 둘이 뭐 했대요? 한미지의 언성이 높아졌다.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던 사람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이 드문드문 등허리를 찔렀다. 제노는 손바닥으로 한미지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욕구를 어렵게 누른다.

 

별관 밖 흡연실로 이끄는 손길에 한미지는 순순히 응했다. 흡연실에 몸을 들이자마자 한미지는 전자담배를 빼 물었다. 크리스천이 담배 피워도 되나. 저렇게 쉽게 니코틴에 분노를 태워도 되는 걸까. 한미지는 사흘을 주린 사람이 밥을 먹는 것처럼 담배를 피웠다. 제노는 짧게 고민하다 마찬가지로 담배 한 까치를 꺼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한미지는 연신 혀를 짓씹고 최지민을 저주했다. 입매 사이로 달콤한 열대 과일 연기가 기슭의 안개처럼 샜다.

 

“최지민 그 또라이 같은 게. 재민이는 몰라도 최지민은 진짜 약 빨았을 거야.”

 

맞다. 여자의 촉은 정말 무섭다. 제노는 손으로 연기를 휘저으며 한미지에게 물었다.

 

“정말 나재민 씨가 마약을 투여해서 신고하신 게 맞습니까?”

 

여기서 한미지가 그렇다고 대답해도 사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불송치 된 사건을 다시 기소할 수 없다. 따라서 제노의 질문은 지극히 사적이고 비공식적인 영역의 것이다. 제노의 물음에 한미지가 눈을 찡그린다.

  

“재민이가 정말 마약을 했으면 송치가 됐겠죠.”

“…….”

“실종 신고는 해봤자 출동을 바로 안 하잖아요. 마약 신고가 직빵이라고 그러던데요, 제 친구가. 저도 이렇게 귀찮아질 줄은 몰랐어요. 저도 그때 심신미약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걔네 경찰 출동해서 같이 못 있었을 거 아니에요.”

“허위로 신고하시면 벌금 냅니다. 그거 공권력 남용이에요.”

“최지민은 했을 거라니까요? 그럼 허위 아닌데. 했죠?”

 

하다마다. 대마도 하고 키스도 했다던데. 얼결에 걸린 격이지만. 제노는 피의자 신문 조서에 그런 불순한 사실까지 면밀히 작성하지 않았다. 재민과 나눈 대화 중 의미 없는 몇 가지는 제노만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제노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한미지의 전화 한 통에 제노는 별관의 교통과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한미지가 아니었다면. 재민이 양주 시에 오지 않았다면. 제노는 영영 이곳에서 침잠하는 삶을 누릴 수도 있었을 텐데.

 

“형사님. 무교시죠.”

“예. 그런데요.”

“동성애도 죄지만 색욕도 죄예요. 재민이랑 저는. 지금 이혼을 숙려하고 있잖아요.”

“예…….”

 

그래도 좋으신 분 같던데요. 제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흡연실 바깥을 보았다. 성경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던가. 과연 그는 이웃을 사랑하는 인물이긴 했다. 제노는 그와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그 부드럽고 동그란 집에서 탕 요리를 먹고 반찬통을 빚졌다.

 

“걔가 형사님한테도 잘해 주던가요?”

 

한미지가 제노를 보고 있었다. 가느다랗게 좁힌 눈초리로. 

 

“원체 친절하신 분이니까요.”

“재민이는…….”

“…….”

“재민이는 이웃도 남자도 그냥 다 사랑하는 것 같아요. 잘 때도 꼭 사람 살에 발을 붙이고 자야 하고. 사귈 때는 그게 귀여웠는데. 대학교 때도 유명했어요. 남자 만난다는 것만 몰랐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바닥을 닦으면 걸레인 거예요. 속된 말로. 그렇게 말하는 한미지의 입에서 여전히 색채가 짙고 달콤한 향이 났다. 갈라섰지만 부부라고. 달금한 향기를 풍기는 건 비슷하다. 한미지는 이런 조그맣고 불필요한 소란을 부리기 위해 서에 찾아온 걸까. 고작 담당 형사한테. 남편이 걸레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 재민보다도 최지민이 불기소가 날지가 더 궁금해서. 제노는 재민이 좀 가엾다고 생각했다. 제노는 재민과 지민의 만남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모두 꿰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미지가 신고한 날을 제외하고 사적이나 공적으로 만난 바가 없었다. 재민이 첫 신문조서에 말했던 것처럼, 재민과 한미지의 결혼관계는 이미 이어질 수 없다고 협의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도장을 찍자마자 양주로 기다렸다는 듯이 이사 와서…….”

.”

“왜 하필 양주로 왔지? 이 깡촌에.” 

 

최지민 때문은 아니다. 재민에겐 증여받은 아파트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제노와 이웃사촌이 되었고. 제노는 답을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았다. 날씨가 얄궂을 정도로 맑았다. 양주시답지 않았다. 이러다 산허리에 비구름이 고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변덕스럽게 비가 올 것이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다. 제노에겐 충분히 골머리를 앓고 몸을 써야 할 사안이 많았다. 고작 재민이 걸레라는 얘기를 듣기 위해서 한미지에게 내내 붙잡혀 있을 순 없었다. 

 

“이런 얘기를 왜 저한테 하시는지.”

 

한미지가 제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제노도 그 백린탄 같은 눈동자를 마주 본다. 한미지가 연기를 풍기며 말했다. 이러면 소문이 나잖아요. 최지민도 좀 곤란해졌으면 좋겠고. 누가 왜 이혼했냐고 물어보면 저도 그럴듯한 핑계가 필요한 것 같아서요. 재민이한테 유감은 없어요, 저도. 솔직히 좀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

 

 

그녀는 제노에게 이미 일어난 전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걸까. 아니면 어떤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온 걸까. 제노는 비로소 라이터의 잠금쇠를 돌렸다. 담뱃불을 붙였다. 연기와 함께 말을 삼킨다. 안타깝게 되었다고. 하필 담당 형사가 나라. 양주 시에 연고도 없으니, 이런 얘기를 소문낼 사람조차 없는 나라서. 그렇게 말하는 대신 한미지에게 마지막으로 묻는다.

 

“왜 이혼하셨습니까?”

“방금 제가 다 말씀 드렸잖아요. 참나.”

 

제 몫을 다한 액상 담배를 가방에 찔러 넣으며 한미지가 자못 짜증을 냈다. 지금 정말 짜증을 내야 하는 게 누군지 모르는 걸까. 대화 몇 번 섞었다고, 한미지는 제노를 편하게 여기거나. 최지민의 담당 형사와 맞담배를 피웠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퍽 여유로워진 것 같았다. 아니면 대체로 타인을 그렇게 삼고 마는 해묵은 습관일지도 몰랐다. 

 

그는 이미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제노는 왜 재민과 한미지가 이혼했는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재민이 직접 말해주었으니까. 하지만 재민의 일에 관해서라면 자꾸… 더 이상 대답이 효용 없을 의문을 갖게 됐다. 제노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의미없는 물음. 계획 밖의 궁금증. 재민은 제노의 삶에 존재한 바가 없었던 규격 외의 인간이니까. 

 

하지만 한미지는 다른 이유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입가에서 투명한 망고 냄새를 풍기며 제노에게 대답했다. 그것만큼은 소문내면 곤란한 비밀이라는 것처럼, 작은 음성이다. 사실… 한미지가 속달거린다. 

 

 

체력이 딸려서 이혼했어요.

 

 

제노는 대답하지 않는다. 필터 끝을 짓씹는다.

최지민을 저주하던 종전의 한미지처럼.

 

 

 

 

 

 

본관과 별관

 

 

제노는 본관 건물을 빠져나와 블록을 따라 걷는다.

 

이슥한 시각의 경찰서는 멍울진 노등만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따뜻한 가슴으로 국민의 손과 발이 되겠습니다. 안개의 홀씨 사이로 비치는 표어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한미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퇴근이 늦어지지 않았을 텐데. 제노는 자켓 대신 입은 남방을 벗어 팔에 걸쳤다. 검은 속티가 축축한 등판 사이로 달라붙어 있었다. 양주 시의 여름나절은 못 견딜 정도로 덥진 않았으나 과연 습윤하고 눅졌다. 

 

별관 앞 민원인 주차장의 커다랗고 하얀 벤츠의 차체를 지나칠 때, 제노는 재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처음 보는 차였으니까. 아마 육둔한 차마의 옆에 서 있던 재민이 보이지 않았다면 영영 모르는 채로 지나쳤을 것이다. 문가에 기대 서 있던 재민이 손을 들었다. 제노는 손을 희뜩이는 그를 거의 모르는 척 하고 지나쳤다가, 이 미터를 채 가지 못해 다시 돌아왔다. 

 

“불기소 처분 났는데. 서에 이제 안 오셔도 됩니다.”

“오늘 차 안 가져오셨죠? 아까 보니까 단지 앞에 있던데.”

 

제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자, 재민이 다시 여상스러운 태도로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왜 문을 열어 주지. 제노는 생에 이런 물리적인 에스코트를 받아본 바가 없었다. 이상한 기분으로 올라타자 재민이 마저 문을 닫아 주었다. 운전석에 올라타곤 안전벨트도 매 주려는지 손을 뻗었다. 제노는 개를 말리듯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재민이 더 이상 손을 벌리진 않았지만, 그가 안전벨트를 잘 매는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노는 짧게 상념한다. 재민의 이런 무분별한 다정함이 한미지의 발언에 대한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 이제노는 서른줄의 형사인데. 재민은 그를 발가벗은 애 다루듯 하니까.

 

재민이 내비게이션에 새뜸마을 2단지를 찍었다. 아직 양주 시에 완전히 적응하지 않아 길눈이 설다고 했다. 차의 외체를 만져 보기까지 했지만, 그 조수석에 앉아 있자니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아랫배가 뜨끔거렸다. 재민은 어딜 다녀오는 걸까. 아니면 어딜 또 가려는 걸까. 정말 제노가 차를 가져오지 않아 오롯하게 이곳에 왔나. 제노는 끊임없이 재민의 결백에 재고한다. 재민의 차가 경찰서를 벗어난다. 무언가를 토해내듯 크게 일렁이며.

 

“미지가 왔다면서요? 연락 받았어요. 담당 형사님 뵀다고.”

“예. 아까 낮에.”

“우리 형사님 잘생겼지, 하니까 욕하던데. ”

 

어쩌자고 한미지한테 그런 얘기를 했지. 낮에 본 한미지라면 욕을 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미지는 욕을 잘해요. 좀 재능이 있어. 재민이 덧붙였다. 제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재민이 운전하는 방식은 꼭 자기 자신을 닮았다. 정성과 돈을 들여. 더없이 친절하고 부드럽게. 미리 차선을 바꾸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을 때 팔을 뻗는 매너가 있었다. 재민은 차의 방향을 틀 때마다 필요 이상으로 조수석을 돌아봤는데, 그게 시야 확보를 위함인지. 제노의 눈치를 살피는 건지 잘 구별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그는 나의 눈치를 보는가.

 

새뜸마을은 양주 시의 남쪽에 있었다. 출퇴근길에는 꼭 녹둔천을 가르는 큰 도로를 지나야 했다. 재민은 본론을 꺼낸 건  대로에 접어들고서야 본론을 꺼냈다.

 

“미지가 뭐라던가요?”

“…걸레라고.”

“누가? 형사님이?”

“아니오. 재민 씨가.”

“거짓말을 진짜 못하시는구나.”

 

재민은 당황하지 않는다. 넌지시 웃으며 이제는 적을 두지 않은 처를 감쌀 뿐이다. 미지가 원래 좀 직설적이라서 그래요. 나쁜 앤 아니에요. 찾아온 것도, 그냥 자기 맘대로 뭐가 잘 안 되니까 답답해서 온 거 같던데. 전 아내를 두둔하는 것 같지만 거리감이 있는 말투다. 남의 일을 대하듯.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 대해 말하듯. 한때의 물가처럼 평온했다. 

 

“아내분이 걸레라고 하는데 화가 안 납니까?”

“그거 미지한테는 칭찬이에요. 크리스천이잖아요.”

“…….”

“그리고 이제 아내가 아니니까.”

“그래도 전처분이 왜 그렇게 얘기하시는지 이해가 잘 안 가서.”

“종교적으로… 만족할 만큼의 성행위는 죄악이라던데요. 근데 저는 결혼 전까지 너무 많이 만족을 했다는 거예요. 거기다 남자랑도 했다니까.” 

“…….”

“저는 미지 이해해요.”

“그만 좀 이해하세요.”

 

그러나 재민은 실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한미지가 봤다면 도리어 화가 날 정도로. 형사 님이 곤란하셨겠어요. 그렇게 일갈하고 말 뿐이다. 안전벨트에 가로질린 가슴팍은 더없이 온순했다. 제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타인의 의도로 사소한 불행에 휘말려도 여전히 온누리에 다정할 수 있나. 그는 신고를 당해 마약 사범이 될 뻔했다. 경찰서를 들락날락거리며 잦은 수고와 사소로운 수모를 견뎠다. 무고하게 흉을 잡혔다. 이 모든 것들이 애초에 없었던 일인 양, 재민은 한미지와 모두에게 자애롭다. 세상이 그에게만큼은 너무도 쉽고 좁다란 걸까. 제노가 한미지였다면 재민과 이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있는 메시아에 다름 아니니. 실상 그녀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교리에 가깝지 않은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제노는 어둑한 창 밖을 바라보다 왈칵 묻는다.

 

“도대체 화를 언제 냅니까?”

“저도 화는 나죠. 근데 그걸 굳이 남한테 내기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럼 언제 화가 나요?”

“일이 참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제노와 다른 의미로 재민은 짓는 표정과 드러내는 감정이 획일적이다. 제노는 재민이 또 어떤 표정을 더 갖고 있는지를 좀 알고 싶었다. 배부른 짐승처럼 웃는 얼굴은 이미 알고 있다. 노여울 때. 슬플 때. 억울할 때. 열이 받쳐 스스로를 견딜 수 없을 때. 어떤 각도로 입술을 누이거나 눈을 찢는지. 어떤 방식으로 숨을 시근거리고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제노는 재민의 부정이 궁금했다. 

 

“형사님은 화 별로 안 내죠.”

“아뇨. 냅니다. 너무 내서 여기 온 거예요.”

“왜요?”

“과잉 진압을 했습니다.”

“사람을 때려요? 형사님이?”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조수석을 돌아봤다. 앞에 보세요. 사고 납니다. 제노가 중얼거리자 바람 새는 소릴 내며 웃었다. 재민은 제노를 뭐라고 생각하기에. 그냥 친절한 이웃? 미안하지만 제노는 형사과 경찰이다. 물론 재민을 처음 봤을 때는 교통과였지만. 제노는 물리적으로 범죄를 다루고, 범법자와 다투고, 나쁜 사람을 잡는다. 우아하게 앉아서 모든 일이 해결되기를 바랄 수 없다는 뜻이다. 때때로 무력을 동반하고 법의 변두리에서 외줄타기를 해야 하니까. 하지만 운전대를 잡은 재민은 여전히 방긋거리고 있다. 왜 웃지. 사람을 때리는 내가 웃긴가.

 

“어쩌다? 형사님은 사람 때릴 때도 좀. 한 대 패겠습니다. 또 치겠습니다. 하고 때릴 것 같은데.”

“저는 때릴 때 경고하지 않습니다.”

“이거 봐. AI가 말하는 거 같아요.”

“재발령이 두 번 났는데. 둘 다 과잉진압 때문이었어요.”

“얼마나 때렸는데요?”

“좀 많이.” 

 

제노는 본디 자애로운 성정까지는 못 되었다. 모든 일의 서두와 끝에 재민처럼 속모를 얼굴로 웃고 앉아 있지는 않았다. 소명이 그러했다. 집을 지키는 한나는 못 되었으니 발꿈치를 무는 개였다. 범과를 엎질러놓고 뻔뻔히 문대는 꼴을 보면 어김없이 눈을 까붙이지만 짖지는 않는. 우짖는 개는 물지 않으니까. 지방경찰청 소속의 제노는 이미 빠진 어금니 세 낱을 손에 쥐고 특수강간범을 줘팼다. 마포경찰서 소속의 제노는 손금을 물어뜯은 마약사범의 코뼈를 쪼개놨다. 그리하여 양주 시의 교통과까지 좌천되어 일선에서 배제되었던 것이고.

 

그러나 제노를 다시 형사과로 데려놓은 재민은 연연하지 않는 것 같다. 제노는 멀거니 웃는 재민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가 고개를 돌려 꾹 입을 다물고서야 겨우 웃음이 잘게 소강했다. 재민은 소실점처럼 작아지는 길과 내비게이션을 흘끔거리며 중얼거렸다. 엄청 나쁜 사람이었나 보다. 형사님한테 맞을 정도면. 

 

“근데 좀 섹시할 거 같네요. 사람 때릴 때도. 그런 얘기 자주 들으시죠?”

 

…도? 

 

“안 듣습니다.”

“경찰서 사람들 참 보는 눈 없는가 봐요.”

 

재민이 얕게 혀를 찼다. 진심으로 그들의 미적 감각에 탄식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재민은 미추의 눈금이나 감정의 계기판이 망가져 있을는지도 모른다. 형사인 제노를 가끔 미취학 아동 다루듯이 대하고, 사람을 팰 땐 섹시하다고 말한다. 범인은 분명 아니다. 

 

차 안은 지극히 고요하고 적막하다. 엔진과 바퀴 소리로 노면의 질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재민의 차는 시트의 가죽마저 사람의 살갗처럼 부드럽고 녹지다. 곳곳에서 차마 몸을 맡기기 송구할 정도로 좋은 향이 났다. 제노는 까만 티셔츠의 섶을 한 번 들썽거린다. 주야 패턴 근무 중이었으니, 좋은 냄새가 나진 않을 텐데. 더워서 바람을 일으키는 줄 알았던지 재민이 에어컨의 온도를 내리며 말했다. 옆에 물 있어요. 그러나 제노는 고요히 앞을 보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의 다정에 응하지 않았다. 다만 묻는다.

 

“그때, 밤에. 제가 차를 함부로 만졌던 날에.”

“아, 그때. 형사님 놀라서 까무러친 날.”

“…어딜 가셨는지 궁금합니다.”

“이것도 수사의 일환인가요?”

“아뇨. 재민 씨는 기소 안 됐잖아요.”

 

수사는 이제 다 끝났어요. 제노가 잘라 말하자 재민이 입을 다물었다. 단면을 섪게 잘라낸 것처럼 어설픈 침묵이다. 재민이 운전대를 옴킨다. 긴 입매에서 웃음이 성냥불처럼 사그라진다. 그 잿불에서 서늘하고 불온한 편벽이 느껴졌다. 온기를 반절이나마 걷어낸 재민의 원형은 친절한 이웃과 거리가 멀다. 오랜 시간 그가 가다듬어 온 반응 방식과 염습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서울에 다녀왔어요.”

“왜요?”

“여긴 다 신혼부부밖에 없잖아요. 외로워서. 원래 뛰는 걸 좋아하는데, 밤에 뛰자니 또 적적해요. 안개가 너무 진해서.”

.”

“그때는 형사님이 밥 먹으러 오실 줄 몰랐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재민은 다시 웃고 있다. 누군가 신경을 써서 다듬은 것 같은 굴곡의 뺨 위로 양주 시의 땅거미와 백열등이 번갈아 비친다. 새로 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도로엔 차량이 모자랐다. 어슴푸레한 안개 속에서 노란 표시등들이 반점처럼 명멸한다. 외로워서. 그는 외로워서 그 밤에 홀로 서울을 갔다. 이 도로를 되짚어 갔다가 다시 또 돌아왔다. 왜. 제노는 의문을 삼킨다. 그는 외롭다는 이유로 제노에게 밥을 먹였다. 편도 30분의 대로를 거슬러 언제 나올지 모를 제노를 기다렸다. 그랬다면 언제고 또…

 

나를 찾아올 수 있었어야지. 

 

“저도 궁금한 게 있어요.”

“예.”

“형사님이 저한테 잘 대해 주시는 거요.”

 

차가 사거리의 신호에 멈춰 섰다. 그는 착실히, 아무도 없는 차도의 적막 속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명도가 낮은 안개의 포자 사이로 적신호가 맺힌다. 재민은 꽤 오래, 요리하듯. 말을 골라내는 것 같았다. 적신호가 사그라지고 직진 신호로 바뀔 때쯤에서야 재민이 솎아낸 말문을 텄다.

 

제가 피의자여서인지. 불쌍해서인지. 아니면 아버지 때문인지 궁금해요.

 

아직 좌회전 신호는 켜지지 않았다. 재민이 솎아낸 질문은 그가 생각한 수위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그가 아버지 얘기를 바로 꺼낼 줄은 몰랐으니까. 제노는 입가를 문지른다. 거스러미가 일어난 입술의 표면이 툭툭 걸렸다. 재민의 시선이 손끝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재민이 그런 오해를 할 만큼, 스스로가 다정을 베풀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기억은 대체로 재민을 의심하는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제가 잘 대해 드렸나요?”

“사람 때렸다는 얘기 들으니까 잘해 주신 거 같아요.”

“셋 다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그때 해 주신 조개탕이 아주 맛있었거든요.”

“먹는 거에 약하시구나.”

 

또 저녁 드시러 오세요. 저 다른 것도 잘해요. 곧 좌회전 신호가 깜빡거리고, 재민이 부드럽게 핸들을 틀었다. 다른 것. 제노는 혓바닥 위로 그 단어를 굴린다. 재민이 발음하는 방식과 좀 다르다. 재민의 ‘다른 것'은 좀 더 불순하게 들렸다. 한미지가 쓸데없는 말을 했기 때문인가. ‘잘해요'를 발음한 그의 입술이 가느다랗게 웃은 까닭인가. 

 

“재민 씨는… 양주 시에 와서 화가 났던 적이 한번도 없습니까?”

“아뇨. 있어요.”

 

제노를 돌아보며 웃는 얼굴에 발작적인 노등의 불빛이 스친다. 

 

“음주 측정 걸린 이후로 항상 화가 났던 거 같아요.”

.”

“도대체 손수건은 언제 돌려주시나, 하고.”

 

양주 시의 밤은 고적한 암적의 어둠이다. 모두 규격 내 네모난 가정의 품에 얼굴을 묻고, 빈 거리에 녹둔천이 움틀거리는 소리가 영영 울리고 만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어떤 질문을 해도. 아무도 야간에 저질러진 부정을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제노는 오른쪽 바지 주머니의 솔기를 누른다. 지긋한 손끝에서 도톰한 촉감이 느껴진다. 재민의 손수건이 그곳에 있다. 다시. 재민의 시선에 달린 손이 그곳을 자무한다.

 

옷을 벗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게 어떤 옷이든.

 

 

 

 

 

 

348호

 

 

제노는 본다.

 

시동이 걸리는 소리에 눈을 뜨게 된다. 원래 잠귀가 어두운 편은 아니지만서도. 새뜸마을 2단지는 아직 감청색 새벽에 휩싸여 있다. 재민은 늘 지상주차장에 차를 댄다. 발코니의 창문을 통해 볼 수 있는 그 위치다. 제노는 맨발을 디딘 채로 창 밖을 내려다본다. 실루엣이 네모난 차. 하얗고 커다란 차. 그 차가 헤드라이트를 번뜩거리며 발발 떨고 있다. 처음부터 잠을 자지 않은 것처럼 사위가 명징하다.

 

어딜 가는 걸까?

제노는 가정하고 소망한다. 새뜸마을의 단지 수가 아주 많았다면. 하고 많은 차 중에 그의 차 하나를 포착하는 일이 아주 어려웠으면. 하지만 그 일은 아주 빈번하고 쉽게 일어난다. 재민이, 혹은 그의 차가 구별이 안 갔으면 좋겠다. 길바닥에 떠돌아다니는 차와 같아서,  감별할 수 없게 다른 사람과 같았으면 하는데. 그와 그가 운전하는 차들은 왜 이다지도 잘 보이는 걸까. 관음하는 제노의 잘못이 아니다. 그가 지나치게 눈에 잘 띄는 탓이다. 이 채도 낮은 도시에서 혼자 해상도가 높아서. 안개 속에서 혼자 명멸하는 점이라.

 

차키를 손에 쥔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왜 그를 쫓고 있나. 스트레스로 뇌의 한구석이 연소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제노의 눈은 고요하고 푸르스름하게 빛난다. 연소하는 인처럼. 체포를 위한 잠복처럼. 검거를 위한 미행처럼. 지금 재민을 쫓는 건 형사인 이제노인가, 아니면 범인인 이제노인가. 하지만 제노는 소리 죽여 문을 닫는 법, 숨을 죽여 좇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재민의 차가 아파트 단지를 나서기 시작한다. 제노는 뒤이어 시동을 걸었다. 거리를 두고 세자리 수의 번호판 읽는다. 쫓기 시작한다.

 

 

재민의 무죄를. 재민의 결백을.

외로움을 닦아내기 위해 양주 시를 벗어나는 재민의 차를. 

 

 

 

 

 

 

 

경부고속도로

서울 2km

 

 

양재의 주상 복합 레지던스.

재민이 지하 2층 주차장에 차를 댄다. 제노는 코너 뒤에 차를 대고 잠시 시간 차를 두어 쫓는다. 재민은 주거동을 향해 걷는다. 제노는 발소리를 죽인다. 주거동에 출입하기 위해선 비밀번호를 치거나 경비실의 인을 득해야 했다. 재민은 경비실에 1208호를 댔다. 이미 구면인 듯, 경비원은 별 말 없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제노는 재민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현관에 발을 들이밀었다.

 

그는 경비실에서 붙잡히는 대신 먼저 공무원증을 댔다. 공무 중입니다. 그렇게 말하니 경비원은 더 붙잡지 않았다. 제노는 청년 경찰의 판형처럼, 나쁜 짓이라곤 영 거리가 멀게 생겼으니까. 무슨 일이 났어요? 아닙니다. 신고가 들어와서. 금방 나갈 겁니다. 뒤통수로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그는 경찰이 언제나 2인 1조로 움직인다는 걸 모르는 게 분명했으니 다행이었다. 

 

공동현관의 엘리베이터는 두 대. 하나는 이미 12층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제노는 반대쪽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2층을 누른다. 모든 일이 제노의 컨트롤과 계획 밖에 있다. 이 밤의 미행, 공무 집행 사칭, 전부 다 계획도 생각도 하지 않은 것들이다. 제노는 손잡이를 꽉 움켜쥔다. 미끌리는 소리가 날 만큼 세게. 거울 속 경장 이제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다. 제노는 표백된 뺨을 문지른다. 서울의 밤은 양주의 것보다 훨씬 더 불쾌하고 끈적거린다. 그는 점차 증가하는 층수의 숫자를 노려본다. 문이 열린다.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친절하게 12층이라고 일러주기까지 했다. 제노는 복도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경첩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울린다. 

 

제노는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 메아리가 남은 복도를 가로지른다. 1208호의 문은 닫혀 있고, 제노는 고요히 현관문에 귀를 댄다. 3센티미터 철제문 너머는 적요. 제노는 어떻게 재민이 들어간 집의 문을 딸지, 재민에게 어떤 말을 할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행동은 즉시의 생각. 그는 문에 작게 노크한다. 이내 두들긴다. 주먹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네모난 문이 온통 울릴 정도로. 이윽고 문 너머가 응답한다.

 

누구세요?

“경찰입니다.”

경찰이 왜요?

 

제노는 침묵을 고수한다. 대답 대신 바지 뒤춤에서 경찰 공무원증을 빼 들었다. 문이 열린다. 안전장치가 걸린 채다. 십 센티가량 열린 문틈 새로 순한 인상의 여자가 보였다. 키는 좀 크고, 나이는 제노보다 연상으로 보였다. 긴장한 기색은 아니었다. 제노는 공무원증을 들어 보였다. 그녀가 제노의 얼굴과 가슴팍을 흘끔거린다. 이윽고 안전장치가 열린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방금 나재민 씨 여기 왔죠.”

“재민아! 너 찾는데?”

 

제노는 문고리를 낚아채 실내에 들어섰다. 아파트는 현관에서 거실까지 동선이 일직선. 중문이 없었다. 문을 열면 좁다란 거실이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조명이 밝지 않았다. 곳곳에 간접등. 손잡이를 빼앗겨 낯선이를 집에 들인 여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노는 집안의 곳곳을 뜯어본다. 쓰리룸. 거주 목적의 인테리어. 협탁 위 패키지를 까지 않은 올리브, 보냉백 속의 브리 치즈와 무화과 스프레드. 콘돔 박스. 그리고 앳된 얼굴의 남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빈백에 앉아 있다. 재민이 아니다.

 

“형사님?”

 

재민은 주방에 있다.

오프너와 와인 바틀을 들고 있다. 맨몸에 네크라인이 얕은 가디건을 걸치고 있다. 제노를 보는 얼굴은 집주인처럼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뭘까. 제노가 쫓아오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그는 제노에게 어쩐 일로 왔느냐는, 여기서 무엇을 하냐는 상식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 잠시 코르크를 따느라 팔에 힘을 주었다, 이내 병을 아일랜드 바에 내려놓는다. 밖에 덥죠. 땀 흘리셨나 봐요. 그렇게 말할 뿐이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뒤에 너무 바짝 붙으시던데…?”

“…….”

“저도 형사님 차 번호 알거든요.”

 

오늘은 출근 안 하셨나 자주 들여다 봤으니까. 일할 때 어떻게 하나 궁금해서 현관문은 안 잡아드렸어요. 재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오프너를 서랍에 집어 넣었다. 집의 구조와 서랍의 쓰임새를 잘 알고 있음을 함의하는 손짓이다. 

 

“아는 사람이야? 진짜 경찰?”

“응. 나 담당 형사님.”

 

대화로 말미암아 파악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막역한 구면이다. 재민은 단순한 친목을 다지기 위해 이곳에 온 걸까. 빈백에 앉은 남자가 불편한 얼굴로 제노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재민이 고등학교 선배. 걔는 내 강의 듣는 애. 어려요. 경찰 아저씨 보면 무서울 나이. 여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는 목소리가 가늘고 말씨가 능갈졌다. 제노가 살풍경한 얼굴로 재민을 돌아보는 찰나에 덧붙였다.

 

“짝 맞추게? 근데 네 명은 너무 많지 않나?”

 

그리고 제노는 다시 협탁 위를 돌아본다. 콘돔 상자.

 

재민은 또다시 난처한 눈매로 제노를 보고 있다. 제노는 그 얼굴을 알고 있다. 몇 번 봤다. 신문 조서에서, 체모에 관한 질문을 하게 해 미안하다는 듯이 지었던 표정. 여자가 와인병을 집어들며 묻는다. 그래서 여긴 왜 오셨어요? 저는 딴 건 다 해도 마약은 안 하는데. 재민이도 그렇고. 제노는 숨을 가다듬었다. 묶었던 매듭이 터진 것처럼. 뇌간에서 무언가 끊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따라서 제노는 웃는다. 

 

“손수건을 돌려 드리러 왔는데요.” 

 

마침내 배를 불린 동물처럼. 

 

 

 

 

 

 

 

 

저는 세 명 이상이서 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여자는 탄식한다. 

 

그럼 두 명이서는 하겠다는 뜻?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서재

 

 

두 사람은 작은 방에 앉아 있다.

남자는 이만 돌아가겠다고 신발을 신으며 사과했고, 여자는 농담이라며 그를 붙잡았다. 나 원래 장난 잘 치는 거 알잖아. 교수님 이러려고 저 초대하셨어요? 경찰까지 부르고. 너 무슨 소릴 하는 거니. 네가 신고제도 비교법적 고찰 논문 쓴대서 내가 참고 삼으라고 불러준 거잖아. 너 교평 신고할 거지. 실랑이가 길어지자 여자는 재민과 제노에게 작은 방을 내주었다. 정신사납게 서 있지 말고 들어가라고 일렀다. 정말 정신 사나웠던 게 누군데. 

 

작은 방은 그녀의 서재다. 구성은 단촐했다. 너비가 긴 원목 데스크에 컴퓨터. 시디즈 의자. 책장. 이곳은 그녀의 서재. 작업실. 긴 원목 데스크에 컴퓨터. 시디즈 의자. 책장. 에싸의 소파 베드. 구성은 단촐했다. 제노는 소파 베드의 허탈하게 앉아 있었다. 공무원증이 걸치적거려 빼두니, 재민이 그걸 집어 들여다 보았다. 이건 몇 살 때예요? 스물일곱. 지금이랑 인상이 되게 다르네. 웃는 것도 그렇고. 제노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런 대화를 나눌 만큼 심리 상태가 여유롭진 않았다.

 

“아직 숙려 기간 아닙니까?”

“오늘부로 끝나요. 선배가 축하한다고 불러서. 이따 가정법원도 가야하거든요.”

“끝난 기념으로 세 명이서 하시나 봅니다.”

“까먹으신 것 같은데… 방금 형사님이 두 명을 다 쫓아냈어요.”

“제가 언제…….”

 

에어켠은 켜지 않았다. 방이 끈덕지고 더웠다. 재민이 제노의 앞에 무릎을 접어 앉는다. 얇은 섬유 너머로 유기적인 열기가 느껴진다. 제노는 뒤로 조금 물러난다. 재민은 다시 붙지 않는다. 고개를 기우듬하게 비틀어 제노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야밤에. 공무도 아닌 일로 공무원증을 들이대고. 변태적 성행위를 위해 모인 치들의 집에 들어와. 다리 사이에 재민을 두고 앉아 있다. 일련의 사실만으로 제노의 세계는 낱낱이 해체되었다. 발꿈치를 잃어버린 개가 되었다. 

 

문 너머로 두 사람의 대화가 불명확하게 벽을 울린다. 재민이 제노의 무릎에 손을 올린다. 그의 손은 이상한 온기를 머금고 있다. 손바닥의 굴곡이 느껴진다. 제노는 턱끝이 툭 불거질 정도로 어금니를 깨문다. 반대쪽 손이 도드라진 하악과 날핏줄에 닿는다. 느리게 가다듬는다. 

 

“형사님.”

“…….”

“화났어요?”

 

재민이 천천히 몸을 곧추세운다. 다시 제노의 무릎에 팔을 괴어 추를 당기듯. 어디에 화가 난 건지 잘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작고 날회다. 아마 바깥의 사람들에게 닿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제노에게 왜 화가 났는지 묻지 않는다. 화가 난 장소를 묻는다. 이유를 이미 알고 있는 걸까. 제노조차 모르는 이유를. 제노는 스스로가 화가 났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는데. 재민의 손끝이 뺨을 기어온다. 관자놀이에 닿는다. 

 

“여기 화난 거면 그러실 필요가 없어요.”

 

다리 사이에서 재민이 웃고 있다. 마땅한 때를 노리듯 입술이 뺨 근처를 배회한다. 그의 살갗에선 새벽녘의 해무처럼 까마득한 내음이 난다. 제노는 아주 깊고 느리게 숨을 쉰다. 일렁이는 가슴팍을 내려다보던 재민이 제노의 덜미를 감아쥔다. 제노는 조금 물러난다. 그만큼 재민이 다리 사이를 파고 들어 효용이 없다. 

 

“형사님은 진짜 모르셨나 봐요. 제가 처음부터 있는 힘껏 꼬시고 있던 거….”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뺨에 입술이 닿는다. 그의 날숨은 양주시의 안개처럼 녹신하고, 보드랍고, 축축하다. 재민의 손바닥이 제노의 맥박을 덮고 있다. 재민은 알고 있을까. 손수건은 여전히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두 겹으로 접혀 있다는 것을. 저도 어디 가서 잘 참지 못하는 편은 아닌데. 재민이 속살거린다.

 

신축이라 벽이 얇아요. 잘 참으셔야 해요.

 

그리고 잇새로 얇은 카드가 물렸다. 바지 앞섶이 열린다. 문 밖의 언성이 멀어진다. 재민이 발치에 널브러진 제노의 세계를 주워 다시 조립한다. 시야가 부연하다. 나는 그것을 몰랐나. 자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의 결백은 궁금하지 않았다. 재민이 찾아오지 않아 스스로가 이곳에 왔다. 불꽃을 좇는 개처럼. 짖지 않고 무는 개처럼. 재민의 시근거리는 얼굴을 보기 위해. 그 숨과 손의 온도를 위해 그의 손에 맥박을 맡겼다. 제노는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입 맞추는 재민을 말리지 않는다. 감각의 포말이 종아리로 범람한다. 시선을 내리깐다. 

 

 

아로새겨진 스물일곱의 이제노가 말갛게 웃고 있다.

 

 

 

 

 

 

양주

 

 

양주 시는 해가 온전히 머리 위를 비출 때를 제외하면 대체로 안개에 뒤덮여 있다. 아침은 늘 때가 늦고, 일조량은 모자랐다. 이제노는 새뜸마을의 집에 얇은 속지 커튼 하나만을 달았지만 서일의 햇빛으로 눈가가 시어 일어난 적은 없었다. 

 

제노는 창틀에 맺힌 햇빛을 본다. 아파트의 거울 같은 창에 번들거리는 태양. 서울이 때때로 이렇게 해가 밝았지. 전부 다 아주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불과 일 여년 전의 일인데. 제노는 의자에 걸린 옷을 집어 다시 몸을 욱여 넣었다. 볕에 온몸을 내놓고 있자니 씻고 싶은 욕망이 간절해졌는데, 이곳은 남의 집이라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넘어트렸던 스탠드와 책 몇 권은 잘 정리되어 있었다. 서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원형 그대로였다. 재민은 없되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제노는 짧은 머뭇거림 끝에 서재의 문을 연다. 잠금쇠가 걸리지 않아 문득 어제 문을 잠갔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와 남자는 이미 나가고 없는 것 같았다. 몇 조각이 없어진 브리 치즈 패키지. 뜯기지 않은 콘돔 박스가 여전히 정물처럼 놓여 있었다. 소파 밑에 와인병이 누워 있었다. 와인 웅덩이를 밟을 뻔한 제노는 각티슈 몇 장을 뽑았다. 쪼그려 앉아 와인을 닦다가 휴지를 빼앗겼다. 젓가락을 든 재민에게. 

 

“눈 뜨자마자 왜 바닥을 닦아요?”

“남의 집에 실례를 해서.”

“체력이 되게 좋다. 경찰이라 그런가.”

 

재민이 대신 바닥을 닦았다. 제노가 물끄러미 본다. 재민은 박스티를 입다 만 모양새다. 꿰이지 않은 한쪽 소매가 어깨 위에 걸려 있었다. 남의 옷을 입고 요리하다 미처 장이 튀길까 반쯤 벗은 것 같았다. 젓가락 끝에 붉은 장이 묻어 있다. 요리를 하던 중인 것 같았다. 짜고 고소한 냄새가 났다. 재민이 티슈를 모아 버리면서 중얼거렸다.

 

“선배가 반찬 만들고 가라고 해서. 남의 집 물레방앗간처럼 썼으면.”

 

비로소 무슨 사고를 쳤는지 실감이 났다. 제노는 창백한 얼굴로 뺨을 문지른다. 재민은 제노를 식탁 의자에 앉혔다. 이미 찬가지가 세개씩 곁들린 쌈밥이 완성되어 있었다. 속이 편한 걸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남의 속을 결장까지 헤집은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는 제노에게 숟가락을 들려주고 한김을 뺀 문어볶음과 참나물겉절이 따위를 락앤락에 담아 뚜껑을 닫았다. 남의 집인데 제 주방 다루듯이 했다. 그는 분명 이 집에 처음 온 게 아니다. 이 아침부터 장을 보고. 제 몫의 옷을 갈아입고. 냉장고를 채웠다. 제노는 묵묵히 양배추 쌈에 밥을 굴리다 물었다.

 

“정말 셋이서도 해요?”

“아니요. 저는 셋이서 하는 거 좋아하진 않아요.”

 

보통 사람은 가능 여하를 따지지 호오를 따지진 않을 텐데. 구태여 지적하진 않았다. 제노는 간밤 새 왜 한미지가 재민을 더러 걸레라고 했는지 완전히 이해했으므로.

 

“문주 선배가 경비실에는 알아서 말해놨대요. 나가는 길에 아저씨가 걱정하셔서.”

“아.”

“조사받을 때 문주 선배가 도와줬어요. 아빠는 제가 로펌 끼고 경찰서 들락날락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시거든요. 가정법원 가는 것도 충분하다고.”

“…….”

“선배가 대학원 강의 나가면 보통 밤밖에 시간이 안 돼서. 제가 자주 왔죠. 학생 입 막으려면 큰일 났다고 혼났어요.”

“최지민 씨도 로스쿨에 다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섬유질을 씹던 뺨이 멈춘다. 제노는 물기가 묻은 젓가락 끝은 내려다 본다. 속상한 얼굴은 아니다. 그는 다만 좀 곤해 보였다. 제 있는 힘껏이 부족했어요? 너무 과했는데요. 그럼 좀 다정하게 말해주세요. 재민이 제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바라는 게 그것뿐이라면 어렵진 않았다. 제노는 일단… 실례를 저지른 남의 집에서 뻔뻔하게 밥까지 먹고 있는 행위가 가장 불편했다. 제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밥을 먹었다. 재민은 제노에게 물을 따주고 반찬을 밀어주었다. 하는 꼴을 보고 있자면 그가 결혼관계를 유지했을 때 얼마나 다정하고 입 속의 혀 같았을지 가늠이 가긴 했다.

 

“한나는 결국 못 데려왔어요. 데려오면 그 좁은 집에서 어떻게 하나, 싶긴 했는데.”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애 딸린 유부남으로 오해합니다.”

“애까지 없으니까 양주에선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큰일이지.”

 

제노는 대꾸하지 않았다. 최초의 프로파일에서 본 재민은 적이 없는 프리랜서였다. 시간이야 차고 많을 것이다. 증여 받은 아파트에서 그는 무엇으로 시간을 보낼까. 곧 서울로 돌아가려나. 제노는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고, 그릇은 금방 비었다. 제노가 그릇을 포개자 재민이 그것을 부드럽게 빼앗아 들었다. 저는 셋이서 하는 건 별로 취향이 아니고. 둘이서 하는 게 좋아요. 제노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귀가 열기로 번들거렸다.

 

“형사님은 서울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요?”

“이제 별로 상관없는 것 같습니다.”

“양주 시는 혼자 살기 별로잖아요.”

“그것도 상관없고요.”

“경찰은… 연애 잘 안 하죠? 바빠서.”

“별로 할 생각이….”

“그럴 생각이 생기면 한다는 뜻?”

“바빠서 집에도 잘 못 들어갑니다.”

“그러신 것 같더라고요.”

 

재민은 그릇을 치웠다. 물에 한 번 헹구고, 식기세척기에 넣고 프로쉬의 세제를 채웠다. 식은 반찬가지를 냉장고에 채워 넣고 상을 닦았다. 손을 씻는다. 반만 꿰었던 티를 바로 입는다. 밝은 조도 아래서 보는 재민은 사뭇 노골적이고 손이 빨랐다. 여전히 무결하고 바른 자세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가 규격의 안쪽에 있는 사람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노는? 제노는 여전히 레일의 안쪽에 있는 사람인가?

 

재민이 제노의 앞으로 직사각형의 카드를 내민다. 지금보다 앳된 제노의 얼굴 위에 재민의 두 손가락이 올라가 있다.

 

 

그럼 냉장고도 잘 채워주고. 밥도 잘 하고. 시간은 많은 사람이면?

 

 

제노는 제 공무원증을 고요히 들여다 본다. 초승달 모양의 잇자국이 남은 신분증을. 송곳니의 패임이 가로지른 그때의 낯선 얼굴을. 안개가 걷힌 서울의 한낮이 식탁 위를 어지럽힌다. 이미 저질러버린 계획 밖의 충동을 안아야 한다. 다시 양주로 돌아가야 한다. 무수한 규격 속으로. 몇 시간 뒤면 호적이 단출해질 남자를 어금니 사이에 물고. 제노는 느리고 나롯하게 눈을 치켜뜬다.

 

 

반찬통 가져가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112신고 접수 녹취록

일시 및 사건번호: '00. 08.21. 08:29 / No. 7921번

 

 

통화자: 여보세요. 여보세요.

경찰관: 112입니다. 말씀하세요

신고자: 제가 사진을, 사진을 한 장 받았는데요. 

경찰관: 예. 그런데요?

신고자: 전남편이랑. 얘 누구야. 이 사람 경찰이거든요. 맞잖아. 이거 정복이잖아. 나 이 사람 알아.

경찰관: 지금 경찰에 신고 전화 거신 거 맞으세요?

신고자: 왜 얘네가, 둘이 이러고 있어? (미지야 전화 끊어) 나재민 진짜 약 빨았나? 아님 동성애로 전향했나?

경찰관: 신고자분. 지금 도움이 필요하신 상태예요?

신고자: 아니, 아니. 이 새끼들이 약을 빤 게 아니고서 이럴 수가 없어요. 경찰이 이래도 돼요?

경찰관: 지금 마약 신고를 하시는 겁니까?

경찰관: 신고자분? 여보세요?